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13회차] 전쟁과 말소
“다들 성급하단 말이지….”
“예? 죄송합니다. 아직 만난 지 하루도 안 됐는데 제가 좀 성급하게 급진도를…. 아우우우! 저도 처음이라 혼란스럽고, 기분이 묘하고…. 죄, 죄송합니다. 정령 님께 민폐가 안 되도록 노력할게요.”
내 혼잣말을 멋대로 해석한 설녀가 우물쭈물했다.
세세하게 설명해주자면 끝도 없으니, 저대로 계속 오해하게 놔두기로 했다.
“마약 용사. 최초의 가짜랑 싸울 뻔하다가 어찌어찌 잘 넘어간 것 같은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
“어. 최초의 진짜가 구경하다가 멘탈 터졌어.”
“...오! 그것참 뜻밖의 전개로구나!”
가출해서 새살림을 차린 선배는 원래부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그 시일을 앞당긴다는 모양이다.
대충 어림짐작해봐도 은하계 규모의 대전쟁. 그런데 이리 하찮은 사유로 터져도 괜찮은 걸까?
여기에 연루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목숨과 명예는 소중하니까. 하찮은 전쟁에 투신할 만큼 한가한 용병이 아니다.
남은 문제나 하나.
“원래 시대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군.”
쏘시아의 타임머신을 이용해서 오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녀가 막바지에 말했던 것처럼 돌아가는 방법은 듣지 못했다.
이 비겁한 마누라를 소환하는 시도를 안 해본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과거’란 설정으로 묶여있어서, 판타지아 대륙 어딘가에 있는 쏘시아 또한 ‘남편으로 꼭 삼고 싶은 MAX급 용사 강한수를 아직 만나지 못한 미혼녀’란 설정이었다.
그래서 내 말발이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나는 정답을 준비해뒀다.
“설녀야. 깃털 좀 쓸게.”
“네? 네. 얼마든지요.”
그녀의 날개는 차원이동 마법의 촉매로 안성맞춤이다. 그리고 차원이동 마법은 그녀를 데리고 있던 마법사A가 연구하고 있었다.
아직 성공하지 못한 그는 대마법사의 명단에 그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우주의 협찬을 받는 나는 다르다.
그럴싸한 이론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 이론이 실패했다고 판단한 마법사A는 자신의 연구를 단념하고 그 핵심재료인 설녀도 포기했다.
그리고 설녀는 내게 넘어왔다.
마법사A가 버린 이론과 함께 세트로.
우우우웅-!
내 손에 쥐어진 설녀의 깃털이 녹색 빛으로 반짝였다.
마법사A의 이론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마법사A. 잘 듣도록. 처음 만났을 때부터 쭉 이야기했지만, 너의 이론은 틀리지 않았어. 64년 경력 용사님의 말씀이니 믿어도 돼. 하지만 너는 욕심을 너무 부렸어.”
이사센터를 예로 들자면, 부피가 커지고 무게가 올라가면 이사비용도 비례하게 상승한다.
설녀의 깃털을 촉매로 삼은 마법사A의 차원이동 마법은 그 이론이 완벽했지만, 공짜로 이용하려는 게 문제였다.
그는 ‘설녀의 깃털’을 이용료라고 생각했다. 깃털을 소모해서 차원이동을 한다는 것이다.
우주의 협찬을 받은 나는 그 문제점을 바로 눈치챘다.
깃털은 깃털이고, 이용료는 이용료다.
차원을 관리하는 우주 회장님은 그렇게 관대하지 않다. 그렇기에 차원이동 할 물질의 가치를 낮출 필요가 있다.
그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힘.
“잘 봐. 이렇게 경험치를 희생해서 내 가치를 낮추고, 소모한 경험치는 차원이동의 원료로 사용하는 거야. 이 세상에 희생 없이 되는 건 하나도 없어. 돈 안 드는 노력조차 시간을 소비하는데.”
“아아…!”
깨달음의 탄성을 터트리며 눈물을 주르륵 흘린 마법사A가 대마법사A로 전직했다.
참 별거 아닌 조언인데,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천재들은 간혹 기초적인 것들을 무시하는 것 같다.
“그림자A.”
“부르셨나요.”
내 그림자 속에서 요정이 튀어나왔다.
“상황은 봐서 알겠지?”
“네. 현시대로 돌아가는 용사님 대신 설녀를 그때까지 돌봐달라는 이야기겠지요?”
“정확해.”
흑화 선배는 결혼에 실패했지만, 유감스러운 요정왕은 결혼을 매우 잘한 것 같다.
그의 아내들은 이 가슴만 밝히는 요정의 어디가 좋아서 기나긴 시간 동안 잊지 않고 그리워하는지 모르겠다.
“엘브하임 님의 업적과 장점을 전부 나열하면 하루로 부족합니다. 음…. 용사님의 표현을 응용하자면, 판타지 야만인들을 갱생해서 문명인으로 바꿨습니다.”
