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13회차]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라!
(용사님.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니에요! 사악한 마왕이 움직이고 있다고요!)
존경하는 여신님. 눈 뜨고 일해라.
마왕 페도나르에게 세상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정의로운 용사가 선점하려고 바쁘게 움직이는 게 안 보이십니까?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의문: 굳이 그를 비참하게 탈락시킬 필요가 있었습니까? 그가 흑역사를 지우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려는 이때, 방금 같은 탈락은 더욱 상황을 악화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가만히 놔두면 접싯물에 코 박고 알아서 퇴장할 거라고 말씀드린 거로 아는데요.
멍청한 시스템. 걱정할 거 없어.
선배가 바다에서 빠져 죽은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정의로운 용사는 선배와 그의 동료들이 마음 편히 떠날 수 있도록 항구까지 정중히 배웅해줬고, 그걸로 이번 사태는 종료.
깔끔한 마무리다.
☞포기: 녹화를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판타지아 북대륙 야만인들에게 선진문물을 전파한 정의로운 용사님은 멈추지 않았다. 이대로 판타지아 전역에 수세식 변기를 보급해서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고 깔끔하게 볼일을 볼 수 있도록 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한 용사 아니겠는가?
며칠 동안 부지런히 뛰어서 ‘귀여운 소녀A’를 구하고 혼자 뿌듯해할 순 있지만, 그렇게 해서 세상이 평화로워질까?
대국적인 관점에서, 야만인들의 전반적인 생활 수준과 행복지수를 올리는 내 행동이야말로 진짜 의미 있는 일이다.
나는 ‘북대륙을 통일한 정의로운 정령황제’란 이름으로 약 2달 동안 북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수세식 변기 설치에 힘썼다.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수도관과 정화조를 매설하고 관리자를 선임했다.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이런 지식이 원래 없었는데, 신성몰랑제국에 수세식 변기를 보급하는 과정에서 배우게 됐다.
당시의 보급관은 쏘시아.
나는 지금 그녀가 하던 일을 흉내 내는 중이었다.
“정령황제 만세!”
“수세식 변기 만세!”
“폐하! 오래오래 사십시오!”
“죽을 때까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하루의 시작이 즐거워요!”
나날이 인기가 올라갔다.
용사가 어떤 몬스터를 쓰러트렸다는 소문은 결국 남의 일이다. 외국에서 벌어지는 전쟁만큼 머나먼 이야기.
하지만 수세식 변기의 보급은 다르다.
매일 빼놓을 수 없는 생리현상이랑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북대륙 원주민이라면 귀를 쫑긋 세울 수밖에 없다.
물론, 2달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북대륙은 넓고, 수세식 변기를 설치할 기술자는 부족했다. 하지만 내가 작업하는 걸 의무적으로 지켜본 마법사와 기술자들이 부지런히 배우고 있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2달.
내 도움 없이 그들끼리 시설을 설치하는 전 과정을 지켜본 후에야 안심하고 이 작업에서 완전히 손을 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걸로 끝난 게 아니다.
“계속 가보실까!”
판타지아 세계는 북대륙이 전부가 아니다.
설녀의 깃털을 이용한 차원이동은 보류하게 됐지만, 그보다 한 단계 낮은 공간이동까지 막힌 건 아니다.
이 깃털만 있으면 판타지아 대륙 어디든 단숨에 갈 수 있다.
☞요구: 전에 부탁드렸던 파티 소개를 해주십시오. 모험 전에 꼭 필요한 절차이니 귀찮더라도 하셔야 합니다.
요구도 많구먼.
정의로운 MAX급 용사님의 모험에 한 발 걸쳐서 영광을 누리려는 얌체들을 살짝 소개하겠다!
첫째, 애완몬스터 설녀.
공간계열 마법의 촉매로 매우 유용한 날개 깃털을 가진 돌연변이 하피다.
전투력은 기대하기 힘들며, 손이 없어서 누군가 챙겨주지 않으면 안 되는 골칫덩어리다. 하지만 내가 챙길 건 아니기에 깃털 보급용으로 데리고 다닐 예정이다.
