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12회차] 황제의 귀환
내가 ‘응애!’ 한마디와 귀여움으로 북대륙을 평정한 8회차 시절, 태어난 시기는 용사력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게 무슨 뜻이냐?
나를 낳아준 유모는 순도 100% 공주님으로, 군사원조의 대가로 이웃나라의 망나니 왕자랑 정략결혼을 했다.
그러나 결혼하고 얼마 안 지나서 이웃나라가 전쟁에서 대패하고 멸망하는 바람에 그녀는 고향으로 탈출을 감행했다.
물론, 이 시도는 실패한다.
그 시기는 공교롭게도 용사력 0년. 용사의 시작 시기랑 겹쳐서 내가 아무리 용써도 물리적으로 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지.”
용사력 –2년.
유모는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직 망나니 왕자랑 결혼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내 개입으로 북대륙 역사가 확 틀어지는 바람에 어떻게 됐을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내게는 생생한 정보통이 있기 때문이다.
▷종족: 휴먼
▷레벨: 999+
▷직업: 기사(충절→불굴↑)
▷스킬: 검기SSS 불굴SSS 매력SS 내공SS 영재S···
▷상태: 의문, 피로, 굴욕
북대륙 최강의 여기사란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침략군 병사들의 배식을 맡으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검희.
그녀는 유모를 매우 잘 따르는 기사였다.
자기 부주의로 알몸을 보여놓고 칼부림하는 미친년이긴 하지만, 조국의 공주인 유모를 향한 충성심 하나는 알아줘야 했다.
당연히 그녀의 모든 것 또한 알고 있다.
다만,
“암흑황제. 내가 공주님의 위치를 순순히 알려주리라고 생각한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굉장히 비협조적이었다.
“네 입을 여는 건 간단해. 폐인이 되든 말든 마음의 정령으로 머릿속을 한 번 휘저어놓거나, 팔다리 묶고 병사 100명쯤 붙여주면 금방 불게 되어있어. 하지만 내가 그러지 않은 건, 순전히 아들 크리스 때문이야.”
“크리스는 내 아들이다!”
나랑 공명하는 크리스는 자기가 아들임을 금방 인정했다. 하지만 검희는 아니었다.
근친혼이 아닌 절대다수의 부부가 그렇듯, 그녀는 나랑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니까. 유일한 접점이 아들 크리스인데….
“엄마…. 암흑황제가 내 아빠가 맞아….”
“크리스! 네가 착각하는 거다! 나는 이런 악당에게 한순간이라도 몸을 허락한 적이 없다!”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가장 큰 차이는 외모 탓일 것이다.
판타지아 원주민인 유모의 자궁에서 태어난 직후의 나는 ‘판타지아 원주민’의 유전자가 짙었다. 하지만 영혼이 기억하는 원래의 내 모습으로 차차 돌아갔다.
물론, 완전히 되돌아가진 않았다.
하지만 척추 외에는 아들이랑 닮은 부분이 별로 없었다.
이 고집불통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지?
“...아! 옥새(玉璽)가 있군.”
왕의 혈통만이 쥘 수 있는 도장이다.
판타지아 대륙의 대다수 나라가 이런 상징적인 ‘국보’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왕족만이 아니라 귀족, 대상인, 유명한 무가(武家) 등도 ‘가보’로 보유한 곳이 은근히 많다.
지구에서는, 신분에 귀천이 없다는 말이 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있고.
하지만 판타지아 대륙에서는 아니다.
혈통으로 갈리는 마법의 재능은 노력으로 따라잡기 힘들고, 노골적으로 혈통을 따지는 마법 도구들이 꽤 된다.
주로 반지 형태의 옥새를 선호한다.
반지처럼 항상 끼고 있다가 필요할 때는 즉시 찍는 것이다.
인주 대신 본인의 피를 사용한다는 점이 특징.
“암흑황제! 옥새를 빼앗는다고 해서 네가 나의 주군이 될 순 없다!”
