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12회차] 살아있는 악마
혈통은 굉장히 중요하다.
지구인의 관점에선 다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겠지만, 판타지아 원주민들은 ‘고귀한 혈통’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초개처럼 내버리는 경우가 대단히 흔하다.
이건 충성이랑 미묘하게 다르다.
어떠어떠한 업적을 세운 영웅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이 이 세상과 내 가족을 지켜주리란 믿음.
토속신앙에 가깝다.
이중나선 형태를 띠는 DNA 염색체가 그 사람의 미래와 운명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재능은 재능일 뿐.
그걸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전적으로 본인 몫이다.
하지만 판타지아 대륙에선 다르다.
“어, 어떻게 이런 기적이….”
“폐하께서 백색 영웅의 혈통이었다니!”
“허허! 이것은 필연이었단 말인가!”
은퇴했는지 코빼기도 안 보이는 지구의 신들이랑 달리, 판타지 세계의 신은 은근히 부지런한 탓이다.
나는 1회차 이후로 신전에 가지 않아서 소통이 안 되고 있지만, 판타지 신은 용사의 모험에 사사건건 참견하기 좋아한다.
이게 판타지 원주민들의 눈에는 ‘운명’처럼 보였다.
신에게 사랑받는 존재로.
이 사상에 가장 많은 영감과 영향을 받은 존재가 용(龍)이었다.
내가 낀 옥새의 제작자이자 환경파괴의 주범인 빙룡왕 슬레이아스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 날도마뱀은 신 흉내를 냈다.
영웅과 그 영웅의 후손에게 특혜를 준 것이다.
나의 세컨드 조국도 빙룡왕 슬레이아스가 수호신으로 군림했을 때만 해도 엄청나게 잘 나가던 제국이었다. 그 용이 남대륙으로 떠나면서 빠르게 몰락했지만.
“짐의 지배에 불만 있는 자가 있는가?”
그렇다고 혈통이 무시되는 건 아니다.
“없습니다, 폐하!”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모두가 바짝 엎드렸다.
지금까지 내게 쭉 삐딱했던 검희도 기사의 예를 표시했다.
판타지 세계에서는 재능보다 혈통이다. 개인이 아무리 날고 기더라도, 강력한 용에게 부탁할 수 있는 혈통을 뛰어넘을 순 없다.
이런 식이다.
혼자서 5천 대군을 쓰러트렸다고? 제법이네!
하지만 누구의 혈통을 이어받은 분의 부탁을 받은 용이 50만 대군을 처치하고 나라를 구했어!
...아예 상대가 안 된다.
물론, 전부 지나간 옛날이야기다.
망룡왕 뇌비우스가 그런 수호룡 대부분을 몰살시키면서 현재는 신 행세를 하는 용이 없다.
하지만 그때의 문화는 고스란히 남아있다.
혈통우월주의란 형태로.
내가 낀 옥새도 그 산물이다.
“그러므로 이 정략혼은 받아들일 수 없다. 하지만 짐의 명예를 걸고 공주의 미래는 책임지도록 하지. 짐의 결정에 불만인 자는 앞으로 나와서 고하라.”
“......”
“......”
“없는 듯하니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지. 북대륙의 항복한 나라들은 신성몰랑제국의 이름 아래에 공국으로서 존속을 인정한다. 조공은 필요 없으나, 매년 건국일에 공왕 혹은 정통후계자가 반드시 참석하도록 하며, 이를 어길 시에 반역으로 간주한다.”
항복하지 않은 나라들에 대해선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지배층들이 싹 단두대로 보내지면서 공왕에 오를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나라들은 직할령으로 둘 수밖에 없다.
마땅한 인재가 나오기 전까지.
그때, 회의실 밖이 소란스러웠다.
탕!
급한 용무가 있을 때는 예의 따지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정말로 회의실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신하가 있을 줄은 몰랐다.
“폐하! 큰일 났습니다!”
용사를 잘못 만나는 바람에 서대륙에서 고인이 된 알렉스 대신 왕궁기사단장이 된 친구다. 이름이 아마, 기사단장B였을 것이다.
A급은 아니지만, 적당히 유능하고 융통성 있는 남자다.
“그 큰일이 뭐지?”
“마법왕국에서 악마를 소환했습니다!”
“...악마?”
“그렇습니다. 수도의 내성까지 막 진격했던 기사단이 그 악마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빠르게 후퇴 명령을 내렸지만, 악마가 너무 강해서….”
“사족이 길다. 이렇게 말하는 중에도 나의 백성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거 아닌가?”
“죄송합니다, 폐하!”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악마 두목의 딸을 핫팩으로 쓰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용사로서 일할 때로군.”
슬슬 황제 놀이도 지겹던 차에 잘 됐다.
