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13회차] 선배님부터♬
“이 세계는 처음부터 잘못됐어.”
판타지 야만인들에게 많은 걸 기대하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위생적으로 청결한 환경 속에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용사, 공주, 왕자, 미녀, 대마법사, 소드마스타….
직업과 신분, 외모, 혈통, 재산 등이 아무리 잘났어도 지저분하게 사는 건 똑같다.
신성몰랑제국은 문화와 청결에 특히 신경 썼으며, 씻는 걸 거부하는 자는 역병을 퍼트리려는 반역자로 간주하여 지하감옥에 가뒀다.
하지만 회귀 한 방이면 전부 초기화!
이 세상은 항상 지저분했으니까.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기회가 왔다.
“후학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나쯤은 해두는 것도 좋겠지.”
흑화 선배처럼 이리저리 치이다가 가출하는 한심한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지금부터 판타지아 대륙의 역사를 새롭게 쓰면, 여기에 맞춰서 후학들과 재학생의 교과서에 영향을 줄 것이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수세식 변기로 이 세상을 정화하리라.”
마스터 몰랑의 위대함을 널리 알리고 싶지만, 이 야만인들에게는 맹목적인 종교보다도 청결이 시급했다.
수세식 변기 보급을 거부하는 나라들을 굴복시키고, 쓰레기 투기와 노상 방뇨를 법으로 엄히 다스리도록 할 것이다.
이걸 말로 설득하긴 힘들다.
돈이 굉장히 많이 들기 때문이다.
일전에 쏘시아에게 부탁해서 수세식 변기를 신성몰랑제국에 보급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변기를 제작하는 건 그렇게 힘들지 않은데, 상수도와 하수도를 전부 갖추는 게 문제다.
지하수나 강물을 펌프 대신 마법 도구로 끌어와서 모든 집에 파이프로 연결하는 게 쉽지 않다.
이 시대는 모든 금속이 무기제작용이다.
왕족과 귀족, 부유한 상인이 아니면 금속으로 된 숟가락은 하나 가지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이런 금속으로 된 파이프를 집마다 연결한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것도 하필이면 물과 똥을 운반하는 용도로.
재상과 사령관 등이 펄쩍펄쩍 뛴다.
판타지 야만인들의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낭비인 셈이다.
“써봤어야 알지.”
사치품으로 취급되는 슬라임식 변기도 나쁘지 않지만, 양산이 너무 어렵다.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 슬라임만이 비좁은 변기에서 쭉 생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약 용사. 고작 그런 이유로 내 아이들을 부려먹지 마라.”
최초의 정령이 항의했다.
“어허! 이건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목적이고, 아까도 말했다시피 악마와 천사를 몰아내고 정령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드는 게 진짜야. 네가 힘을 잃고 마약 정령이 된 원인이 누구 때문이냐?”
“너.”
이 멍청한 정령이 별 고민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맞잖아. 나는 너의 마약에 찌든 불우한 정령이다. 이건 불가항력이야. 그러니 네 잘못이 맞다.”
“네가 힘을 잃은 이유는?”
“못된 동생들 때문이지.”
여기서 동생은 최초의 악마와 최초의 천사를 뜻한다.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으니 진짜 형제자매는 아니지만, 배신과 통수가 난무하는 콩가루 집안이란 건 틀림없다.
“이유가 더 필요해?”
“음…. 아니.”
그 뒤는 간단했다.
정령들이 빠른 속도로 세상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무식한 야만인들은 정령들의 진정한 힘을 전혀 모른다. 정령을 ‘원소’에 묶어서 생각한 탓이다.
땅의 정령: 고체 조종
불의 정령: 에너지 생성
바람의 정령: 벡터 생성
물의 정령: 액체 조종
마음의 정령: 호르몬 조종
정령들의 능력은 훨씬 위협적이며 광범위하다. 제대로 싸우면 그 어떤 종족도 당해낼 수 없다.
생명체는 고체와 액체로 이루어져 있으며, 에너지와 벡터랑 깊은 연관이 있는 칼로리를 소모하며 산다. 그리고 내분비샘에서 생산하는 호르몬의 지배를 받는다.
