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12회차] 여기가 닮았네!
눈앞의 소년이 내 아들이라고 누가 가르쳐준 건 아니다. 하지만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비슷하게 생겨서? 그렇진 않다.
외모는 나보다 검희를 훨씬 많이 닮았다.
내 어릴 적의 귀여움은 북대륙 백성들이 모두 인정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 녀석은 취향 좀 탈 것 같은 귀여움이다. 모발도 내가 아닌 검희를 닮아서 금발에 가깝고.
그런데도 나는 ‘아들’이라고 단정했다.
뿌연 청동거울을 마주 본 기분이 들었으니까. 내 추측이 틀렸다면 우주의 기운이 벌써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아빠라고요…?”
“그래. 내 눈을 바라봐. 너는 알 거다. 내 말이 진실이란 걸.”
“마, 말도 안 돼…. 그럴 리 없어….”
고개를 좌우로 맹렬히 저으며 부정하는 아들. 너무나 갑작스러운 선언에 혼란스러운 점은 이해하지만, 여기는 전쟁터, 그것도 바다 위라는 걸 상기해줬으면 좋겠다.
한데….
“너무 시끄러운걸.”
일단은 좀 조용히 하도록 해자.
병사들이 박박 악을 쓰며 싸우는 소리는 백색 소음처럼 웅얼거림이나 다름없었지만, 현자와 함께 온 북대륙 동료들은 아니다.
아까부터 나를 사기꾼으로 몰면서 굉장히 불쾌하게 하고 있었다.
“저 말을 듣지 마! 크리스.”
“암흑황제가 네 아빠일 리 없어.”
“크리스. 흔들리면 안 돼!”
아들 이름이 ‘크리스’인 모양이다.
모양새 안 나게 이름을 묻는 사태를 피할 수 있게 해준 보답을 해줘야겠다.
탁!
손가락을 튕겼다.
나를 중심으로 정의로운 용사의 파동이 퍼져나갔다.
목숨을 빼앗진 않지만, 고막을 찢고 달팽이관의 림프액을 흔들어놓는 성질이 있다.
임상시험 때는 간혹 부작용으로 뇌출혈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어설픈 능력으로 막겠다고 저항하지 않으면 괜찮다.
간혹 있는 일이잖은가?
무면허 돌팔이 의사가 잘못 건드려서 병이 악화하는….
“쿨럭?!”
“아, 아앗-?!”
“보글보글….”
털썩, 털썩.
북대륙 동료들이 눈이 뒤집히고 거품을 물면서 줄줄이 쓰러졌다.
귀에서 피를 조금씩 흘리며 비틀거리는 병사들이랑 달랐다. 그렇다고 내가 저들만 차별한 건 아니다.
정의로운 용사의 파동은 공명정대하니까.
죄인이 몰랑몰랑한 심판을 거부해서 벌어진 사소한 촌극이다.
물론,
“역시, 내 아들답네.”
정의로운 용사의 파동으로부터 무사한 건 아들뿐이었다.
머리는 모르지만, 유전자가 기억하고 있다. 아들은 정의로운 용사의 파동에 저항하지 않고 전도체처럼 자연스럽게 흘려버렸다.
그렇기에 멀쩡히 서 있을 수 있었다.
“나도 있다, 마약 용사.”
“이 용사가 또 비겁한 수를 쓰네.”
마찬가지로 멀쩡한 최초의 정령과 쏘시아가 깐죽거렸다. 내 몸을 성희롱 중인 5마리 정령왕도 한 손씩 거들었다.
나는 도움 안 되는 그들을 무시했다.
“이제 좀 대화할 분위기가 나는군.”
양군의 병력은 전멸했다.
죽은 건 아니지만, 전투를 속행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병력이 정의로운 용사의 파동에 노출되어 빌빌거리고 있었다.
나는 아들의 능력치를 차분히 살폈다.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999+
▷직업: 영웅(경험치 200%)
▷스킬: 영재MAX 만능MAX 행운MAX 신성S 마기S…
▷상태: 혼란, 격정
...차분히 볼 수가 없었다.
나조차 너무 난해해서 S등급 이상은 올리지 못했던 스킬 ‘만능’이 MAX등급이었다.
물론, 만능인 탓에 다른 스킬들이 성장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괜찮을 정도로 만능의 효과들이 좋기에 상관없다.
자세히 살펴보자!
▷종류: 스킬
▷명칭: 만능
▷등급: MAX(0%)
▶Z: ?
▷SSS: 실수가 사라진다.
▷SS: 이론만 맞으면 빠르게 배운다.
▷S: 무엇이든 매우 잘한다.
▷A: 실수해도 무미하다.
▷B: 몸으로 겪으며 빠르게 배운다.
▷C: 무엇이든 제법 잘한다.
▷D: 실수가 줄어든다.
▷E: 흉내 내면서 빠르게 배운다.
▷F: 무엇이든 약간 잘한다.
굉장히 포괄적인 효과들이다.
