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12회차] 마이 아쿠아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비켜라. 나는 황제를 봐야겠다.”
거죽과 뼈만 남은 앙상한 청년이 기사들이랑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고릴라처럼 덩치 큰 기사들이 비실비실한 청년 하나를 막지 못하고 밀려나고 있었다.
물리적인 몸싸움을 벌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청년의 뒤편에 바글바글한 인어들이 기사들에게 주는 압박감이 상당했다.
“내 낭군님이 지나가신다잖아.”
“비켜! 하찮은 수컷들!”
“얼른 일 끝내고 돌아가요, 내 사랑.”
“오늘은 무슨 자세를 할까? 후후!”
인어 특유의 원피스 한 장 차림, 직업은 공주, 999레벨. 스킬도 Z등급 하나씩 보유하고 있다.
개개인이 아쿠아 수준.
저 정도면 인어 중에선 최상위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인어들이 해골바가지를 연상시키는 청년의 뒤편에 팬클럽 여고생들처럼 모여있었다.
그런 인어들의 후광을 받는 청년은 처음 보는 남자였지만, 나는 그가 누군지 보자마자 깨달았다.
애초에 저 푸른색 머리카락은 흔치 않다.
“현자야. 꽤 많이 변했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여자를 알게 된 소년은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그게 정신적인 면이 아니라 물리적인 성장일 줄은 몰랐다. 육체와 능력치가 몰라보게 바뀌었다.
“용사여. 외모만 바뀐 게 아니다.”
“어, 그래. 말투도 건방지게 바뀌었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고 해도 좋았다.
능력치만 보더라도, 옛 흔적만 살짝 남아있을 뿐이다.
▷종족: 인피니티 휴먼
▷레벨: 999+
▷직업: 성현(성욕→마력↑)
▷스킬: 마력ZZ 정력Z 마법MAX 마술MAX 마기MAX…
▷상태: 현자, 골렘, 탈진, 빈혈
동정일수록 마력이 상승하는 직업 ‘현자’에서 성욕이랑 비례하게 강해지는 ‘성현’으로 뒤집혔다.
스킬에도 예전에는 없었던 ‘정력’이 추가됐는데, 주위에 응원하는 여성이 있으면 절대 쓰러지지 않는다는 효과가 가장 성가시다.
혼란스러운 상태의 ‘골렘’도 은근히 신경 쓰이고...
그런데 이보다 더 눈여겨볼 점이 있었다.
인피니티 휴먼(Infinity Human).
예전에는 현자의 종족이 평범한 ‘휴먼’이었는데, 무슨 봉인을 깨듯 급격히 업그레이드됐다.
▷종류: 종족
▷명칭: 인피니티 휴먼
▷등급: 전설
▷전설1: 머나먼 세상을 본다.
▷전설2: 머나먼 진리를 본다.
▷특성1: 무한 효과가 상승한다.
▷특성2: 인내 효과가 감소한다.
▷특성3: 정신을 잃지 않는다.
▷종족1: 번식력이 우수하다.
▷종족2: 다양한 가능성을 내포한다.
전설 효과가 상당히 신경 쓰였다.
머나먼 세상, 진리를 본다?
그게 무엇을 본다는 의미인지 불분명했다.
하지만 곧 알게 될 터.
방구석 폐인 같던 현자에서 인어들을 이끄는 위대한 성현이 된 남자가 두 눈을 부릅뜨며 선언했다.
“오직 나만이 이 세상의 결말을 알고 있다!”
너무나 뜻밖의 대사에 한순간 말문이 막혔던 나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현자야. 정말 미안한데, 나도 알고 있으면 안 되냐?”
“헛소리! 마왕만 쓰러트리면 세상이 평화로워질 줄 아는 용사여! 너는 하나도 모른다! 너는 그저 신의 뜻대로 만들어진 연극 속 주인공일 뿐! 진실은-!”
“교보재 주제에 말이 많군.”
“......”
“뭘 깨달았는지 대충 알겠는데, 세상에는 모르는 편이 나은 것도 있어. 지금의 너처럼. 무척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잖아?”
“...이 세상은 가짜다.”
그건 나랑 생각이 다른걸?
“이 세계에서 태어난 자들에게 사과해라. 시작은 비록 인큐베이터 같은 인공이었을지 몰라도, 여기도 엄연한 진짜다.”
나는 수세식 변기도 없고 야만인들로 득실거리는 이 판타지아 대륙이 정말 싫다.
하지만 가짜와 진짜를 구분 못 할 정도로 어리석거나 현실도피 하는 겁쟁이는 아니다.
이 세계의 제작자가 마누라이기도 하고.
“기억이 돌아온 모양이네.”
