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12회차] 울보+관음증
“거참….”
내 기억이 맞는다면, 하루에 한 번씩 선배 욕을 했던 것 같은데.
용케 입 다물고 여태까지 참았다는 게 신기했다.
▷한탄: 나도 사람이다. 열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옳은 말을 하는 자를 쳐낼 만큼 무능한 지도자가 아니다. 과거의…. 그렇군. 아내들에게 한없이 물렀던 나를 떠올린다면 곤란하다. 인간은 실패하며 성장하는 생물. 현재는 다르다.
...꽤 맺혔던 게 있었던 모양이다.
일단 말문을 트니 끝이 없었다.
“그 울보랑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씻으러 갈 테니 오늘은 밤까지 절대 찾지 마.”
“울보?”
“가출하던 마지막 날에도 울었어. 안부 전해줘. 아! 듣고 있으려나?”
쏘시아는 히쭉 웃고는 선장실을 떠났다.
▷한숨: 저 악마는 여전히 악마 같은 말만 하는군. 지금의 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왕이라고 불리거늘. 그래도 후배는 좋겠어. 저 악마가 밤에는 어떨까, 항상 궁금했었거든. 예상대로 대단하더군. 자네의 말대로 정말 비겁한 몸이야.
어이? 후배의 사생활까지 구경하는 건 너무하지 않아?
▷히쭉: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다. 나는 저 악마- 아니, 여자가 그런 귀여운 비명을 지를 수 있으리라고는 여태 생각하지 못했거든. 후배의 짐승 같은 몸놀림은 은근히 배울 점이 많아. 물론, 전투력 측면에서는 아직 어린애 수준이지만.
전투력?
궁금해서 그러는데, 얼마나 강하슈?
▷피식: 알아서 어쩌려는가? 그리고 그런 중요한 정보를 알려줄 만큼 나는 호락호락하지 않아. 하지만 멋대로 구경한 점도 있으니 살짝만 가르쳐주겠다. 너를 초주검으로 만들고 행성을 파괴한 뇌비우스를 1초 안에 처리할 수 있다.
G등급 스킬을 가졌던 뇌비우스를 1초 안에?
그 정도면 우주에서 깡패처럼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부럽거나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게 그 증거니까.
후배인 내가 뭐라고 욕하든 그는 무력하게 듣기만 한다.
즉, 본인이 강하다고 주장하긴 하지만, 이곳에 침투해서 연약한 후배를 때릴 배짱과 능력은 없다는 것이다.
▷움찔: 신랄하군. 하지만 그 추측 또한 지극히 옳다. 그래서 나는 세력을 키우는 중이다. 영원히 강해질 줄 알았던 내게도 한계가 왔기에. 종족에 숫자가 붙은 자들은 터무니없이 강하다. 저 쏘시아도 후배 눈에는 약하겠지만, 시스템 제약이 풀리면 너는 그녀에게 명령 내리기도 전에 가루로 변할 것이다.
세력이라….
그런 것치고는 아들이랑 부하들이 너무 약한 것 같던데?
▷긍정: 후배에게 당한 아들과 부하들은 확실히 약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평가의 이야기. 자연현상에 버금가는 전투력을 보유한 존재는 이 우주 전체를 다 뒤져도 그리 많지 않다. 될 가능성이 있는 자를 포함하더라도. 하지만 내 밑에는 그런 존재가 꽤 있지. 보안이 중요한 사안이라서 감추기도 했으나, 그들을 움직이면 바로 전쟁으로 이어지기에 쉽게 움직일 수 없다.
싸우면 질 것 같아서 얌전히 있다는 거네?
▷긍정: 그 평가 또한 지극히 옳다. 후배는 하나도 모르고 있다. 온종일 감자 껍질을 벗기고 병사들에게 배식해주는 그 여자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강한지를.
안 그래도 그게 궁금했었다.
선배도 보았다면 알고 있겠지만, 얼마 전에 망령왕 섹스피어가 선배의 동료였던 동료들을 소환했었다.
알렉스, 아쿠아, 실비아, 현자, 라누벨, 용병왕….
▷침묵: 흠….
무슨 말이라도 해보슈. 아니면 그만 훔쳐보시든가. 관음증 선배.
▷결정: 나도 추측이라서 쉽게 말할 수 없어서 늦었다. 그러니 관음증이란 말은 빼라! 하렘의 황태자로 불린 이 몸에게 관음증은 어울리지 않는다.
하렘? 푸웃! 호구의 황태자이시겠죠. 같은 용사로서 존경합니다, 선배님.
▷반격: 후배도 혼돈의 유물에 남은 사념을 통해서 보지 않았는가? 관음증 후배.
그건 억지로 본 겁니다.