“대단하군!”
“후후! 그것만이 아니에요. 또….”
“미안, 그림자A. 유감스러운 줄 알았던 요정왕 다큐멘터리 2부는 500년 뒤에 듣도록 할게!”
그리고 그리워할 필요 없다.
만나고 싶은 너의 임은 지금 남대륙에 있을 테니까.
“아니요. 이곳에 계신 그분은 앨범 속의 사진이랑 같습니다. 제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엘브하임 님의 추억이 아닌 현재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서, 꽤 장기임무가 되겠군요. 하지만 기쁜 마음으로 재회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설녀의 깃털과 차원이동 마법은 저에게도 꼭 필요한 거니까요.”
그림자A의 목적은 페스티벌 대륙에 사는 남편을 만나는 것.
그곳은 판타지아 대륙과 별개의 차원이기에 반드시 차원이동 마법이 필요하다.
“중요성을 안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겠네.”
“맡겨주세요. 최초의 용사가 터무니없이 강한 건 틀림없지만, 과거의 그는 제 적수가 안 됩니다. 그리고….”
“그리고?”
“아직 초창기라서 그런 것 같지만, 제가 알던 최초의 용사는 저렇게까지 암컷만 밝히는 머저리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나이로 계산하면 사춘기가 되겠군요.”
“잠깐.”
“말씀하세요.”
“이때의 선배 나이가 몇인 줄 혹시 알아?”
이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애완동물 다루듯 설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림자A는, 내가 묻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한 차례 고개를 갸우뚱한 후에 대답했다.
“19살쯤 될 겁니다.”
“경력은?”
“이제 2년쯤 되겠군요.”
“...회귀한 거 아니지?”
“아닙니다.”
“맙소사….”
선배의 능력치는 도저히 2년짜리로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의 나이 때, 날이면 날마다 알렉스에게 처맞으며 피똥과 눈물을 줄줄 쌌으니까. 초월영역 스킬은커녕 999레벨조차 넘기질 못했다.
선배는 재능이 철철 넘치는 괴물이었다.
성격과 취향에는 다소 하자가 있는 것 같지만, 그림자A의 말에 따르면 그것도 차차 개선된다는 것 같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고.
▶궁금: 강한수 생도님의 1회차가 궁금해졌어요.
모르는 편이 좋아, 교생 아가씨!
완벽한 MAX급 용사님에 대한 환상이 와르르 무너질 테니까.
내 2년차가 선배의 2년차보다 정신적으로 성숙했다고 장담할 순 있지만, 그래봤자 도토리 키재기다.
“...내 생활기록부도 남아있겠군.”
흑화 선배가 전쟁을 일으키려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파기할 기회가 온다면 꼭 파기해야지.
▶걱정: 정말로 전쟁이 벌어질까요? 제 직장이 전쟁터로 변해서 훌륭한 선배님과 동기, 후배들이 다치거나 죽는 건 보고 싶지 않아요….
교생 아가씨, 마음을 강하게 먹으라구!
그리고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내가 봤을 때, 이 전쟁은 그리 쉽게 벌어지지 않는다.
흑화 선배는 ‘내 생활기록부를 삭제해라. 그렇지 않으면….’란 식으로 물밑협상을 먼저 진행하리라.
딱히 무리한 요구는 아니기에 교직원 일동은 승낙할 테고, 그것으로 이번 사태는 조용히 마무리될 것이다.
전쟁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건 어려울 겁니다.”
“어? 당신은….”
“오랜만이죠? 이번에는 피자 대신 치킨을 시키고 싶지만, 여긴 신성한 학당이라서 교직원과 학생 외에는 출입할 수 없어서 어렵네요. 그 점은 양해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선물로 주신 반지는 잘 쓰고 있습니다, 보건 선생님.”
어떻게 이 여자를 잊을 수 있겠는가?
이 반지를 낄 때마다 보건교사의 요추와 경추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군요. 어떻게 썼는지 세세하게 듣고 싶지만, 시간이 없으니 짧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교사가 교육장에 난입하는 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는 건 알고 있죠? 하지만 최초의 용사가 선전포고해온 비상사태라서 어쩔 수 없이 특례를 쓰게 됐습니다.”
흑화 선배. 너무 화끈하신데요?
은하계를 지배하는 그 왕국이 독재국가라는 걸 깜빡했다.
그럴싸한 명분은 필요 없다. 통치자인 선배가 전쟁하고 싶으면 간부와 국민은 군말 없이 따라야 한다.
“그래서 전쟁이 벌어지나요?”
“아직은 아닙니다. 강한수 학생의 짐작처럼 요구를 해왔어요. 열흘 안에 자신의 생활기록부를 말소하지 않으면 판타지아 차원 전체를 소멸시키겠다고.”
“전쟁에 참여하라고 알리러 온 거군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전개다.