다양한 조건에서 학습 속도가 빨라지고 실수가 점점 줄어든다. 무엇이든 잘한다는 효과 또한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좋다.
그런데 더 재미난 점은 따로 있다.
이런 만능이랑 쌍벽을 이루는 스킬 영재!
▷종류: 스킬
▷명칭: 영재
▷등급: MAX(71%)
▶Z: ?
▷SSS: 손재주가 꽤 증가한다.
▷SS: 성공률이 꽤 증가한다.
▷S: 숙련도가 꽤 증가한다.
▷A: 경험치가 꽤 증가한다.
▷B: 손재주가 약간 증가한다.
▷C: 성공률이 약간 증가한다.
▷D: 숙련도가 약간 증가한다.
▷E: 경험치가 약간 증가한다.
▷F: 떡잎부터 비범해진다.
1살에 황제에 오른 나만큼은 아니지만, 회귀하지 않았다는 걸 고려하면 엄청난 재능이다.
심지어 한계돌파가 71%.
온전히 내게서 비롯된 까닭에 다시 올리기 힘든 S등급 신성과 마기 빼고 스킬들을 제물로 갈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능력치가 훨씬 더 높았을 것이다.
여기에 행운마저…?
▷종류: 스킬
▷명칭: 행운
▷등급: MAX(0%)
▶Z: ?
▷SSS: 실수가 성공보다 낫다.
▷SS: 상대의 운을 빼앗는다.
▷S: 운이 마르지 않는다.
▷A: 우주의 기운이 가끔 돕는다.
▷B: 함정을 가끔 무시한다.
▷C: 운이 약간 상승한다.
▷D: 추락해도 죽지 않는다.
▷E: 눈먼 화살을 가끔 피한다.
▷F: 운이 좋아진다.
영재, 만능, 행운.
스킬 이름부터 사기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깡패 녀석들이 한 소년에게 모였다.
남들은 이 중에 하나만 있어도 망아지처럼 날뛰며 우쭐대는데, 내 아들은 전부 가진 거로 모자라서 한계돌파 중이었다.
여기에 신성과 마기까지!
물과 기름처럼 상극이면서도 올리기 힘든 두 속성을 무리 없이 엮어주는 종족 ‘카오스 휴먼’으로 마무리했다.
▷종류: 종족
▷명칭: 카오스 휴먼
▷등급: 고대
▶고대1: 모든 속성을 익힐 수 있다.
▷고대2: 가능성이 희망적이다.
▷특성1: 혼돈 효과가 상승한다.
▷특성2: 파괴 효과가 상승한다.
▷특성3: 망각 효과가 상승한다.
▷종족1: 번식력이 우수하다.
▷종족2: 다양한 가능성을 내포한다.
아들의 능력치를 줄줄이 나열하고 보니, 스킬 ‘만능’ 빼고는 전부 내가 걸어온 길이었다.
나도 만능이 있긴 했지만, 생산계열 스킬을 익히지 않고 전투계열만 편향적으로 습득하는 바람에 등급을 올리지 못했다.
나중에는 Z등급에 오르기 위해 생산계열에도 손을 댔지만, 이때는 너무 늦어버렸다.
스킬 만능에 조금도 의존하지 않고 ‘우주의 총애’로 몽땅 해결해버리기 때문이다. 숙련도를 올리며 성장할 기회가 사라졌다.
시기를 놓치면 ‘영재’를 영영 익힐 수 없듯이.
“검희가 뭐라고 했지?”
나는 아들의 양아버지조차 죽인 적 없다. 애초에 북대륙은 골렘D에 넣을 성검3를 가지러 잠깐 다녀온 게 끝이다.
아들 크리스가 대답했다.
“정의롭고 귀여운 귀족이었던 어린 아빠를 살해한 당신이 엄마를 덮쳤다고….”
말끝을 흐리긴 했지만, 대충 상황을 이해했다.
이걸 태몽(胎夢)이라고 하던가?
진학상담사가 배려했는지 모르지만, 검희는 아들을 낳기 직전에 나를 보좌했던 전생의 일들을 꿈으로 꾼 듯했다.
하지만 꿈이란 게 뚜렷하지 않은 법이다.
나는 마왕을 쓰러트리고자 육체를 급성장시켰다.
귀여운 아기에서 늠름한 용사로!
검희가 꾼 꿈속에서 그 성장 과정을 몽땅 생략해버렸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현생의 그녀는 이상하게 해석할 수밖에 없다.
북대륙을 슬기롭게 다스리는 귀여운 아기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갑자기 늠름한 남자가 꿈에 튀어나와서 그녀를 자빠트리고 성스러운 창으로 찌른 셈이니까.
교직원 일동의 일 처리가 참….
▶빼꼼: 저도 부자(父子)의 감동적인 재회를 기대했었는데요. 아빠에게 아빠를 죽인 원수라고 해서 당황했어요. 이 사안은 제가 선배님께 건의해볼게요!
