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234화 (234/430)

 234화

[13회차] 하찮은 이유

▷굴욕: 제삼자의 시선으로 과거의 나를 보는 게 이토록 괴로울 줄이야…. 내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과거의 나는 끔찍했는가….

어라? 흑화 선배. 아직 계셨군요.

▷짜증: 너랑 엮일 때마다 냉정함을 잃는군. 그리고 흑화(黑化)가 아니다. 지금의 나는 충동적인 감정에 흔들리거나 지배받지 않는 이성적인 인간이다.

그런 것 같네요. 그렇겠죠?

▷경고: 의문형으로 말하지 마라.

과거의 선배가 제법 강했었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나도 약한 편은 절대 아니며, 상대평가로 능력치만 따지면 내가 우위에 있었다.

레벨은?

999레벨 이상은 확인이 어렵지만, 내가 압도적일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내 종족 ‘유니버설 휴먼 듀얼코어’는 용사의 직업특성 경험치 500%를 가볍게 추월하는 경험치 효율을 자랑한다. 쓰러트린 대상의 모든 경험치를 고스란히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저 선배의 꼬락서니를 보라!

하루 중 대부분을 무가치한 일로 허비한다. 그 증거로 스킬들은 3일 전에 봤을 때랑 등급이 완벽히 똑같은 정체 상태였다.

반면에 나는 그 시간 동안 용을 조련하고, 성녀C를 포섭한 후, 설녀를 키우는 마법사를 찾아가서 협상까지 했다.

그야말로 효율의 극치!

나는 이렇게 64년을 살아왔다.

“이봐. 어째서 그런 험악한 표정을 짓는 거지? 나는 정당한 거래를 통해서 이 돌연변이 하피의 부양권을 넘겨받았어.”

“그녀는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다!”

“왜?”

“왜라니?”

“이 하피를 어째서 물건처럼 거래하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묻는 거야.”

“이유가 필요한가? 이건 당연하다.”

과거의 선배는 전형적인 위선자다운 표정을 지었다.

“이 마을에 몇 명의 노예가 상주하는지 알아?”

“...뭐?”

“아느냐고?”

“그걸 왜 묻는 거지?”

“모르면 잘 들어. 이 마을에는 정확히 43명의 노예가 살아. 여긴 북대륙 북부라서 매우 춥거든. 대지가 얼어서 농사는 힘들고, 폭설이 자주 내려서 상인의 방문도 드물지. 그런데도 이만한 규모의 마을이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이 근방에 있는 광산을 개발하고 싶은 영주가 노예를 사서 강제로 살게 했기 때문이야.”

“......”

그는 말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친절히 말해주니 알아듣는 것 같았다.

“너는 조금 전에 몬스터를 사고파는 게 못마땅해서 구하겠다고 했는데, 동족인 인간은 뒷전이군. 너는 몬스터가 인간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몰랐다.”

“왜 몰랐지?”

“......”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오늘까지 3일째.

선배는 온종일 설녀만 쫓아다녔다. 나머지 마을 사람들의 웃는 얼굴 뒷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나?

나는 1회차 때 지긋지긋할 정도로 보았다. 그리고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스킬 ‘투시’로 마을 사람들의 엉덩이에 ‘노예 낙인’이 있는지 전부 확인했다.

▷경악: 전부 확인했다고? 엉덩이를? 남녀노소 안 가리고?

흑화 선배가 뭘 상상하시는지 대충 예상이 가네요.

하지만 이건 1회차 때 생긴 습관이다.

지구에서는 문신도 하나의 패션으로 자리 잡으면서 꽤 대중화된 편이지만, 판타지아 세계에서는 이유 없이 문신하는 경우가 없다.

소속, 신분, 계급, 지위, 학력, 직업, 출신….

주민등록증처럼 가르쳐준다.

하지만 2회차부터는 귀찮아서 안 하는 바람에 스킬 ‘투시’를 아예 익히지 못했다. 이미 내 머릿속에 신상정보가 다 들어있어서 문신이 있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랬다가 도적E의 ‘뽕’에 속는 대참사를 겪었지만!

나는 그 뒤에 스킬을 다시 습득했다. 이 뒤에도 쓸 일은 별로 없었지만, 여기는 아니다.

아는 엑스트라가 없는 과거의 시대.

그래서 일일이 확인하며 다녔다.

“아직도 할 말이 남았냐?”

“......”

