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13회차] 스노우볼
“네 엉덩이의 점을 초면의 남자가 어떻게 아는지 궁금해도 참으시고….”
“잠깐만요! 참을 게 따로 있지! 흘려넘기기엔 굉장히 민감한 발언인데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아 줄래요?!”
“일단 술부터 마시죠. 맨정신으로 할 얘기가 아니라서.”
“맨정신? 대체 무슨….”
“술.”
“...네. 그러죠.”
성녀C가 마지못해 승낙했다.
주위에서 힐끔거리며 귀를 열고 듣고 있던 사내들은 나를 귀신 혹은 위대한 존재처럼 우러러보았다.
“바텐더. 블랙 드래곤 20년산 이상 있나?”
마시면 정신이 훨훨 날아갈 정도로 도수가 센 과일주다. 처음에는 탄산수처럼 맹맹한데, 금방 취기가 올라와서 뻗어버린다.
생으로 먹기엔 너무 쓴 과일로 만든 까닭에, 과일주 중 유일하게 대량생산에 성공하면서 전쟁터로 나가는 병사들에게 조금씩 나눠주는 술로도 종종 쓰인다.
혹은,
일용의 핫팩을 얻기 위해 주문한다.
하지만 워낙 유명한 술이라서 여기에 낚이는 아가씨는 정체를 감춘 귀족 딸내미나 공주 외에는 거의 없고, 혹시라도 낚인다면 상대가 마음에 들어서 ‘낚여주는 척’한다고 봐야 한다.
즉, 이 시커먼 과일주는 발렌타인 초콜릿 같은 거다.
▶감탄: 강한수 생도님은 술에도 정통하시네요. 그래서 저에게 그 술을 권하는 동료들이 많았던 거였군요. 하지만 오해하진 마세요! 저는 술에 강하답니다! 언제나 끝까지 살아남아서 뒷정리했어요.
교생 아가씨는 간도 예쁜 모양이네!
“죄송하지만, 손님. 블랙 드래곤이란 술은 없습니다. 이 일에 꽤 오랫동안 종사해왔다고 자부하지만, 그런 이름의 술은 처음 듣습니다. 혹시…?”
“오해는 말아줘. 바텐더가 추측하는 귀한 신분이…. 맞긴 하지만, 귀한 술은 아니니.”
“헙! 네.”
아무래도 이 시대에는 과일주 ‘블랙 드래곤’이 아직 개발되지 않은 모양이다.
어느 대륙의 주점에서든 흔히 구할 수 있었던 ‘국민 술’이었는데 말이지.
내가 어쩔 수 없이 다른 술을 고민하고 있는데….
“천사는 종족일 뿐, 귀한 신분인 건 아니죠. 자화자찬도 적당히 해줬으면 좋겠네요. 수상한 모험가님.”
성녀C가 ‘모험가’란 단어에 유독 힘을 주며 코웃음 쳤다.
“고귀한 황제가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모험을 떠나면 그 순간부터 수많은 모험가 중 하나가 되지. 직업은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거야. 볼 수 없다니, 안타깝네.”
“당신의 능력치라면 이틀 전에…. 어?”
톡 쏘듯 대꾸하던 성녀C가 갑자기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놀라긴 나도 마찬가지다.
“내 능력치가 보여?”
선택받은 용사도 아닌 성녀C 주제에?
“분명히 모험가였는데 이틀 사이에 무슨 짓을 한 거죠?! 어째서 그런 터무니없는 직업을…!”
“정말로 보이는 모양이네.”
나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그녀에게 대답해준 후, 바텐더 뒤편의 진열장에 있는 술 중에서 가장 독한 녀석으로 주문했다.
내 능력치가 정말로 보인다면 성녀C가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현재 내 직업은 이랬으니까.
▷종족: 레전드 엔젤
▷레벨: 999+
▷직업: 용왕(용족→레벨↑)
▷스킬: 영재ZZZ 신앙Z 날조Z 공갈MAX 조련MAX…
▷상태: 마검, 무녀, 용린
용들의 왕(王)이 되었다.
서리왕 에쉬노프의 몸과 마음을 굴복시키면서 녀석의 왕좌를 내가 빼앗- 위임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나도 생소하긴 마찬가지. 언제나 직업이 ‘용사’였던 탓에 이런 식으로 직업을 계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직업 효과는 ‘용족’을 대상으로 싸울 때, 레벨이 상승한다.
거창한 이름에 비하면 하찮게 느껴지지만, 판타지 세계관 최강의 생명체인 용족을 상대로 우위를 점한다는 건 결코 무시할 수 있다.
물론, 나는 이런 직업이 없어도 강하지만.
애초에 대전제가 잘못됐다.
이미 용왕을 쓰러트릴 만큼 강한 존재가 용족을 상대할 때 유리해지는 버프를 받아서 뭐하겠는가?
