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12회차] 리바운드를 지배하는 자가….
그래서 혼자 남대륙으로 떠날 줄 알았던 용사 루루는 자칭 라이벌인 반역자 레몬을 설득해냈다.
북대륙 원정에 레몬을 쓰고 싶었지만, 2년 용병 계약이 끝났기에 나도 순순히 풀어줬다. 그 둘이 남대륙의 5대 재앙 페닉스를 쓰러트린다면 나로서도 나쁠 게 없기 때문이다.
서대륙의 5대 재앙은 너무나도 불쌍한 용사 아몬드를 뺀 넷이서 다시 토벌하러 떠났다. 이번에는 천사도 동행했기에 성공할 확률을 높게 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어마어마하군.”
구 신성제국의 수도를 ‘U’자 모양으로 감싸는 산으로 향했다. 초등교육장에선 보지 못했던 지형이다.
당연하다. 저건 단순한 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앙대륙의 5대 재앙, 망룡왕 뇌비우스
그 최고령 용이 산으로 위장된 채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평범한 수면이 아니다. 수명이 거의 끝나가는 망룡왕 뇌비우스의 시간이 정지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저 봉인을 풀기 전까지는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는다.
덩치 비교 좀 하려고 쑥떡을 불러봤는데, 상대적으로 너무나 아담하게 느껴졌다.
에베레스트와 동네 뒷산만큼의 차이랄까!
오늘은 이 친구를 해결하기 위해 왔다.
“마약 용사. 어떻게 하려고?”
“단숨에 처리한다.”
“친구라며?”
“제국이 녹아버리는 것보다는 낫지.”
한가롭게 대화로 풀 순 없었다.
뼛속까지 패왕인 망룡왕 뇌비우스는 눈을 뜨자마자 유종의 미를 거둔답시고 한 판 붙을 것이다.
수명이 다할 때까지.
이대로 봉인을 쭉 유지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시간제한이 있다. 늦으면 판타지아 세계가 맹독으로 멸망!
어떻게 보면, 여전히 중앙대륙 남부를 지배하며 버티고 있는 마왕 페도나르보다 더욱 성가시고 위협적이다.
그러니 꼭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
“폐하. 봉인을 풀 준비를 마쳤습니다.”
신성제국 수석마법사였던 늙은 마법사A가 말했다.
구 신성제국 수도를 둘러싼 산의 정체가 5대 재앙이란 사실을 아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의 손에는 시간을 봉인하는 구슬이 쥐어져 있었다.
원래는 신성제국 황궁 보물창고에 엄중히 보관되어 있었는데, 저것도 초등교육장에선 없었던 물건이다.
나는 몸을 풀며 말했다.
“짐이 신호를 보내면 봉인을 풀어라.”
“폐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늙은이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시국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모든 용사가 모였을 때 토벌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폐하 혼자서 조용히 처리하신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입니다!”
“무리인지 아닌지는 짐이 결정한다.”
“송구합니다!”
나는 힘을 끌어모았다.
보유한 레벨과 경험치를 전부 힘으로 치환했다. 상당한 양이었기에 시간도 무려 5초나 걸렸다.
계획은 간단하다.
봉인이 풀리자마자 선제공격으로 단숨에 끝장내기!
흙으로 덮여있는 망룡왕 뇌비우스의 신체구조는 땅의 정령들이 가르쳐줘서 파악이 끝난 상태다.
“해제.”
“신이시여! 저희를 굽어살피소서!”
마스터 몰랑에게 빌지 않는 건방진 마법사A가 봉인을 해제했다. 극상품의 보석처럼 영롱한 빛을 뿜던 구슬이 평범한 유리 공예품처럼 변했다.
그리고 친구가 깨어났다.
그그그그-
대지가 흔들리고 하늘이 공포에 빠졌다. 산에서 살고 있던 동물, 몬스터들도 혼비백산하며 도망쳤다.
바로 지금이다!
팡야!
