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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급 관심용사-227화 (227/430)

 227화

[12회차] 설녀

판타지 세계에는 한 가지 성별로만 이루어진 종족이 매우 많다.

오크, 고블린, 트롤, 오우거, 난쟁이, 인어, 거인, 라미아, 아나크네...

이들 중 몬스터로 분류되는 대다수 종족은 맨땅에서 솟구치며 탄생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2세에 대한 바람과 성욕이 없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할까?

종족 ‘휴먼’에 답이 있다.

인간은 이종교배가 가능한 유일한 종족이다.

중성인 용(龍)부터 요정에 이르기까지, 생식기 사이즈만 맞으면 어떤 종족하고도 결합할 수 있다.

남자들을 납치하는 저 ‘하피’들도 마찬가지다.

하피(Harpy).

그 어원은 ‘슬쩍 빼앗는 자’ 혹은 ‘억지로 빼앗는 자’로 불린다.

머리와 몸통만 인간 여성인 조류의 모습.

그리스 신화에서는 겁이 많고 심술궂으며, 남의 음식을 훔쳐먹거나 썩은 고기를 먹는 괴조(怪鳥)로 묘사된다.

그러나 판타지아 세계의 하피는 살짝 다르다.

“여왕님의 명대로.”

“미남을 납치하자!”

“인간 암컷들을 죽여!”

매우 호전적인 몬스터다.

인어처럼 성욕을 밝히진 않지만, 덤비면 자기가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싸우려는 외골수적인 새대가리들이다.

그런데 그만큼 싸움도 잘한다.

하피의 날개는 거친 폭풍과 눈보라도 뚫을 수 있으며, 그녀들의 발톱은 강철보다 단단하다. 심지어 깃털에는 마법 면역이 있어서 웬만한 마법은 일절 통하지 않는다.

약점은 깃털이 돋아나지 않은 몸통과 머리.

하지만 하늘을 빠른 속도로 자유롭게 날 수 있는 하피의 몸에 화살을 박거나 날붙이로 베는 건 대단히 어렵다.

“으아아악~?!”

“나, 나를 놔라! 놔!”

“하피가 내 남편을…!”

“헉! 엘쉬까지?!”

전형적인 여전사들인 하피는 보석 같은 것에 흥미가 없다.

그녀들의 관심사는 오직 종족 내의 서열. 그리고 이 서열은 사로잡은 ‘인간 수컷’의 양과 질로 구분된다.

얼마나 훌륭한 남자를 많이 보유했느냐, 이걸로 하피는 자신의 강함과 우위를 과시한다.

빼앗거나 빼앗기고 죽을 때까지.

수명을 꽉 채우고 자연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얼음왕국의 도시를 헤집고 다니던 하피들이 나를 발견했다. 그녀들은 사냥꾼처럼 눈을 번뜩이더니-!

...나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어째서…!”

새대가리들에게 얕보인 내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가 갔다.

1회차의 나도 이러진 않았다. 전부는 아니지만, 몇 마리쯤은 내게 관심을 보였으니까.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

내게 ‘인기 없는 남자’란 낙인이 찍혔다.

하지만 정의로운 용사인 나는 이 부조리한 현실을 단호하게 부정하겠다!

푹! 푹! 푹!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활짝 펼친 후, 하늘이 전부 자기들 것처럼 활개 치는 하피들을 줄줄이 처치했다.

그녀들의 발톱은 강철보다 단단하지만, 내 날개에 돋아난 뿔들은 성검보다 날카롭고 튼튼하다.

약점인 몸통과 머리?

내게는 그런 구분이 무의미했다.

“강한 놈이다!”

“죽이자!”

“내가 죽일 거야!”

하지만 하피들은 부나방처럼 달려들었다.

덤비면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끊임없이 달려들고, 예외 없이 정의의 심판을 받고 추락했다.

100마리든 1000마리든.

나를 남자로 보지 않은 새대가리들을 전부 응징하리라!

“이놈!”

마침내 하피의 여왕이 움직였다.

서리여왕 엘쉬.

북대륙 5대 재앙이며, 가장 많은 남자를 소유한 하피이기도 하다. 그녀는 실컷 가지고 놀다가 질린 남자는 부하들에게 넘기고, 지금처럼 인간의 도시와 마을을 습격해서 새 수집품을 모은다.

덩치도 일반 하피보다 3배쯤 컸다.

