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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급 관심용사-224화 (224/430)

 224화

[12회차] 신성몰랑제국

내 논리정연한 설명에 잠시 말문을 잃은 쏘시아. 그녀는 자기 팔뚝을 문지르며 질문했다.

“나는 살아있는데?”

“안 죽인 게 아니라 못 죽인 거지.”

나랑 키스하다가 목이 부러졌는데도 벌떡벌떡 일어났다.

죽었다고 복창하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허리디스크도 걸리긴 했지만, 그게 진정한 죽음을 뜻하진 않는다.

이런 반칙 캐릭터인 쏘시아를 제외하고는, 내가 안 죽여본 악마가 없었다.

간부부터 말단까지.

내 손을 거치지 않은 자가 없었다.

“뭔가…. 악마를 쓰러트리는 게 용사의 본분이긴 한데, 네가 말하니 악(惡)의 근원 같아.”

“악마에게 나는 두려운 존재지. 안 두려운 용사는 용사가 아니야. 너도 침대 위에선 내게 살려달라고 애원하잖아?”

“안 했어! 했어도 말하지 마! 이 쓰레기 자식아!”

“악마의 욕은 용사에게 칭찬이지.”

“아니, 아니. 나는 남녀 사이의 보편적인 윤리를 이야기하는 중이거든?!”

정의로운 MAX급 용사는 비겁한 악마의 변명을 한 귀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이 악마는 뭐야?”

“아빠가 시스템에 간섭해서 만들어낸 신세대 악마.”

“이게?”

예전에 교생 아가씨가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마왕 페도나르가 ‘비공식 패치’로 시스템에 간섭했고, 그걸 교직원들이 고쳤다고 우기지만, 악마의 번식력이 원상복구 된 대신에 돌연변이 들이 태어나기 시작했다고.

“너는 모르겠지만, 수많은 분신으로 나뉜 채 초등교육장부터 고등교육장까지 골고루 퍼져있는 나는 그 변화를 느끼고 있어. 예전에 졸업률이 95%쯤 했다면, 지금은 10%도 안 돼.”

“왜?”

나는 정말로 이해가 안 돼서 질문했다.

“몰라서 물어?”

“몰라서 묻지. 알면 용사가 악마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겠니?”

“돌연변이들 때문에 아빠랑 대면조차 못 하고 전멸하는 용사가 태반이야. 간신히 돌연변이를 쓰러트릴 수준까지 용사가 성장하면, 그만큼 힘을 되찾은 아빠에게 패배하고.”

모든 악마를 지배할 수 있는 마왕의 유일한 약점.

마왕은 용사랑 마주치면 레벨과 스킬 등급이 감소한다.

다시 말해, 용사가 모험을 통해 강해질수록 마지막 대결에서 마왕 페도나르가 유리해진다.

약하면 돌연변이에게 패배하고, 강하면 마왕에게 패배하고.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졌다는 이야기 같다.

“내 추측이 맞아?”

“맞아.”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 돼. 비열한 우정의 힘이면 돌연변이도 쉽게 이길 텐데.”

용사가 꼭 강해질 필요는 없다.

동료를 잔뜩 모아서 돌연변이를 처치하면, 마왕을 상대로도 그리 불리한 싸움을 할 필요는 없다.

“직업이 학살자야.”

“...아!”

“네가 너무 순식간에 쓰러트려서 감을 못 잡는 모양인데, 이 돌연변이들에게는 협공이 통하지 않아.”

나는 다시금 돌연변이의 능력치를 확인했다.

▷종족: 레어 데몬

▷레벨: 1

▷직업: 학살자(학살=몰살↑)

▷스킬: 마기Z 촉수Z 맷집MAX 광기MAX 학살MAX…

▷상태: 사망

직업 학살자.

스킬 학살의 등급만큼 몰살도 올려주는 직업특성이다.

마법사가 아닌 직업군을 대량살상병기로 만들어주는 환상적인 직업이다.

▷종류: 스킬

▷명칭: 몰살

▷등급: MAX

▷Z: ?

▷SSS: 경험치 감소가 사라진다.

▷SS: 광범위 피해를 준다.

▷S: 지형의 구애를 안 받는다.

▷A: 피해 범위가 매우 넓어진다.

▷B: 피해 위력이 매우 증가한다.

▷C: 관통 속성이 추가된다.

▷D: 피해 범위가 넓어진다.

▷E: 피해 위력이 증가한다.

▷F: 범위 피해를 준다.

이런 스킬 ‘몰살’만큼 광범위는 아니지만, 다수의 대상을 잔인하게 죽여서 공포에 빠트리는 것에 좀 더 초점을 둔 스킬 ‘학살’도 비슷한 효과로 중첩되며 상승효과를 일으킨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악마 중에 ‘학살자’가 없었다.