이번에는 내가 부르지 않았는데 불쑥 튀어나온 쏘시아가 현자를 보고는 별거 아니란 어투로 진단을 내렸다.
“창조신 판타지시아…! 이곳에 있었나…!”
그녀를 본 현자가 두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나는 마누라를 돌아보며 물었다.
“창조신 판타지시아?”
“이 시스템 제작자는 나니까. 이름은 대충 지은 가명.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대놓고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그녀의 말이 옳다.
기사A, 기사B, 귀족B, 하녀H, 바다인어 다수….
이 자리에는 관계없는 원주민들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탁!
털썩, 털썩, 털썩….
암흑물질을 가볍게 건드리자마자 뇌가 몰랑몰랑 흔들린 원주민들이 줄줄이 기절하듯 쓰러졌다.
하지만 그들이 바닥에 키스하는 일은 없었다.
판타지아 세계의 창조신마저 함락한 내 공성추 위에 항상 앉아있는 마음의 정령왕 덕분이다.
녀석은 정신을 잃은 자들을 조종했다.
조금 주워들은 기억을 지우고, 마치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이 이 현장에서 떠나도록 했다.
“낭군님. 내일 올게요.”
“음? 벌써 퇴근할 시간인가?”
“폐하!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무리 정령왕이라고 해도 Z등급 스킬을 보유한 다수의 바다인어까지 동시에 조종하는 건 무리였다.
순전히 정신을 잃은 무방비상태이기에 가능한 작업이었다.
물고기 대가리라서 원래 멍청하기도 하고.
“이제 됐지?”
“...우리가 장소를 옮기는 게 정상 같은데.”
“그건 너무 궁상맞잖아.”
“내가 시스템을 다시 조작할 수 있게 된다면, 사회경험 없는 미성년자는 뽑지 않도록 설정할 거야. 희망으로 가득한 어린 꿈나무들에게 미래를 건다는 고모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어….”
자괴감에 빠져든 쏘시아가 내 어깨에 자기 머리를 박았다.
나는 툭 밀쳤다.
“어깨 결린다. 대가리 치워.”
“분위기 파악 못 하는 고자- 매우 나쁜 놈! 자기 여자에게 어깨 좀 빌려주면 덧나?”
“얼마 전까지 동정이었던 친구랑 중요한 대화 중이잖아. 눈치 없는 유부녀는 이래서 문제야.”
“너…. 나중에 두고 봐.”
“계속 보고 있으면서 새삼스럽게.”
뭐가 그리 즐거운지, 최초의 정령은 이 와중에도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배꼽 잡고 어깨를 들썩였다.
악마랑 싸우는 용사가 그리 신기하냐?
현자마저 끼어들었다.
“창조신과 용사여. 욕이 목구멍 아래까지 차올랐는데,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면 안 될까?”
“얼른 해.”
“기다리고 있잖아.”
무언가를 참듯 자기 관자놀이를 한참 동안 지그시 누르며 침묵하던 현자가 마침내 입술을 뗐다.
“미치지 않는 방법을 내게 가르쳐다오, 창조신 판타지시아.”
*
*
*
생명체는 컴퓨터랑 다르다.
듀얼코어, 쿼드코어, 멀티엔진….
컴퓨터는 여러 문제나 계산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다.
물론, 괴짜나 천재 부류에 속하는 인간들이 두세 가지 일을 한꺼번에, 오른손과 왼손이 각각 다른 일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만약, 동시에 수천 가지를 하라고 하면 어떨까?
청소, 빨래, 공부, 여행, 청취, 방사, 싸움….
슈퍼컴퓨터라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네가 무슨 초현실적인 깨달음을 얻어서 시스템 통제를 뚫고 기억을 되찾은 모양인데…. 내가 내린 결론은 다시 봉인하는 거야.”
“그럴 순 없다.”
쏘시아의 설명에 현자는 냉철한 어조로 단호하게 답했다.
그동안 나는 창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날씨가 참 흐리고 좋네~
“하나씩 정리해보자. 현재 용사들은 타락한 최초의 용사를 처치하기 위해 키우는 4세대야. 너는 마왕을 쓰러트린 2세대. 하지만 진짜 영혼은 마왕의 손짓 한 번에 간단히 소멸했고, 현재는 생활기록부를 토대로 만든 잔류사념 같은 거야.”
“소멸…?”
“그래. 소멸. 내 추측이 맞는다면, 너는 용사 후보였던 2세대 학창시절 기억이랑 현자로 활동하는 4세대 기억이 막 뒤섞여있을 거야. 하지만 그 어디에도 판타지아 세계 밖에서 모험한 기억은 없겠지. 최초의 용사가 누군지도 기억 안 날걸?”
“......”