엘쉬는 원래 평범한 하피였는데, 북대륙 전설에 나오는 아름다운 설녀(雪女)를 잡아먹고 얼음을 다루는 힘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기원이야 어쨌든, 하피는 마법 내성이 있는 대신 마법을 못 다루는데, 그녀만은 얼음 속성의 마법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다.

마법만이 아니다.

쩌저적-!

그녀의 근처에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꽁꽁 얼어붙는다.

이 탓에 아무리 뾰쪽하고 빠른 화살촉도 엘쉬의 몸에 닿기 전에 얼음 덩어리가 돼버린다.

날붙이라고 다를 게 없다.

베기는커녕 유리처럼 바스러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아직 ‘5대 재앙’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많았다.

“엘쉬, 너마저….”

그렇다면 얕보는 채로 죽어버려라!

나는 방심하는 적을 사랑한다.

또한, 지금은 오래 상대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쏘시아의 집에 있는 타임머신을 타고 집으로 가는 일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

서리여왕 엘쉬는 그저, 지나가는 길에 걸리적거려서 치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능력치도 별거 없다.

▷종족: 스노우 하피

▷레벨: 999+

▷직업: 설왕(설원→불패↑)

▷스킬: 빙결ZZZ 폭설ZZ 용맹Z 비행Z 관통Z…

▷상태: 심장, 설녀, 이빨, 격분

얼리는 것에 특화된 능력치.

그 밖의 능력은 정예 하피랑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 이 얼린다는 행위는, 고체처럼 분자의 움직임이 거의 없도록 둔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비슷한 예로, 내 오른쪽 사타구니에 달라붙어 있는 ‘불의 정령왕’은 엄연히 따지면 ‘불’을 속성으로 하는 게 아니다.

분자의 움직임을 빠르게 하는 것.

이 현상을 본 무식한 판타지 원주민들이 ‘발화(發火)’라는 한정된 능력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러니 일해라.

뿅! 뿅! 뿅! 뿅….

내 주문을 받은 불의 정령왕이 졸개들을 불렀다.

그렇게 소환된 정령들은 서리여왕 엘쉬의 영향을 받아서 움직임이 둔해진 분자들을 빠르게 활성화했다.

쉽게 말해, 얼어붙은 것들을 녹였다.

“불의 정령왕이 어째서 그런 곳에…!”

자기 힘이 급격히 약해지는 걸 깨달은 서리여왕 엘쉬가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왜? 바지 속에 정령을 키우는 용사를 처음 보니?”

“용사였나…!”

“일일이 놀라지 마라, 삼류악당처럼.”

더 놀랄 기회도 없겠지만.

촤악!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로 서리여왕 엘쉬의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를 찢어발겼다.

여성의 잘록한 허리 두께쯤 하는 그녀의 목이 절단되고, 몸통에서 분리된 아름다운 머리가 훨훨 날아갔다.

서리여왕 엘쉬가 부활하는 2차전은 없을 것이다.

이 일대에 쌓인 모든 눈을 녹여버렸으니까!

설왕인 그녀는 ‘설원(雪原)’에서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다는 사기적인 직업특성을 보유하고 있지만, 이처럼 설원을 제거해버리면 별거 아닌 적이다.

▶당혹: 원래는 이렇게 쉬운 5대 재앙이 아니었을 텐데요….

서리여왕 엘쉬가 침착하게 눈이 녹지 않은 장소로 도망치며 게릴라전술을 펼쳤다면 상당히 피곤한 싸움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방심했고, 나 또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

“이제, 얼음 폭탄인 심장을 뽑아보실까.”

이 심장은 남대륙에서 대단히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

물론, 나는 이런 게 없어도 남대륙의 5대 재앙인 불꽃왕 페닉스를 쓰러트릴 수 있지만, 자칭 라이벌인 용사 레몬에게는 필요할 것이다.

내가 머리 없는 엘쉬의 시체로 다가갈 때였다.

휘이이잉~!

갑작스럽게 눈보라가 몰아쳤다.

사방에 흩어져 있는 하피의 시체들을 땔감 삼아서 캠프 파이어를 즐기던 불의 정령들이 줄행랑을 칠 정도로 강렬한 냉기.

그 원흉은 엘쉬의 ‘얼음 심장’이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성검 뉴클리온을 소환해서 힘껏 던졌다. 눈보라가 몰아친다는 건, 이 일대가 다시 설원으로 바뀐다는 뜻.