산적 두목이나 엽기살인마 같은 삼류악당들이 ‘낮은 등급’으로 종종 보유하긴 했었지만, 이 직업이 진가를 발휘하려면 등급이 높고 소유자의 전투력도 어느 정도 받쳐줘야 한다.

“과연…. 이제 좀 이해가 되네.”

고위악마들은 직업이 다 형편없었다.

품위를 올려주는 ‘귀족’ 같은 비전투 직업이 대부분이다. 쏘시아도 예외가 아니다.

▷종족: 세컨드 데몬

▷레벨: 999+

▷직업: 여왕(매력→지배↑)

▷스킬: 마기ZZ 혈기ZZ 불사ZZ 매력ZZ 불굴Z···

▷상태: 마검

원래 보유한 스킬이 전투에 특화돼서 별로 티가 안 나지만, 비열한 우정의 힘에 대항할 방법 없는 직업이란 건 마찬가지다.

동료들이 응원해줄수록 강해지는 성검1의 필살기는 진정 답이 없으니까. 불사도 간단히 찢어버린다.

초월등급도 찢을 수 있을진 미지수지만.

“이런 녀석들이 많나?”

“몰라. 시스템 방화벽에 안 걸리려고 수시로 바뀌거든. 그래서 차원마다 등장하는 돌연변이의 숫자와 성질이 전부 달라.”

“재미있네.”

“더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줄까?”

“뭔데?”

쏘시아가 비누 향기로 가득한 얼굴을 내 귓가에 가까이 대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아빠가 시스템을 이해하기 시작했어.”

전장 뒷수습을 신하들에게 맡긴 후, 나는 쏘시아랑 좀 더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장소를 옮겼다.

이럴 때는 침실이 좋겠지?

*

*

*

마왕은 자살할 수 없다.

세상을 파멸시키려는 마왕을 쓰러트리고자 용사가 소환됐는데, 정작 마왕이 자살해버린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그래서 시스템으로 차단됐다.

하지만 나는 마왕 페도나르가 할복하며 자살하는 모습을 딱 한 번 보았다.

지금까지 호구로 알았던 마왕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기만 했던 최악의 전투였고, 용사를 역으로 물리친 마왕이 갑자기 자살하면서 대서사시 같은 용사의 모험은 엉망진창이 됐다.

“그게 시스템을 뚫은 거란 말이지….”

이 세계는 최초의 악마와 최초의 천사가 합작한 교육시스템이다.

최초의 악마는 자기 감옥을 제작하는 사업에 강제로 투자한 셈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대주주’란 사실은 변함없다.

평소에는 대주주의 권한을 쓸 수 없다.

하지만 용사가 일정 수준을 넘어설 만큼 강해지면 마왕은 시스템에 간섭할 힘을 확보하게 된다.

그것이 마왕의 자살.

시스템을 교란하는 최고의 수단이다.

“나는 무척 마음에 안 들지만, 최초의 용사처럼 아빠도 너를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있어.”

마법왕국 국왕이 사용하던 넓은 침대 위에 축 늘어진 쏘시아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마왕에게 인정받아도 전혀 기쁘지 않은데.”

“너는 아빠의 희망이야.”

“뭔 개소리야?”

“아내가 기껏 진지하게 설명해주는데 개소리? 이 개새끼가…!”

...그리하여 우리는 판타지아 대륙을 0번 멸망시킬 만큼 치열하게 싸웠다.

그리고 30분쯤 흘렀다.

“흑흑! 악마를 울리는 나쁜 놈. 너는 용사도 아니야!”

“칭찬 고마워.”

“너 같은 녀석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아빠만 좋았지. 네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시스템에 간섭할 방법은 알아도 매번 실패했었거든. 쉽게 말해, 용사가 성검과 동료들에게 의존해서 너무 약했어.”

마왕은 부단히 노력해왔다.

용사의 성장을 위해 아낌없이 퍼줬다.

자식, 부하, 재물, 경험….

다른 건 다 제쳐두더라도, 인간 나라를 전복시킬 그럴싸한 계획을 세우던 왕자와 왕녀들이 용사에게 당하면 직접 복수하고자 뛰쳐나올 법한데, 마왕은 성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1회차 막바지에 나는 마왕에게 물어봤다.

그때 뭐라고 했더라?

“악마의 정치를 아느냐고 물었었지….”

이런 뒷사정을 몰랐던 당시로선 알 수가 없었다.

용사의 성장을 바라는 마왕이라니?