“없으면 꺼져. 그리고 진지하게 경고하는데, 인간부터 구한 후에 몬스터를 챙겨라. 이 인류의 배신자 새끼야.”

정의로운 후배의 외침에 양심이 푹푹 찔린 선배가 주춤하며 뒷걸음질 쳤다!

▷변호: 과거의 내가 병신이었던 건 일부 인정하지만, 인류의 배신자란 비난을 들을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만. 순전히 마음에 드는 이성에 한눈 팔려서 본분을 잊은 평범한 청춘이지 않은가?

아니요. 저는 그랬던 적이 없었습니다만?

▷설득: 잘 생각해보도록. 너도 신출내기였던 1회차 때는 분명히 나만큼이나 여자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며 귀찮게 구는 한심한 양아치였을 것이다!

전혀 아닌데요? 흑화 선배.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에게 잠시나마 의지하며 호감을 품었던 시기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나는 1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고향별과 어머니의 테니스라켓만 생각했다.

여자보다는 생존과 귀환!

그러니 똑같이 취급하지 말하주실래요? 굉장히 불편합니다.

“아니! 그녀는 몬스터가 아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그리고 내게 소중한 사람이다! 내가 인간을 챙기지 않았다고? 틀려. 나는 신이 아니라서 모두를 구하지 못한 것뿐이야. 소중한 사람을 먼저 챙길 수밖에 없다. 그러니 설녀 양을 네놈의 더러운 마수로부터 구해내겠다!”

물러서던 선배가 뚝 멈추더니 큰 소리로 선언했다.

▷흡족: 과거의 나여! 아주 잘 말해줬다! 그 소중한 사람의 범주에 그들이 들어가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모두를 구할 필요는 없다. 나를 따르는 자들에게 순위를 매기고, 그 순위에 맞는 대우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부족하지 않은가!

흑화 선배. 과거의 자신을 옹호하고 미화하는 태도가 추합니다.

“거참….”

이 야만적인 세계는 논리정연하게 설명해줘도 안 된다.

나는 공명정대한 거래를 통해서 몬스터 ‘설녀’를 이양받았고, 판타지아 대륙의 어느 나라에서도 몬스터를 애완동물처럼 키우면 안 된다고 법으로 정해두지 않았다.

그런데 저 선배의 태도를 보라!

“사람은 모두가 다르게 생겼고, 설녀 양은 우리랑 팔이 조금 다르게 생겼을 뿐이다. 나는 설녀 양의 아름다운 내면을 보고 사람이라고 판단했지만, 너는 그녀의 외면만으로 몬스터 취급했다. 이젠 힘으로 자신의 정의(正義)를 관철할 수밖에.”

논리로 안 되니 폭력을 동원하려고 한다.

상태에 ‘마검’이라고 표시된 휘황찬란한 검을 소환했다.

그것은 내가 익히 아는 무기였다.

성검2…!

▷황당: 그걸 이름이랍시고 설명하면 누가 알아듣지?

나만 알아들으면 됩니다, 흑화 선배.

성검2는 유치한 하트 모양의 손잡이가 특징이며, 스킬을 증폭해주는 사기적인 효과가 있다.

내가 써봐서 잘 아는데….

주인의 몸으로 주인 대신 멋지게 싸워주는 오토매틱 기능이 있는 성검1보다 훨씬 위협적이다.

“폭력으로 남을 설득하는 방식은 좋지 않아, 야만인.”

간혹 손이 미끄러지는 불가피한 상황이 있긴 했지만, 약자를 힘으로 굴복시키는 야만적인 행동을 취한 적은 없다.

“무기를 들어라.”

“싫어.”

여기서 선배랑 싸움을 벌이면 역사가 완전히 틀어진다.

판타지아 북대륙의 5대 재앙인 서리여왕 엘쉬를 조련하고, 설녀를 빼내는 데 성공했는데, 다 와서 망칠 순 없었다.

“비겁하게 싸웠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싸움을 포기하는 건, 패배를 인정한 거나 다름없다. 그러니 설녀 양을 풀어줘. 그녀는 네 소유물이 아니다. 거부한다면 지금부터 힘으로 빼앗겠다.”

어떻게든 설녀를 내게서 빼앗겠다는 의지로 충만한 선배.

머릿속까지 정자로 가득 차 있는 선배의 안면을 시원하게 한 대 후려쳐주고 싶지만, 나는 싸울 수 없었다.

어떻게든 말로 설득해야 했다.