“...내가 크리스 때문에 참는다.”
“내 아들에게 손을 댔다간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아이고 머리야…. 말이 안 통하는 이년을 얼른 데려가라. 가서 감자 껍질이나 더 벗기게 시켜.”
기사들이 검희를 끌고 나갔다.
직후, 크리스가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엄마에게 말을 너무 험하게 하시는데요. 제 허리를 박살 낼 때도 그렇고, 정말로 제 아빠가 맞아요?”
“의심하지 마라. 내가 아들도 아닌 녀석에게 이 넓은 땅을 무상으로 줄 것 같아?”
“그건…. 상식적으로 어렵겠죠.”
“너도 잠자코 보고만 있어. 오래 안 걸리니.”
신성몰랑제국의 군대가 속속 내 주위로 모여들고 있다.
그들은 빙하로 막힌 북대륙 북부를 제외한 삼면의 바다와 항구도시를 점령했다.
그리하여 남부, 서부, 동부 순으로 정복이 끝났다.
남은 지역은 중부와 북부뿐.
하지만 북부는 북대륙의 5대 재앙인 서리여왕 엘쉬가 지배하는 동토(凍土)다. 그래서 인간이 살지 않고, 사는 극소수는 5대 재앙이 재미로 키우는 가축이라고 보면 된다.
“판타지아 중앙대륙의 5대 재앙인 망룡왕 뇌비우스를 홀로 토벌한 용사이시며, 위대한 마스터 몰랑의 대리자이신 황제 폐하! 당신의 신성몰랑제국 군대가 명만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노귀족A가 흥분한 어조로 준비를 마쳤음을 내게 알려왔다.
출전할 때만 해도 내게 불만이 많았던 늙은이였는데, 이렇게 뚜렷한 실적이 나오니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로 돌변했다.
자기가 죽기 전에 북대륙 땅에 깃발을 꽂을 날이 올 줄 몰랐다나?
다른 귀족과 기사들의 태도도 별 차이 없었다.
나는 씩 웃으며 단상 위로 올라갔다.
내 밑으로 병사들이 모여있다.
“신성몰랑제국의 몰랑스러운 병사들이여! 여기까지 낙오하지 않고 따라온 그대들이 자랑스럽다. 쓰러진 전우들의 희생을 잊지 말고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말고 싸워라. 그대들에게 그분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마. 몰랑.”
“몰랑! 몰랑! 몰랑!”
“몰랑! 몰랑! 몰랑!”
“몰랑! 몰랑! 몰랑!”
“가라. 그리고 승리를 짐에게 바쳐라!”
대량살상병기인 현자가 빠진 마법왕국은 볼 것 없었다.
가히 ‘남자 킬러’라고 할 수 있는 바다인어가 빠진 신성몰랑제국의 전력도 절반 넘게 감소하긴 했지만, 가장 중요했던 해전을 바다인어에게 맡기고 전력손실 없이 대승을 거머쥔 신성몰랑제국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승승장구했다.
이건 북대륙의 전략적 패배다.
나는 이번 전쟁에서 직접 나선 적이 없었다.
신성몰랑제국의 국력보다 강한 내 개인 전투력이면 하루 안에 북대륙을 점령했으리라.
하지만 나는 ‘황제’로서 이 자리에 있다.
직접적인 전투는 병사들에게 맡기고, 나는 뒤에서 전술을 세우고 신하와 백성을 관리하는 일만 한다.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크리스. 내가 왜 직접 안 싸운다고 생각하느냐?”
“음…. 귀찮아서?”
“너는 내 아들로 태어난 걸 감사하게 여겨라. 아니었으면 네 요추는 벌써…. 크흠! 뭐, 그건 됐고. 힘으로 세운 나라는 모래성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저들은 지금까지 직접 성문을 넘고 깃발을 꽂았다. 그리고 이날 있었던 일을 자식과 손자들에게 자랑하겠지. 그 이야기를 듣고 자란 후손들은 조국에 자부심을 느끼며 성장할 터.”