엘쉬가 부활하기 전에 심장을 파괴해야 했다.

내 손에서 미끄러진 성검 뉴클리온은 쭉 날아갔다. 하지만 거센 눈보라의 방해로 살짝 빗나가고 말았다.

...행운 보정이 퇴근했나?

오늘따라 운이 따라주질 않았다.

“Snooooo-!”

그리고 마침내 서리여왕 엘쉬가 부활했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더는 하피라고 부르기 힘들었다. 더는 인간 여성의 머리가 아니었던 탓이다.

덩치도 눈보라를 삼키며 불어나더니 용(龍)에 버금가는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했다.

마치, 시조새처럼 튀어나온 주둥이에는 이빨이 가득했고, 엘쉬의 머리 위에는 수탉처럼 왕관 같은 깃이 솟아났다.

변화는 거기서 끝이 아니다.

깃털 없는 가슴의 정중앙에는 사람이 반쯤 파묻혀 있었다.

그 정체로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설녀로군.”

내가 예전부터 알고 있던 게 아니다. 서리여왕 엘쉬의 변신은 예전에도 본 적 있지만, 가슴에 박혀있는 저 여자는 아니다.

순전히 능력치로 알아낸 것이다.

▷종족: 스노우 휴먼

▷레벨: 1

▷직업: 설녀(설원→매력↑)

▷스킬: 폭설G

▷상태: 심장

레벨만 충분히 받쳐주면 행성을 통째로 얼려버릴 위력의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설녀가 엘쉬의 ‘심장’인 듯했다.

초등교육과정에선 이처럼 설녀가 등장한 적이 없었다. 이걸로 지레짐작할 수 있는 거라면?

“흠. 중등교육과정부터 나온다는 필살기랑 관련된 건가…?”

그 필살기를 견식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이 도시가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았기에 참았다.

지금이 서리여왕 엘쉬의 진정한 전투형태.

덩치와 머리통만 바뀌었지만, 저 머리통이 문제다.

포식자처럼 달려들어서 물어뜯는데, 저 송곳니가 박힌 부위는 꽁꽁 얼어붙어서 세포가 싹 죽는다.

나중에 치료하더라도 회오리 모양의 흉터가 저주처럼 남고.

“Snoooo!”

“오냐. 내가 가마.”

나는 포악하게 울부짖는 서리여왕 엘쉬를 향해 눈 덮인 대지를 박차며 수직으로 도약했다.

1회차 때는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눈부터 치웠다. 그리하여 무한한 부활을 봉인한 후에 힘겹게 쓰러트렸다.

물론, 그 과정에도 동료들의 미미한 희생이 뒤따랐으나 마을 사람들만 무사하면 된 거 아닌가?

지금은 정령들이 마을 사람들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것도 필요 없다.

영혼까지 깔끔히 소멸시킬 예정이니까.

여기서는 마왕 페도나르의 비기를 쓰기로 했다.

조건은 신체접촉.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암흑물질이 단숨에 엘쉬의 머리통을 뭉개버렸다.

녀석도 가만히 당해주진 않았다. 주둥이를 쫙 벌리고 송곳니로 나를 찌르려 했지만, 내 몸을 보호하는 ‘신성’을 뚫지 못했다.

이게 필살기면 무척 실망스러운걸?

푹.

...무언가 내 배를 찌른 것 같은데?

시선을 살짝 내린 나는 기가 막혔다.

허! 이걸 설녀가?

단순히 심장 역할만 하는 줄 알았던 설녀가 입을 쫙 벌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에 구경만 하고 있었던 거라면 이렇게 놀라지 않았으리라.

그녀의 입에서 쏘아진 얼음송곳이 내 복부를 순식간에 꿰뚫었기 때문에 황당한 것이다.

쩌적-!

2차 피해로 얼어붙기까지.

내부장기가 그 기능을 빠르게 상실해갔다.

“...웃지 마라. 기분 나쁘니.”

“히히- 힛?!”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추락하는 엘쉬의 가슴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설녀의 가슴골 사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푹!

단숨에 손을 찔러넣어 심장을 뽑아냈다.

빠르게 눈에서 빛이 소실되어가는 설녀가 나를 바라본다. 내가 아직 살아있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시선.

나는 그녀의 푸른색 심장을 사탕처럼 날름 핥으며 답해줬다.

“이 용사님은 전설적이거든~”

네가 설원에서 불패(不敗)라면, 나는 어디서든 필승(必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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