내가 응축해서 쏜 진녹색 빛이 대규모 산사태가 발생하는 산을 깔끔히 관통했다.
......
그리고 잠잠해졌다.
아직 이불처럼 뒤집어쓰고 있던 흙도 치우지 못한 망룡왕 뇌비우스는 심장을 잃고 영원한 안식을 맞이했다.
2차, 3차로 변신할 시간 따위는 주지 않는다!
친애하는 전우가 쓰러졌다는 건, 1레벨까지 떨어졌던 내 레벨이 다시 999레벨까지 찬 것으로 확신할 수 있다.
산으로 위장되어 있던 망룡왕 뇌비우스가 쓰러지면서 산도 그 규모를 유지하지 못하고 축소됐다. 점점 산의 높이가 낮아지더니, 마지막에 가서는 평지와 언덕으로 변했다.
망룡왕의 시신이 변화한 맹독이 도시를 쓸어버릴 위협도 사소하게나마 있었지만, 보리스의 정화로 이 또한 조용히 정리했다.
“변신하지 않은 이 친구는 참 약하단 말이야!”
그런데도 5대 재앙의 수좌다. 다른 5대 재앙은 대체 얼마나 약한 걸까? 그런 5대 재앙에 쩔쩔매는 용사들은 더욱 답이 없고.
“마약 용사. 조금, 아주 조금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아직 잠에서 깨지도 않은 노약자를 기습공격으로 죽이다니.”
“이봐, 마약 정령. 손가락으로 혼나볼래? 나는 위선자가 아니야. 대의를 위해서라면 약간의 희생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어. 물론, 내가 희생하진 않는다.”
이것으로 내 몫의 ‘용사 역할’은 끝났다.
학급마다 소환되는 용사의 숫자는 10명. 그러니 2명씩 짝을 지어서 5대 재앙을 1마리씩 처리하면 딱 맞다.
그런데 나는 혼자서 가장 강한 5대 재앙을 토벌했다. 그러므로 용사로서 내게 주어진 임무와 역할은 다한 셈.
이제 남은 건?
“찰떡. 전에 작성해둔 살생부 명단 기억하지? 거기에 적힌 친구들을 중심으로 군대를 편성해서 남부 마왕령으로 출정 보내. 핑계를 대면서 빠지려는 자는 반역죄로 사형. 악마의 천적인 천사들도 함께 파견하면 대놓고 나를 비난할 수 없겠지.”
“네, 주인님.”
성녀H가 공손히 대답했다.
중앙대륙 북부 통치는 황녀에게 맡겼다.
그녀의 꿈인 여황제는 아니지만, 그 이상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총독으로 임명시켜줬으니 불만은 없을 터.
...그런데 불만이 있었다.
황녀는 총독 겸 황후 자리를 원했다. 그러면 총독을 포기하라고 했더니, 황녀는 그러겠다고 대답해서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이 황녀의 사고방식은 도저히 모르겠단 말이지.”
황후가 되어 2세를 낳아 제국을 집어삼키려는 걸까? 그렇다면 총독을 포기해도 될 만큼의 이점이 황후란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결혼은 절대 안 될 말이다.
“마약 용사. 드디어 가는 거냐?”
“그래. 드디어 간다.”
판타지아 북대륙 원정을 떠날 때다.
용사력 -2년.
마스터 몰랑의 가호를 받은 신성몰랑제국은 마왕과 북대륙 지배자들에게 항복 권유 후 전쟁을 선포했다!
***
북대륙과 중앙대륙은 바다와 운하(運河)로 나누어져 있다. 지구의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랑 비슷한 셈.
해로와 육로.
2가지 선택지가 있지만, 운하 하나만 건너면 되는 육로는 깔끔히 포기했다.
마법이 극도로 발전한 북대륙에는 마법사가 바글바글하니까. 비좁은 육로로 대군이 이동하면 대량학살 마법의 제물이 될 뿐이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모두가 해로를 이용할 거라고 믿겠지.”
