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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급 관심용사-215화 (215/430)

 215화

[12회차] 통일

교생 아가씨, 그건 나도 몰라!

애초에 서열을 정한다는 것부터가 내게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두 번째 악마인 쏘시아가 아니었다면 ‘누구를 몇 번째로 좋아한다.’라는 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건 굉장히 복합적인 문제였다.

내가 첫 번째로 결혼한 대상은 8회차 검희였으니, 첫 번째 아내라면 그녀일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또 이야기가 다르다.

검희보다 더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성이 많았다. 객관적으로 그녀는 첫 번째 여자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누굴까?

이름을 기억하는 여성이란 부분도 애매하다.

어머니, 어머니의 친구 딸A, 어머니의 친구 딸B, 라누벨, 실비아, 팩토리아, 아쿠아, 쏘시아 등등.

이 또한 은근히 많다.

▶당혹: 수수께끼처럼 어려운 문제네요. 하지만 저도 그 마음을 이해해요. 저에게 은근히 잘해주시는 선배님들이 많은데, 그중에 한 분을 콕 찍어서 좋아한다고 말하긴 어렵거든요.

교생 아가씨의 꿈이 훌륭한 선생님이기 때문 아닐까? 사랑보다 교육에 더 신경 쓰는 거지.

▶수줍: 빈말이라도 기분 좋네요.

내가 교생 아가씨랑 대화하는 와중에도 상황은 진행되고 있었다.

항복을 권유받은 닭대가리들은 쉽게 수긍하지 않았다. 캡틴 판타지의 엉덩이에 깔려서 사망한 총책임자를 대신하는 천사가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 내 앞으로 날아왔다.

반투명한 흰색 천을 붕대처럼 온몸에 두른 암탉이었다.

예전에 페스티벌 때도 비슷한 복장의 천사를 본 적 있다. 천사에 관해서는 판타지 61년 경력을 가진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저 복장은 고위급 천사에게만 허락된 음란한 차림이란 건 안다.

왜냐?

천사의 보물창고에 고급 붕대가 꽤 많았다.

신성으로 치유하는 게 기본인 천사가 정말로 붕대를 쓸 일은 거의 없으니, 이건 붕대를 가장한 옷이라고 봐야 했다.

사제의 사제복처럼.

“지상의 왕이여, 당장 물러나세요.”

그 천사가 건방진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말투도 상당히 거슬렸다.

“예의 없는 천사여. 네 주제를 알라.”

쿵덕! 쿵덕! 쿵덕!

캡틴 판타지의 엉덩이 율동에 맞춰서 천사들이 아우성쳤다. 심지어 도시가 침몰하는 배처럼 기울기까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천사가 서둘러 답했다.

“멈추세요! 이 도시에는 무고한 생명이 다수 살고 있습니다! 이런 폭거를 지상의 용사들이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용사의 심판이 두렵지 않나요?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모든 걸 잃을 수-”

“내가 용사다.”

“...에?”

“지상에도 관심 좀 가져라, 닭대가리.”

이 천사는 용사를 들먹이지만, 정작 그 용사들이 누군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 없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조금은 이해됐다.

▷종족: 아크 엔젤

▷레벨: 999+

▷직업: 퇴마사(악마→피해↑)

▷스킬: 신성ZZ 채찍Z 정화Z 인내Z 축복MAX···

▷상태: 경악, 혼란

능력치가 준수했다.

내 기준에는 한없이 가소로웠지만, 중등교육장 수준으로는 최상위권 강자에 해당했다. 대륙 곳곳에 은거한 채 마왕과 5대 재앙의 준동만을 경계하는 수호자들이랑 그 전투력이 비슷하리라.

“용사가 어째서 천사를…!”

“뭘 그렇게 놀라지? 용사가 천사를 공격하면 안 된다고 법으로 정해져 있는 건 아니잖아?”

“이, 이건 신성모독입니다!”

“그건 내가 할 소리다.”

감히 마스터 몰랑의 업적을 가로채다니. 그분의 관대함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모든 천사가 몰랑몰랑한 심판을 받았을 것이다.

“재차 묻지. 대가리 박아. 아니면 여기서 죽든가.”

“우리의 저력을 얕보지 마십시오.”

“짐을 얕보지 말라. 여전히 고개를 들고 있는 천사는 예외 없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처리해.”

내 주문에 캡틴 판타지가 응했다.

통통한 두 다리로 균형을 잡으며 일어선 귀여운 아기가 힘차게 양팔을 휘둘렀다. 신묘한 기술이 가미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망룡왕 뇌비우스랑 몸싸움을 벌일 정도로 거대한 덩치는 그 자체만으로도 강력하고 위협적이었다.

퍼버벅! 퍽! 퍽!

하늘에서 고개 쳐들고 쏘시아의 비겁한 몸매를 노골적으로 구경하던 천사들이 무더기로 납작해졌다.

맞고 튕겨 나간다?

애들 장난이나 당구도 아니고, 그런 만화와 애니메이션 같은 상황은 일절 없었다.

