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237화 (237/430)

 237화

[13회차] 커플링

“이번 일만 잘 마무리해주면 자율출입증을 발급해드릴게요. 그러면 지금처럼 몰래 탈출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교육장이 그리우면 언제든지 돌아올 수도 있고요.”

“그냥 탈출하면 되는데 굳이…?”

몰래 하느냐, 당당히 하느냐의 차이밖에 없다.

“교육장을 빠져나가려는 학생에게 이런 말을 해줘야 하는 제 상황이 참 한심한데요. 강한수 학생. 지금 하려는 방법으로는 절대 교육장을 빠져나갈 수 없어요. 진짜 설녀는 옛날에 죽었습니다. 판타지아 세계에서 다시 태어난 설녀는 여기서밖에 힘을 못 써요.”

“...아들은?”

조금 엉뚱한 질문이긴 하지만, 꼭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됐다.

내 아들도 이 세계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가면 모든 힘을 잃을까?

“아니요. 당신의 아들들이라면 괜찮습니다. 판타지아 세계의 생명체들은 크게 2가지 분류로 나누어져 있어요. 생활기록부를 바탕으로 태어난 반쪽짜리 영혼. 이들은 후학들의 교육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경험치 수급을 위해 복사하듯 무한정 찍어내는 몬스터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왕 페도나르의 손짓 한 번에 소멸해버린 용사의 동료들도 여기에 해당한다.

본인들은 그 사실을 모르지만.

“또 하나는 순수한 판타지아 대륙 태생입니다. 몬스터를 제외한 대다수가 여기에 해당하죠. 피자라는 세계 위에 놓인 토핑처럼 영혼이 나누어져 있긴 하지만, 완벽한 영혼이란 건 틀림없습니다. 낳아준 부모가 거짓된 영혼일지라도.”

설명은 잘 알아들었다.

하지만 내가 할 말은 정해져 있다.

“보상이 짜다!”

애초에 판타지아 세계의 자율출입증 따위는 내게 쓸모없다. 졸업해서 지구로 돌아가면 이 방향으로는 오줌도 안 쌀 생각이니까.

그러니 좀 더 가치 있는 보상을 제시해줬으면 좋겠다.

“교직원이 학생에게 줄 수 있는 보상 중에서는 가장 파격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원치 않으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이건 덤으로 꼭 드리고 싶군요. 누가 알아요? 졸업한 후에도 이곳이 그리워서 돌아보게 될지를.”

“반드시 돌아오게 될 거란 저주 같은 복선이네!”

나는 저런 의미심장한 발언이 너무 싫다.

“이번에는 개별적인 보상을 이야기해볼까요? 예전에 소개했다시피 저는 보건교사입니다. 그렇기에 제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보상도 이쪽 방면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당신이 뚜렷하게 원하는 바를 이야기해준다면 그 분야에 정통한 선생을 소개해줄 수도 있어요.”

“...들어본 후에 생각하죠.”

보건교사의 선물이라!

부드러운 핫팩을 보관하는 사차원 주머니 같은 거라도 주려나?

“당신이 상상하는 보건교사가 어떤 이미지인지 충분히 알겠군요. 전에 준 선물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보건(保健)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건강을 지키는 일은 전부 보건에 해당하죠.”

“저는 매우 건강합니다만?”

항상 준비되어있는 내 성창(聖槍)도 매우 양호하다.

“당신이 건강하더라도 주변은 어떨까요? 부모, 친구, 형제, 연인. 영원한 생명을 가진 요정 왕족도 병들어서 죽습니다. 당신도 예외는 아닙니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그 사기적인 종족특성 덕분에 죽진 않겠지만, 병든 채 불행하게 골골 앓으며 생명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선생님. 그것까지 해결되면 신(神)이죠.”

지나친 과욕이다.

건강 관리는 결국 자기 몫이다. 생활습관이 잘못된 사람이 허리디스크와 목디스크로 고생하듯이.

세상에 공짜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

나 대신 공부하고 운동해줄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편하겠는가?

“음양의 조화와 이치에 대해 아시나요?”

“조금 압니다.”

흑화 선배처럼 종족을 따지지 않는 만류귀종(萬流歸從)의 경지에 도달하진 못했지만, 평균 이상은 안다고 자부한다.

“제가 드리려는 건 커플링입니다.”

허공을 향해 손을 한 차례 휘저은 보건교사의 손바닥 위에 한 쌍의 커플링이 뚝 떨어졌다.

...디자인이 굉장히 특이한 커플링이었다.

내가 아는 커플링은 똑같이 생긴 두 반지를 공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장식 부분이 하나는 볼록하고 다른 하나는 오목했다.