저는 선배처럼 들어가도 되냐고 성문 주인의 눈치를 보면서 허락을 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입장료까지? 어디 가서 용사라고 하지 마십시오.
▷부들: 비겁하다! 젊은 날의 치기로 있었던 일을 끄집어내서 하늘 같은 선배를 우롱하다니! 네가 그러고도 정의로운 용사라고 할 수 있는가! 부끄러운 줄 알아라!
먼저 대답부터 해주시죠.
선배의 과거에는 유감스러운 요정왕이 절친처럼 표현되면서 자주 출연했지만, 알렉스와 라누벨 등은 없었다.
이게 어찌 된 걸까?
▷대답: 나에게 일방적으로 정보만을 바라는 후배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지만, 영입하기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이야기해주겠다. 그들은 최후의 결전에서 죽었다. 모험 내내 한 명의 낙오자도 없었던 최정예들이 마왕 페도나르의 손짓 한 번에 몰살당했지.
그러면 지금의 저들은 뭐야?
▷설명: 동료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모험 도중에 합류한 자들과 처음부터 함께한 자들. 그리고 대단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파티 리더였던 내 허락을 받고 중간에 합류한 자들은…. 후배의 표현처럼 응원단에 가까웠다. 내 개인을 위한 치어걸 단체라고 할 수 있었지.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살 수 있었다.
오늘은 두 가지로 놀라는 중이다.
그 울보 선배에게 설명충 기질이 있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지금부터 놀랄 예정이다.
본론만 말하세요, 본론만.
그 치어걸들이 전부 선배의 마누라가 돼서 바가지 긁고, 끝끝내 가출해서 새살림 차렸다는 이야기를 또 듣고 싶지 않다.
▷부들: 폭언은 작작 좀 해라! 선배에 대한 배려와 존경심이 눈곱만큼도 없는 녀석!
본론만.
▷인내: 참으로 뻔뻔하도다. 선배에게 그런 폭언 해놓고 정보를 요구하다니. 자칭 문화시민이라면서 사회경험이 지나치게 부족한 거 아닌가? 그건 다음에 내 기분이 풀리면 알려주겠다. 참고로, 네가 찰떡이라고 부르는 성녀의 밤이 나는 마음에 든다. 이만.
엥? 이보쇼, 선배. 선배 나리?
대답이 없었다.
정말로 안 가르쳐줄 생각인 듯했다.
과거의 자기랑 다르다고 했는데, 유리 같은 정신력과 쪼잔함은 전혀 바뀐 게 없었다.
용사의 덕목 중 하나가 도발 아닌가?
동료들이 다치지 않도록 적들을 도발해서 공격이 자기에게 집중되도록 유도하는 전설적인 호구.
어디 가서 용사라고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후배가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있어야 말이지.
마누라에게 퇴짜 먹고 울면서 친구를 찾아갈 때부터 짐작을….
▷버럭: 안 울었다! 그리고 적당히 해라! 남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조금은 눈치를 봐야 정상 아닌가!
오! 아직 계셨군요? 삐져서 안 보는 줄 알았죠.
▷부들: 이젠 정말로 간다. 그러니 욕하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해라. 유익한 정보는 꿈도 꾸지 말고.
선배는 그렇게 말하고 정말로 떠났다.
정보를 더 얻어내지 못했다는 점이 못내 아쉬웠지만, 내게는 또 다른 창구가 있으니 괜찮다.
그렇지? 교생 아가씨?
▶난감: 저는 절대로 강한수 생도님에게 제 개인정보를 유출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정신력이 매우 약하거든요.
교생 아가씨는 예쁘니 괜찮아.
▶부끄: 또 마음에도 없는 말씀을 하시네요! 시, 싫다는 건 아니지만! 저를 본 적도 없으시잖아요!
안 봐도 그냥 알 수 있다.
교생 아가씨는 내가 아는 선에서 최고의 미녀다!
▶혼란: 아저씨라고 맨날 놀리던 강한수 생도님의 칭찬 서비스가 무언가를 요구하기 위한 떡밥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뿌리칠 수 없네요. 뭐가 궁금하세요?
교생 아가씨. 그건 오해야. 나는 진심으로 예쁜 아가씨라고 생각한다구?
▶화끈: 얼른 요구를 말해보세요! 안 그러면 저도 당분간 도망쳐 있을 거예요. 흥흥!
나를 속물로 보지 말아달라구, 비밀 친구. 슬라임처럼 여린 내 마음에 상처가 돼.
▶재촉: 얼른 말해보세요.
용사의 동료로 정식 채용된 알렉스와 라누벨 등의 정체. 하다못해 교사의 분신 같은 것인지만이라도 확인해줘.
▶대답: 그거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해드릴 수 있어요. 교직원 신년회와 송년회 등에는 원로선배님부터 저 같은 신출내기 교생까지 친목과 단합을 위해 의무적으로 전부 모이는데요. 그곳에 단 한 명도 없었어요.