둘째, 암살자 그림자A.
유감스러운 요정왕을 사모하는 유부녀다. 명예교사의 지위를 가지고 있어서 용사들의 동태를 스토커처럼 살필 수 있다.
손이 없는 설녀의 보모 역할을 맡고 있으며, 입만 열면 남편 찬양이라서 멀리하고 싶은 요정 아줌마다.
셋째, 마약 정령.
최초의 정령이란 어마어마한 신분이랑 달리, 전투력은 한없이 밑바닥을 달리고 있다.
하지만 보건교사가 준 커플링을 끼고 파워업!
여전히 내 머리 위에서 안 내려오려고 해서 문제지만, 유사시에는 나 대신 싸울 수 있다.
특징으로는 구조가 특이한 총배설강을….
“그런 상스러운 소개는 좀 빼라! 그나저나 마약 용사. 네 파티가 아주 꽃밭이 됐구나!”
그 최초의 정령이 헛소리를 지껄였다.
“어딜 봐서?”
“어딜 보더라도.”
“네 눈은 옹이구멍이니? 눈 뚫고 잘 봐. 하나는 유전자조작이 의심되는 몬스터고, 또 하나는 온종일 남편만 찾는 유부녀야. 그리고 너는 성별이 없는 정령. 이게 꽃밭이면 선배는 식물원이지.”
이제 슬슬….
“잠시만요! 저는 왜 빼나요!”
설녀의 깃털을 활성화해서 서대륙까지 단숨에 이동할 예정이었던 나는, 성녀C의 참견으로 잠시 멈췄다.
남자로서 솔직하게 그녀를 평가해보자.
얼굴S, 가슴S, 허리S, 엉덩이S, 다리S, 목소리S….
하지만 그게 끝이다.
성녀C에게 맡길 포지션이 없었다.
(용사님. 그녀는 용사 후보였던 만큼 다방면으로 유능해요. 또한, 여신이라고 소개해도 믿어질 아찔한 미모 덕분에 정보수집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답니다! 동료로 영입하면 큰 도움이 될….)
“북대륙을 부탁해!”
“...네?”
(뭘 부탁한다고요?)
성녀C와 판타지아 여신이 동시에 어리둥절했다.
“내가 없는 동안 북대륙을 관리해줘. 잘하면 그냥 너에게 계속 맡길 테니 열심히 해봐. 기준은 간단해. 수세식 변기를 널리 보급해서 여행자들도 어렵지 않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쉽지?”
“쉽진 않지만, 그 변기는 저도 바라는 바예요.”
예의상 거절하는 척이라도 할 법한데, 성녀C는 내 제안을 냉큼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술집에서 그녀의 하소연을 들어본 결과, 출세욕 같은 야망이 무척 큰 여자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내 모험에 끼려던 것도, 다 끝난 나중에 그럴싸한 감투 하나쯤 받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감투를 지금 준다고 하니, 망설임 없이 덥석 물었다.
“이것으로 북대륙은 마왕의 손아귀에서 미리 해방됐고….”
이제 다른 대륙으로 넘어갈 차례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설녀의 깃털을 활성화했다.
마탑에서 이용하는 공간이동 마법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초장거리 도약이었지만, 내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설녀의 깃털처럼 대단한 아이템은 어려운 임무를 완수하고 1개 받는 게 일반적인데요….)
쪼잔한 여신님은 잠자코 있어.
전폭적으로 지원해준다고 떠들더니, 교직원 일동처럼 주둥이로 나불거리는 게 전부다.
물론, 그 이유는 잘 알고 있다.
자기들의 개소리(가르침)가 그 어떤 아이템보다도 귀중한 지원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파앗!
단 2달 만에 북대륙에 평화와 청결을 가져다준 정의로운 용사와 잡것들은 서대륙으로 떠났다!
*
*
*
내가 아는 서대륙은 빛을 먹고 사는 초대형 파리 ‘루시퍼’의 과도한 번식으로 1년 내내 어둠만 이어지는 추운 세계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평범한걸?”
