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13회차] 호랑이를 잡으려면?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예전에 보건 선생이 챙겨준 절대 반지를 꼼꼼히 착용한 후, 술기운으로 후끈 달아오른 성녀C의 체온을 해소해줬다.
세상을 구하기도 바쁜 MAX급 용사님이 간호까지 해주다니? 영광으로 알았으면 좋겠다.
“너무 뻔뻔해서 할 말이 없네요….”
펄펄 끓는 핫팩 같았던 몸이 식은 성녀C가 깨어나자 한 말이었다.
“몸은 좀 괜찮아?”
“당신 때문에 전혀 안 괜찮아요.”
“숙취는 없는 것 같네.”
“은근슬쩍 넘어가지 말아 줄래요?! 술집에서 멋대로 퍼마시다가 잠든 제게도 잘못이 있지만, 무방비한 초면의 여성에게 그렇고 그런 걸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새 아침을 맞이하는 당신의 태도는 심각하게 잘못됐다고요!”
“안 죽였잖아.”
“...예?”
“길거리에서 잠든 미녀를 박제(剝製)해서 파는 장사꾼보다는 훨씬 낫다고 보는데. 뜨겁게 달군 인두로 엉덩이를 지져서 노예의 낙인을 찍는다든가? 사지와 피부 멀쩡하잖아.”
“......”
“무사히 아침을 맞이한 것만으로도 내게 고마워하라고.”
이 여자는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것 같다.
노예와 박제로서 가치와 몸값은 ‘유명한 남성’이 더 높긴 하지만, 여성이라고 해서 안전한 건 아니다.
그 미모가 출중하다면 더욱.
밤새 잠도 안 자고 지켜준 용사님에게, 알몸 좀 봤다고 시시콜콜 따지는 이 뻔뻔한 아가씨에게 한마디 안 해줄 수가 없었다.
“예시들이 전부 최악의 상황뿐이군요.”
“사람은 항상 최악을 염두에 둬야 하지.”
“제가 누구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었는데, 역으로 듣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네요. 무사히 아침을 볼 수 있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사례는 하지 않겠어요. 지금도 왜 감사하게 여겨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드니까!”
새침한 표정으로 나를 한 차례 째려본 성녀C는 침대 밑에 떨어진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해하진 말았으면 좋겠다. 전부 그녀가 직접 벗은 것들이니까. 내 손은 거들었을 뿐.
“벌써 가려고?”
“제가 안 돌아가면 동료들이 걱정할 거예요.”
“경쟁자가 아니라?”
“아까부터 자존심 긁는 소리만 계속해서 솔직하게 말해둘게요. 어젯밤에는 당신이 제법 마음에 들어서 잠든 척한 거예요. 그러니 구해줬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생색내지 말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성녀C가 정색하며 말했다.
나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성녀C의 능력치 상태에는 ‘수면’이란 표시가 뜨지 않았으니까. 그녀가 잠든 척하고 있다는 것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녀C는 내가 능력치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감쪽같이 속였다고 믿는 거겠지.
“벌써 가려고?”
“네. 당신이랑 대화하면 저까지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절대로 어젯밤 일을 발설하지 마세요! 하면 정말 화낼 겁니다.”
나는 성녀C가 ‘성녀’라는 직업 이미지 때문에 자유분방한 사생활을 감춘다고 생각했었는데, 원래부터 그래왔던 모양이다.
“절대로 말하지 않을게. 대단한 일도 아니고.”
“...끝까지 제 자존심을 긁는군요. 하지만 묘하게 설득력 있어서 분하네요. 네. 맞아요. 대단한 일은 아니죠. 하지만 이 세상에는 여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려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고향별에서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는데.”
“고향별?”
“어머! 말이 많아졌군요. 수상한 천사님. 당신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내게 극상의 저주를 퍼부은 성녀C가 떠났다.
쩔뚝쩔뚝.
마음만은 말이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우아함이랑 거리가 멀었다.
나는 빵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물었다.
“좀 도와줄까?”
“당신, 너무한 거 아닌가요? 싫진 않았지만…. 아, 아무튼! 계단까지만 도움을 받을게요. 딱 계단까지만!”
