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12회차] 용사 or 중2병
“응애? 응애!”
반면, 쏘시아를 본 캡틴 판타지는 반갑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고사리처럼 앙증맞은 손으로 순식간에 그녀를 낚아채고는 젖꼭지 장난감처럼 그녀의 머리를 쪽쪽 빨았다.
...무척 좋아하는 눈치다.
“과연…. 두 번째란 건가.”
캡틴 판타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나’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좋아하는 존재는 자연스럽게 ‘두 번째 저주’가 걸린 쏘시아가 되는 것이다.
참으로 아기다운 애정표현!
그때,
퍼어엉-!
캡틴 판타지의 머리를 때리는 조그마한 인어가 있었다.
정말로 살아있는 물고기는 아니고, 마법공학으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 인어였다.
몰랑몰랑한 아기 피부에 상처를 주진 못했지만, 망룡왕 뇌비우스랑 몸싸움을 벌일 정도로 거대한 삼등신 머리가 미미하게 기울었다.
그만큼 물리적인 충격이 강했다는 뜻.
나는 무시했던 현자의 안드로이드 능력치를 확인했다.
▷종족: 프리미엄 골렘
▷레벨: 999+
▷직업: 무녀(미녀→근력↑)
▷스킬: 불사G 내성G 맷집G 매력ZZZ 민첩ZZZ…
▷상태: 양호
...완전히 깡패였다.
제작자인 현자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스킬 등급. 어째서 저런 비대칭의 주종관계가 가능한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쪽쪽, 응애?”
“......”
쏘시아는 아기랑 놀아주기 바빴다.
캡틴 판타지는 조그마한 안드로이드 인형의 공격 따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무시하고 넘겼다.
그저, 귀찮은 파리 상대하듯 팔을 한 번 휘저을 뿐.
퍼억-!
하지만 체급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능력치 외의 능력을 따진다면, 덩치야말로 최고의 지표일 것이다. 망룡왕 뇌비우스가 그러했듯 캡틴 판타지도 거대한 몸이 무기.
“마이 아쿠아~?!”
현자가 애인을 잃은 듯한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그의 간절한 응원이 통한 걸까?
캡틴 판타지의 통통한 팔뚝에 맞고 대지에 처박힌 안드로이드가 오뚜기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응애!”
다음은 없었다.
캡틴 판타지가 탱글탱글한 엉덩이로 깔아뭉개버린 까닭!
신의 영역에 접어든 안드로이드의 맷집 덕분에 파괴되진 않았을지 몰라도, 몰랑몰랑해서 착착 달라붙는 캡틴 판타지의 엉덩이를 빠져나오진 못할 것이다.
내 짐작처럼 안드로이드는 침묵했다.
미모에 비례해서 근력이 상승하는 직업 ‘무녀’가 있긴 하지만, 캡틴 판타지의 몸무게 또한 기존의 범주를 초월하긴 마찬가지.
상황이 깔끔히 정리됐다.
“마약 용사. 저 아쿠아 골렘은 분할되지 않은 것 같다.”
말의 고삐를 붙잡듯 내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상황을 지켜보던 최초의 정령이 훈수를 뒀다.
“이름이 아쿠아 골렘이었군.”
“마이 아쿠아다! 저 사악한 아기의 엉덩이를 당장 치워!”
얼굴이 파랗게 질린 현자가 충혈된 두 눈을 부릅뜨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뭐-”
퍽.
안드로이드의 제작자도 침묵했다.
내 공격은 어찌어찌 요령 좋게 막아낸 모양이지만, 캡틴 판타지의 한 방은 묵직했다.
깨달음을 얻어서 위대한 성현으로 각성했던 현자는 한 줌의 핏덩이가 되어 무대에서 퇴장했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
녀석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그건 언젠가 있을지 모를 다음 기회로 넘겨야 할 듯했다.
“그래도 약간의 수확은 있었네.”
이 교육장은 소멸한 존재마저 재활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존재도 가능할 터.
가령, 내 분신을 잔뜩 만드는 것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걸 클론이라고 하던가?
상상만으로도 섬뜩했다.
▶설명: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강한수 생도님이 살아계시는 한, 클론은 불가능하답니다. 이걸 전문용어로 존재감의 삼투압 현상이라고 부르는데요. 흠…. 무대에서 존재감 강렬한 주연 탓에 조연들이 싹 죽는 느낌?
교생 아가씨, 설명 고마워.
“쪽쪽? 응애….”
캡틴 판타지는 무척 아쉽다는 얼굴을 한 채 소환이 해제됐다.