마법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망망대해에 넓게 흩어진 진형으로 침공해올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매우 잘 안다.
육로만큼이나 해로도 답이 없다는 것을.
마법사들이 날씨 조작으로 역풍과 태풍, 해일을 일으키면 제국의 배는 북대륙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부 가라앉을 것이다.
“마약 용사. 그러면 어떻게 하려고?”
“내전(內戰).”
판타지아 중앙대륙에서 내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다. 굳이 수많은 과부와 고아를 양산해서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전쟁을 선포하긴 했지만, 전쟁하진 않는다.
항구에 수많은 군함을 집결해두고 병사들을 훈련하면서 ‘전쟁 중’이란 느낌만 내면 된다.
나머지는?
“암흑상회에서 처리할 거야.”
암흑상회에서 야심 차게 준비 중인 양산형 골렘 ‘적기사’가 대량으로 시장에 풀릴 것이다.
신성몰랑제국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적기사를 웃돈 주고서라도 사려는 나라가 많아질 것이고, 이웃하는 나라들이랑 구매 경쟁이 붙으면 국고가 금방 텅텅 빌 것이다.
빈 국고를 단시간에 채우려면?
전쟁과 약탈밖에 없다.
이 시뮬레이션은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
암흑상회는 적기사를 팔기 위해 북대륙 나라들의 정치에 조금씩 간섭해서 분란과 갈등을 조장했다. 현자의 탑에서 벌어지는 골렘 투기장에 나가서 주기적으로 적기사 성능을 어필하기도 하고.
이게 결실을 보는 게 용사력 6년.
북대륙은 전란에 휩싸인다.
하지만 이번에는 판타지아 중앙대륙을 통일한 초강대국이 북대륙 나라들에 ‘구매 동기’를 부여해줌으로써 그 기간을 단축했다.
이건 암흑상회의 주인인 쏘시아랑 무관하다.
그녀는 바지사장이니까.
“누구보고 바지사장이라는 거야!”
내가 세운 계획의 전말을 들은 쏘시아가 발끈했다.
“맞잖아? 너는 시작부터 암흑상회의 두목이고, 유능한 부하들이 알아서 충성하고. 하는 일이 없지.”
“무시하지 말아 줄래?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암흑상회라는 터무니없이 거대한 조직이 내란 없이 유지될 수 있었던 거야.”
쏘시아는 두 번째 악마. 언제나 이인자다.
하지만 여기에도 편법이 있다.
암흑상회의 창시자가 일인자인데, 그는 젊은 나이에 과로사했다. 그러나 그가 키워낸 간부들의 ‘정신적 스승’으로서, 죽어서도 일인자란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판타지가 시작된다.
보통은 ‘스승의 유지는 내가 이어받겠다!’라고 나서는 자들끼리 싸우다가 분열하는 게 일반적인 수순이다.
하지만 쏘시아의 두 번째 저주가 ‘스승님의 유지는 당연히 쏘시아 님이.’란 공식이 성립되게 했다. 덕분에 그녀는 이인자이면서도 암흑상회 총지배자란 자리에 무난히 앉을 수 있었다.
“대표가 죽지 않고 주식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회사 운영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거지?”
“비슷해. 그리고 나도 처음부터 게을렀던 건 아니야.”
쏘시아는 암흑상회의 힘으로 용사들을 골탕 먹이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회귀를 거듭하며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며 질려버렸다.
심지어 노는 것도 질려서 대부분 시간을 잠으로 때운다고….
“본인이 게으르다는 건 아는군?”
“흥!”
“어디서 콧방귀야. 춤춰.”
“아앗-?!”
중앙대륙 북부는 조선소에서 군함을 건조하고 병사들을 훈련하느라 바쁘고, 남부에서는 실제로 전쟁이 벌어졌다.
수많은 생명이 죽어갔다.
악마의 천적인 퇴마사 보리스, 불사의 군단을 이끄는 성녀H, 신성몰랑제국의 마스코트 골렘D.