“이봐. 야만인. 설녀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하! 세상에 누가 너 같은 놈을 좋다고 따라-”

“사족이 길다. 그래서 중요해, 안 중요해?”

“...그녀의 의사가 중요하다.”

“알면 좀 닥쳐. 지금부터 물어볼 거니까.”

“......”

나는 설녀를 돌아봤다.

그리고 질문했다.

“동료들을 동원해서 네가 하피란 사실을 알려 마을에서 쫓아낸 후에 위로하는 척하며 계획적으로 접근한 저 녀석이 좋냐? 아니면 동족들에게 버림받은 너를 지금까지 보살펴준 마법사가 안전하다고 보증한 내가 낫냐?”

“당신이요.”

설녀의 대답에 선배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그러더니 이에 반항하듯 거칠게 따졌다.

“불공평하다! 네 질문의 서술방식은 지극히 너에게 유리하지 않은가! 그러니 내가 다시 하겠다. 설녀 양. 지난 3일 동안 당신과 즐거운 추억을 쌓은 제가 좋습니까? 아니면 오늘 처음 본 추악한 노예 상인이 좋습니까?”

“그 추악한 분이 제게는 훨씬 멋지게 보이네요.”

야무지게 대답한 설녀가 내 가슴에 살포시 머리를 기대며 안겼다.

당장 그 닭대가리를 치우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이대로 가만히 있는 편이 상황을 유리하게 끌어주기에 꾹 참았다.

허어! 내 인내심의 끝이 안 보이는구나!

“설녀 양. 당신은 속고 있는 겁니다.”

▷체념: 그만! 그만해라! 그쯤 했으면 미련을 버리고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 과거의 나여, 제발 부탁이니 그 이상 나를 힘들게 하지 말아다오!

...나는 이 선배가 제법 냉정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과거의 자신에게 트라우마가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을 꼭 구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흑화 선배의 처절한 외침은 과거의 자신에게 닿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오른팔로 설녀의 잘록한 계륵(鷄肋)을 끌어안고, 왼손 검지로 그녀의 턱을 추켜올렸다.

그 후에-

“쪼옥.”

“으음….”

몬스터랑 키스하는 취미는 내게 없지만, 지구에서도 동물원 사육사들이 관객들을 위해 돌고래나 물개랑 하는 걸 본 적 있다.

나도 업무상 어쩔 수 없이 인어랑 몇 번 했었다.

이번에는 그 대상이 어류에서 조류로 바뀌었을 뿐. 그러니 눈썹이 파르르 떨릴 만큼 불쾌해할 필요 없다.

“앗…. 아아….”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할 말을 잃은 선배. 성검2도 어느새 소환 해제되어 있었다.

싸울 의지를 상실했다는 의미.

이 돌연변이 하피를 정말 인간으로 생각하긴 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저런 표정을 짓는 거겠지.

“흑…!”

선배는 급기야 닭똥 같은 눈물을 한줄기 흘리더니 줄행랑쳤다.

완벽한 나의 승리.

야만적인 폭력을 초월한 언어폭력의 승리로 오래오래 기록될 것이다.

“마약 용사. 이대로 저 녀석을 보내도 괜찮을까?”

영화 관객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입을 꾹 다물고 숨죽인 채 구경하고 있던 최초의 정령이 걱정 섞인 어조로 질문했다.

글쎄? 안 괜찮아도 세상은 괜찮을 것이다.

▶걱정: 심경변화가 크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최초의 용사에게는 역사를 바꿀 힘이 있으니까요.

교생 아가씨. 그걸 걱정했다면 아예 시작도 안 했어. 그리고 설사 잘못되더라도 여긴 가상의 세계에 지나지 않아.

현실은 무사하다.

여긴 잘못되더라도 시스템이 롤백하면 끝난다.

안 그렇습니까, 흑화 선배.

...흑화 선배?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이 없었다.

벌써 들어가셨나?

▷결론: 판타지아 차원은 잇따른 교육과정의 실패로 나날이 세력이 줄어들고 있었지. 그래서 나는 승리의 확신이 들 때까지 결전(決戰)을 미뤄왔는데…. 그 생각이 바뀌는군. 하루속히 판타지아 세계를 멸망시키는 쪽으로. 나의 굴욕적인 생활기록부가 남아있는 저 끔찍한 교육장을 이 세상에서 완벽히 지우겠다!

흑화 선배가 최종 보스 같은 선언을 했다.

참 하찮은 이유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