둘을 겹치면 ‘8’자 모양이 나왔다.

“8이 아니라 ∞입니다. 제작자가 들으면 섭섭해할 평가는 자제해주세요. 이 커플링은 무한의 띠를 상징합니다.”

“무한이라….”

전형적인 상술이었다. 애초에 커플링이란 명칭도 반지를 팔아먹으려는 장사치들의 속임수이지 않은가?

이 반지들이 ‘영원한 사랑’ 같은 단순한 상징성만 존재한다면, 실망을 넘어서서 보건교사의 능력을 의심해볼 것이다.

“...당연히 평범한 커플링이 아닙니다. 하지만 강한수 학생. 기능성만을 추구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디자인과 브랜드만으로도 값어치 있는 물건이 세상에는 아주 많아요.”

“그런 무가치한 충고는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하죠. 그래서 무슨 기능이 있습니까?”

한숨을 푹 내쉰 보건교사가 답했다.

“애인이랑 커플링을 끼고 음양의 조화처럼 이 부분을 겹쳤을 때 진정한 힘이 발휘됩니다. 미리 노파심에 말해두겠는데, 동성(同姓)끼리는 안 됩니다.”

“성전환하면?”

“...생각지도 못한 편법을 찾아낸 당신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하지만 아직 진정한 힘이란 게 뭔지 듣지 못했다.

설마, 남녀가 합체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극단적인 짓은 하지 않습니다! 이 반지는, 사랑하는 아내를 친누이에게 빼앗긴 사내가 그 한을 담아서 만든 겁니다. 음양의 조화는 번식만을 위한 수단이 아님을 증명하고자 부단히 애썼습니다.”

“그래서 그 기능이 뭡니까?”

몇 번째 질문하는지 모르겠다.

“마약 용사. 순도 69% 로맨티움 반지가 흔한 줄 알아? 저렇게 질질 끌면서 뜸을 들일 가치가 있어. 그 기능을 아직 듣지 못했지만, 전설의 금속을 사용한 이상, 절대로 평범한 반지가 아니야.”

“그거야 써봐야 알지.”

보건교사를 옹호하는 최초의 정령에게 핀잔을 준 나는, 얼른 대답하라고 눈치를 줬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요. 과연, 자연계의 대모이신 최초의 정령님은 이 반지의 구성비율을 정확히 파악하실 수 있군요? 맞습니다. 이 반지는 소유자의 감정에 따라서 최강도, 최약도 될 수 있는 신비의 금속 로맨티움이 69% 함유된 합금입니다. 시스템에 의해 분할되지 않은 진품이기도 하죠.”

“그래서 기능은?”

슬슬 기다리기 짜증 나려고 하는데?

“음양의 조화로 하나가 된 남녀가 이 반지를 끼고 맞대면, 둘 중 하나가 반지를 뺄 때까지 대부분의 힘을 공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언제든 서로를 인식할 수 있으며, 육체와 정신적 고통과 기쁨을 나눌 수 있어요.”

“능력 공유라….”

상당히 흥미로운 기능을 가진 커플링이었다.

어떻게 활용할지는 두고 볼 문제지만, 보건교사의 설명 자체만 봐서는 무척 좋다고 판단됐다.

남은 문제는 하나.

이 반지를 얻으려고 내가 아르바이트를 뛰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강한수 학생에게 나쁜 제안이 절대 아닙니다. 싫다는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애초에 이 일을 맡는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가치 있는 일이예요.”

“질문 하나만 합시다.”

“네. 얼마든지요.”

“어떤 식으로든 마왕 페도나르만 쓰러트리면 되는 겁니까?”

“...그렇긴 한데, 강한수 학생이 질문하니 대단히 불안한데요. 하지만 맞습니다. 최초의 용사가 유명한 이유는 지금까지 누구도 쓰러트리지 못한 마왕 페도나르를 처치했기 때문입니다. 과정이야 어떻든 마왕만 쓰러트리면 이 임무는 끝납니다.”

이 임무를 맡아야 한다는 것 빼고는 전부 마음에 들었다.

첫 번째 보상인 자율출입증.

나는 굉장히 꺼림칙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졸업하지 않아도 언제든 지구에 갈 수 있는 열차표를 얻은 셈이다.

두 번째, 로맨티움 69% 커플링.

보건교사가 이 반지에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면, 활용할 방법이 무궁무진했다. 나랑 똑같은 힘을 발휘하는 초강력 핫팩이 생기는 셈이니까.

야만적인 임무를 전부 떠넘길 수 있다.

“좋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장인어른만 쓰러트리면 된다.