명예교사 지위는?
▶난감: 강한 발언권으로 시스템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정식 교사가 아니란 건 확실하지만, 명예교사의 명단은 솔직히 알 수 없어요. 선배들에게 여쭈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너무 위험해요. 아! 명예교사란 지위를 악용하는 사례가 발견된다면 그걸 빌미로 명단을 가르쳐달라고 청원할 순 있겠지만요.
권한 남용이라….
명예교사의 지위를 가진 자를 몇 명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지위를 남용해서 내게 피해를 준 적은 여태 없었다.
이건 좀 더 생각해봐야겠는걸?
“흠. 시간이 꽤 지났네.”
찌질한 줄로만 알았던 선배가 설명충이었던 탓이다.
“마약 용사. 지금처럼 계속 황제 놀이를 할 거냐? 네 아들은 황제가 그다지 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던데. 이건 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네 손가락보다도 재미없다.”
온종일 내 머리 위에 달라붙어서 안 떨어지는 마약 정령이 할 말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고 여기서 어정쩡하게 멈출 순 없지. 지금 멈추면 내 평판이 박살 날 건데. 그리고 녀석은 내 뒤를 이어서 황제가 될 거야. 안 하면 안 되도록 내가 만들 테니. 그리고 착각하는 게 있는데, 황제란 자리는 스스로 올라가는 게 아니야. 하늘이 정해주는 거지.”
그리고 황제가 되어보면 또 생각이 달라질지 모른다.
잠깐만 하다가 그만두려고 했는데 하루가 지나있다든가? 의외로 적성이 맞을 수도 있다.
다만,
“하지만 네 말이 맞아, 마약 정령.”
“히히! 드디어 마약 용사가 나를 인정하는구나!”
“...네 이미지는 킁킁거릴 때부터 진즉 박살 나긴 했다만 그래도 그 웃음소리는 좀…. 하여간 속도를 올릴 필요가 있겠어.”
북대륙 정벌을 마무리할 때가 됐다!
▶의문: 이제 막 항구에 정박했는데요?
교생 아가씨. 이런 말 못 들어봤어?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내가 북대륙에 온 시점에 이 전쟁은 끝난 것이다.
***
“아들아. 정치란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분야별로 우수한 자들을 채용해서 업무를 분담해서 맡기면 끝이다. 횡령이나 모반 같은 죄를 지으면 바로 사형시키고. 네가 할 일은 그것뿐이다.”
“그, 그건 좀….”
“아주 유능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역으로 너무 뛰어나서 자기가 황제가 되면 더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착각하니까. 언젠가 꼭 사고를 치지. 능력보다 중요한 건 충성심. 그리고 너에게 옳은 쓴소리를 할 줄 아는 강단이다.”
“...모두가 두려워하면요?”
“황제로서 실격이지.”
“아빠도 그러면 실격이네요.”
“내가?”
“주위를 둘러보세요.”
부지런히 인수인계 중이던 나는 아들의 핀잔에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가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다.
“짐이 두려운 자는 앞으로 나오라.”
“......”
“......”
없는 모양이다.
“보다시피 이 아빠의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다. 나를 두려워한다면 저렇게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없지. 물론, 적이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건 곤란하지만. 아차! 깜빡했군. 손님들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어. 빨리 보내드려.”
댕강! 댕강! 댕강!
발가벗기고 머리에 검은색 포대를 뒤집어씌운 남녀들이 줄줄이 단두대에 목이 절단됐다.
영지를 지킨답시고 덤빈 귀족들이다.
해전에서 대패하고 남자들이 범해지는 끔찍한 사태에 겁먹은 대부분의 북대륙 나라들이 순순히 항복했다.
하지만 꼭 튀고 싶어 하는 관심종자들이 있다.
그렇다면 소원대로 관심을 줘야지!
성별과 지위 따지지 않고 알몸으로, 모두가 지켜보는 광장까지 걸어가게 한 후에 처형했다.
“소원을 이루고 죽었으니 여한은 없겠지.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 폐하!”
“참으로 자비로우십니다, 폐하!”
이틀 만에 북대륙 절반을 점령했다. 해안을 낀 항구도시들은 진즉 끝났고, 이제 남은 건 북대륙 중앙에 자리한 설산M의 주변국들이다.
북대륙의 노른자 땅.
가장 많은 마법사를 보유한 마법왕국과... 그리고 내 세컨드(Second) 조국뿐.
그곳만 점령하면 이 전쟁도 끝난다.
“...유모도 볼 수 있겠군.”
“유모요?”
“그런 게- 그런 분이 있다.”
용사력 –2년.
지금이라면 그녀도 아직 죽지 않았을 것이다.
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