MAX급 용사님은 마왕이 소환됐기를 은근히 소망하면서 피와 땀이 난무하는 마법왕국 수도로 향했다!
*
*
*
판타지 원주민이든 지구인이든 이상한 착각을 하고 있다.
요정, 악마, 천사, 정령, 인어….
인간 외의 종족에 묘한 환상을 품는 것이다.
그들도 먹으면 싸고, 벗기면 부끄러워한다. 잘못하면 어머니에게 처맞고, 안 맞으려고 아버지를 방패막이로 쓴다.
이슬만 먹고 실수 한 번 안 하는 완벽한 종족은 없다.
언제나 대립 관계로 그려지는 천사와 악마도 그렇다.
천사가 ‘날개 달린 인간’이라면, 악마는 ‘뿔 달린 인간’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악마는 천사랑 달리 인간에게 배척받는다.
성격은 두 종족 다 비열하고 사악한데, 악마만 유독 부정적인 이미지가 박혀 밉보이고 있다.
판타지 신이 마왕을 이기고 승자로서 선동과 날조를 한 탓도 있지만, 악마 고유의 능력인 ‘각성’도 크게 한몫했다.
저놈처럼.
“으하하하! 개미 같구나! 작고 약해!”
악마는 원하는 형태로 육체를 변화할 수 있다.
자기 능력이 닿는 선이란 조건 때문에 망룡왕 뇌비우스처럼 터무니없이 거대해질 순 없지만, 손가락을 칼날로 바꾸거나 등에 날개를 생성하는 등은 가능하다.
이것이 악마의 각성.
그런데 그 대부분의 모습은 실로 엽기적이다.
여성 악마들은 그나마 ‘미모’를 추구해서 봐줄 만하다. 하지만 강해지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남성 쪽은 그야말로 비호감의 극치.
악마의 안 좋은 이미지 대부분은 악마 남성이 만들었다고 해도 절대 틀리지 않는다.
기사단장B가 호들갑 떨었던 악마도 후자에 속했다.
“흠…. 처음 보는 뉴비(newbie)인데….”
구리색의 완벽한 역삼각형 근육질 상체, 횃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푸른색 머리, 할퀴기 좋도록 갈고리처럼 생긴 손, 해파리처럼 무수히 많은 촉수가 돋아난 등판….
몬스터보다 더 괴물 같은 모습이었다.
신장은 대충 3층 건물 높이. 하지만 사방으로 뻗은 촉수 때문에 훨씬 크게 보였다.
보유한 능력치도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종족: 레어 데몬
▷레벨: 999+
▷직업: 학살자(학살=몰살↑)
▷스킬: 마기Z 촉수Z 맷집MAX 광기MAX 학살MAX…
▷상태: 광란, 흥분, 쾌락
외견과 능력치만 보더라도 ‘사정 청취 필요 없이 즉각 응징해주세요!’라고 외치는 것 같은 악역 캐릭터.
이런 친구들을 1회차 초창기 때 자주 만나볼 수 있다.
하지만 7년차가 넘어선 중후반기부터는 악역 캐릭터가 다 떨어졌는지, 어정쩡하게 생긴 떨거지들이 많다.
아무튼,
“으어어어….”
“하으읏….”
녀석의 등에서 뻗은 촉수에는 사람들이 야릇한 신음을 흘리며 매달려 있었다.
국왕, 왕비, 왕자, 공주, 하녀, 귀족, 마법사….
그들은 촉수에 칭칭 감겨있지 않았다. 치마나 바짓가랑이 사이로 파고든 촉수에 꼬치처럼 꿰여 있었다.
촉수에 꿰뚫린 저들의 몸이 무사할지 살짝 걱정되면서도 궁금하긴 했지만, 이번 사태가 끝나면 전부 단두대로 보내질 반역자들이기에 딱히 문제없을 것이다.
“Z등급이 둘이라…?”
악마의 스킬 등급은 초등교육과정보다 전반적으로 상향된 중등교육과정이란 점을 고려하더라도 너무 강했다.
Z등급 둘이란?
내가 없는 신성몰랑제국을 며칠 안에 멸망시킬 힘이다.
물론, 마스터 몰랑이 나서면 나노미터 단위로 사라질 하찮은 존재이긴 하지만, 그분이 나설 일은 없으니 논외로 치자.
Z등급 스킬을 둘이나 보유한 악마를 소환한 마법왕국 왕족과 마법사들은 제정신인 걸까?
실시간으로 확장되는 자신들의 배설구를 느끼면서 열심히 반성하고 있을 것이다.
“너는…?”
“이제야 봤군.”
