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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급 관심용사-228화 (228/430)

 228화

[12회차] 자유와 속박

솔직히 말하자면, 깜짝 놀랐다. 능력치도 변변찮은 5대 재앙이 내 몸에 상처를 냈다는 사실이.

심지어 1회차 때보다 극심한 흉터가 복부에 새겨졌다.

물론,

스르르….

위대한 마스터 몰랑의 가르침 앞에선 가소로운 잔재주였다.

절대로 안 사라질 것 같은 푸른색 회오리 모양의 흉터가 말끔히 사라졌다.

하지만 남들은 어떨까?

일전에 본 최초의 용사도 흉터를 지우지 못했다.

그만큼 5대 재앙이 사용하는 이 ‘필살기’가 강력하다는 의미.

▶난감: 그 흉터는 실패의 낙인이라고 불린답니다. 신성의 축복을 타고난 천사가 필살기를 막아줘야 하는데, 아닐 때는 동료를 잃거나 사망하거든요. 회귀하면 당연히 사라지긴 하지만요.

교생 아가씨. 천사는 안 죽어?

조금 전 공격은 내 Z등급 신성을 뚫고 들어왔다. 이런 걸 천사가 맨몸으로 맞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설명: 강한수 생도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천사는 생명력이 굉장히 질기답니다. 빛의 속성을 타고난 그들은 마음이 꺾이기 전에는 절대 소멸하지 않아요.

그래? 이상하네. 잘만 죽던데!

▶당혹: 그러게요. 페스티벌 당시에는 강한수 생도님의 손에 천사들이 참 쉽게 죽었었죠. 음…. 당시에 떳떳하지 못했던 천사들이 정의로운 강한수 생도님의 심판에 순순히 따랐다고 저는 생각해요!

세상에서 가장 예쁜 교생 아가씨가 나를 감동하게 하네!

빛의 속성.

마음이 꺾이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

대단히 유용한 종족특성이었다.

이름과 기록이 ‘전설’처럼 어딘가 남아있는 한, 절대로 소멸하지 않는 내가 부러워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눈보라가 그친 도시에는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에 갈기갈기 찢긴 하피의 시체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뿐, 얼마 안 지나서 시체들은 연기가 되어 자연으로 스며들었다.

“너희의 죄는 상남자를 못 알아본 것이다.”

1회차 때보다 인기가 줄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마약 용사. 크게 착각하는 게 있다.”

내 머리 위에 앉아있는 최초의 정령이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뭐가?”

“하피들은 너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어?”

이건 뭔 참신한 개소리야?

“인어는 상대가 멋진 수컷이면 악마든 요정이든 구분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사랑하지만, 하피는 달라. 오직 인간만….”

“그건 나도 알아. 내가 몰랐던 건, 엄연한 인간인 내가 인간의 카테고리에 없다고?”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영원히 인간이란 법은 없지. 너는 점점 정령이 돼가고 있다. 이건 아주 당연한 거야. 여기서 퀴즈. 인간이 전설이 되면?”

“...신(神)?”

“비슷해. 신격보다 한 단계 낮은 영령(英靈)이 되니까.”

그게 뭔지 감도 안 잡히지만, 내가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변하는 중이란 것만은 잘 알겠다.

“뭐, 돼보면 알겠지.”

지금의 내 관심사는 손에 쥔 심장이었다.

두근두근!

그것은 여전히 뛰고 있었다.

내가 알던 ‘서리여왕 엘쉬의 심장’이랑 달랐다. 그건 영롱한 사파이어처럼 생겼으니까.

그리고,

“이건…. 설마?”

정체를 깨달은 내 정신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

*

*

그것은 순백의 용이었다.

종족으로 구분한다면 ‘화이트 드래곤’ 혹은 ‘아이스 드래곤’일 것이다. 색이 비슷한 이 둘을 구분하는 확실한 방법은-

“Iceeeeee.”

음. 아이스 드래곤인 모양이다.

“그녀를 당장 놔줘라! 서리왕 에쉬노프!”

혼돈의 유물만 만지면 항상 출연하는 주인공 ‘최초의 용사’가 용 앞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그런데 그녀가 누구지?

“Iceee?”

“그녀가 잘못되면 절대로 네놈을 용서하지 않겠다!”

최초의 용사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편에는 동료들과 하렘 응원단이 바글바글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리왕 에쉬노프’라고 불린 저 용을 토벌하고 어떤 여인을 구하려는 것 같았다.

