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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급 관심용사-242화 (242/430)

 242화

[13회차] 초대 요정왕 ⑱

파앗!

설녀의 깃털을 이용한 공간이동은 순식간에 나와 잡것들을 서대륙에서 남대륙으로 이동시켜줬다.

이곳도 내가 알던 현대랑 환경이 달랐다.

사막 대신 푸른 초원과 밀림이 곳곳에 존재했고, 덥긴 하지만, 건조하지 않고 습했다.

온난화의 주범인 프레온 가스보다 해로운 빙룡왕 슬레이아스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이전이라서 그럴 것이다.

“오긴 왔는데….”

내 머릿속에 기록된 남대륙 지형이랑 너무 달랐다. 그나마 큼직한 산의 위치는 바뀌지 않아서 얼추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용사님.”

남대륙으로 간다고 했을 때부터 말이 많아진 그림자A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아, 그렇군. 여긴 네 고향이었지?”

“고향이기도 하지만, 남대륙에서 아주 오랫동안 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막으로 바뀌기 전의 고향은 정말 오랜만이라…. 저도 감회가 새롭네요. 엘브하임 님이랑 반씩 나눠 먹은 바퀴벌레의 추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아아! 엘브하임 님~!”

“...바퀴벌레를 초콜릿처럼 말하지 말아 줄래?”

우리는 남쪽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거인왕과 요정왕이 한창 전쟁 중이기 때문이다.

“우습네. 거인과 요정이 남대륙 남부의 패권을 놓고 수십 년째 싸운다는 것이. 이렇게 땅이 넓은데 말이야.”

물론, 정말로 이유를 몰라서 한 말이 아니다.

남대륙 남부는 날씨가 온화해서 가장 살기 좋다. 지구의 아프리카로 따지면 남아프리카공화국쯤 위치한다고 할까.

어떻게 아느냐고?

뿅! 뿅! 뿅! 뿅!

나는 서대륙에서처럼 남대륙에서도 토박이 정령들에게 지역 정보를 다운로드 받는 중이다.

하지만 모든 걸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가령, 선배가 언제, 어떻게, 무엇을 했는지는 모른다.

☞기록: 그의 남대륙 방문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5년 뒤입니다. 멸족 직전까지 몰린 요정 종족이 정령, 인간들이랑 손을 잡고 불꽃왕 페닉스의 맹공격에 대항합니다.

5년이면 너무 멀다.

하지만 딱히 문제없을 것 같았다.

남대륙 남부에서는 이미 종족전쟁이 벌어졌고, 거인들을 상대하는 요정들은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전선은 아직 팽팽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초대 요정왕이라….”

요정 중에서 제대로 싸울 줄 아는 자는 요정왕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가녀린 팔로 활시위를 당겨서 조잡한 화살을 쏘는 게 전부였다.

현대의 요정처럼 정령을 다루지 못했고, 제대로 된 무기와 갑옷도 갖추지 못했다.

어디 그뿐이랴?

전략이고 뭐고 없었다.

야만인처럼 돌격과 후퇴만 존재할 뿐.

하지만 요정왕 혼자서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있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불의 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건물 3층 높이의 거인들이 기름 적신 장작처럼 타버렸고, 옷 대신 두른 ‘불의 갑옷’은 또 하나의 무기나 다름없었다.

지나간 발자취에는 ‘불의 길’이 형성돼서 추적이 힘들었고, 등에 부스터처럼 타오르는 ‘불의 날개’는 제트기 같은 기동력을 제공했다.

그가 휘두르는 불의 검도 위협적이었지만, 불에 휩싸인 온몸으로 그냥 충돌해도 웬만한 거인은 흔적도 없이 타버렸다.

살아있는 유성!

그야말로 압도적인 전투력이었다.

“흠. 가까이 가서 능력치를 구경하고 싶은걸.”

내 관심사는 유감스러운 요정왕에서 초대 요정왕으로 넘어갔다. 사용하는 기술들이 하나같이 ‘불꽃왕 페닉스’의 축소판이었던 까닭.

“당연하다, 마약 용사. 거인왕은 그 초대 요정왕을 삼키고 남대륙 5대 재앙, 불꽃왕 페닉스가 됐으니까.”

“그 삼켰다는 것이 불의 정수라고 불리는 보물인가?”

“더욱 정확히 말하면, 모든 요정의 시조인 초대 요정왕이 가진 영생의 유전자다. 그 피를 진하게 물려받은 요정이 지금의 왕족이고. 그래서 평균 3000년을 사는 보통 요정이랑 달리, 왕족은 수명의 한계가 없지. 정말로 영원히 산 요정은 여태 없었지만.”