나는 어젯밤보다 2배는 커진 성녀C의 엉덩이를 한쪽 팔로 번쩍 받치듯 안아 들었다.
바로 들려오는 신음.
“엉큼한 성녀. 나는 그 고통을 이해한다.”
내 머리 위에 앉아있던 최초의 정령이 한가롭게 두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말했다.
얼굴이 다시 새빨개진 성녀C가 작게 중얼거렸다.
“짐승….”
잘해줘도 욕먹는 호구 용사님은 성녀C를 1층까지 옮겨줬다.
그녀는 여전히 엉거주춤한 자세로 후다닥 도망치듯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
나는 그런 성녀C를 배웅해주고.
“용사는 정말 힘든 직업 같아.”
스트레스로 어깨와 목이 뻐근했다.
하루쯤은 이대로 침대 위에 쓰러져서 편안히 쉬고 싶지만, 오늘부터 차원이동을 연구해야 했다.
내가 중등교육과정에 입학한 이유는 순전히 아들 때문이었다. 졸업하면 ‘원하는 대상’을 판타지아 세계에서 빼준다고 했으니까.
조건은 졸업.
판타지아 세계를 나가지 말라고는 안 했다.
나를 제외한 9명의 용사가 힘을 합쳐서 5대 재앙과 마왕을 쓰러트릴 때까지 지구에서 쉬고 있을 계획이다.
▶의문: 그냥 강한수 생도님이 부지런히 활약해서 빨리 졸업하는 편이 좋지 않나요?
아주 예리한 지적이야, 교생 아가씨!
나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하지만 이 비열한 교직원 일동은 나를 순순히 졸업시켜줄 것 같지 않다.
초등교육과정의 편파판정처럼 어떤 식으로든 꼬투리를 잡아서 물고 늘어질 터.
그래서 아예 자리를 비워두기로 했다.
없으면 꼬투리도 못 잡으니까.
▶난감: 학생이 교실에 없는 건 충분히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보는데요….
그건 걱정하지 마, 교생 아가씨!
내 몫은 해둘 것이다.
용사가 총 10명.
나 혼자서 5대 재앙 중 하나를 쓰러트리고, 9명이 나머지 넷과 마왕 페도나르를 토벌하면 딱 맞다.
마을의 거리로 나온 나는 설녀부터 찾았다.
차원이동 마법의 촉매로 그녀의 날개 깃털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하! 설녀 양. 어디를 급히 가십니까?”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선배가 오늘도 설녀를 따라다니며 치근덕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근성 하나는 알아줘야 할지도?
물론, 그 근성의 피해자는 괴롭겠지만.
“마법사님의 심부름이요. 오늘은 무척 바쁘니 귀찮게 하지 말아 주세요.”
“함께 가죠.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저 혼자서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선배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쫓아다녔다.
이에 설녀는 무척 부담스러워했고, 그런 둘을 멀찍이서 구경하는 선배의 응원단 표정은 암살자처럼 싸늘하기만 했다.
나는 이 뒤의 미래를 안다.
응원단이 ‘설녀는 몬스터다!’라고 소문을 내면서 사고가 터진다. 그리고 설녀는 마을에서 도망치다가 용에게 먹힌다.
지금, 내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1) 사고가 터지기 전에 정리한다.
2) 사고가 터진 직후에 도와준다.
문제를 해결한다는 관점에선 결과가 같지만, 타이밍이 다르다.
지금 나가서 선배의 마수로부터 설녀를 구출하면, 나 또한 선배처럼 치근대는 수컷으로 보일 뿐이다.
반면, 설녀가 위기에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구해주면 극적인 연출과 함께 호감을 얻을 수 있다.
이건 고민할 것도 없었다.
“이봐, 거기 양아치.”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위기에 빠질 때까지 기다리며 타이밍을 재는 비열한 취미가 내게는 없다.
“......”
하지만 선배는 불러도 내 옆을 무시하고 지나쳤다.
나는 서둘러 그의 발을 걸었다.
“너 말이야 너.”
