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13회차] 사랑의 전도사
▷종족: 로열 뱀파이어
▷레벨: 999+
▷직업: 폭군(폭력→지배↑)
▷스킬: 혈기ZZ 지배Z 흡혈Z 잠복SSS 현혹SSS…
▷상태: 당황, 옥새, 성물, 유골
서대륙 최고의 미녀랑 흐뭇한 시간을 보내는 흡혈귀의 변변찮은 능력치였다.
초등교육과정 기준으로 보면 절대강자에 속하지만, 분할되지 않은 고대의 시대인 여기선 맞지 않고 다닐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흡혈귀들의 왕 행세를 하고 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로운 용사로서, 이런 불합리한 광경을 보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어떤 대마법사는 ZZZ등급 스킬을 둘이나 가지고 있으면서도 호구처럼 사는데, 별것도 아닌 흡혈귀는 최고의 미녀랑 얼레리꼴레리를 하고 있었다.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
“...잠만! 나중에 다시 올게!”
이대로 돌격해서 정의로운 응징을 가해도 되지만, 그렇게 되면 ‘망령왕 섹스피어’가 영영 사라진다.
그건 곤란하다.
북대륙의 서리여왕 엘쉬처럼 서대륙도 5대 재앙은 그대로 남아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마약 용사. 그 답을 나는 모르겠다.”
“멍청한 정령은 보고만 있어.”
나는 곧바로 대마법사 섹스피어의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힘없는 청년 같은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큰일 났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무, 무슨 일인데 갑자기 남의 집 대문을 걷어차면서….”
“지금은 그런 사소한 논쟁을 벌일 때가 아닙니다! 40대 동정 대마법사인 당신의 힘이 꼭 필요합니다!”
“힘? 나는 폭력을 그다지 좋아…. 쿠엑?!”
“잔말이 많아!”
원래는 스스로 결정한 후에 자기 발로 가도록 할 예정이었는데, 꾸물대는 꼬락서니가 답답해서 도저히 못 기다려주겠다.
나는 대마법사 섹스피어의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를 붙잡고 잡아끌었다.
“켁켁! 힘은 당신이 더 강한 것 같소만…!”
“기분 탓이야.”
“아, 알겠으니 놔주시오! 내 발로 따라가겠소! 당신 혼자 힘으로는 어려워서 대마법사인 내게 도움을 청했다고 해석하면 되겠소?”
“대충 맞아.”
지혜가 극에 달한 마도사다운 추리력이었다. 나 혼자 힘으로 역부족이란 대목은 틀렸지만,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하면 그의 추리가 가장 그럴싸하다.
우리는 그대로 흡혈귀들이 숨어있는 동굴까지 직행했다.
“흐음…. 이 동굴 안에서 피의 냄새가 진동하오. 필시, 흡혈귀들의 서식지일 터.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은 흡혈귀인 것이오?”
내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어째서 내 1회차 때는 이런 유능한 동료가 없었는지 참으로 한탄스러울 노릇이다.
“맞아. 이제 들어가. 이 정령이 안내해줄 거야.”
뿅!
토박이 정령이 깍듯이 꾸벅 인사했다.
“당신은….”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나보다 강한 당신을 걱정하는 게 아니오만. 함께 들어가지 않는 거냐고 묻는 것이오.”
“나는 입구에서 흡혈귀 원군과 퇴로를 차단할 거야.”
“정확한 목적이 무엇이오?”
“흡혈귀들의 항복. 그리고 피를 제공하는 가축으로 비참히 살아가는 마을 주민들을 구하는 거야.”
“흠…. 알겠소.”
대마법사 섹스피어는 뭔가 석연치 않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군말 없이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림자A.”
손이 없는 설녀를 돌볼 때를 제외하면 항상 내 그림자 속에 숨어있는 요정 아줌마를 불렀다.
“아줌마는 빼요. 독수공방한 세월이….”
“남편을 부정하는군?”
“아, 아니에요! 소녀가 어찌 감히 엘브하임 님을 부정하나요! 그분은 저의 찬란한 태양, 그분은 저의 시원한 오아시스, 그분은 저의….”
“1절만 해! 저 노총각을 몰래 따라가 봐. 요추가 아픈 인간치고 실전에 강한 자를 못 봤거든.”
허리디스크와 목디스크는 온종일 앉아있는 사람에게 주로 생기는 직업병이다.
섹스피어도 가진 능력치에 비해 실전에는 약할 게 틀림없다.
“흐음~”
“...왜?”
“당신도 용사는 용사구나, 싶어서요.”
“잔말 말고 얼른 따라가 봐.”
“분부대로~”
나랑 계약으로 연결되어있는 그림자A의 시각과 청각이 내게 공유되면서 내부사정을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음? 침입자다!’
‘늙은 남자의 피는 별로인데….’
