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230화 (230/430)

 230화

[13회차] 어떤 용사의 날조계획

“모험가 젊은이. 정신이 좀 드시는가? 길가에 쓰러져 있는 자네를 이곳에 데려왔다네. 나는 이 마을에서 그대처럼 방황하는 모험가들을 돕는 길잡이 훼이커라고 하네!”

라누벨 대신 노인이 내게 환영 인사를 건넸다.

나이 먹은 양반이 아주 뻔뻔한 얼굴로 거짓말을 술술 내뱉는 바람에 ‘내가 길가에 쓰러져 있었나?’라고 기억을 되짚어볼 정도였다.

나는 주위를 힐끔 둘러봤다.

통나무로 된 전원주택. 안의 가구는 훔칠 게 없을 만큼 허름했고, 내가 누워있는 침대 또한 딱딱하고 차가웠다.

분명히 쏘시아의 타임머신을 이용했을 터.

하지만 그 시작은 묘하게 ‘용사’랑 비슷했다.

“모험가라….”

바로 능력치부터 확인해봤다.

▶종족: □□□□ 휴먼 □□□□

▷레벨: 999+

▶직업: □□(전원=?레벨)

▶스킬: 영재ZZZ □□Z 날조Z 소멸MAX 파멸MAX···

▶상태: □□, □□, 용린

...온통 모자이크투성이였다.

내 종족인 ‘유니버설 휴먼 듀얼코어’가 앞뒤로 잘렸다. 종족특성은 유지되는 것 같았지만, 설명도 능력치처럼 깨져서 영 보기가 좋지 않았다.

직업도 ‘용자’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이건 아예 활성화가 안 된 빈 깡통이었다.

스킬 중에선 ‘신성’이 미구현처럼 모자이크됐고, 상태는 ‘성검’과 ‘성녀’를 올바르게 읽어내질 못했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일까?

산전수전 다 겪은 MAX급 용사님이 추리해보자면, 과거로 오면서 이 시대에 없었던 능력치는 모자이크 처리된 것으로 보인다.

▷오류를 발견했습니다.

▷버그를 발견했습니다.

▷조각모음을 시작합니다.

기계적인 메시지가 떡하니 출현했다.

그러더니,

▷종족: 레전드 엔젤

▷레벨: 999+

▷직업: 모험가(모험→생존↑)

▷스킬: 영재ZZZ 신앙Z 날조Z 소멸MAX 파멸MAX…

▷상태: 마검, 무녀, 용린

시스템은 신성을 보유한 나를 천사로 해석했다.

직업은 노인이 소개했던 것처럼 ‘모험가’로 바뀌었고, 성검과 성녀는 엑스트라 같은 명칭으로 격하됐다.

하지만 효과는 그대로.

여기에 ‘평범한 척’하는 ZZZ등급 영재 효과가 적용됐다.

▷종족: 엔젤

▷레벨: 999+

▷직업: 모험가(모험→생존↑)

▷스킬: 신앙S 날조S 내성A 체력A 비행A…

▷상태: 양호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천사가 됐다.

눈속임에 지나지 않지만, 능력치를 훔쳐볼 수 있는 용사도 감쪽같이 속이는 게 가능해서 꽤 만족하는 중이다.

“자네. 여기가 어디인지 안 궁금한가?”

“전혀.”

“그, 그런가. 특이하군. 내가 구해낸 모험가들은 여기가 어디인지부터 다들 묻던데….”

말끝을 흐린 노인이 옆쪽의 빈 침대에 시선을 줬다.

전문적으로 모험가를 납치해서 침대에 눕히는 일을 해왔다는 걸 방증해주듯 침대가 무척 많았다.

누워있던 몸을 일으킨 나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라누벨 못지않게 참견하기 좋아하는 노인이 끈질기게 따라붙으려고 했지만, 내가 작정하고 따돌리니 금방 포기했다.

여기가 어딘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남쪽 하늘에 보이는 M자 모양의 설산.

북대륙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설산M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남쪽에서 보인다는 건, 여기가 북대륙 북부라는 의미.

차원이동 한 쏘시아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제대로 오긴 한 모양이네.”

나는 목적을 잊지 않았다.

정확한 시대에 불시착한 게 맞는다면, 용에게 설녀가 아직 먹히기 전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시기다.

대로를 지나가던 용병A와 용병B의 대화에서 ‘서리왕 에쉬노프’라는 용의 이름이 나온 것만 봐도 확실했다.

시스템에 기록된 과거 역사.

그 기록에 간섭해서 슬쩍 바꿈으로써, 모든 교육장의 ‘서리여왕 엘쉬’에 첨가된 설녀를 해방하는 게 목적이다.