“그 유감스러운 녀석은 아직 잘 살아있던데?”

지금도 시청 2층의 시장집무실에서 지나가는 인간 여성의 가슴을 내려다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녀석은 요정이 아니라 바퀴벌레다. 약한 주제에 잘 살아남아.”

“소녀처럼 그분의 고귀한 인품(人品)에 감복한 충신들이 주위에 많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정령님.”

그림자A는 눈을 빛내면서 또 남편 자랑에 돌입했다.

“둘 다 닥쳐. 그리고 내 질문에나 대답해. 저 시조는 인간의 돌연변이야? 아니면 몬스터?”

초대 요정왕의 능력은 불꽃왕 페닉스랑 완벽히 일치했다.

하지만 ‘요정’이 사용하니 느낌이 달랐다.

거인이 휘두른 거대한 몽둥이에 얻어맞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불꽃으로 변하며 되살아났다.

요정보다는 신수(神獸) 중 하나인 불사조(不死鳥) 같다.

“초대 요정왕도 너처럼 다른 세계에서 온 용사다.”

“처음 듣는 이야기인걸.”

어째서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여태 안 해준 거야?

“마약 용사. 이게 중요해? 인간도 마찬가지다. 판타지아 원주민들의 기본 종족은 ‘휴먼’이지. 반면에 너처럼 지구에서 온 인간은 ‘아크 휴먼’이다. 북대륙에 있는 네 아들은 두 행성의 원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2세라고 할 수 있지. 요정에 비유하면 왕족이라고 보면 돼.”

“과연….”

최초의 정령이 단순명료하게 설명한 탓일까?

참 별거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

“초대 요정왕은 요정 용사가 주를 이뤘던 1세대 출신이다. 하지만 너처럼 뛰어난 용사는 아니었어. 저 불사조 같은 능력으로 혼자만 살아남은 약골이었거든. 그러니 너무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아.”

“안 해.”

별것도 아닌 거인에게 잡아먹혔다는 설정에서부터 글렀음을 알고 있었다.

단지, 저 활활 타오르는 이펙트가 마음에 들었을 뿐.

우리는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계속 남하했다.

전장이 육안에 들어올 때까지.

“모든 요정을 죽여라!”

“사, 살려줘!”

“도망치면 폐하에게 죽어!”

“흑흑! 엄마, 아빠, 형….”

그건, 전쟁이라고 부르기 미안한 수준이었다.

요정왕은 거인들의 본진에서 혼자 열심히 날뛰고 있고, 강제로 징집된 요정들은 거인들에게 학살당하고 있었다.

요정의 조잡한 화살은 거인의 두꺼운 살가죽을 뚫지 못했고, 상대적으로 작은 몸으로 부지런히 뛰어도 도망치지 못했다.

그건 요정왕을 상대하는 거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거인들의 몽둥이와 주먹은 그의 화염을 막지 못했다.

양 진영에서 벌어지는 학살극!

“흠. 옛날 생각나네.”

내 1회차 때도 비슷했었다.

누가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지 내기한 동료들은 살인광처럼 전장으로 뛰어가고, 나만 뒤에 남아서 본진을 지켰다.

망할 동료들은 항상 당연히 져야 할 싸움에 끼어들어서 뒤집길 좋아했다.

그러면 오합지졸들을 보호하는 뒤치다꺼리는 항상 내 몫이었다. 안 지켜주면 초토화될 테니까.

수많은 업적을 세운 무쌍의 용사가 본진을 지킨다는 것만으로도 적군의 별동대는 함부로 들어오지 못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실로 참혹했다.

경험치, 스킬 숙련도, 명성….

그 모든 걸 동료들이 독식하고 내게는 ‘겁쟁이’란 오명만 돌아왔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납치된 초창기처럼 동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레벨과 스킬에서 항상 우위에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동료들이 오늘 벌인 학살을 무용담처럼 포장하여 파티를 벌일 때, 나는 한밤중에 홀로 몬스터 사냥을 나가야만 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열 받는 1회차로군.

“마약 용사가 1회차 추억을 얘기할 때마다 숨이 탁탁 막힌다. 영웅전기로 쓰면 1권도 안 팔릴 것 같아.”

“동감이야.”

☞부정: 당신의 생활기록부는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매우 희귀한 사례이기에 특별취급하고 있습니다. 용사 육성의 부작용과 반작용에 관한 심층연구의 참고자료로 사용할 예정….

당장 삭제해라, 망할 시스템. 나쁜 말로 할 때!

은하계 규모의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과거를 세탁하고 싶어 하는 흑화 선배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전쟁은 온종일 하지 않았다.