우선, 가벼운 것부터 시작해볼까?
“우리에게 저항하는 인간은 오늘부터 설사하게 되리라.”
나는 선언했고, 이것은 실현될 것이다.
*
*
*
판타지아 세계의 북단인 북대륙 북부를 기점으로, 판타지 야만인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내게 항복하며 복속해왔다.
순탄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수세식 변기 보급에 드는 비용을 부담이 싫어서 대항하는 멍청이도 간혹 있었다.
그들의 말로는?
뿌지지!
먹고 싸는 기본적인 생명 활동이 고통이고 지옥이 됐다. 처음에는 식중독을 의심했던 그들은 한참 뒤에야 ‘마음의 정령’이 한 짓임을 눈치챘다.
호르몬 조작!
설사는 살짝 맛보기로 보여준 것이다.
“하, 항복합니다.”
“설사는 그만, 제발 그만…!”
“어찌 이리도 잔인할 수가!”
“흑흑! 엉덩이가 아파.”
다섯 정령이 전부 나설 것도 없었다.
호르몬을 지배하는 마음의 정령만으로도 약소국들은 바로 백기를 들었고, 설사로 고통받은 그들은 수세식 변기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것이 바로 일석이조(一石二鳥)!
남은 건?
뛰어난 능력으로 호르몬 조작을 회피한 자들뿐.
강대국의 지배층은 본인의 힘이나 비싼 마법 물품으로 자기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이건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이 용사님의 실력을 보여줄 때로군.”
“마약 용사! 설사는 괜찮지만, 폭력은 나쁘다! 아이들을 전쟁에 이용하진 마라!”
최초의 정령이 근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단 이틀 만에 평화적으로 북대륙의 50%를 복속한 MAX급 용사님은 친절하게 요정의 요추(腰椎) 4번과 5번 사이를 어루만져줬다.
이 용사님을 어떻게 보고!
“전쟁은 안 해. 보고만 있어.”
이 시대의 북대륙은 마법왕국의 원조인 마법제국이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이틀 동안 병합하지 못한 50%가 이 제국의 영토였다.
하지만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친애하는 나의 백성들이여! 걱정하지 마라. 수세식 변기란 수상한 물건을 팔며 용사를 자칭하는 사악한 존재와 정령들로부터 그대들을 지켜주겠다. 지금까지 마법제국은 무수히 많은 위기를 극복해왔고,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마법제국의 황제로서 약속하겠다! 마지막까지 그대들을 포기하지 않고 함께 싸우겠노라!”
...라고 마법제국 황제가 황궁 테라스에 서서 외쳤다.
거짓말로 가득한 연설.
저걸 가만히 놔두면 용사라는 이름이 운다.
나는 신속하게 간섭했다.
“무식한 나의 백성들이여! 걱정하지 마라. 수세식 변기란 완벽한 물건을 팔며 용사를 자칭하는 선량한 존재와 정령들로부터 그대들을 격리해주겠다. 지금까지 마법제국은 무수히 많은 사기를 쳐왔고,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마법제국의 황제로서 약속하겠다! 마지막까지 네놈들을 지켜주지 않고 나만 챙기겠노라!”
동정을 유지했다면 현자가 됐을지도 모를 뛰어난 마법사이기도 한 마법제국의 황제는 호르몬 조작을 막아냈다.
하지만 목소리는 어떨까?
입 밖으로 나온 ‘음파’는 초속 340m로 퍼져서 주변 사람들의 고막을 진동시킨다.
음파는 진동이기에 벡터를 따른다.
여기에 바람의 정령이 간섭해서 그 벡터를 만지작거리면?
“헉! 황제가 미쳤어?!”
“도망쳐! 저 황제는 위험해!”
“어, 어찌 저런 막말을….”
“황제가 백성을 버렸다!”
마법제국 황제가 말하자마자 슬쩍 바꿔치기한 내 엉뚱한 연설문을 들은 마법제국 백성들은 공황에 빠졌다.