“...당신은 마을 입구에서 만났던 천사로군요. 이번에는 무슨 용무이십니까?”
내가 잽싸게 쭉 뻗은 발에 걸린 선배는 넘어지지 않았지만, 설녀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발걸음을 멈췄다.
양아치 짓을 방해받은 그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뒤를 봐.”
“뒤?”
내 말에 뒤를 힐끔 돌아본 선배. 그는 골목 모퉁이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는 응원단을 발견했다.
들켰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들은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이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들도 이제 막 선배를 발견했다는 듯이.
“왜 보라고 한 건지 모르겠군요.”
“정말로 몰라?”
저 스토커들을 보면서 아무런 생각이 없어?
“정말로 모릅니다. 용무가 없다면 저는 가보겠습니다.”
선배는 벌써 거리가 제법 벌어진 설녀를 빠르게 따라잡았다. 그리고는 다시 졸졸 쫓아다니며 귀찮게 했다.
그 광경을 보자마자 이마에 절로 주름이 쭉쭉 그어진 나는 선배의 능력치를 확인했다.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999+
▷직업: 용병(재산→생존↑)
▷스킬: 혼돈ZZ 파괴ZZ 망각ZZ 영재Z 불굴Z…
▷상태: 불쾌, 마검, 마수, 마갑
서리왕 에쉬노프랑 당장 싸워도 될 만큼 훌륭한 스킬 등급. 하지만 그의 정신상태는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았다.
“이거 참….”
과거의 선배랑 한판 붙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역사가 어떤 식으로 틀어질지 알 수 없어서 포기했다.
선배와 설녀의 거리를 물리적으로 벌리는 건 무리.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
*
*
시스템 보정 탓일까?
내 간섭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그대로 흘러갔다.
선배의 응원단이 악의적인 소문을 내는 바람에 하피란 사실을 들킨 설녀는 마을에서 도망쳤다.
물론, 완벽히 똑같진 않았다.
미리 조치한 덕분에 서리왕 에쉬노프는 유전자조작 하피를 잡아먹지 않았고, 설녀는 무사히 마법사의 은신처까지 올 수 있었다.
놀란 선배가 뒤늦게 그녀를 따라왔다.
하지만 이미 끝났다구?
덜컹!
“흑흑! 마법사님, 큰일이에요! 제가 하피란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들키고 말았어요. 이제 전 어쩌면 좋죠?”
집 문을 부수듯 열고 들어온 설녀가 울면서 마법사에게 하소연하듯 질문했다.
자애로운 표정으로 그녀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은 마법사는 먼저 와있던 나를 가리키며 답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인사드리렴. 오늘부터 너를 돌봐줄 분이시란다. 매우 두툼한 지갑과 인성을 가지신 훌륭한 신사분이시지.”
“아….”
너무 울어서 두 눈이 퉁퉁 붓고 충혈된 설녀가 반쯤 넋을 놓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녀가 안심할 수 있도록 정의로운 용사의 미소를 지었다.
“안녕, 설녀 아가씨. 나는 차원이동 마법의 촉매로 좋다는 네 깃털에 관심 많은 MAX급 용사님이라고 해.”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합법적으로 그녀의 소유권을 이양받았다.
“설녀 양! 도망치지 말고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당신은 흉악한 몬스터가 아니라 사랑받을 자격 있는 인격체- 헛! 너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마법사의 집으로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그리고 나를 향해 삿대질했다.
그 무례한 남자의 이름은 최초의 용사.
힘으로 용사가 된 야만인이었다.
“설녀 아가씨. 저 개소리는 듣지 마. 자신의 정체성을 외면하거나 부정하는 건 좋지 않아. 너는 엄연한 몬스터야. 나는 이 훌륭한 마법사에게 네 소유권을 이양받은 사육사고.”
“아….”
반쯤 넋을 놓은 채 나를 바라보는 설녀.
마찬가지로 혼이 쏙 나간 얼굴로 멍하니 서 있는 선배에게 나는 히쭉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제 몬스터에게 용무가 있나요? 없으면 이만 나가주세요.”
“네놈…!”
이마에 힘줄이 돋아난 선배가 본색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