현자가 저 하늘의 먹구름 같은 표정을 지었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네~
“너는 입버릇처럼 말했지. 여자를 멀리하고 마법에 몰두했다면 최초의 용사에게 밀리지 않았을 거라고.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기지 않았을 거라고.”
“혹시, 그 여자가 인어인가?”
“이것만 말해줄게. 최초의 용사에게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기지 않았어. 그녀는 너랑 같이 마왕의 손에 죽었거든.”
“......”
하늘도 우중충한데 분위기마저 너무 무겁다.
이럴 때는 노래가 최고지!
“야! 아쿠아. 경쾌한 노래 좀 불러봐.”
나는 황실 정원에서 쑥떡과 크리스의 대결을 구경하고 있는 민물인어 아쿠아를 불렀다.
그런데 엉뚱한 방향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이 자식! 누구에게 노래를 시키는 거냐!”
“...뭐?”
어째선지 현자가 발끈한다. 꿈에 나올까 두려운 삐쩍 마른 얼굴로 두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노려본다.
...이 녀석이 갑자기 왜 이래?
“용사님은 내 남자니까~♬ 내 남자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아쿠아의 노래가 시작됐다.
이런 그녀의 뒤편에서는 마냥 즐거운 인어왕이 리듬에 맞춰 온몸을 흔들며 춤추고 있었다.
“용사, 아쿠아, 용사, 아쿠아, 용사, 아쿠아…!”
같은 단어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눈이 붉게 충혈된 현자의 온몸에서 푸른색 마력이 봉화처럼 들끓기 시작했다.
내 대응은 신속했다.
팡-!
완전히 죽일 기세로 현자의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를 힘껏 걷어찼다.
현자의 몸에 둘린 투명한 보호막이 줄줄이 부서지고, 그의 목이 꺾이는 감각이….
“얕았어.”
나는 ‘오또케! 오또케’ 연발하며 발만 동동 구르는 정령들처럼 상대가 불길한 무언가를 하도록 멀뚱멀뚱 구경하는 취향이 없다.
그리고 적당히 하지도 않는다.
할 거면 후환을 남기지 않도록 확실하게.
하지만 내 발끝에서 전해져오는 감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현자가 죽지 않았노라고.
내가 알던 현자라면 조금 전의 기습으로 머리와 몸통이 분리됐어야 한다. 저렇게 투포환처럼 날아가지 않는다.
“마약 용사. 황궁 수리비가 상당하겠는데?”
“나도 알아.”
나는 걷어찬 현자가 날아간 방향으로 줄줄이 뚫린 벽의 구멍들을 터널처럼 쭉 따라 들어갔다.
마법사는 몸이 약하다는 편견은 없지만, 내가 진심으로 내지른 공격을 맞고도 버틴 건 간과할 수 없었다.
그 능력치로는 불가능한데…?
“아빠의 힘을 빼앗으며 완성된 육성시스템. 그것의 혜택을 받은 3세대와 4세대는 무능력한 밑바닥부터 차곡차곡 힘을 쌓아 올렸어. 하지만 1세대와 2세대는 달라. 원래부터 능력자였던 천재들만 뽑았거든. 심지어 그때의 기억도 되돌아왔다면, 네가 알던 현자로 보면 안 돼.”
내 의문을 눈치챈 쏘시아의 해설이었다.
“즉, 능력치 외의 힘을 보유했다?”
“정확해.”
신성몰랑제국 북대륙에 자리한 제2 몰랑폴리스의 단단한 황궁 외벽까지 부수고 밖으로 튕겨 나간 현자.
내 예상대로 그는 죽지 않고 멀쩡했다.
“내 사랑을 빼앗은 용사 놈! 용서할 수 없다…!”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지만!
나를 선배로 착각하는 게 틀림없다.
“이 새끼가 생사람 잡네!”
“아쿠아를 건드린 시점에 생사람은 아니지.”
나는 쏘시아의 핀잔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런 영양가 없는 대화로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현자에게 시간을 줘버렸다.
아차, 싶었다.
마법사에게 시간을 주는 건 위험하니까.
하물며 상대는 판타지아 세계관 최강의 마법사였다.
“마법보다 더 심연 같은 그대여. 아름다운 그대를 사랑해버린 이 죄인을 영원히 곁에 두고 용서하지 마시오. 그 죄인의 이름으로 소망하노니, 이 세계에 강림하라! 마이 아쿠아(My Aqua)…!”
쿠구구구….
그것은 전투용 골렘이었다.
지구를 침략한 안드로이드들이랑 닮았고, 내가 아는 어떤 멍청한 민물인어랑도 닮았다.
그렇다면 나는?
“와라. 캡틴 판타지! 너의 귀여움으로 압살해버려!”
어째선지 쏘시아가 공포에 찌든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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