이 직업은 계륵이나 다름없다.
▶반론: 강한수 생도님. 좀 더 넓게 생각하세요. 꼭 일대일로 싸우란 법은 없잖아요~ 다수의 용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용왕은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답니다!
오! 교생 아가씨가 똑똑하네!
그렇다. 꼭 일대일로 싸우란 법은 없다.
다수의 용을 학살할 때, 용왕만큼 좋은 직업도 없으리라!
▶당혹: 그,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요….
아무튼, 현재 내 직업은 용왕이었다. 용족이 아닌 내가 용왕이란 사실이 특이하긴 했지만.
“당신, 천사인데 어떻게 용왕인 거죠?”
“어째서 내가 순순히 대답해주리라고 생각하지?”
“말을 참 기분 나쁘게 하시네요.”
“남의 밑천을 노골적으로 가르쳐달라고 하는데, 말이 곱게 나갈 리 없잖아. 내 상식이 틀린 건가?”
“그, 그건…. 실례했습니다. 너무 놀라서 제 생각이 짧았네요. 제 미숙함을 사과드립니다.”
MAX급 용사님의 논리정연한 반론에 설득된 성녀C가 고개까지 숙이며 내게 사과했다.
나는 정의로운 용사의 미소로 회답했다.
“나야말로 미안. 보기 드문 미녀 앞에서 너무 정색했네. 아직 술이 안 들어가서 그러니 이해해줘.”
“...말을 참 잘하시네요.”
“빈말이라도 고마워. 한 잔?”
“네. 주세요.”
짠!
우리는 첫 잔을 시작으로 주거니 받거니 했다.
술기운은 스킬 ‘해독’ 외에도 ‘내성’ 같은 방어계열 스킬로 효과를 경감시킬 수 있다.
하지만 안 취할 거면 뭐하러 마시는가?
정말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주점에서는 스킬을 잠시 꺼두는 게 예의다.
그리고 나는?
술에 아주 강한 편은 아니다.
일반인 이상이긴 하지만, 귀여운 척하면서 꼴깍꼴깍 물처럼 마셔대는 술고래 라누벨 같은 괴물들을 이기진 못 한다.
그렇게 취하고 나면….
“자, 잠깐만요! 당신, 지금 손을 어디에….”
“너의 뒤태를 볼 때마다 느낀 거지만, 곧게 뻗은 척추가 참 예쁘네.”
손버릇이 조금 나빠진다.
“성희롱이라고 하기에는 부위가 참 애매한…. 그리고 매번? 아까부터 쭉 느끼던 거지만, 당신은 정말 특이한 분이로군요.”
“그렇게 말하는 너야말로.”
“아니요. 저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완전히 취했다면 술기운을 날릴 생각도 못 했을 텐데, 어느새 정상으로 돌아온 성녀C가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술값만 아깝게 됐다.
“벌써 이틀 전이네. 내가 용사- 그 미청년과 귀여운 아가씨를 결혼시키려고 하니 무척 불쾌한 표정을 짓던데. 혹시, 그 미청년을 좋아해서 질투?”
“굉장히 불쾌한 오해로군요! 그 정반대입니다. 어째서 외부자인 당신이 저희에게 관심을 두는지 모르겠지만, 그와 저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란 것만은 이 자리에서 단호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정색하는 표정까지 정말 단호했다.
나도 그녀가 라누벨을 질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이야기를 끌고 나가기 위해 살짝 도발한 것이다.
외부자가 왜 관심을?
이런 의문을 느낄 틈을 안 주는 게 관건이다.
“정반대라면…. 귀여운 아가씨 쪽을 좋아하는…? 이걸 전문용어로….”
“아니에요! 완전히 잘못 짚었어요! 어떻게 그런 해석이 나올 수 있는 거죠?!”
“네가 정반대라며? 남자가 아니면 여자를 좋아한다는 뜻이지.”
“아예 안 좋아한다는 선택지도 있거든요?!”
술값 아깝게 스킬로 술기운을 싹 날리긴 했지만, 분위기에 취한다는 말이 있다.
한 번 올라간 성녀C의 혈압은 쉽게 내려가지 않았다.
그녀는 그간 쌓인 불만을 주절주절 ‘외부자’인 내게 한껏 토로하기 시작했다.
“세상은 1등만 알아줘요.”
“그런 감이 있지.”
“저와 그의 능력은 종이 한 장 차이였어요.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라이벌 관계였죠. 하지만 상품이 걸린 시합을 계기로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어요.”
최종우승자인 1등은 가장 푸짐한 상품을 받는다. 그리고 2등은 약간 떨어지는 상품을 받고.
여기까지는 분명 공평하다.
하지만 푸짐한 상품을 받은 1등은 크게 성장하고, 아쉽게 진 2등은 그보다 덜 성장한다.