그리고 상당히 흐트러진 쏘시아가 기진맥진해진 몸으로 내 품에 흐느적흐느적 안겼다.
“너…. 좀 여자 같다?”
“굉장히 무례한 소리이긴 한데, 지금은 힘드니 제발 좀 가만히 놔둬.”
나는 위치 확인을 위해 주위를 한 번 둘러본 후, 연약한 척하는 쏘시아의 엉덩이를 팔로 받치며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런 내 얼굴을 쏘시아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보았다.
“이년은 잘해줘도 노려보네.”
“너…. 좀 남자 같다?”
“그 건방진 발언은 이따가 반성시켜주도록 하지. 지금부터 바빠질 예정이거든.”
“네가 바쁘- 뭐…. 황제 일로 바쁘긴 하더라.”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늘 딴죽 걸던 쏘시아가 이번에는 쉽게 수긍하며 넘어갔다.
정말로 어디 아픈 모양이다.
펄럭-!
나는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펼쳤다.
온종일 서류만 들여다보는 황제 업무만 보다가 힘을 쓴 탓일까? 갑자기 용사가 되고 싶어졌다.
변덕이라고 해도 좋았다.
“온 김에 왕까지.”
서리여왕 엘쉬를 토벌해볼까!
▶5대 재앙을 심심풀이 땅콩 취급하지 말아 주세요….
*
*
*
북대륙의 5대 재앙인 서리여왕 엘쉬.
그녀는 판타지아 북대륙의 설산M을 중심으로 부채꼴 모양의 북부를 지배하는 절대자다.
이런 북부를 북대륙 원주민들은 없는 취급한다.
그래서 내가 북부만 제외하고 점령했음에도 ‘이 땅은 신성몰랑제국으로 하나가 됐다!’라고 모두가 생각하는 것이다.
어째서냐?
우선, 북부는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온 지역에 1년 내내 눈이 내리는 탓에 농사는 불가능하고, 위험천만한 몬스터 외의 동물은 살지 않는다.
물론, 이런 동네도 나는 1살 때 점령했었지만.
“여기에 내 아지트가 있어.”
“알아.”
“여기서 너랑 처음 만났었지.”
“그것도 알아.”
아까부터 감성적으로 변한 쏘시아의 말에 건성으로 답해주며, 나는 눈보라를 뚫고 북쪽으로 쭉 올라갔다.
이 얼어붙은 땅은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지만, 마법은 그 불가능마저 가능하게 해줬다.
그렇게 탄생한 얼음왕국.
서리여왕 엘쉬를 수호신으로 숭배하는 광신도 집단이 다스리는 나라다.
“침입자다!”
“악마다!”
항상 추운 북부에서만 자라는 특정 식물성 몬스터의 열매와 잎을 주식으로 삼는 얼음왕국 백성들은 성정이 굉장히 난폭하다.
판타지 야만인 중에서도 극단적인 야만인!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용사님을 악마라고 부르는 것부터가 이미 글렀다.
“그 날개는 오해받기 딱 좋아.”
“비겁한 쏘시아야.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돼. 이건 무수히 많은 악(惡)과 하렘을 심판한 정의로운 날개라고.”
이 날개는 적들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진화한 형태다.
성검도 왜 성검인가? 성스러운 양념치킨이면 안 되나? 최상의 맛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해줄 수 있다.
그런데도 흉흉한 칼인 이유는?
적들을 썰어버리기 좋은 형태이기 때문이다.
“뭐…. 그건 됐어.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내 집에 들르는 게 어때?”
“네 집에?”
쏘시아의 제안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용사와 황제는 역할과 임무가 굉장히 막중한 직업이다.
이들이 쉬면 쉴수록 그만큼 무수히 많은 사람의 삶이 고달파지기 때문이다.
용사 지크는 이런 면에서 굉장히 영악한 놈이었다.
실컷 놀면서 주위 사람들이 힘들어질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가 극적인 연출과 함께 구해주는 수법을 자주 이용했으니까.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은퇴하기 전까지는.
“...뜻밖의 발견이네. 곰곰이 생각해보니, 네가 낮에 시시덕거리며 노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밤에도 뭐…. 가정의 평화와 안녕이란 측면에서 보면, 나름대로 일한다고 봐야 할지도.”
쏘시아가 기적을 발견한 어린 양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게 신기한가?”
“어.”