기회는 단 한 번.

확실하게 처리해야 한다.

정보수집을 위해 마을 한복판을 쭉 걷던 나는, 사방이 탁 트인 광장에서 내가 알던 판타지아 대륙이랑 다른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함께 하피 둥지를 토벌할 귀족 치유사를 모집합니다!”

“명중률 높은 궁수와 마법사 찾습니다! 하피 사냥입니다!”

“하피 사냥 1년 이상 경력자 아무나! 당신만 오면 출발!”

“초보 모셔요. 저렴하게 하피 사냥법을 가르쳐드립니다!”

“뫼비우스 용병단에서 신입을 모집합니다. 상담 환영!”

바글바글한 사람들의 함성. 분수대나 나무상자 같은 곳에 올라가서 부지런히 홍보하고 있었다.

파티 모집, 버스 모집, 길드원 모집, 애인 모집…. 음?

저들이 힘들게 하는 저 일들은, 소위 ‘용병 노조’라고 할 수 있는 용병 길드에서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약간의 수수료만 내면 적합한 인재를 대신 물색해준다.

지구의 광통신이랑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저들처럼 아날로그로 소리 높여 외치진 않는다.

“이게 시대반영이란 건가….”

판타지아 대륙도 차츰차츰 발전해서 현재의 용병 길드란 시스템을 구축해낸 것이다.

나는 용병들의 능력치를 쭉 관찰했다.

▷종족: 아크 휴먼

▷레벨: 95

▷직업: 전사(전쟁→체력↑)

▷스킬: 투지D 체력E 맷집E 질주F 항마F…

▷상태: 양호

햇병아리들처럼 고만고만했다.

하지만 내가 주의 깊게 살펴본 건 그들의 레벨과 스킬이 아니다.

바로 종족.

함께 사냥을 떠날 동료를 모집하고자 광장에 모인 다수가 ‘아크 휴먼’이었다.

종족에 붙은 ‘아크’란 명칭은 특별하다.

판타지아 대륙의 토박이가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존재란 뜻이기 때문이다.

인간 외의 종족들도 ‘아크’가 붙으면 왕족 같은 고귀한 신분으로 취급받는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요정의 ‘아크 엘프’를 들 수 있다.

아무튼,

“이건…. 용사들의 시작 지점이란 느낌인걸.”

여기서 싸잡아서 부르는 ‘모험가’를 ‘용사’로만 바꾸면 상황까지 딱 들어맞는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기 위해 비밀 친구를 불러보기로 했다.

교생 아가씨?

▶먼산: 교생 아가씨 없다.

...그녀가 무사히 선생이 될 수 있도록 여기선 안 부르기로 했다.

하지만 교생 아가씨가 내게 섭섭한 태도를 고수할 정도로, 이번 차원이동이 대단히 민감한 사항이란 건 틀림없었다.

“섭섭하다, 마약 용사! 나를 잊다니!”

탁탁!

내 머리에 정자세로 앉아있던 최초의 정령이 두 다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발뒤꿈치로 내 이마를 막 때렸다.

“마약 정령. 언제 왔냐?”

침대 위에서 깨어날 때까지만 해도 없었다. 그런데 공기처럼 다가와서 내 머리에 자연스럽게 안착했다.

나도 익숙해져서 깜빡했다.

최초의 정령이 우쭐거리듯 대답했다.

“내 날개는 아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거기가 어디든 순식간에 날아갈 수 있지. 기억이 통합되자마자 남대륙에서 동족단결로 바쁜 엘브하임을 버리고 곧장 날아왔다.”

“잠깐! 그 유감스러운 요정왕을 버리고 왔다고?”

“어. 무슨 문제라도?”

“네가 와버리면 비실비실한 요정들은 어떻게 싸우냐?”

“어련히 잘 살겠지. 신성몰랑제국의 요정들처럼.”

“아이고….”

나는 역사를 조금만 바꿀 예정이었는데, 이 대책 없는 정령이 벌써 과거를 크게 왜곡시켜버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마약 용사. 이 정도의 변수는 시스템 보정으로 무마될 수 있는 수준이니까. 내가 여기서 아이들에게 절대 요정을 돕지 말라고 선언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이미 요정들은 정령 없이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종족이 됐다.”

“정말이지?”

“우주에서 가장 고귀한 최초의 정령님을 의심하지 마. 여기가 정말로 과거라면 이미 왜곡은 시작됐다. 예를 들어, 너를 본 여자가 심경변화로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뤄서 아들 대신 딸을 낳는다든가? 그렇게 아들이 아닌 딸이 태어나면 족보가 엉키고 미래도 바뀌지.”