적군과 아군 구분 없이 닥치는 대로 주변 건물을 부수고 생명을 죽이던 악마가 마침내 나를 발견하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으하하하! 네가 그 황제냐!”
쿵! 쿵! 쿵! 쿵!
악마가 큼직한 발로 대지를 울리면서 내게 달려왔다.
놈의 외침을 들은 병사들이 도망치던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용사이신 폐하께서 오셨다!”
“용사가 왔다! 우리는 살았어!”
“멍청한…! 폐하를 지켜라!”
내가 싸워주길 바라는 병사와 지키려는 기사들. 그들이 뭐라고 하든 간에 문제의 악마는 이미 내 지척에 도착해 있었다.
사방에서 날아든 촉수가 내 엉덩이를 노렸다.
나는 씩 웃었다.
“이봐. 변신이란….”
요렇게 하는 거다.
펄럭-!
나는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생성했다.
그 탓에 호화로운 황제의 용포(龍袍) 상의가 찢어지고 말았지만, 옷값은 악마에게서 뜯어낼 예정이기에 상관없다.
그리고 무척 유감스럽게도,
놈은 내가 옷을 찢는 거친 퍼포먼스를 선보인 게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쓰러졌다.
촤악, 푹, 푹, 푹….
G등급, 신의 영역에 들어선 망룡왕 뇌비우스의 칠흑빛 비늘에도 거침없이 박혔던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에 무수히 돋아난 뿔들이 악마의 온몸을 찢어발겼다.
성검은 거들뿐.
마스터 몰랑의 참교육을 받으며 업그레이드된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는 이미 성검 뉴클리온보다 강했다.
“마, 말도 안 돼…. 성검도 없이 내 촉수를…?”
악마가 죽어가면서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다.
“진정한 용사는 성검에 의존하지 않는 법이다. 명심하도록.”
“요, 용사가 어찌 그런 날개를….”
쿵!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된 악마의 거구가 쓰러졌다.
재생 따위는 되지 않았다. 정의로운 용사의 축복이 악마의 자연치유를 방해한 탓이다.
“축복이 아니라 저주겠지.”
구경꾼A에 지나지 않는 최초의 정령이 딴죽을 걸었다.
“쯧쯧. 이 정령이 속성의 상성도 모르네. 원래 성스러운 축복은 악마에게 독인 법이야.”
“마약 용사가 주장하는 그 성스러운 축복은 모든 종족에게 치명적인 맹독인 것 같은데…?”
“네가 시험해볼래?”
“고귀하고 연약한 정령을 괴롭히지 마라!”
치이이이….
각성이 해제된 악마의 원래 모습이 드러났다.
덩치가 크고 능력치도 높기에 악마의 성년인 20~30대 사이의 외견일 줄 알았는데, 딱 봐도 10세 미만의 미성년자였다.
코흘리개 꼬맹이.
그렇다고 해도 실제 나이는 인간보다 훨씬 많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무척 뜻밖이었다.
어린 악마가 마왕보다 세다니?
“이렇게 강한 악마라면 내가 모를 리 없는데….”
지금의 내게는 하룻강아지에 지나지 않지만, 다른 용사가 상대했다면 5대 재앙에 버금가는 중압감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고민하지 않았다.
물어보기 만만한 악마가 있기 때문이다.
“쏘시아, 소환.”
“야! 이 나쁜 쓰레기야!”
악마는 역시 악마라는 걸까?
미세먼지만큼의 애정도 안 보여주던 남편이 기껏 불러줬는데, 반가움을 담은 인사 대신 쌍소리부터 내뱉는 쏘시아였다.
그녀는 옷 대신 비누 거품을 입고 있었다.
“물어볼 게 있어서.”
“막 소환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나는 이 저주 때문에 네 부름을 거부할 수 없단 말이야!”
“빨리 보고 싶어서.”
“...비겁한 놈.”
긴 수건을 소환해서 거품째 알몸을 가린 쏘시아가 새침한 어조로 투덜댔다. 그래서 처음보다는 눈꼬리도 내려가며 표정이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너에게 당장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그 뒷말은 굳이 안 해도 알아! 네가 용무도 없이 빨리 보고 싶다고 말할 놈이 아니란 것쯤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어!”
쏘시아의 표정과 감정은 시시각각 바뀌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용무를 밝혔다.
“이 악마는 뭐야? 처음 보는 녀석인데.”
내 질문에 고개만 살짝 돌려서 죽은 코흘리개 악마를 힐끔 본 쏘시아가 콧방귀를 끼며 답했다.
“진짜 바보 아니야? 네가 모든 악마를 알 리 없잖아? 처음 볼 수도 있지.”
그녀의 반론에 나도 콧방귀를 꼈다.
왜냐하면,
“내가 모르는 악마는 살아있는 악마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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