그 여인은 누굴까?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용의 발밑에 사람이 깔려 있었다. 아니, 사람이 아니다. 순백의 깃털로 양팔이 뒤덮여 있는 인간이 인간일 리 없으니까.

그건 분명 ‘하피’였다.

“용사님. 조심하세요.”

“서리왕을 자극하는 건 위험해요.”

“이러다가 그녀가 죽을지도….”

선배의 뒤편에서 아름다운 여인들이 훈수를 뒀다.

그녀들의 말대로, 저 용을 자극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안 그러면 구하려는 하피가 납작하게 짓뭉개질 테니까.

“큭!”

바보가 아닌 선배도 그 사실을 아는지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용은 아니었다.

아가리를 쫙 벌리고는 숨결을 토해냈다.

“Iceeee-!”

눈 덮인 숲이 한순간에 얼음으로 변했다.

선배와 동료들은 나름 멀쩡했지만, 전투력이 조촐한 응원단은 전멸 직전이었다.

딱 봐도, 두 번째 용의 숨결은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선배는 여전히 공격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리고는 응원단을 지키기 위해 방어태세를….

아이고! 이 답답한 양반아! 그냥 공격해!

간섭할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싸워주고 싶을 정도로 한심한 대응이었다.

그때,

“용사님. 저는 신경 쓰지 말고 공격하세요.”

용의 발밑에 깔린 하피가 애원하듯 말했다.

그녀는 내가 알던 하피들이랑 근본적으로 달랐다.

일반적인 하피는 송골매처럼 날카로운 눈매와 표정을 항상 짓고 있는데, 이 하피는 눈매가 병아리처럼 둥그스름하고 묘하게 귀여웠다.

“그런 소리 하지 마.”

“저는 틀렸어요.”

“내가 반드시 구해줄게! 조금만 기다려!”

“...네, 용사님.”

말투와 성격도 내가 아는 하피랑 달랐다. 타고난 여전사들인 하피의 대사 중 절반은 죽이라는 내용이니까.

그녀들은 동족끼리도 ‘~하지 않으면 죽인다!’라고 말하는 게 생활화되어 있다.

그런 하피가 연약한 공주님 같은 대사를 읊었다.

이게 어찌 된 걸까?

“Iceeee.”

나처럼 대단히 기분이 불편해지신 용이 움직였다. 아가리를 쫙 벌린 놈은 숨결을 내뱉는 대신 잽싸게 인질인 하피를 낚아챘다.

아까부터 계속 응원단의 안위를 살피며 숨결을 경계하고 있던 선배는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하피의 전신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성격만큼 외형도 돌연변이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처럼 하얀 건 그렇다 치더라도, 두 다리가 인간이랑 똑같았다. 그것도 ‘다리 미인’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완벽한 라인을 자랑했다.

하지만 하피로서는 최악이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두 발은 하피의 최대 무기니까. 새처럼 나뭇가지에 매달리거나 무언가를 붙잡는 용도로도 쓰인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발가락과 발톱 모두 짧은 ‘인간의 발’을 가진 저 하피는 하자가 많았다.

인간의 관점에선 돌연변이가 훨씬 마음에 들지만.

“Iceee♪”

“아, 안 돼~!”

그 하피는 용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흐물흐물 무릎 꿇은 선배가 절규하고, 용은 날개와 꼬리를 들썩이며 웃었다. 뒤편의 동료들은 안타깝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응원단은….

“아….”

“착한 하피였는데….”

“너무해….”

끔찍한 광경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다는 듯이 다들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선배랑 달리 전방위에서 관람할 수 있는 나는 그녀들의 표정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담담하거나 웃거나.

나불거리는 대사처럼 슬퍼하는 자는 없었다.

“서리왕 에쉬노프! 반드시 죽이겠다…!”

“Iceeee~♬”

격분에 찬 용사의 위협적인 선언에도 용은 웃었다. 참으로 마룡다운 훌륭한 자세였다. 녹화해뒀다가 쑥떡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여유로운 표정은 오래 가지 못했다.

“I, Iceee…?!”

돌연변이 하피를 삼킨 용이 복통을 호소하듯 배를 부여잡고는 바닥을 좌우로 굴렀다.

나 같으면 이때를 노려서 공격했겠지만, 선배는 용의 갑작스러운 난동에 응원단이 휩쓸리지 않도록 보호하기 급급했다.