“용사가 하루 쉬면, 인류의 평화도 하루 늦어져. 이건 교통체증이랑 비슷해. 누군가 신호 위반으로 교통사고를 내서 길을 막았어. 수많은 직장인의 출근이 지연되고, 우편배달 등도 늦어져서 고객센터로 문의가 폭주하게 되지. 끔찍한 일이야.”
고작 하루 쉬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병렬’로 계산했을 때의 이야기. 모두가 하루씩 손해 보고 감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걸 ‘직렬’로 계산하면 어떨까?
용사가 하루 쉬면, 수천 년을 낭비하게 된다.
“그걸 중2병이라고 해.”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처럼 이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굴러가는 게 맞다만?”
여기는 나를 위한 교육장이다.
내가 안 구하면 영원히 고통받을 세상이다. 직업도 ‘신에게 선택받은 용사’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걸 어쩌라고?
“어…. 그 부담을 줄이라고 동료가 있는 거야.”
“동료가 방해된다면?”
“나처럼 안 되는 동료를 구해야지.”
“...네가?”
“이 거대한 제국이 단시간에 발전할 수 있었던 게 누구 덕분이라고 생각해? 널리 이롭게 보급된 수세식 변기는? 내가 운영하는 암흑상회의 자금력과 추진력이 아니면 불가능했어.”
“흠….”
부정할 수 없었다.
암흑상회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던 건 사실이니까.
“용사님. 저도 잊으시면 곤란합니다. 소녀의 몸과 마음은 엘브하임 폐하의 것이지만, 그분을 다시 뵙는 날까지는 당신의 동료입니다. 또한, 용사님의 말씀에 일부 동의합니다. 만약, 엘브하임 폐하께서 취향에 할애하는 시간을 조금만 줄이셨다면, 요정들이 인간을 밀어내고 세상을 지배했을 테니까요!”
그림자A가 불쑥 끼어들더니 유감스러운 남편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저 말이 하고 싶어서 튀어나온 게 틀림없다.
“아무튼, 내 집에 한 번 가보는 게 어때? 네가 좋아할 만한 물건도 있어. 지구로 돌아가고 싶다며?”
“...음? 아!”
떠올랐다!
쏘시아를 다시 보고 싶었던 이유.
그녀의 비겁한 가슴과 가슴 탓이 절대 아니다.
신성제국의 한 던전에서 발견한 선배 용사의 아지트. 그에게 쏘시아가 제작하도록 부추긴 타임머신 설계도가 원인이었다.
쏘시아는 그 설계도의 원주인.
실험해본 결과, 그 타임머신은 반쪽짜리 실패작이었지만, 그녀라면 완벽한 차원이동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게 됐으면 나부터 했지.”
“그건 그러네.”
“하지만 너도 꼭 몸이 갈 필요는 없잖아? 마음만이라도 지구에 닿으면 되는 거 아니야?”
“...그럴지도.”
부모님의 안위를 확인하는 게 최우선. 그다음은 6년 동안 밀린 학업과 소설, 게임 등을 독파하는 것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아바타라도 딱히 상관없다.
신성몰랑제국 황궁에서는 황제가 실종돼서 난리가 나겠지만, 이럴 때를 대비해서 인수인계를 부지런히 해둔 아들 크리스가 잘 해내리라고 믿는다.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판타지아 세상의 평화는?”
“나머지 용사들이 잘 해내겠지.”
나를 제외한 9명이 힘을 합치면 어떻게든 해내지 않을까?
▶조언: F학반은 소위 문제아만 모아놓은 교육장이에요. 그들이 활약할 거라고 너무 기대하지 않는 편이 강한수 생도님의 정신건강에 좋아요.
교생 아가씨의 지적이 비수처럼 내 가슴에 박히는군!
하지만 내 결정은 바뀌지 않는다.
“너, 뭐든지 즉흥적이구나?”
“이건 결단력과 추진력이 좋다고 하는 거야.”
“말이나 못 하면.”
나는 문제의 날개를 숨기고 쏘시아가 가리키는 집 방향으로 빠르게 뛰어서 이동했다.
서리여왕 엘쉬?
당장 내 눈앞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 5대 재앙을 만나려면 여기서 좀 더 북쪽으로-
“호호호! 나의 아이들아! 이 도시에 사는 꽃미남들을 납치해오렴! 방해하는 여자와 추남은 얼마든지 죽여도 좋다!”
“엘쉬다!”
“오빠! 얼른 도망쳐!”
“아이고! 내 아들은 안 된다!”
뛰던 발걸음을 멈춘 나는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우주의 총애가 시들시들해졌나…?”
정의로운 용사님은 오늘도 일터로 나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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