‘하지만 동정의 향기가 나는 것 같지 않아?’
‘어머! 정말이네? 그러면 맛을 기대해도….’
‘빛이여!’
‘캬아아앗~?!’
‘커어어엌~?!’
...실전이 부족해도 상관없었다.
마도사의 ‘지혜’가 부족한 실전경험마저 보충해준 덕분이다.
섹스피어는 노련한 베테랑 용병들마저 혀를 찰 만큼 숙련된 행동력으로 거침없이 동굴을 헤집고 다녔다. 저런 남자가 어째서 연구소에선 호구 같았는지 불가사의였다.
그는 동굴에 갇힌 인근 도시와 마을의 주민을 구한 후, 허공에서 소형 골렘을 소환하여 동굴 밖까지 그들을 호위하도록 했다.
흡혈귀들이 숫자로 밀어붙였지만, 비좁은 공간에서 빛의 마법을 구사하는 대마법사의 상대가 안 됐다. 기껏 접근해도 무형의 보호막에 막혀서 손끝 하나 대지 못했다.
이것이 ZZZ등급 스킬 보유자의 저력.
40대 동정 대마법사의 힘이었다.
‘또 누구냐!’
금방 클라이맥스에 돌입했다.
절대로 좁힐 수 없는 실력 차이를 깨달은 흡혈귀들이 줄줄이 항복한 탓이다.
토박이 정령이 알려주는 길로 곧장 가지 않고 동굴 내부를 이리저리 비집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구출했음에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섹스피어란 이름의 발명가라오.’
뒷수습은 자기가 만든 골렘에게 맡기는 식의 확실한 분업을 통하여 시간과 수고를 단축한 ‘지혜’의 마도사.
그는 소란을 듣고부터 허겁지겁 속옷과 바지를 입고 있는 흡혈귀의 왕이랑 대면했다.
이 둘을 합치면 망령왕 섹스피어가 된다.
하지만 지금은 ‘적’으로 만났다.
‘감히 내 영토에서 소란을 벌이다니! 동정 늙은이 인간! 곱게 죽을 생각은 버려라.’
‘동정이라고 얕보지 마시오! 빛이여!’
‘으캬~?!’
흡혈귀의 왕은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나는 박진감 넘치는 싸움을 기대했지만, 둘의 능력치 격차가 극심했던 탓에 그런 전개는 벌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패자부활전도 없었다.
치이이이….
시커멓게 타버린 흡혈귀의 왕은 미동조차 없었다.
멍청하긴!
자고로 여자는 힘들게 자신을 구해준 남자에게 호감을….
‘어머! 정말 강하신 분이군요!’
서대륙 최고 절세미녀의 두 눈이 하트로 변했다.
그녀는 여전히 팔다리가 묶인 알몸이었는데, 그 상태에서 살짝 허리를 비트니 무척 요염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어흠! 지금 풀어주겠소. 하지만 남편의 복수를 한다고 나를 기습한다면 후회할….’
‘어머! 소녀는 풋풋한 처녀랍니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는 절세미녀! 그녀에게 장성한 딸이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정령도 알고, 시스템도 알고 있다.
그런데….
‘실, 실례했소. 흠흠.’
무한한 지혜를 그새 어디에 놓고 온 걸까? 대마법사는 그녀의 뻔뻔한 거짓말에 홀라당 넘어갔다.
‘멋진 신사님.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으시다면 마법 말고 당신의 손으로 직접 이 밧줄을 풀어주세요.’
‘내가 직접? 그건…. 알겠소.’
‘살살 풀어주세요.’
‘가, 가만히 좀 있으시오. 자꾸 그렇게 움직이면 내 손이 당신의 맨살과 그…. 크흠! 아무튼, 움직이지 마시오.’
한 편의 코미디처럼 힘들게 풀려난 흡혈귀 미녀는 인간 대마법사의 몸에 거머리처럼 착 달라붙었다.
가녀린 양팔을 그의 목에 두르고, 풍만한 가슴이 눌리도록 바짝 밀착한 채 뜨거운 눈길로 올려다봤다.
‘저 쓰레기로부터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강한 신사님.’
판타지 세계의 여성들이 바라는 남편감은 ‘자신을 지켜줄 만큼 강한 남성’이다.
결혼해서 자식이 생기면 끝?
아니다. 이 야만적인 세계에서는 무력으로 남의 아내를 빼앗고 기존의 자식들은 죽이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진다.
그래서 노리는 수컷이 많은 미녀일수록 강한 남성을 찾는 경향이 강해진다.
충동적인 감정보다 안전을 우선시한 셈.
물론, 절대적인 건 아니다.
취향은 다양하니까. 가진 거라고는 공성추와 방울뿐인 양아치랑 눈이 맞아서 가출한 공주와 귀족 영애가 적지 않다.