압도적인 질량과 속도, 마왕의 신기술인 암흑물질이 가미된 캡틴 판타지의 공격을 천사들은 한순간도 견디지 못했다.

찰나에 가해진 절대적인 압력에 폭파!

붕대로 온몸을 칭칭 감은 음란한 천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스킬 ‘신성’의 효과인 일반속성 무효와 반사도 통하지 않았다. 캡틴 판타지란 존재 자체부터가 일반적이지 않았던 탓이다.

그녀는 붕대처럼 납작해져서 형체조차 남질 않았다.

“응애애애~!”

귀여운 아기에게 겁먹은 천사들이 바짝 고개를 조아렸다. 쏘시아의 알몸을 구경하는 용감한 닭대가리는 더 없었다.

이들의 죄목은 사칭죄!

신성몰랑제국이 모시는 마스터 몰랑의 업적을 가로챈 것 하나만으로도 모든 천사의 날개 깃털을 뽑고 노예로 영원히 봉사하도록 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나는 자비로운 호구 용사.

천사의 날개 깃털만 조금씩 꾸준히 뽑기로 했다.

“마약 용사. 천사의 깃털을 어디에 쓰려고?”

“베개와 이불 재료. 오리털보다 부드럽고 따뜻할지는 의문이지만, 허영심 가득한 왕족과 귀족이라면 내가 얼마를 부르더라도 살 거야. 신성몰랑제국에서만 구할 수 있는 훌륭한 특산품인 셈이지!”

“그, 그렇구나! 호호!”

최초의 정령은 어설프게 웃으면서 딴청을 부렸다. 하지만 딱히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마약 정령. 무슨 좋은 일 있냐?”

“내 날개는 아직 멀쩡하니까.”

천사의 도시 엘몰랑도는 신성몰랑제국에 평화적으로 병합됐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접한 신성제국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골골 앓고 있던 황제와 황위 계승권 1위였던 1황자는 분노한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처형 됐다. 그리고 이 흐름을 주도한 황녀는 내게 신성제국을 바쳤다.

촤아아아-

그 직후부터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

이건 우주의 기운이 아니다.

정확한 시기에 ‘몰랑의 호수’를 방문한 나는 곤히 호수 밑에 잠자고 있는 ‘수호자 울룰루’를 처치했다.

깨어나서 날뛸 틈도 주지 않고 단숨에!

2회차 때, 나는 이 메기처럼 생긴 거인 때문에 열흘 동안 폭우가 쏟아져서 곤욕을 치렀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비다! 비가 드디어 내린다!”

“신성몰랑제국 황제는 진짜 신이야!”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나는 이 비가 열흘 동안 내린다고 천명(闡明)했다. 그리고 정말 열흘째 되는 날에 비가 뚝 멈췄다.

이때부터 내 명성과 평판은 MAX급까지 치솟았다.

강제로 조국이 병합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불순분자들도 쏙 들어가서 자취를 감췄다. 자연을 멋대로 조종하는 신을 상대로 싸워서 이길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유는 또 있다.

모든 길은 몰랑으로 통한다.

판타지아 중앙대륙을 통일한 신성몰랑제국의 모든 도시와 마을은 수도 몰랑폴리스까지 거미줄처럼 이어졌다.

잘 닦인 길로 유통이 빨라지면서 상업이 활성화되고 패전국 지역의 경제와 문화가 빠르게 살아났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재벌 2세의 기둥서방. 모든 남자의 로망이지.”

“...나는 우주에서 가장 행복한 악마일 거야. 너무 행복해서 미칠 것 같아.”

내게 지갑과 성문을 활짝 연 쏘시아가 생긋 웃었다.

판타지아 세계 전역에 뻗어있는 암흑상회의 주인이 쏘시아다. 그리고 나는 쏘시아의 서방님이다.

그녀의 것은 내 것이고, 내 것은 그녀의 것이다.

하지만 잘생긴 남편의 무한한 사랑에 감동한 아내 쏘시아가 사절하면서 전부 내 것이 됐다.

용사의 오지랖이 드디어 보상을 받는군!

교생 아가씨. 요즘 다시 생각하게 됐어.

▶궁금: 뭐가요?

우정과 희망은 여전히 쓸모없지만, 사랑은 잘만 활용하면 용사의 모험에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난감: 강한수 생도님이 생각하는 사랑이랑 교육과정에서 지향하는 사랑이 미묘하게 다른 것 같지만요…. 이것도 사랑의 힘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예쁜 얼굴만큼 융통성을 발휘할 줄 아는 교생 아가씨는 훌륭한 선생이 될 거야.

▶화끈: 다, 당연하죠. 흥흥!

판타지아 세계의 경제중심지인 중앙대륙을 통일한 나는 올해의 국가사업을 선포했다.

도로 연결? 그건 정말 사소한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보다 중요한 건 생각할 수 없다. 암흑상회를 흡수하지 못했다면 나도 엄두를 못 냈을 것이다.

