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240화 (240/430)

 240화

[13회차] 발명가

“악당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남의 혼잣말을 엿듣고 질문하다니, 예의가 없네.”

“미, 미안하게 됐소.”

대마법사 섹스피어는 발명가였다. 연구실 겸 실험실 겸 침실 겸 식당인 장소에서 거의 온종일 연구만 하는 일벌레였다.

하지만 그는 괴짜 같은 게 아니다. 서대륙에서는 그 같은 발명가와 마법사가 무척 많기 때문이다.

단 하나 차이가 있다면?

“섹스피어 씨. 다음에도 사람이 필요하면 불러주세요.”

꾀죄죄한 몰골로 사는 독수공방 노총각의 집에 이팔청춘의 아가씨가 방문해있었다는 점이다.

눈이 확 돌아갈 만큼 대단한 미인인 건 아니었다. 지구에서 태어났다면 또 다르겠지만, 평균 외모가 쓸데없이 높은 판타지아 대륙에서는 평범보다 살짝 나은 축에 속했다.

즉, 흔한 아가씨였다.

하지만 여기서만큼은 달랐다.

바로 옆에 공주님이나 미녀를 세워놨다면 모르겠지만, 주변이 워낙 칙칙한 공방인 바람에 상대적으로 더 예뻐 보이는 대비 효과(contrast effect)가 있었다.

▶당혹: 평가가 너무 짜신 것 같아요. 미녀는 그냥 순수하게 미녀라고 불러주세요.

걱정하지 마, 교생 아가씨.

교생 아가씨가 이쁘다는 건 우주가 알고 나도 아니까!

▶뿌잉: 보신 적도 없잖아요.

글쎄에~

“연구에 협조해줘서 고맙다. 여기, 약속한 보수.”

대마법사 섹스피어는 그 아가씨에게 아기 주먹 크기의 돈주머니를 건넸다.

짤랑!

금화보다는 못하지만, 조그마한 돈주머니에서 은화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청아하게 들렸다.

이걸 임상시험이라고 하던가? 주로 제약회사에서 신약의 검증을 위해 하던 거로 안다.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정령들이 곧바로 그 아가씨의 신상정보를 물어왔다.

전염병으로 부모를 일찍 여의고, 5명이나 되는 어린 동생들을 혼자 키우는 장녀이자 가장이라고 한다.

영주의 성에서 하녀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있지만, 동생들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환경에서 돌보기 위해 부업으로 임상시험에 꼬박꼬박 참가하고 있다.

지구에서는 돈을 받고 ‘안전한 실험’에 동참하는 임상시험이 꽤 보편화 되었지만, 판타지아 대륙은 아니다.

이 야만인들에게는 ‘안전성 테스트’란 개념이 없다.

새로운 마법 도구를 개발하면 곧바로 실용화 단계에 들어간다. 그러다가 부작용이나 후유증, 문제점 등이 발견되면 그때 다시 수정, 보수한다는 방식이다.

아주 미묘한 차이.

나는 ‘판타지 야만인’다운 사고방식으로 섹스피어에게 질문했다.

“이 돌덩이는 어디에 쓰는 겁니까?”

“돌덩이가 아니라 골렘이오. 생긴 건 기존의 인간형이랑 다르지만, 의자처럼 생긴 요 부분에 앉으면 골렘이 온몸을 주무르며 마사지해주는 획기적인 도구지!”

골렘으로 안마의자를 만들었다는 것 같다.

“그거참 굉장한 도구로군요! 저에게 하나 파십시오.”

정말로 팔면 곤란하다. 나에게는 이딴 골렘보다 훨씬 부드럽고 따스한 안마기가 호주머니에 항상 들어있기 때문이다.

최근 2달 동안 쓰지 못해서 온몸이 찌뿌둥하긴 하지만!

“미안하지만 그건 팔지 않소. 아직 안전검사가 끝나지 않아서 당장 팔긴 어렵고, 나는 그리 돈이 궁핍한 발명가가 아니오.”

판타지 세계에서는 발명가에게 후원해주지 않는다.

이건 저작권을 보장해주지 않는 탓인데, 기껏 개발해서 대박이 나더라도 남들이 바로 흉내 내버리면 연구비와 개발비를 회수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판타지아 대륙에서 과학기술은 답보하고 마법만 발전했다.

보안시스템이 없는 가전제품은 뜯어보면 바로 복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마법은 마법사 본연의 실력이 안 따라주면 흉내를 내고 싶어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제가 써보겠습니다. 써보고 문제가 생기면 그때 고쳐주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젊은 사람이 참 고집불통이군! 안 판다고 했소. 잘못돼서 뼈라도 바스러지면 누구를 탓하려고? 그러니 포기하시오. 안전검사가 끝날 때까지는 절대로 안 팔 거요.”

보통의 발명가와 마법사라면 망설임 없이 팔았을 것이다.

돈을 벌면서 안전검사도 할 수 있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상황이니까.