와우! 교생 아가씨가 일하네!
▶뿌잉: 언제나 열심히 일하고 있었거든요!
교생 아가씨의 활약을 기대할게.
아무튼, 교직원의 허술한 일 처리 탓에 생긴 오해는 빠르게 풀리고 있었다.
아들 크리스의 귀여운 외모는 ‘북대륙 3대 미녀’로 통하는 검희를 닮아서 살짝 차가운 귀공자 분위기를 풍겼지만, 능력치는 전적으로 나를 복사해서 붙여놓은 것 같았다.
아니, 스킬 만능이 있으니 더 우수한가?
“크리스. 내가 네 아비다. 너도 이미 느끼고 있겠지?”
“...어째서 전쟁을 일으키신 거죠?”
내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크리스.
다른 녀석이었다면 일단 허리디스크부터 얹어주고 시작했겠지만, 아들에게 그럴 순 없었다.
언제나 공명정대해야 할 용사로서 실격이군….
은퇴할 때가 된 것 같다.
“너에게 모든 걸 주기 위해.”
“예?”
“만날 기회는 지난 3년 동안 몇 차례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바로 찾아가지 않았다. 용사란 직업은 무보수로 일하면서 낭만만 부르짖는 백수건달이었으니까. 이런 꼴을 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전장에서 원수로 만날 줄은 더욱 몰랐지만.”
“......”
“이해했다면 나를 따라와라. 신성몰랑제국은 앞으로 네가 다스릴 나라. 옆에서 하나하나 가르쳐주마.”
“그게 북대륙 정복인가요?”
“일부지.”
한심한 지배자와 무식한 동료들은 싸워서 이기고 깃발을 꽂으면 다 끝나는 줄 안다.
진짜는 그다음이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내정과 외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세계의 모든 나라랑 싸워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가장 피해야 하는 수단이 전쟁이다.
비열한 협공은 답이 없으니까.
전쟁 후에 양산되는 과부와 고아도 문제다.
전사자들의 유가족에게 위자료와 전쟁보상금이 지급되긴 하지만, 그 액수는 평생 쓸 수 있을 만큼 넉넉하지 않다.
돈이 많아도 풀어선 안 된다.
한두 명에게 보상해주는 게 아니니까.
단숨에 인플레가 발생해서 화폐 가치가 폭락한다.
사과 하나에 500원이었는데, 다음날부터 5000원이 되는 식이다.
열심히 싸워준 병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서 국고가 탕진할 때까지 빵빵하게 보상해줘도 며칠뿐이란 얘기다.
그 뒤는?
함께 망하는 것이다.
지구처럼 정보와 계산이 빠르지 않고 교통도 나쁜 판타지 세계에선 사재기가 쉬워서 더욱.
아무튼,
“북대륙과 중앙대륙 통일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눈앞만 바라봐서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어. 그게 황제든 용사든. 카리스.”
“크리스예요.”
“흠흠! 크리스. 이 아빠를 따라와라. 이건 나를 돕는 게 아니다. 위대한 마스터 몰랑을 따르는 신성몰랑제국이 어떤 나라인지,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지 직접 옆에서 봐라. 물론, 내 통치가 마음에 안 든다면 나중에 네가 바꿔라. 그것도 봐야 알 수 있는….”
“됐어요.”
“......”
“저는 황제 같은 거에 관심 없어요. 제가 아는 건, 아빠가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하고 있다는 거예요. 조금 전에 말씀하셨죠? 전쟁은 수많은 과부와 고아를 양산한다고.”
나는 또박또박 말대꾸하는 아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희생 없는 평화는 없다. 모두를 구할 순 없어.”
“전쟁을 정당화하지 마세요.”
“검희! 용사의 동료답게 이상한 사상을 아들에게 주입….”
나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내가 여전히 쓰러져 있는 검희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마자 아들 크리스가 돌진해왔기 때문이다.
저건 그러니까….
기습이네?
저건 검희의 스타일이 아니다.
그녀는 친절하게 ‘지금부터 공격합니다.’라고 미리 가르쳐주고 싸우는 고지식한 기사니까.
하지만 전혀 위협이 안 됐다.
나와 아들 사이에는 몰랑몰랑과 말랑말랑만큼의 격차가 존재하니까!
“비겁한 남편. 저걸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뭐라고 하는데?”
아들이 돌격해오든 말든 비겁한 자칭 마누라랑 대화할 정도로 여유가 넘쳤다.
쏘시아가 실실 쪼개며 답했다.
“그 아빠의 그 아들. 외모는 딴판인데, 정의로운 용사인 척하면서 비겁하게 싸우는 스타일이 닮았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화내지 않고 자비로운 용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아들은 부드럽게 보듬어줬다.
“아얏-!?!
“하하하! 외모랑 성격이 너무 딴판이라서 내 아들인지 내심 긴가민가했었는데, 이제야 확신이 드는군.”
척추가 닮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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