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243화 (243/430)

 243화

[13회차] 불꽃왕 페닉스

“이년이 미쳤나…!”

“저, 정말 죄송합니다, 폐하. 살려주세요. 자비를…. 제발! 제발!”

사색이 된 요정 아가씨가 요정왕에게 싹싹 빌었다.

“하! 자비? 감히 짐의- 켁켁!”

나는 말이 많아지려는 요정왕을 정중히 말렸다.

사람이든 요정이든 놀라면 어깨와 턱에 힘이 들어갈 수도 있는 거 아니겠는가? 고작 그걸로 저리 화를 낼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나?

정령들이 온종일 껴안고 있어도 꾹 참고 있다.

“이봐, 요정왕. 일단은 내게 먼저 자비와 용서를 구걸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나랑 대화하다 말고 예쁜 아가씨랑 시시덕거리다니. 정말 예의가 없네.”

하지만 나는 호구 같은 용사.

이런 터무니없는 푸대접에도 매우 익숙하다!

“이거 놓으- 켁켁! 미, 미친 인간…!”

초대 요정왕이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일반적인 요정 남성들보다 탄탄한 근육으로 뒤덮인 몸. 여기에 뜨거운 화염까지 씌워져 있었다.

힘없는 요정 아가씨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하지만 그의 주먹질, 발길질, 화염은 내게 약간의 피해조차 주지 못했다.

즉,

“진짜 약하네.”

“......”

발광하던 초대 요정왕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자신의 공격이 하나도 통하지 않았음을.

“거인이랑 싸우느라 지쳐서 그렇다고 변명하거나 위안을 얻어보는 건 어때?”

“......”

내 제안에도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자! 강자 행세를 해온 약자여! 수많은 약자를 봐온 너라면 지금부터 무얼 해야 하는지 잘 알겠지? 모른다면….”

“아, 압니다!”

공포에 절은 초대 요정왕이 답했다.

아주 간단한 논리다.

약자가 강자가 되면 약자의 서러움을 이해하고, 강자가 약자가 되면 강자의 무서움에 몸서리치게 된다.

물론, 절대적인 건 아니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는 속담도 있잖은가?

강자가 돼서 약자를 더욱 못살게 괴롭히는 자가 있고, 약자가 돼도 현실을 보지 못하고 나대는 자가 있다.

“오늘부터 네 이름은 불꽃왕 페닉스다.”

“어, 어떻게 제 본명을…?”

“...음?”

한순간 내 사고가 멈췄다.

그건 시아버지의 추태를 구경하던 그림자A와 최초의 정령도 다르지 않았다.

“네 진짜 이름이 페닉스라고?”

“그, 그렇습니다. 불꽃왕은 고향별에서 쓰던 별호…. 켁켁?!”

“잠시만 기다려봐. 생각 좀 정리하게.”

내가 아는 ‘불꽃왕 페닉스’는 고층빌딩 크기의 초대형 거인이다. 남대륙의 5대 재앙이며, 화산지대에 사는 불의 거인의 시조다.

그런데 유감스러움을 넘어서서 한심하기까지 한 이 요정왕이 자신을 ‘불꽃왕 페닉스’라고 소개했다.

아직 그 이름은 존재하지 않을 터.

“용사님. 이건 아무래도….”

“아무래도 그렇지?”

“그런 것 같다, 마약 용사.”

불의 힘을 다루고 영원한 생명을 가졌던 초대 요정왕은 ‘거인왕 페닉스’에게 패배하고 잡아먹혀서 ‘불의 정수’를 빼앗겼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거인왕이 스스로 ‘페닉스’라고 자칭했다는 얘기는 어느 문헌에도 없었다. 모두가 당연히 이 이름일 거라고 지레짐작했을 뿐.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종족을 바꾼 거였군.”

요정에서 거인으로.

이 전투에서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후손들을 보면서 동족 혐오 같은 감정을 품게 된 것 같다. 그리고 탈주!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다.

“과연…. 혈통은 속일 수 없다는 건가.”

초대나 3대 요정왕이나 동족을 혐오하는 건 똑같았다.

“용사님. 엘브하임 님은 달라요. 제가 사모하는 임은 동족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족하기에 보듬어줄 수 있어서 사랑스럽다고 제게 버릇처럼 말씀하셨는걸요!”

시아버지와 남편을 똑같이 취급하자마자 그림자A가 발끈했다.

그 유감스러운 요정왕은 결혼 하나만큼은 성공한 것 같다. 본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알겠으니 1절만 하자. 지금은 이 녀석을 중간보스로 만드는 게 급선무라고.”

역사(교과서)를 내가 새롭게 쓰고 있긴 하지만, 큰 틀이 바뀌어선 안 된다는 게 시스템의 주의사항이었다.