어째서 백성들이 격분하는지 모르는 황제도 혼란에 빠졌고, 설사로 고통받는 와중에도 충성심만으로 버텨온 귀족들은 무척 실망했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이때,
“안녕하십니까, 마법제국 백성 여러분. 저는 황제 폐하께서 소개하셨던 정의롭고 선량한 용사입니다. 또한, 저는 이 나라의 진정한 정통계승자임을 이 자리에서 당당히 밝히는 바입니다. 제 손가락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이 옥새를 봐주십시오!”
유모, 감사합니다.
당신이 준 유전자는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Z급 날조가 힘을 더하면서, 우매한 마법제국 백성과 귀족들을 단숨에 매료시켰다.
(저기, 용사님? 세상을 구하시려는 거 맞죠? 이건 아무리 봐도 용사의 모험이 아닌데요….)
멍청한 여신님. 잘 들어.
도굴꾼처럼 무덤과 유적 등을 파헤쳐서 보물을 빼먹는 양아치가 세상을 구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진정한 용사라면, 정정당당하게 선동과 날조로 승부해야 한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이 나라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정통후계자를 새 황제로…!”
“과연! 그래서 저리 강했던가!”
단 이틀 만에 판타지아 북대륙의 절반을 복속시킨 ‘정의로운 용사’를 모르는 원주민은 없었다.
그들은 내 말에 호응했다.
내가 모든 정령을 지배할 만큼 강한 이유도, 대마법사였던 초대 황제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았기 때문이란 식으로 해석됐다.
“어, 어찌 이런….”
중요한 연설을 망친 무능한 황제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제자리에서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옥좌에 오래 버티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정의로운 65년 경력 용사님은 수세식 변기를 널리 보급하며 북대륙을 이롭게 했다.
하지만 아직 다 끝난 게 아니다.
마왕 페도나르 못지않게 위협적인 불순분자가 이 대륙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너, 너, 너는 추방.”
나는 선배와 라누벨, 알렉스를 북대륙에서 쫓아냈다.
물론,
“잠시만요! 라누벨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귀여운 척하는 항의가 있었다.
“네 잘못이 뭐냐고 물었냐?”
“네!”
“너는 숨 쉬는 것 자체가 죄다.”
“에엣?!”
설녀가 나를 선택한 일로 충격받은 선배는 별 불만 없이 배를 타고 도망치듯 떠났다. 그리고 그의 뒤를 동료들과 응원단이 따랐다.
물론, 남은 자도 있었다.
“성녀C. 너는 안 따라가냐?”
“저를 그런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나랑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린 성녀C가 새침한 어조로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리고 덧붙이듯이-
“하지만 당신이 좋다면 어쩔 수 없고요.”
“호오?”
“뭐, 뭔가요! 그 의미는! 저는 어디까지나 같은 모험가로서 당신의 행동이 좋다고 말한 것뿐이에요! 물론, 남자로서 능력이 마음에 안 든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지만!”
“그래그래.”
내 가벼운 대답에 눈살을 찌푸린 성녀C가 말했다.
“정말이라니까요. 자기 뜻대로 안 되는 모든 문제를 물리적인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1위보다 훨씬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당신이라면, 그들이 원하는 진정한 용사가 될지도 몰라요.”
“욕은 적당히.”
교직원 일동이 원하는 용사? 듣기 불쾌하구먼!
“나름 용기 내서 말한 칭찬이거든요?! 제가 칭찬에 얼마나 인색한 줄….”
“관심 없어.”
“아, 네.”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성녀C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차례.
“선배. 소원대로 퇴장해주셔야겠습니다♪”
이 시대의 주역은 나다.
추방당하듯 떠난 선배가 다른 대륙에서 5대 재앙을 쓰러트리고 명성을 쌓으면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그래서 노래한다.
선배와 라누벨 등이 탄 배가 항구를 떠나는 광경을 구경하며, 인어왕에게 배운 지배의 노래를.
“Good bye, Good bye. Good bye~♬”
아름다운 바다인어들의 환대를 받은 저 배는 바다 한복판에서 가라앉을 것이다.
다음 차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