그러다가 문제가 생겨도 책임지지 않는다.

구매자의 실수로 도구가 오작동을 일으킨 것이란 식으로 몰아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뒤에선 그 오작동을 수정하지만.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안 판다고 하니 어쩔 수 없군요. 그러면 이건 팝니까?”

“어디에 쓰는 약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사겠다는 것이오?”

“몸에 좋은 약이겠지요!”

조금 전에 온 아가씨가 먹은 약이다.

“그것은 영혼을 지켜주는 약이오. 죽음에 이르는 부상으로 시체가 되더라도 외상만 마법으로 완벽히 치유하면 다시 영혼이 육체에 들어가서 살아날 수 있는 불사의 묘약이지.”

“오! 정말 대단하군요!”

살짝 과장하긴 했지만, 이번에는 반쯤 진심으로 한 말이다.

불사의 묘약.

저것이 이 풋풋한 40대 대마법사를 훗날 ‘망령왕’이라고 불리게 해주는 근원임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저도 하나 주십시오.”

이 약의 구성성분을 분석해서 나도 만들어볼 생각이다.

몸에 좋은 약이라고 속여서 선물세트처럼 구성하면, 어머니의 테니스라켓 위력이 조금은 약해질지도 모르니까.

“나도 그러고 싶지만, 이건 장복해야 효과가 있소. 현재까지는 나와 조금 전에 본 아가씨만 먹고 있지. 재료가 귀해서 많이 만들고 싶어도 그럴 수 없고, 효과를 확인하려면 죽어야 한다는 문제도 있소. 그래서 원래는 나 혼자만 먹으려고 했는데….”

섹스피어는 내가 정령에게 들었던 아가씨의 신상정보를 비슷하게 읊었다.

객관적인 제삼자의 눈으로 본 정령의 분석이랑 달리, 그 영악한 아가씨가 자신의 처지를 좀 더 처량하고 불쌍하게 표현해서 이 순진한 40대 아저씨를 속인 감이 적잖아 있었지만.

대략적으로는 맞았다.

“...어린 동생들이 어엿한 성인이 되어 독립할 때까지 그 아가씨는 죽을 수 없다오. 그 사연을 들은 나도 더는 만류할 수 없었지. 현재까지는 나나 그녀나 몸에 이상이 없지만,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라오. 이런 걸 돈 받고 팔순 없소. 재고도 부족하고.”

...장인정신이 상당히 투철했다.

호구로서도 100점 만점!

손해만 보며 사는 이 대마법사가 어쩌다가 흡혈귀마저 두려움에 벌벌 떠는 망령왕이 됐는지 의문스러워졌다.

그렇다고 2년을 기다릴 순 없고….

“아! 결혼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나는 북대륙에서 암흑공주를 보았다. 하지만 망령왕 섹스피어는 흡혈귀가 아닌 완벽한 인간이었고, 결혼은커녕 연애조차 시작하지 않은 40대 미혼남이었다.

순서가 크게 어긋나있었다.

그렇다면 암흑공주의 족보는 어떻게 되는 거지?

“결혼…. 크흠!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오. 이 연구가 끝날 때까지 마도사를 유지해야 하기에.”

지구였다면 말도 안 되는 변명이지만, 능력치가 실존하는 판타지 대륙의 원주민의 말이라서 코웃음 칠 수 없었다.

섹스피어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었다.

▷종족: 그랜드 휴먼

▷레벨: 999+

▷직업: 마도사(동정→지혜)

▷스킬: 마술ZZZ 마도ZZZ 마력Z 요술Z 지력Z…

▷상태: 양호

스킬 ‘마술’과 ‘마도’의 등급이 극단적으로 높았다.

판타지 원주민 남성들이 오랫동안 동정을 유지하면 전직할 수 있는 직업은 2가지다.

현자와 마도사.

현자는 ‘마력’을 올려주고, 마도사는 ‘지혜’를 올려준다. 둘 다 장단점이 있지만, 마법사로서 정점을 찍는 최단코스임은 틀림없다.

그래서 노리는 마법사들이 적지 않다.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지만.

몬스터의 습격과 인간들끼리의 전쟁이 끊이지 않는 판타지아 대륙에선 남성의 사망률이 매우 높은 탓이다.

그래서 가정형편이 조금만 돼도 한 집에 아내가 두셋씩 된다. 인구가 곧 국력인 시대이기에 국가에서 장려한 영향도 있지만, 몬스터와 도적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든든한 사내를 원하는 아가씨들의 소망이 더욱 크게 작용했다.

남자들이 대마법사를 꿈꾸며 동정을 유지하고 싶어도 여자들이 가만 놔두질 않는다고 할까!

여성도 비슷한 직업이 있다.

하지만 이쪽은 심각한 하자가 있다.

순결을 쭉 유지하면 100% 전직해서 ‘마녀’가 될 수 있는데, 일단 전직하면 순결은 의미가 없어지고 외모가 뛰어날수록 마력이 상승한다.