실제 역사를 부정하면 안 되니까.

그 역사의 주역이었던 ‘최초의 용사’가 세계사 교과서에서 빼달라고 요청하는 바람에 대타로 내가 들어간 것이다.

내가 최초의 용사인 건 아니기에 그 중간과정을 입맛대로 고치는 건 괜찮지만, 결과는 최대한 비슷하게 가야 한다.

그중에서도 5대 재앙은 필수다.

최초의 용사가 5대 재앙을 쓰러트렸기 때문에 나도 똑같이 5대 재앙을 쓰러트려야 한다.

하지만 현재 남대륙은 서대륙 때처럼 5대 재앙이 아직 탄생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야. 너는 종족도 바꿀 수 있냐?”

아까부터 눈알을 굴리며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던 초대 요정왕이 내 질문에 신속하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할 수 있었다면 당장 바꿨지요.”

“흐음….”

아무래도 거인왕에게 패배해서 잡아먹혔다는 건 정말인 듯하다. 하지만 죽지 않고 거인왕의 육체를 빼앗았다고 보면 되려나?

이건 시스템의 조언이 필요할 것 같았다.

☞설명: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큰 치명상을 입어도 죽지 않는 요정왕을 쓰러트리기 위해 거인왕은 유성처럼 활활 불타오르는 상태의 그를 통째로 삼킨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탄생한 불꽃왕 페닉스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기록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응. 도움이 안 되는 설명, 고마워.

“먹여보면 알겠지. 따라와.”

“켁?!”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활짝 펼친 나는 초대 요정왕의 목을 잡은 채로 거인들의 진영까지 쭉 날아갔다.

거인왕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끽해야 8m 높이의 다른 거인들이랑 달리, 혼자만 수십m에 달하는 압도적인 덩치를 자랑하고 있었으니까.

이쪽도 설녀처럼 돌연변이였다.

하지만 이 둘의 삶은 전혀 달랐다. 설녀는 동족들에게 왕따를 당했고, 거인왕은 그 호칭처럼 절대적인 왕이 됐다.

“음? 또 싸우러 왔느냐, 요정- 음? 인간이잖아? 아니, 등에 흉측한 날개가 달렸으니 악마인가?”

“악마가 아니라 정의로운 용사다!”

나는 멋대로 지껄이는 거인왕에게 바로 일갈을 날려줬다.

“용사? 내가 모르는 종족도 있었나? 하여간 조그마한 것들은 종족도 참 많아. 덤벼라. 조그마한 하등생물.”

그 발언을 들은 주위의 거인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거인이라고 해서 전부 덩치가 큰 건 아니다.

수컷만 존재하는 거인 종족은 인간 여성을 통해서만 번식할 수 있으니까.

거인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새 생명은 성별에 따라 혼혈 없이 종족이 뚜렷하게 나뉜다. 남자아이면 거인, 여자아이면 인간.

성장기 때는 거인이나 인간이나 별 차이 없다.

하지만 인간인 여자아이는 때가 되면 성장이 멈추는 반면, 거인인 남자아이는 죽을 때까지 계속 큰다.

그렇기에 거인들의 신장은 일정하지 않다.

물론, 어느 시점부터는 나무처럼 성장해도 티가 안 나는 시기가 오긴 하지만, 그때면 수명이 거의 끝나가는 황혼기다.

거인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인 중에서도 비정상적인 성장을 거듭해온 거인왕의 체급은 다른 거인들의 수십 배에 달했지만, 녀석도 수명의 한계를 극복하진 못하고 황혼기에 접어든 상태였다.

얼굴은 새하얀 턱수염으로 가득했고, 맞는 옷이 없어서 가리지 않은 공성추는 세월의 무상함을 극단적으로 보여줬다.

하지만 온몸의 울퉁불퉁한 근육은 아직도 현역이었다. 그렇기에 여전히 왕좌를 빼앗기지 않은 것이리라.

“족장 또 싸운다!”

“헉! 나는 도망친다!”

“왕에게 맞기 싫다!”

거인왕의 전투에 휘말리기 싫은 거인들은 가족들을 큰 손으로 조심스럽게 품고 사방으로 도망치듯 흩어졌다.

거인에게 가족이란?

후손과 육아를 책임지는 인간 여성이다.

정상적인 결합은 거의 없고 대부분 인간 마을을 습격해서 납치하는 형태지만, 거인은 아내와 딸들에게 지극정성인 팔불출이다.

오직 인간 여성에게만.

번식이랑 무관한 인간 남성과 나머지 종족은 개미처럼 짓밟고 잡아먹는 잔혹성을 보인다.

“이봐. 거인왕.”