그 결과, 다음 시합해서도 1등은 1등을 하고, 2등은 2등을 한다. 그리고 상품은 1등과 2등의 격차를 더욱 벌어지게 한다.
이런 식으로 계속 반복되면?
“저는 이제 라이벌은커녕 그가 노리는 수많은 여자 중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됐어요.”
“저런…. 스노우볼(Snowball)에 당했군.”
“스노우볼?”
“내 고향에서 쓰는 전문용어야.”
굴리면 굴릴수록 커지는 눈덩이에서 나온 말이다.
내 선배는 쉴 새 없이 빠른 속도로 굴려서 눈덩이를 키웠지만, 성녀C는 선배에게 밀려서 도중에 멈추고 말았다.
대수롭지 않게 ‘다음에는 이기면 되지!’라고 얕보면 안 된다.
스노우볼은 복리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한 번 1등은 영원한 1등.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성녀C와의 대화에서 나는 여러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아직 그들은 ‘용사 파티’가 아니었다. 현재로서는 모험가 최상위권들로 구성된 ‘엘리트 집단’에 가까웠다.
이들 모두가 용사 후보.
하지만 ‘진정한 용사’는 오직 한 명뿐이다. 그리고 가장 유력한 용사 후보는 모든 시험의 1등 상품을 휩쓴 선배였다.
완전히 양아치로구먼!
“생각할수록 짜증 나네요! 바텐더! 여기 술! 가장 독한 놈으로!”
스킬로 취기를 몰아낸 성녀C가 또 술을 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내게 권하지도 않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서둘러 질문했다.
“교직원에 대해 알아?”
“교직원?”
“너를 판타지아 세계에 납치해서 무언가를 가르쳐주거나 훈계하려는 사람.”
“판타지아 세계요?”
“음?”
용어의 차이로 교직원을 모를 순 있다. 하지만 ‘판타지아 세계’란 단어에 어째서 그녀가 되묻는 걸까?
하지만 당장은 그 의문을 접어뒀다. 술기운을 몰아내지 않는 그녀의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계심이 풀린 무방비한 상태.
그렇기에 예민한 것 위주로 물어봐야 했다.
“일행 중에 모험가가 아닌 사람이 누구누구야?”
“많죠.”
상당히 마음에 안 드는 두루뭉술한 대답이었다.
“너를 가르쳐준 사람은?”
“스승은 없어요. 저는 고향별에서부터 뛰어났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군요. 이 세계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이것저것 가르쳐준 사람이라면 있어요.”
“그게 누군데?”
“당신이 이틀 전에 중매를 섰던 귀여운 소녀.”
여기서 또 라누벨이…?
“그녀는 모험가인가?”
“우리보다 먼저 이 세계에 온 선배입니다.”
“본인 주둥이- 크흠! 입으로 그렇게 자기소개했다는 거지?”
“네.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 아! 혹시, 라누벨처럼 귀여운 여자애가 취향이신- 꺄으읏~?!”
“미안. 손이 미끄러졌네.”
사람이 절대로 해선 안 되는 말도 있는 법이다!
어떻게 그리 심한 말을!
취기로 얼굴을 붉게 물든 성녀C가 내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린 채 기어가는 목소리로 항의했다.
“당신, 손장난이 너무 심한데요. 적당히 안 하면 화낼 겁니다.”
“적당히는 괜찮다는 뜻이지?”
“본인 마음대로 해석 좀…. 하아! 됐어요. 그 버릇없는 손으로 술이나 따라봐요.”
성녀C가 빈 술잔을 내게 내밀었다.
정당한 응징을 버릇없다고 표현한 그녀의 발언이 나를 불쾌하게 했지만, 호구 같은 용사이기에 꾹 참았다.
기다리면 기회가 반드시 오리라 믿으면서.
“그런데 제가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아니, 어째서 이런 얘기를 당신에게 하게 됐는지 도통 모르겠….”
쿵!
눈의 초점이 풀린 성녀C의 상체가 앞뒤로 위태롭게 흔들거리더니, 이마를 테이블에 박으며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거참….”
기회가 내 예상보다 빨리 왔다.
나는 곤히 잠든 성녀C의 요추(腰椎) 4번과 5번 사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유리잔을 닦으며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내는 바텐더가 보였다.
나는 그에게 신사의 언어로 말했다.
“말 안 해도 알지?”
정의로운 용사님은 오늘도 정의를 실천하신다!
시커먼 늑대들로 가득한 주점 한복판에 어찌 미녀를 버려둘 수 있겠는가?
귀찮음을 무릅쓰고 도와주기로 했다.
“네. 손님이 조용히 주무실 수 있도록 방음벽이 두꺼운 침실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걸 어쩌죠? 침대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괜찮아. 나는 안 잘 거니까.”
이처럼 정의로운 열혈(熱血) 용사를 1등 안 시켜주는 교직원 일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