“패배한 나라들은요?”
“허튼 생각을 못 품겠지. 내가 떠난 뒤에도.”
나는 1회차 때 무수히 많은 실패를 겪었다.
그 대부분은, 당연히 패배했어야 할 전쟁에 ‘용사의 동료’들이 멋대로 간섭해서 승리로 이끈 경우다.
억지로 일군 승리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용사가 떠나자마자 ‘이건 다 용사 때문이야. 저들만 없으면 우리가 이길 거야!’라고 생각하는 무리가 줄줄이 튀어나왔다.
그 결과는 실로 참혹했다.
언제나 ‘오늘도 착한 일을 했어!’라고 헤실헤실 웃으며 앞만 보는 동료들은 관심 없지만, 언제나 뒤를 돌아본 나는 아니다.
정략결혼이 싫어서 전쟁을 일으킨 공주님은?
망나니 왕자보다 더욱 최악인 산적 두목의 첩이 됐다.
무능한 형을 밀어내고 후계자가 된 사생아는?
가신들의 충성을 얻지 못해서 가문이 쫄딱 망해버렸다.
그래서 내가 나서지 않는 것이다.
내가 모든 전쟁에 간섭해서 신성몰랑제국을 승리로 이끈 후에도 영원토록 남는다면 상관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절대로 나서면 안 된다.
후계자를 잘 키우면 된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나, 너는 너.
크리스가 아무리 잘났어도 내가 될 순 없다.
설사, 크리스가 나보다 강하더라도 반역을 꾸미는 무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혹시, 이런 말을 들어봤냐? 내가 지금 무릎 꿇는 이유는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지.”
“아뇨.”
“그, 그렇군. 하여간,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이거다. 지금은 숨죽이고 있는 자들도 내가 떠나면 바로 달려들 거란 거. 그걸 최소화하려면 내가 전면에 나서선 안 돼. 특히, 전투 측면에서.”
아주 간단한 수학적인 계산법이다.
전투력을 숫자로 표현해보자.
예시1)
신성몰랑제국+황제=100
신성몰랑제국=40
이러면 황제가 떠나거나 다치자마자 딴마음을 품는 연놈들이 방방곡곡에서 죽순처럼 돋아날 것이다.
후계자가 뛰어나다고 믿는 자는 드물다. 황태자 시절에 대륙 하나쯤 먹는 업적을 선보이지 않는 한은.
반면에 이러면 어떨까?
예시2)
신성몰랑제국+황제=100
신성몰랑제국=99
황제가 있든 없든 신성몰랑제국 군사력에 변화가 없다면 허튼 생각을 품지 못한다.
사실, 대다수의 나라가 예시2에 해당한다.
역사가 긴 나라일수록 싸움도 잘하는 지배자는 극히 드무니까. 삼국지의 여포 같은 영웅이 세운 신생국들이 주로 예시1처럼 가다가 세대교체나 암살, 미인계 등으로 허망하게 망한다.
“크리스. 이해했냐?”
“이해는 했는데, 비관적인 미래만 생각하시네요.”
“비관적인 결말을 많이 겪어봤으니까.”
그것까지 아들에게 줄줄이 설명해주고 싶지 않았다. 모르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으니까.
“폐하! 백기를 든 왕국의 사절단이 오고 있습니다.”
“마법왕국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그래, 그렇겠지.”
마법왕국은 북대륙의 종주국이란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있다. 열세임을 알면서도 쉽기 포기하지 않을 터.
마법만능주의가 낳은 불행이다.
이 압도적인 열세도 마법을 잘만 활용하면 뒤집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현자쯤 된다면 그것도 가능하겠지만, 그 현자는 인어왕을 보자마자 대량의 코피를 쏟은 후, 인어들에게 바다로 끌려가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불분명한 상황이다.