“수세식 변기를 널리 보급하여 세상을 이롭게 하라!”

판타지 경력 63년 만에 나는 소소한 꿈을 이룰 수 있었다.

***

변변찮은 F급 중등교육장에 8번째 용사가 소환되면서 내 용사 경력도 64년을 맞이했다.

이번 용사는 아직 앳된 여성이었다. 초면에 내게 쿠데타(라이벌)를 선언했던 7번째 멍청이랑 달랐다. 겉보기에는 어려도 속은 최소 300살이 넘은 아줌마였기 때문이다.

▷종류: 생활기록부

▷이름: 루루

▷성향: 선(善)

▷속성: 애교

▷경력: 308년

▷기록: 2

▷총평: 사랑과 우정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우등생. 하지만 무엇이든 과하면 엎질러지는 법이다. 애인과 동료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바람에 모든 능력치가 낮다. 이 학생을 이대로 놔둬도 괜찮을지에 대해서 교직원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이상한 학생의 자립심을 조금은 배웠으면 좋겠다. 아주 조금만.

자립심이 강한 어떤 이상한 학생은 대체 누굴까? 정말 한심하다. 요즘 대세는 사랑이거늘.

아무튼, 눈앞의 새로운 용사부터 상대해주기로 했다.

“신성몰랑제국에 온 걸 환영한다.”

“와아! 정말 대단하시네요. 용사로 시작해서 단시간에 황제가 된 거잖아요. 정말 존경스러워요, 한수 오빠.”

최소 300살 먹은 석기시대 할머니가 80살도 안 된 풋풋한 총각- 유부남에게 오빠라니?

하지만 나는 겉으로 티 내지 않았다. 내가 교직원처럼 용사들의 생활기록부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비밀이기 때문이다.

“존경?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용사라면 야만인들쯤은 간단히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수세식 변기를 개발하셨다고 들었어요. 정말 놀라워요! 그동안 말 꺼내기 부끄러워서 쭉 참아왔지만, 수풀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정말 힘들었었거든요.”

신성제국을 마지막으로 중앙대륙을 통일한 나는, 수세식 변기의 구조와 원리를 알고 있는 쏘시아의 도움으로 대량생산에 성공했다.

애초에 개발할 것도 없었다.

이 비겁한 악마는 자기 집에만 이 위대한 발명품을 놓고 혼자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비데까지!

괘씸죄로 쏘시아에게 수세식 변기 금지령을 내렸다.

그랬더니 그녀는 나 몰래 슬라임식 변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어째선지 신음을 흘리며 무척 괴로워하기에 모른 척하는 중이다.

“8번째 용사. 할 말은 다 끝났나?”

“예? 네.”

“짐도 용사. 용사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한다. 섭섭하지 않을 만큼의 활동비와 장비를 지원해주겠다. 그러니 뒤는 걱정하지 말고 남대륙의 5대 재앙을 토벌하도록.”

“와!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누구랑 동행하나요?”

“동행이 필요한가?”

“피, 필요해요. 혼자서는 좀….”

나는 8번째 용사 ‘루루’의 생활기록부 총평을 떠올렸다. 사랑과 우정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내용이 이런 의미였던 모양이다.

동료라니?

발목만 잡는 그들이 필요한지 의문이다. 하지만 남대륙까지 함께할 말동무와 짐꾼은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관대한 용사의 미소를 지었다.

“원하는 동료를 말하라. 중앙대륙에 사는 자라면 최대한 지원해주도록 하겠다.”

“와! 그러면 나서스 왕자님으로 부탁합니다!”

“그는 구(舊) 요정왕국이었던 서부 총독으로 바쁘다.”

“그러면 알렉스 씨와 라누벨이요!”

“둘은 서대륙에서 죽었다.”

“그, 그러면 성왕국의 성녀님과 토마스 기사단장님이요.”

“성녀A는 구 성왕국과 상인공화국 지역을 합친 동부 총독의 일로 바쁘고, 토마토는 3년 전에 절벽에서 떨어져서 죽었다.”

“...인어공주 아쿠아는요?”

“내가 집무실 어항에서 애완물고기로 키우고 있는데, 암컷인 너랑 동행할지 의문이군.”

“대체 누가 남았나요?”

반쯤 넋을 놔버린 용사 루루가 내게 질문했다.

나는 0.2초쯤 생각한 후에 말했다.

“요정공주였던 실비아는 어떤가? 임신 중이라서 당장은 힘들지만, 출산과 산후조리가 끝나는 내후년쯤에는 동행할 수 있을 거야.”

“......”

“그렇다고 너무 실망하지 말도록. 넓은 침낭이 필요하다면 내가 괜찮은 사내들을 소개해주지. 대충 31명이면 되겠나? 모험 내내 골라 먹는 재미가 있을 거야.”

“괘, 괜찮아요….”

얼씨구? 국가지원을 마다하다니?

남에게 너무 의존한다는 생활기록부의 편파판정이랑 달리, 이번 용사는 상당한 호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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