“과연…. 일리 있는 말이야.”

최초의 정령은 나비효과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으로 변한다는?

하지만 여긴 허구의 과거다.

차원을 찍어낼 만큼 방대한 교육시스템에 기록된 ‘지나간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이곳을 혁신적으로 바꾼다고 해서 실제 미래가 변하진 않는다.

시스템에 기록된 역사를 토대로 짜인 미래만 변경될 뿐. 그리고 여기에는 안정화를 위한 보정이 들어간다.

최초의 정령이 든 예를 계속 써보자.

정의로운 MAX급 용사님을 본 임산부가 심경변화로 아들 대신 딸을 낳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시스템 보정이다.

현실에서는 과거가 바뀌면 미래도 바뀐다.

하지만 이 세계는 컴퓨터랑 비슷해서, 획일화된 미래를 위해 과거가 장단을 맞추는 게 가능하다.

“그래도 살인은 주의해야겠는걸.”

남자든 여자든 한쪽이라도 죽어버리면 2세를 낳을 수 없으니까. 이건 시스템 보정으로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조금 번거롭게 됐지만, 허리와 목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마약 용사. 설녀부터 찾을 거냐?”

“아니.”

“응? 네 목적은 설녀였잖아.”

“그 새대가리가 용에게 잡아먹힌 이유는 선배의 응원단 때문이야. 하지만 시스템 보정을 잊으면 안 돼. 바람에 긴 소매가 날려서 날개를 들킨다거나, 집에 가는 길에 우연히 용이랑 마주쳐서 납치되거나…. 역사가 반복될 가능성이 매우 커.”

운 나쁘면 어떤 식으로든 용에게 먹힐 수 있다.

“아! 알겠다! 서리왕 에쉬노프를 처리할 생각이구나! 하지만 그러면 최초의 용사가 할 일이 없어지는데?”

“잠자코 보고만 있어.”

용(龍)들은 한 번 정한 둥지를 잘 떠나지 않는다.

용이 선천적으로 게으른 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정말로 몰라서 할 수 있는 착각이다.

용들은 각각 영역이 있다.

하늘, 대륙, 바다.

인간이 국경선을 긋듯이 용들도 자신만의 영토를 가졌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용A가 둥지를 나오면 이웃하는 용B와 용C를 자극하게 된다. 둥지를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영역 확장의 오해를 부르기 때문이다.

물론, 압도적으로 강하면 눈치 볼 것 없다.

망룡왕 뇌비우스처럼.

“마약 용사. 둥지의 위치는 알아? 모르면 내가 아이들에게 시켜서 알아낼 수 있는데.”

“됐어. 조금 전에 용병Q에게 들었어.”

“우우! 기껏 호의를 베풀었는데 멋대로 해결하다니. 그래서 마약 용사가 하피들에게 인기가 없는 거다.”

“닥쳐.”

그 불명예스러운 일은 떠올리고 싶지 않다.

서리왕 에쉬노프.

놈의 둥지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마룡이나 악룡으로 불리는 녀석들은 이웃의 눈치를 보지 않기 때문에 활동량이 왕성하다. 그래서 사는 둥지의 위치도 쉽게 노출된다.

맨날 같은 장소를 들락날락한다면 뻔한 것이다.

필요한 정보는 광장에서 전부 모았다.

지금부터는 계획대로 실전!

나는 누구의 경추(頸椎)도 잡지 않고 조용히 마을을 빠져나왔다.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도 펼치지 않고 야만적인 원주민들처럼 마을 출입구를 통해서 밖으로….

“라누벨은 이 마을이 좋다고 생각해요!”

“귀여운 라누벨 양의 추천을 따르는 게 어때?”

“나는 찬성! 라누벨은 귀여우니까.”

방금까지 평온했던 내 혈압이 지독한 소음공해로 급상승했다.

기껏 봉인해둔 오른손의 흑골룡(黑骨龍)도 날뛰기 시작했다. 귀여운 척하는 저 존재의 경추를 물어뜯고 싶어 한다.

“하하! 그러면 결정됐네. 얼른 저 마을로 가보자! 오늘은 또 무슨 즐거운 만남이 있을지 기대되는걸!”

엉덩이를 좌우로 살랑살랑 흔드는 라누벨을 바짝 뒤따라온 미청년이 호기롭게 외쳤다.

뭐? 즐거운 만남?

“그딴 거 없어.”

“...방금, 저에게 한 말인가요?”

“그래. 너.”

MAX급 용사님은 까마득한 선배의 파티랑 조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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