마왕 페도나르에게 승부사 기질이 있다는 한마디로 얼렁뚱땅 정의해버리기에는 지나치게 비논리적이었으니까.

하지만 마왕의 딸을 마누라로 둔 지금은 안다.

마왕이 어째서 용사의 성장을 바랐는지를.

이게 악마의 정치다.

“시작이 어려웠지 그 뒤부터는 쉬웠어. 네가 만들어준 기회로 시스템에 간섭해서 용사가 강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했거든. 그 결과물 중 하나가 돌연변이 악마야. 이젠 아빠가 얼마나 간섭했는지 나도 파악이 안 되는 상황이야.”

“언젠가 마왕이 자력으로 이곳을 탈출할 수도 있다는 뜻?”

“맞아.”

“내 덕분에?”

“어. 너 때문에.”

용사가 마왕을 돕다니?

이건 확실히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하지만 나도 억울하다!

나는 그저 마왕을 홀로 쓰러트릴 수 있을 만큼 강해졌을 뿐이다. 그게 잘못이라니!

세상에 이런 부조리를 보았나!

▶난감: 혼자 쓰러트리지 말라고 다양한 이벤트와 경품이 준비되어있었는데요….

교생 아가씨는 알고 있었어?

▶부정: 아니요. 사랑과 우정의 중요성은 학창시절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게 교육시스템 허점을 메꾸는 교묘한 장치인 줄은 전혀 몰랐어요. 너무 놀라서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중이에요.

정말로 놀라서 뛰는지 확인하고 싶다.

비밀 친구. 이 정의로운 용사님이랑 데이트하지 않을래? 대기 번호 0순위로 모실게!

이 와중에도 2순위는 계속 쫑알대고 있었다.

“그 고마움의 표시로 사랑한다던 딸을 이런 나쁜 놈에게 팔다니. 아빠는 악마도 아니야! 흑흑!”

“비겁하게 우는 척하지 마라.”

“나도 감정이 있어! 너무 억울하면 울 수도 있거든!”

그때, 격하게 흔들리는 와중에도 내 머리 위에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있던 최초의 정령이 참견했다.

“조카야. 이런 말 해서 정말 미안한데, 혼인계약서는 네가 작성했잖아. 마약 용사가 피해자고.”

“이모는 대체 누구 편이에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물론, 나는 마약의 편이다.”

북대륙 북부와 중앙대륙 남부를 제외한 두 대륙의 모든 영토를 병합한 신성몰랑제국.

국가란 개념이 없고 인구도 적은 서대륙과 남대륙은 무시하고 보면, 판타지아 세계의 약 60% 인류가 내 지배 아래에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겉보기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의 상권을 지배하는 암흑상회의 두목이 내 마누라고, 우주의 절대강자인 마스터 몰랑이 내 스승이다!

실질적인 지배율은 99.9%쯤 한다고 볼 수 있다.

제국의 내부사정은?

“히프리아 님! 같이 가요!”

“숙녀는 절대 뛰지 않는 법입니다.”

“네! 히프리아 님!”

근친이란 이유로 자연스럽게 파혼된 후, 황제가 아끼는 누이동생처럼 취급받는 유모는 성녀H를 친언니처럼 잘 따르고 있었다.

...너무 잘 따르는 거 아니야?

하지만 그 반대인 녀석들도 있었다.

“크리스, 네가 약한 이유는 훌륭한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은 탓이야.”

“용에게 약하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종족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 그래서 친아들인 너보다 내가 훨씬 강한 거야! 그리고 지금의 나는 용의 형태가 아니라서 너랑 조건은 같아.”

“크윽! 다시 한번!”

쑥떡과 크리스는 온종일 싸우고 있었다.

결과는 쑥떡의 압승.

매번 지는 게 분했던 걸까, 크리스는 공간이동 마법으로 중앙대륙과 북대륙을 헤집고 다니면서 몬스터와 악당의 씨를 말리고 있었다.

똑똑.

집무실 창가에 서서 인어왕과 인어공주 아쿠아가 헤엄치는 연못이 있는 황궁 정원을 내려다보던 나는 노크 소리에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인가?”

“폐하. 실종됐던 현자를 발견했다는 전갈입니다. 그런데….”

시녀가 곤혹스러워하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계속 고하라.”

“폐하께서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판단되어 무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소식을 전하게 됐다고 합니다.”

탁탁.

엎드려있던 최초의 정령이 내 이마를 손바닥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얼른 가보자, 마약 용사!”

“말 안 해도 갈 거야.”

현자의 상태가 궁금하긴 했다.

MAX급 용사는 동정을 뗀 대마법사의 말로를 구경하기 위해 무거운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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