툰드라 같았던 날씨도 온난했고, 하늘은 흐리긴 해도 어둡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 원인은 간단했다.
현대의 서대륙에선 하늘을 뒤덮을 만큼 많았던 루시퍼가 이 시대에는 별로 없었다.
그 대신,
번개를 쏘는 초대형 모기가 있었다.
파지지직-!
녀석들이 주삿바늘처럼 생긴 주둥이로 번개를 허공에 쏘면, 불나방처럼 그 빛에 매료된 루시퍼들이 가까이 다가갔다가 타죽었다.
그야말로 루시퍼의 천적!
최초의 정령이 사족을 붙였다.
“제우스. 루시퍼와 흡혈귀의 체액만 빨아먹고 사는 모기다. 현대의 판타지아 대륙에서는 멸종한 생물이지.”
“나도 알아.”
제우스가 쏘는 번개는 특이하게도 ‘햇빛’ 속성을 가졌다. 그래서 흡혈귀에게도 대단히 위협적이다.
녀석들은 벼락에 맞고 기절한 흡혈귀의 피를 빨아먹는다. 피를 빠는 흡혈귀가 역으로 빨리는 황당한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이 먹이사슬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건 불행이자 비극이었다. 용사에게 한 차례 토벌당한 망령왕 섹스피어가 흡혈귀의 몸을 차지한 탓이지. 놈은 흡혈귀에게 위협적인 제우스를 싹 몰살시켰다. 그리고 천적이 사라진 루시퍼는 기하급수적으로 번식해서 서대륙을 삼켜버렸고.”
최초의 정령이 다 아는 내용을 주절주절 떠들었다.
“마약 정령. 그 정보는 이제 쓰레기야.”
“어째서?!”
“정말 몰라서 물어?”
이 정의로운 용사님이 역사를 새롭게 쓸 것이다.
서대륙에서 할 일이 하나 더 늘었다.
수세식 변기를 보급하는 건 기본이고, 여기에 멸종위기생물인 제우스를 지키는 임무가 추가됐다.
하지만 만만치 않았다.
내가 아는 서대륙은 빛 한 점 들지 않는 ‘죽은 대륙’이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보라!
중앙대륙만큼 살기 좋은 녹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심지어,
“오늘은 내가 모험가 할래!”
“그러면 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상인!”
“나는 또 마왕이야? 정말 너무해!”
도시와 마을 밖에서 아이들이 진지하게 노는 모습이 보였다.
지구에서는 별거 아닌 풍경이지만,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판타지아 세계에서는 아니다.
아이들이 크면서 부모에게 가장 먼저 배우는 가르침이 ‘절대 울타리 너머로 나가지 말 것’이다.
그런데 저 아이들은 겁도 없이 마을 밖에서 놀고 있었다.
그만큼 치안이 확보되어있다는 의미.
극히 드문 일이다.
“흐음…. 서대륙은 정보를 처음부터 다시 수집해야 할지도 모르겠는걸.”
회귀를 반복하며 쌓은 65년 경력이 별 도움 안 됐다.
“마약 용사! 내게 물어봐라!”
“그럴 필요 없어.”
“왜?”
“서대륙에 사는 정령들에게 정보를 받는 중이야. 호오? 흥미로운걸. 산 채로 잡은 제우스를 발전기로 써서 순수과학을 발전시키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어.”
서대륙 토박이 정령들의 정보 다운로드가 완료됐다. 그리고 흥미로운 사실들을 몇 가지 알게 됐다.
마도공학이 아닌 순수공학이 연구되고 있었다.
그 시작은 강력한 흡혈귀들에게 위협적인 제우스를 활용하는 거였는데, 그렇게 무기를 개발하던 중에 ‘가전제품’이라고 부를 만한 발명품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매연에 뒤덮인 고향별 지구의 세계사를 들여다봐도 알 수 있다.
과학과 기술은 전시(戰時)에 급속도로 발전한다.