성적표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

지금까지 편파적인 성적표 때문에 회귀를 반복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은 탓일까? 이젠 무시해도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 마음이 지극히 평온해졌다.

“강한수 학생. 이야기가 대충 끝난 것 같죠? 이 커플링은 계약금으로 미리 줄게요. 자율출입증은 끝나고 드리겠습니다. 그걸 받으면, 고향별에 언제든 갈 수 있습니다.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도. 당신이 판타지아 교육장의 위기를 물리쳐주길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보건교사는 진심으로 바란다는 듯이 기도하듯 양손을 꼭 쥐며 내게 작별인사를 건넨 후에 떠났다.

이번에는 ‘떠나는 척’이 아니라 정말로 떠난 것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받은 반지들을 찬찬히 살펴봤다.

로맨티움 69% 합금 커플링.

남성용은 볼록 반지, 여성용은 오목 반지라고 부르자.

이미 누구에게 쓸지도 결정해놨다. 보건교사는 기능성이 전부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건 ‘가진 자’들의 논리다.

외모도 힘이 있어야 꾸밀 수 있다.

“마약 정령.”

“...응?”

“네가 껴.”

나는 머리 위에 천연덕스럽게 앉아있는 최초의 정령에게 오목 반지를 내밀었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파트너는 이 정령이다.

전투력이 부족한 게 흠이지만, 최초의 정령답게 그릇이 무한한 그녀는 내 힘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

또한, 내게 없는 권한과 신분이 이 정령에게는 있다.

“마약 용사. 나처럼 작고 여린 정령에게 이 반지는….”

“남자니?”

“아니다! 내 어딜 봐서 남자라는 거냐!”

“팔목에 껴봐.”

손가락이 너무 작아서 안 맞는다면, 맞는 부위에 끼우면 된다.

상당히 특이한 총배설강을 가진 이 정령의 모호한 성별이 살짝 걸리긴 했지만, 본인의 호언장담처럼 남자는 아니니 문제없을 것이다.

“아! 마약 용사는 천재구나!”

방금까지 낙담하던 최초의 정령이 해맑은 얼굴로 오목 반지를 냉큼 챙기더니 곧바로 손목시계처럼 착용했다.

하지만 아직까진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당연했다.

“자, 이제 맞춰보자고.”

톡.

65년 경력의 정의로운 용사는 최초의 정령이랑 손을 맞댔다!

그리고 모든 게 바뀌었다.

*

*

*

(용사님. 안녕히 주무셨나요? 오늘은 표정이 무척 좋으시네요. 날씨도 역사에 남을 위대한 모험을 시작하려는 용사님을 축복하듯 무척 화창하네요!)

다음 날, 초인종처럼 꼭두새벽부터 내 의식을 깨우는 시스템 메시지가 영혼 깊숙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판타지아 여신’이란 설정다운 여성스러운 목소리로 단단히 무장한 상태였다.

다만,

“이게 좋은 날씨라고?”

구름 하나 없는 하늘은 가뭄을 예고하는 것 같은데?

인간들이 가뭄으로 고통받길 원하는 이 여신의 도덕심을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부탁: 녹화 중입니다.

이봐, 시스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라고 들어봤니?

편집이나 가식 없이 생방송처럼 진행하는 방송을 뜻한다. 그리고 나는 꾸밈없이 진솔한 용사가 될 생각이다.

(...용사님. 이 근방에는 사악한 용이 살고 있어요. 서리왕 에쉬노프. 그놈에게 정의의 철퇴를 꼭 내려주세요!)

그놈이 아니라 그년이야.

최근에 내가 성전환시켜줬거든.

공중파로 녹화할 거면, 기만과 날조 없는 정확한 정보만을 시청자들에게 제공해줄 의무가 있다.

“마약 용사. 나는 좀 더 자고 싶다.”

최초의 정령이 손등으로 눈곱 낀 눈을 비비며 말했다.

“네가 언제 내 허락받고 잤니?”

“...어라? 그렇네. 이것도 반지의 효과인가? 어째선지 네 허락을 안 받으면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게 말하고는 내 머리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나는 팔다리를 움직이며 몸에 이상이 없는지 쭉 확인해본 후, 여관의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휘이잉~

바람의 정령들이 떨어지는 내 몸을 밑에서 떠받들어줬다. 지극히 공손한 자세로.

뿅! 뿅! 뿅! 뿅!

그리고 수많은 정령이 내 앞에 빠르게 집결했다.

“잘 와주었다, 나의 군단이여. 이 세상의 진정한 지배자가 누구인지 악마와 천사들에게 똑똑히 가르쳐주자!”

장인어른은 방어만 하다가 끝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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