판타지 신과 그 일당들은 ‘흑화된 최초의 용사 타도(打倒)’를 목적으로 사회부적응자들을 납치해서 용사로 육성한 거 아니었던가?
...그렇다고 내가 사회부적응자라는 얘기는 아니다.
나는 시스템 착오로 끌려온 피해자다.
“아니요. 아직 배움이 끝나지 않은 학생을 전쟁터로 밀어 넣을 만큼 저희는 파렴치한 집단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무의미한 전쟁은 되도록 피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유는 그뿐인가요?”
최초의 용사를 토벌할 병사를 육성하는 집단이 평화를 부르짖는다는 것이 우스워서 그렇다.
“하아….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준비가 안 됐어요. 최초의 용사처럼 탈주해서 적으로 돌아서는 사례가 다시는 없도록, 강한수 학생이 소속된 4세대부터는 힘보다 인성을 중시하는 바람에 전투력 성장이 매우 더디게 이루어진 탓이죠.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아무리 훌륭한 교육방침이라도 장점만 있을 순 없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습니다.”
“그의 생활기록부를 말소하기로 했다는 거군요?”
“네. 하지만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겠죠. 역사의 톱니바퀴가 빠지게 되는 셈이니까.”
최초의 용사가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렸다.
이런 위대한 업적을 세운 그를 기리는 신전과 사조직이 많으며, 유아교육용 전래동화처럼 쭉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것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최초의 용사란 캐릭터가 완전히 빠져버리면?
“주인공이 빠진 소설이 됩니다. 처음부터 주인공이 없는 소설이었다면 괜찮지만, 판타지아 대륙의 역사는 최초의 용사가 너무나 깊숙이 관여된 탓에 빼기가 쉽지 않다는 겁니다.”
“아예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한다는 거군요?”
“네. 하지만 이건 소설이 아닌 거대한 시스템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짜는 건 불가능해요.”
“그렇죠. 개발자를 해고했으니까.”
판타지아 교육시스템을 만든 창조신이나 다름없는 쏘시아 없이 다시 처음부터 구축하기란 어렵다.
그녀를 다시 고용하는 건?
이번에는 쏘시아가 쉽게 당해주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시스템을 통째로 자신이 먹으려 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절대로 불가.
개발자 없이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네. 맞습니다. 그녀의 남편이란 소문이 있던데, 당신의 생각을 들여다보니 정말이었군요.”
“그 해결책이란 게 뭡니까?”
나는 도통 모르겠다.
전쟁은 되도록 피하고 싶지만, 요구대로 흑화 선배의 생활기록부를 말소할 순 없는 이 상황에서 무얼 할 수 있을까?
“우선은 장소를 바꿀까요? 관련 없는 사람들은 나중에 기억을 수정하면 되지만, 그럴 수 없는 옛 제자의 노골적인 시선이 무척 부담스럽네요.”
보건 선생이 그림자A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 노골적인 옛 제자도 말했다.
“한 번도 찾아오지 않으셨으면서 여전히 저를 제자라고 생각하긴 하시는군요?”
그림자A의 말투는 썩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적대적인 것도 아닌 오묘한 말투였다.
“당신이 그 풍만한 가슴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듯이, 저도 그 기술을 가르쳐준 제자를 한시도 잊은 적 없답니다. 준엄한 학칙이 가로막고 있어서 만날 수 없었던 것뿐이죠. 아! 당신의 남편인 엘브하임은 무척 건강하더군요. 이미 강한수 학생에게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은혜는 잊지 않고 있어요.”
“잊으면 곤란하죠.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네요. 당신이 절실히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할 수 있도록 변용술을 가르쳐준 저에게, 그 남자가 얼마나 따졌는데요. 이건 사기 결혼이라면서.”
엘브하임. 너란 요정은 대체….
하지만 누굴 탓하겠는가?
이건 여자의 변신에 속은 본인 책임이다.
“한 남자의 인생을 농락한 제자와 스승의 아름다운 추억담에 끼어들어서 매우 미안한데, 장소를 옮긴다고 하지 않았어?”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림자A가 설녀와 대마법사A를 블랙홀처럼 시커먼 그림자로 삼키면서 순식간에 자리를 피해준 까닭이다.
“안 옮겨도 되겠는걸요?”
“그러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갑시다. 어떻게 전쟁을 피할 겁니까?”
나는 도통 모르겠다.
전쟁을 피하려면 흑화 선배의 생활기록부를 지워야 하는데, 지우면 교육시스템이 붕괴한다. 그러면 전쟁을 회피한 의미가 없어진다.
이건 딱 봐도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 아닌가?
“간단합니다. 그의 빈자리를 채울 새로운 용사가 있으면 됩니다.”
“...음?”
“어머나? 이거 참 우연이네요! 최초의 용사랑 비슷한 시대에서 활동하는 훌륭한 용사 후보가 눈앞에 있군요?”
보건 선생이 나를 바라보며 산뜻한 눈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