“항복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다. 나는 지금까지 도전자를 살려둔 적이 없으니까. 아내 빼고. 그녀는 정말 강했지. 그리고 그만큼 강한 자식들을 내게 많이 남겨주고 떠났다.”

그렇게 말한 거인왕이 목에 걸린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풀어서 다른 거인에게 넘겼다.

한 인간의 전신 뼈로 장식된 목걸이.

골격으로 보아선 여성으로, 그 뼈의 주인이 거인왕이 말했던 아내인 것 같았다.

거인왕은 내가 알던 ‘불꽃왕 페닉스’랑 그 모습이 사뭇 달랐다.

흰 머리카락과 자글자글한 주름.

늙은 외모에 어울리는 감성적인 성격.

붉게 타오르는 모발과 패기 넘치는 호전성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잠깐의 대화만으로 단정하긴 이르지만, 인간 여성을 애 낳는 가축처럼 여기지도 않았다.

지극히 평범한 거인이었다.

“거인왕. 더 살고 싶지 않아?”

나는 요정왕의 변변찮은 경추를 흔들며 제안했다.

이 요정을 먹으면 불로영생(不老永生) 할 수 있다구?

알약…. 하다못해 병아리 크기만 됐어도 꿍쳐뒀다가 부모님께 드렸을 것이다.

“자그마한 용사. 항복할 게 아니면 헛소리하지 말고 덤벼라.”

하지만 거인왕은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차더니, 거대한 화강암 몽둥이를 한 손으로 가볍게 쥐었다.

그리고는 기다리지 않고 바로 휘둘렀다.

휘이이잉~

거인왕이 몽둥이를 쥔 팔을 한 번 휘젓는 것만으로도 일대에 돌풍이 몰아쳤다.

내 겨드랑이에 터를 잡은 바람의 정령왕이 턱짓으로 아이들을 부려먹지 않았다면 내 몸도 미세하게 흔들렸을 것이다.

무척 가소로웠다.

“자꾸 작다고 무시하는데 말이야. 나의 친애하는 전우보다 작은 녀석이 까불긴.”

망룡왕 뇌비우스랑 비교하는 건 우습고, 쑥떡이랑 싸우면 그럭저럭 체급이 맞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양아들 녀석은 지금 이곳에 없다.

신성몰랑제국의 현황을 주기적으로 내게 보고하는 성녀H와 함께 현대에 남아있다.

취미는 반항적인 동생의 군기 잡기?

소환하는 건 간단하지만, 다시 돌려보내는 게 쉽지 않다.

대신,

“진정한 우량아가 뭔지 보여주지. 오라! 캡틴 판타지!”

“응애!”

귀여운 아기가 허공에 소환됐다.

캡틴 판타지.

고사리 같은 양손에 딸랑이와 쏘시아를 쥐여주고 싶을 만큼 앙증맞은 모습은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었다.

“뭐, 뭐냐?! 저건 대체- 쿠엌?!”

그 우렁찬 목소리에 놀란 거인왕의 치켜든 얼굴 위로 몰랑몰랑한 엉덩이가 뚝 떨어졌다.

콰과광!

남대륙을 대표하는 화산의 일각이 둘의 충돌로 뭉그러졌다.

서둘러 몸을 일으킨 거인왕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캡틴 판타지의 몰랑몰랑한 아기 피부를 어쩌진 못했다.

심지어 체급에서도 밀렸다.

거인왕의 덩치는 캡틴 판타지의 통통한 종아리와 허벅지를 합친 수준밖에 안 됐으니까.

허겁지겁 뒤로 물러난 거인왕. 언제나 조그마한 생명체만 상대해온 그는 반쯤 넋을 놓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디서 이런 터무니없는 아기가….”

정체를 묻는 거인왕의 질문에 캡틴 판타지가 철학적으로 대답했다.

“응애!”

현인의 말씀처럼 수많은 의미가 함축되어있는 한마디.

나는 혼란 상태의 거인왕을 향해 아장아장 전진하는 캡틴 판타지에게 초대 요정왕을 넘겨주며 지시했다.

“이 불량식품을 저 거인에게 먹여.”

“응애? 응애!”

덥석.

야! 네가 먹으면 어떻게 해?! 퉤퉤! 얼른 뱉어! 얼른~!

“아기들은 호기심이 많기에 항상 안전한 물건만 손에 쥐여줘야 합니다. 이래서 육아를 해본 적 없는 남자들이란….”

유부녀 요정이 뒤편에서 어깨를 으쓱하며 핀잔을 줬지만, 지금은 혼쭐을 내줄 시간조차 아까웠다.

불꽃왕이 불꽃이 없으면 어쩌라고?

“망했다….”

불의 힘을 다루는 초대 요정왕은 귀여운 아기의 뱃속으로 허무하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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