판타지아 서대륙도 그랬다. 흡혈귀들에게 대항할 용도로 무기를 개발하던 도중에 여러 편리한 가전제품들이 탄생했다.
대량생산과 실용화 단계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지만.
“마약 용사. 그래서 관심 있어?”
“...아니. 유감스럽게도 너무 늦었어.”
보건교사가 약속한 자율출입증을 받으면 지구로 귀환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고생할 필요가 있을까?
수세식 변기 하나 보급하기도 쉽지 않은 이 세상에 모든 문명이기를 널리 알릴 필요는 없다. 마법이란 대용품이 있기도 하고.
물론,
“멸종생물은 보호해주겠지만.”
전자공학을 살릴지 버릴지는 원주민들이 알아서 선택할 문제다.
용사인 내가 할 일은 ‘망령왕 섹스피어’를 찾는 것이다.
녀석이 살던 아지트 위치는 가봐야 의미 없다. 선배에게 한 차례 패배하기 전이기 때문이다.
아주 간단한 원리다.
망령왕 섹스피어가 흡혈귀의 몸을 차지해야만, 흡혈귀에게 위협적인 초대형 모기에게도 멸종위기가 찾아온다.
시기상 아직 그 전이다.
내가 너무 빨리 왔나?
☞긍정: 북대륙에서 서리여왕 엘쉬의 위협을 너무 빠르게 해결하고 서대륙으로 넘어왔습니다. 망령왕 섹스피어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2년 뒤입니다.
2년?! 그동안 선배는 북대륙에서 뭘 했대?
☞검색: 그는 북대륙에서 활동한 846일 동안, 할아버지 9명, 할머니 5명, 소년 3명, 소녀 39명, 유부남 27명, 유부녀 35명, 총각 2명, 처녀 24명, 남자아이 2명, 여자아이 56명을 직간접적으로 도왔습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25831명을 살해했습니다. 명성과 평판은 각각 3%, 2%씩 상승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과연 시스템. 수치화해서 세세하게 기록해두고 있었다.
그런데 저걸 본 탓일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현재까지 내 상황은 어때?
☞조사: 용사 강한수는 북대륙으로 소환된 67일 동안, 할아버지 694명, 할머니 1405명, 소년 2069명, 소녀 6395명, 유부남 25931명, 유부녀 73948명, 총각 4850명, 처녀 19530명, 남자아이 596명, 여자아이 978명을 직간접적으로 도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0명을 살해했습니다. 재조사 실시…. 0명을 살해했습니다. 명성과 평판은 각각 594%, 13960% 상승했습니다.
선배처럼 극단적이진 않지만, 나도 남성보다 여성이 높게 나왔다. 나는 딱히 편중해서 도운 적이 없는데?
☞분석: 수세식 변기는 남성보다 여성들에게 만족도가 높게 나왔습니다. 또한, 사회활동을 하는 남성들은 세금 상승의 원흉이라면서 상대적으로 낮은 만족도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지난 2달 동안 당신이 아무도 살해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물론, 부상자는 기록적으로 많았습니다.
뭐? 부상자가 있었다고? 나는 기억에 없는데?
시스템. 말도 안 되는 억지 부리지 마.
☞설명: 목디스크 29502명, 허리디스크 33410명이 집계됐습니다. 원하신다면 성별과 나이대로 세세하게 구분해드릴 수 있습니다.
...뭐야?
☞의문: 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있어. 어째서 목디스크보다 허리디스크가 많은 거지? 나는 공명정대하게 1대1 비율로 한 것 같은데!
☞오류: 질문의 의미 해석 불가.
이 뒤로 시스템과 판타지아 여신은 한동안 참견해오지 않았다.
조용해서 좋구먼!
그동안 나는 서대륙에서 정령들까지 동원하여 망령왕 섹스피어를 열심히 찾아다녔다.
끝끝내 찾긴 했는데….
“이 녀석, 도저히 악당으로 안 보이는데?”
아직 ‘망령왕’이라고 불리기 전인 섹스피어는 요추(腰椎) 4번과 5번 사이가 항상 아픈 풋풋한 40대 대마법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