하지만 그 한때의 무한한 자유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나면, 궁핍한 현실과 부부싸움이 기다리고 있을 뿐.
‘아, 알겠으니 일단 좀 떨어져서….’
‘제가 싫으신가요? 흡혈귀라서? 못생겨서?’
‘그건 아니오! 다만….’
‘다만?’
‘이 상황이 너무나 갑작스럽소.’
‘처음에는 누구나 다 그렇답니다. 당신을 만나고부터 거칠게 요동치는 제 심장과 바짝 마르는 송곳니도요.’
서대륙 최고의 미녀는 노련한 사냥꾼처럼 동정 대마법사를 쉽게 풀어주지 않았다.
무력으로는 그의 상대가 안 된다. 진지하게 싸우면 0.001초도 안 돼서 끝날 터.
하지만 그녀의 무기는 애초에 무력이 아니다.
예쁜 골반이다!
▶궁금: 강한수 생도님의 취향은 예쁜 뼈를 가진 여성인가요?
아주 예리한 질문이야, 교생 아가씨!
여성의 외면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중시하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자란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어머니의 지혜에 감탄했다.
요정처럼 태생적인 한계가 있거나 자기관리를 못 한 아가씨가 아닌 한, 뼈가 예쁘면 대부분 미인이었다.
▶당혹: 그 내면은…. 음. 그렇군요.
흡혈귀의 왕에게 이런저런 일을 당해본 서대륙 최고의 미녀는 자신을 지켜줄 듬직한 남자가 절실했다.
그리고 눈앞에 떡하니 대마법사가 등장!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공격적으로 밀어붙였다.
여기까지 와서도 섹스피어가 동정을 유지한다면, 대마법사를 초월한 미지의 무언가가 될 자격이 있는 존재일 것이다.
그 영혼이 가짜일지라도.
아무튼,
“대충 정리가 된 것 같군.”
5대 재앙일 때처럼 예쁜 흡혈귀 마누라를 그대로 얻었다. 망령왕 섹스피어란 명성은 얻지 못했지만, 이런 말이 있잖은가?
근묵자흑(近墨者黑).
검은색을 가까이하면 검게 변한다고 했다.
절세미녀랑 살을 맞대며 살다가 우연히 그녀의 송곳니에 찔려서 흡혈귀가 될 것이다.
그럴 확률이 0.01%라도 상관없다.
기회는 밤마다 찾아오니까.
이러면 ‘망령왕’이란 별호 빼고 전부 갖춰진 셈!
“마약 용사는 정말 대단하다.”
내 머리 위에서 빈둥거리던 최초의 정령이 감탄한 어조로 말했다.
“대단하긴 무슨.”
판타지 경력 65년이면 이 정도는 가볍게 해줘야 한다.
“너는 쉽게 말했지만, 최초 녀석이었다면 자기가 구하고 지금쯤 짝짓기 중이었을걸. 상대는 서대륙 최고의 미녀니까.”
우주 최고라도 내가 알 바 아니다.
나는 여성의 외면보다 내면을 중시하는 남자니까!
(여성의 뼈를 중시하는 용사님! 위기가 찾아오기도 전에 서대륙을 구하셨군요! 저도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으니 자세히 묻진 말아 주세요….)
영영 사라진 줄 알았는데! 반갑지 않네, 존경하는 여신님. 이대로 남대륙으로 가면 되나?
(네. 남대륙에서는 현재 거인과 요정이 한창 전쟁을 벌이고 있답니다. 그리고 조만간 두 종족을 대표하는 족장이 결전을 벌이고, 이 싸움에서 승리한 거인은 불꽃왕 페닉스로 불리게 돼요. 전쟁에서 패배한 요정들은 멸족의 위기를 맞이하는데요. 이때, 중앙대륙에서 넘어온 한 요정 소년이 뿔뿔이 흩어진 동족들을 통합해서 나라를 세워요.)
그 요정 소년이 누군지 알 것 같다.
유감스러운 요정왕이겠지.
“훌륭한 용사님! 어서 가요!”
그림자A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재촉했다.
나는 바로 의문을 제기했다.
“너는 진짜 남편이 아니면 사진으로 실컷 봐서 관심 없다며?”
“예전에 한 번 강한 척하고 싶어서 한 말을 아직도 기억…. 흠흠! 그래도 적적한 마음을 달래는 데는 2D보다 3D가 낫잖아요~ 자! 용사님! 여기, 깃털.”
“아얏?! 살살 해주세요!”
살아있는 유니크 아이템 제조기인 설녀의 팔에서 깃털을 뽑은 그림자A가 얼른 잡으라고 내 코앞에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며 마지못해 받았다.
“뭐…. 나도 궁금하니 가보자고.”
그 유감스러운 요정왕의 동족 혐오와 인간 찬양이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