우람한 덩치만큼 칼로리 소모가 큰 거인들은 장기전에 취약했다. 도망치는 요정들을 잡히는 대로 간식처럼 먹고 있지만, 삐쩍 마른 요정들로는 배가 차지 않았다.

그래서 후퇴.

굶주린 거인들은 거대한 해양몬스터를 잡기 위해 바다로 떠났다.

“헉헉…!”

적진에서 날뛰던 초대 요정왕도 다르지 않았다.

혼자 싸우다시피 했으니까.

지친 몸을 이끌며 돌아온 그는 거인들에게 유린당한 본진을 힐끔 보고는, 막 재건된 막사로 냉큼 들어가서 휴식을 취했다.

이 참혹한 광경을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였다.

“요정이 여태 멸족하지 않은 게 신기한걸?”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본 나는 짧은 감상평을 내렸다.

“그야말로 최악이지요. 하지만 저 폭군이 모든 요정의 시조입니다….”

그림자A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덧붙였다.

“초대 요정왕은 이종교배가 가능한 인간들이랑 동침하여 수많은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중에 가장 요정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은 분이 제 시어머니였던 2대 요정왕이십니다. 그리고 엘브하임 님은 초대와 2대 요정왕 사이에서 태어나셨죠. 물론, 당시엔 초대, 2대란 개념이 없었습니다. 전부, 엘브하임 님이 정상적인 국가를 세운 후에 계보를 따져서 완성된 호칭이지요.”

자기 종족의 역사라서 제법 세세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역사서에 기록된 시조는 너무하다 싶을 만큼 미화되어 있으니까요. 시조가 세상에 둘도 없는 폭군이었다고 한다면, 누가 동족을 사랑하겠어요? 철저하게 감춘 끝에 진실을 아는 요정은 거의 없습니다.”

“3대 요정왕의 유감스러운 취향처럼?”

“...가장 존경받는 요정왕이 동족보다 인간을 더, 훨씬 좋아한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좋을 게 없으니까요. 그 이유도 좀….”

풍만한 가슴 때문이라고 왜 말을 못 하니?

“뭐, 됐어. 남대륙도 개편이 좀 필요하겠네.”

토박이 정령들의 보고에 따르면, 그 유감스러운 3대 요정왕은 남대륙 인간 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요정의 인권’을 지키기 위한 정치질로 한창 바빴다.

녀석도 아는 듯했다.

여기에 온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저 시조가 문제의 근원이군.”

무능한 주제에 쿠데타가 불가능할 정도로 전투력이 높았다. 저런 녀석에게 논리적인 설득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힘에는 힘으로.

나는 거인의 발에 짓밟힌 동족들의 시신을 울면서 정리하는 요정들의 사이를 조용히 지나갔다.

아무도 나를 막지 않았다. 그럴 기운도 없을뿐더러,

“잠시만 멈춰- 지나가십시오, 아무튼, 신성한 분이시여.”

초대 요정왕이 휴식을 취하는 단 하나뿐인 막사의 입구를 지키던 요정들이 좌우로 공손히 물러났다.

이것이 정의로운 용사의 힘이다.

“신성Z의 효과겠지.”

“남의 신성한 머리에 온종일 총배설강을 문대는 지저분한 정령은 빠져.”

“지저분하지 않아! 내부까지 깨끗해!”

“닥쳐. 지금부터 중요한 대화를 할….”

막사 내부에 펼쳐진 기가 막힌 광경을 본 나는 말문이 막혔다.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침대 위에 초대 요정왕이 ‘대(大)’ 자로 누워있었는데, 그의 가랑이 사이에 쭈그려 앉은 요정 여성이 얼굴 깊숙이 묻고 있었다.

한 명이 아니다.

침대 주위를 둘러싸듯 5명이 더 있었는데, 그녀들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놈은 뭔데 감히 짐의 휴식을…. 음? 하등한 인간이 여긴 무슨 일이지? 위대한 짐에게 무슨 볼일…. 오! 옆의 그년을 짐에게 바치러 온 것이냐? 그렇다면 지금의 무례를 용서해주마.”

내 인기척을 느낀 요정왕이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나를 보며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야, 그림자A. 시아버지께 큰절 안 올리냐?”

“그럴 바에 자결하겠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재회한 가족의 오붓한 대화는 단 1초 만에 종료.

지금부터는,

“으캬캬캬?!”

남자들끼리 진지하게 경추(頸椎) 잡고 이야기해볼까?

“이봐. 너무 요란 떠는 거 아니야? 살짝 어루만졌을 뿐인…. 이해해. 흠흠.”

목이 문제가 아니었다.

정의로운 용사의 깜짝 방문에 놀란 요정 아가씨의 턱에 힘이 들어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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