결혼할 수 있게 됐으니 기뻐할 일이지만, 외모에 자신 없다면 직업을 얻어도 의미가 없다.

이게 좋은 걸까, 나쁜 걸까?

그 답은 마녀로 전직한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안 하는 거군요? 그런 거로 합시다.”

“정말이오!”

“누가 뭐랍니까.”

망령왕 섹스피어에게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모를 뽐내는 흡혈귀 아내가 다섯 명이나 됐다.

하지만 전부 결혼하지 않은…. 음?

나는 여기서 무언가 걸리는 설정 오류가 있음을 눈치챘다. 암흑공주가 진즉 태어나서 선배의 동료로 활동 중일 때부터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장사 많이 하세요. 곧 망할 것 같지만.”

“절대로 안 망하니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훈훈한 덕담을 남기며 아저씨 섹스피어랑 헤어졌다. 그리고 지금부터 다른 방향으로 조사해보기로 했다.

▶반짝: 이 수수께끼 같은 상황을 풀 계획이 있으시군요!

물론이야, 교생 아가씨!

가장 쉬운 방법은 자칭 여신님에게 물어보는 거지만, 시스템이 오류 났다는 메시지가 뜬 이후부터 침묵하는 바람에 이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직접 뛰는 수밖에!

하염없이 2년 동안 기다릴 순 없고, 선배가 안타깝게 자연재해로 퇴장하면서 역사가 틀어진 상황이다.

그러니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

“암흑공주의 모친부터 만나봐야겠군.”

서대륙 최고의 미녀로 유명한 흡혈귀. 그녀라면 이 꼬여버린 족보의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

*

*

...생각보다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서대륙의 환경이 항상 어두컴컴했던 현대랑 다른 탓이다.

내가 알던 흡혈귀들은 인간처럼 지상을 활보하고 다녔지만, 이 고대의 흡혈귀들은 빛을 피해 그늘진 곳으로 전부 피신했다.

도시를 통치?

도시는커녕 동굴 속에서 살고 있었다.

정령들을 동원해도 힘들었다.

땅, 불, 바람, 물, 마음.

5가지 속성을 하나로 합치면 못 하는 게 없을 것 같지만, 어둠이랑 친한 흡혈귀는 예외였다.

어둠의 정령을 고용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용사가 악마랑 손을 잡을 순 없잖은가?

“참 누추한 곳에 사는군.”

본명이라도 알았다면 이토록 헤매지 않았을 테지만, 그녀는 내 머릿속에 ‘콜로니A 시장’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마약 용사. 서대륙 최고 미녀에게 너무 박대한 것 같다.”

“이름 좀 모르는 게 박대하는 거냐?”

이상한 논리를 펼치는 정령에게 핀잔준 나는, 번화했던 콜로니A랑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변변찮은 동굴 안으로 향했다.

흡혈귀가 사는 곳답게 내부는 어두컴컴했다. 하지만 우주의 가호를 받는 내게 이건 장애가 되지 못했다.

우득-!

등 뒤로 살금살금 다가와서 내 목에 지저분한 송곳니를 박으려는 흡혈귀 소녀에게 가볍게 응징도 해줬다.

가녀린 목이 예쁘게 돌아간 걸 확인한 나는 계속 안쪽으로 향했다.

내가 만만치 않다고 판단한 흡혈귀들은 동굴 벽에 바짝 붙은 채 예의주시했다.

물론, 언제든 한꺼번에 달려들 태세를 갖춘 채로.

“여기로군.”

동굴은 미로처럼 복잡했지만, 정령들이 알려준 길을 따라 거침없이 전진한 나는 헤매는 일 없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여기가 동굴인 탓일까?

작게 중얼거린 내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렸다. 그리고 그 음성은 목적지에 있던 흡혈귀의 예민한 청각을 자극했다.

“누, 누구냐!”

여성이 아닌 남성의 당황한 목소리.

나는 여기까지 길을 안내해준 토박이 정령을 돌아봤다.

야! 제대로 안내한 거 맞아?

끄덕끄덕!

내 몸에 들러붙고 싶어서 안달 난 정령이 열심히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며 결백을 주장했다.

...흠. 일단은 계속 믿어보기로 할까?

나는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코너를 돌며 진입했다. 그리고 짧게 자기소개했다.

“실례합니다. 길을 잃은 정의의 용사인데요. 서대륙에서 골반이 가장 예쁜 흡혈귀가 이 근방에 산다는 소문을 듣…. 오!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네.”

손발이 묶여있는 전라의 흡혈귀 미녀가 보였다. 그리고 그녀 뒤편에는 낯익은 흡혈귀 남성이 보였다.

망령왕 섹스피어.

지금은 다른 이름일 것이다.

“누구냐고 물었다!”

“제, 제발 구해주…. 아흑!”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굉장히 바쁘신 건 알겠지만, 계속 실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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