이 전쟁은 절대 뒤집을 수 없다.
“사절을 만나보지.”
나는 세컨드 조국을 흡수하기 위해 회의실로 이동했다.
***
“신성몰랑제국의 위대한 황제 폐하! 저는….”
“사족은 됐다. 항복의 증거로 뒤편에 선 공주를 짐에게 바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면 계속 고하라.”
“폐, 폐하의 혜안에 감탄했습니다….”
사절단의 대표가 고개를 푹 숙이며 긍정했다.
내 예상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항복한 세컨드 조국에서 공물로 보낸 공주는 유모였다. 원래의 역사에서 정략결혼의 대상만 나로 바뀌었다.
유모의 표정은?
그야말로 공주님의 모범이었다.
생판 모르는 남자, 그것도 침략국의 두목에게 시집가게 생겼음에도 싫은 표정을 일절 짓지 않았다.
하지만 본인의 감정을 포기한 인형인 건 아니다.
남편이 될 내가 어떤 남자인지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 힐끔힐끔 조심스럽게 관찰하고 있었다.
순도 100% 공주님.
유전자와 외모만 공주인 엽기적인 말괄량이가 아니다.
그녀의 가냘픈 몸매 또한 남자의 방심을 부른다. 검희처럼 밤에 남편을 죽일 수 있는 암살자가 절대 아니다.
이런 유모를 싫어할 남자는 고자일 것이다.
이것이 진짜 공주.
로맨스 소설의 여주인공처럼 ‘백마 탄 왕자’를 입맛대로 골라서 결혼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곱게 자라도록 성실히 세금을 납부해준 백성들을 위해 스스로 새장에 들어간 카나리아.
나는 내심 안도했다.
역사가 틀어져서 유모가 벌써 죽었거나 시집갔으면 이번 12회차는 대실패로 기록됐을 테니까.
하지만 이젠 그럴 걱정을 덜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그대들의 항복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이며, 백성들의 피해는 없을 거라고 이 자리에서 약속하겠다.”
“감사합니다, 폐하!”
“단, 조건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옥새를 구경하고 싶군. 짐은 북대륙 정세를 거의 모른다. 그러니 저 공주가 정말로 왕가의 피가 흐르는 진짜 공주인지 확인하고 싶다.”
“폐하. 송구하오나, 옥새는 국보이기에 소신이 당장 약속드리기 어렵나이다. 하루만 말미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허가한다.”
“감사합니다.”
나는 유모의 호위기사로 검희를 붙여줬다.
그녀는 조국이 항복하고 신성몰랑제국의 속국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했지만, 우직한 기사답게 새로이 맡은 임무에 충실히 임했다.
그리고 옥새가 도착했다.
속국이 됐는데 국보가 다 무슨 소용인가?
빼앗기는 것보다는 직접 선물하듯 바치는 편이 모양새도 좋기에 선뜻 내준 것이리라.
나는 넘겨받은 작은 보석함에서 옥새를 꺼냈다.
아가리를 쫙 벌리고 있는 푸른 용의 옆모습이 새겨진 반지.
이건 타국들처럼 현자가 만든 게 아니다.
프레온 가스보다 해로운 온난화의 주범인 ‘빙룡왕 슬레이아스’가 남대륙으로 떠나기 전에 이 왕국에 작별선물로 만들어준 거라는 전설이 있는 진품이었다.
이걸 다시 끼게 될 줄은 몰랐는데.
“폐, 폐하! 조심하십시오! 왕가의 피가 흐르지 않는 자가 끼면 손가락이 꽁꽁 얼어붙는…. 얼어붙어야 정상인데…?”
내가 옥새를 끼는 걸 보고 식겁한 사신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미리 초대해둔 검희와 아들도 놀라고, 신성몰랑제국의 신하들 또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들.
나는 정의로운 용사의 미소를 지으며 선언했다.
“북대륙이여, 너의 황제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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