흠. 저래서 유전자조작 식재료를 조심하라는 걸까?

용의 모습이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두두둑, 두둑!

그 과정을 쉽게 묘사하자면, 하얀색 용이 하얀색 새로 변했다. 새의 조상이 공룡이라고 했으니, 딱히 신기한 일은 아닐 것이다.

“Snooooo~?!”

원했던 변화가 아니었는지, 용이었던 새가 자기 몸을 한 차례 훑어보고는 비탄에 잠긴 포효를 내질렀다.

저거랑 비슷한 새대가리를 나는 알고 있다.

방금 사냥했는데 모를 리 없었다.

“너는…. 서리왕 에쉬노프가 맞나?”

선배는 멍청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답하듯, 새대가리가 차츰 인간 여성의 아름다운 얼굴로 바뀌었다.

“그건, 너부터 죽이고 생각하겠다, 용사여.”

그렇게 생각해낸 명칭을 나는 알고 있다.

서리여왕 엘쉬.

과거에 훌륭한 마룡이었던 존재는, 유전자조작 식품을 잘못 먹고 하피로 전락했다!

너무나 비극적인 이야기다.

이건, 유기농 자연식품을 애용하자는 교훈을 내게 남겼다.

‘저…. 정말 죄송하지만, 유전자조작이란 이해 불명의 교훈을 위해 보여드린 제 과거가 아닌데요….’

유전자조작 식품이 정의로운 용사님의 결론에 찬물을 끼얹었다!

*

*

*

너무나 하찮은 사연이었다.

인간의 ‘쓸모없는 다리’를 갖고 태어난 그녀는 동족들에게 왕따를 당했고, 날카로운 발톱이 없어서 혼자서는 사냥도 못 했다.

대신, 타고난 마법적 재능으로 인간 마법사에게 거둬져서 인간들의 마을 근처에서 살게 됐다. 그녀는 소매가 긴 옷으로 항상 날개를 가려서 하피란 사실을 감춘 채 생활했다.

금세 미인으로 소문이 난 그녀에게 붙은 별명은 설녀.

온몸이 하얗고 주로 다루는 마법이 얼음 계통이었던 까닭이다.

설녀는 재앙과 비극을 몰고 다니는 용사가 이 마을에 찾아오기 전까지 행복하게 잘 지냈다.

그녀에게 청혼했다가 차인 청년들은 불행했겠지만!

마법사가 그녀의 날개 깃털을 마법 촉매로 쓰기 위해 자주 뽑아가긴 했지만, 마법도 가르쳐주고 밥도 줬으니 몬스터 학대는 아니었다.

문제는 최초의 용사에게 있었다.

“선배는 정말…. 존경스럽군.”

얼굴과 몸매만 예쁘면 몬스터라도 괜찮다는 걸까?

인종을 넘어서서 종족 평등을 주장하는 선배. 심지어 말로만 떠들지 않고 몸소 평등을 실천했다.

몬스터 로맨스 판타지!

내가 따라잡기에는 너무 허들이 높았다.

그 로맨스의 전말은 아래와 같다.

선배는 마을로 놀러 나온 설녀의 미모에 반해서 뒤를 졸졸 쫓아다녔고, 여기에 질투심이 폭발한 응원단이 진실을 폭로했다.

몬스터란 사실을 들킨 설녀는 도망치듯 마법사의 집으로 날아가던 중, 일거리를 찾던 마룡의 눈에 띄어 사로잡힌다.

그리고 유전자조작 식품이 됐다.

‘중간중간 왜곡된 내용이 있긴 하지만, 대충 맞아요. 서리왕 에쉬노프에게 잡아먹힌 저는 그 사악한 마룡이랑 융합되어….’

잠깐! 사족은 됐고, 본론만 짧게.

네가 바라는 것과 보상만 빠르게 말하고 끝내줬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흔해 빠진 사연을 들어준 것만 해도 많이 기다려준 거다.

‘자유와 속박.’

이 망할 새대가리야. 줄여도 너무 줄였잖아.

‘그, 그런가요? 저의 소망은, 용사들에게 끊임없이 사냥당하는 이 운명으로부터 탈출하는 것. 그 대가는, 저에게 자유를 주신 당신에게 속박되는 겁니다.’

...이 하피는 외모만큼 취향도 돌연변이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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