셋 중 누구를 보내더라도 전쟁은 손쉽게 끝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방해되는 자를 자연스럽게 제거하는 용도로 마왕만큼 좋은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너, 자꾸 이러면 마왕이 장인어른이라고 소문낼 거야!”
춤추기를 멈춘 쏘시아가 새빨개진 얼굴로 나를 협박했다.
“해봐. 나는 그 소문이 거짓이라고 증명할 테니. 부정할 방법은 매우 많아. 우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마왕의 딸에게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치욕으로 트라우마를 안겨주는 것부터 시작해볼까?”
“...호호! 농담이야, 농담. 아내의 애교로 봐줘.”
쏘시아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되지도 않는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최초의 정령은 내 머리 위에서 배꼽을 잡고 웃기 바빴다.
“히히! 아이고, 배야! 히히!”
“마약 정령. 이상한 소리로 웃지 마라.”
“내 마음이다! 그런데 마약 용사,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 네 말대로라면 북대륙은 이대로 가만히 놔두면 되는 거잖아.”
아주 좋은 질문이다.
“내가 호수에서 잡은 거인 울룰루. 가뭄을 해결할 목적으로 사냥했을 뿐인데, 문뜩 여기가 떠오르더라고.”
성검2가 숨겨진 비밀장소. 그 정확한 위치는 나도 모른다. 모래뿐인 해안가에는 이정표 같은 게 없으니까.
이렇게 또 올 줄 알았다면 주변 환경을 좀 더 세심하게 살폈겠지만, 2회차 때만 해도 13회차까지 올 줄 몰랐다.
그래도 괜찮다.
초등교육장이랑 전개가 똑같다면 곧 해변에서-
“Ulluuu….”
“Ulluuuuu….”
“Ulluuuuuuu….”
2회차 때처럼 파도에 섞인 울룰루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도 그 ‘카오스 타이탄’은 내 경험치가 됐다. 그리고 여기에 반응한 ‘카오스 머메이드’가 오라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성검2를 지키는 수호자 인어를 ‘또’ 만났다.
▷종족: 아크 머메이드
▷레벨: 999+
▷직업: 수호자(수호→피해↓)
▷스킬: 수호MAX 창술SSS 회피SS 통솔SS 면역SS…
▷상태: 경계, 인내
능력치는 초등교육장 때보다 전반적으로 올랐다. 하지만 내게는 너무나 가소로웠다.
“현생의 용사여. 물러나세요.”
“지나가겠다면 어쩔 건데?”
나는 2회차 기억을 더듬으며 똑같이 질문했다. 그랬더니 인어도 똑같은 대답을 했다.
“유감스럽게도 그 바람은 무리입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요. 해변에서 눈을 뜬 용사님은 다시 아름다운 모험을 떠나게 될 거랍니다. 랄랄라~♪♬”
“흠…. 노래를 잘 부르네. 내가 키우는 민물인어보다 나아.”
“감사합니다. 랄- 어…?”
나는 노래를 부르다 말고 당황하는 바다인어의 꼬리지느러미를 낚아채듯 붙잡은 후, 번쩍 들어 올렸다.
인간의 상체가 밑으로 뒤집힌 인어가 가느다란 양팔을 허우적거렸다.
“얌전히 있어. 지느러미를 뜯어서 주둥이에 쳐넣기 전에.”
“......”
인어가 바로 얌전해졌다.
그때, 한 박자 늦게 따라온 쏘시아가 비겁한 가슴을 떠받치듯 팔짱을 낀 채 새침하게 질문했다.
“여긴 왜 온 거야? 또 인어 애첩(愛妾)이 필요해?”
“질투가 추하다. 만년 2위.”
“누가 질투한다는 거야!”
나는 발끈하는 쏘시아에게 MAX급 강태공처럼 바다인어를 흔들어 보이며 답해줬다.
“바다인어를 지배하는 자가 해전(海戰)을 지배한다.”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왕(王)이라도 베야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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