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13회차] 좋은 나이
판타지아 동대륙은 4개의 큰 섬과 수많은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대륙이다.
모든 도시는 해안을 낀 항구도시이며, 밭과 농장으로 이용되는 내륙에서는 방화를 포함한 일체의 전투행위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평화하고는 거리가 멀다.
용병, 해적, 해군, 현상금 사냥꾼, 상인···.
동대륙은 온갖 군상이 다 모여서 쌈질하는 무법지대다.
그만큼 바다에 빠져 죽거나 실종된 사람이 많으며, 그 대부분은 해적왕이나 거상 같은 허무맹랑한 꿈을 꾸는 남성.
여기에 ‘남자 헌터’인 바다인어까지 가세하면서 남성의 비율이 극단적으로 줄어들었고, 그 부족해진 남성을 보충하기 위해 다른 대륙에서 남성 노예를 꾸준히 사들이고 있다.
주로 남성 요정을.
인어는 요정을 안 건드리기 때문이다.
그 결과,
▷종족: 하프 엘프
▷레벨: 455
▷직업: 어부(낚시→행운↑)
▷스킬: 낚시D 그물E 체력E 항해E 행운F···
▷상태: 양호
...이런 친구들을 은근히 많이 볼 수 있다.
순수한 요정은 비실비실해서 오랜 항해를 견디지 못하지만, 요정 남성과 인간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2세들은 다르다.
발정 난 인어들에게 납치당하지 않으면서도 인간 못지않은 우수한 육체를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긴 수명까지.
어부라고 무시하면 훅 가는 수가 있다.
수많은 물고기와 소형 몬스터를 낚시하며 오랫동안 경험치를 쌓아온 혼혈 어부들은 깡패 같은 레벨 덕분에 웬만한 기사보다 강하니까.
“저 엽기적인 어부를 보니, 제대로 도착한 것 같네.”
판타지아 남대륙에서 동대륙까지.
배를 타고 이동했다면 쾌속선을 이용해도 한 달 남짓 걸리는 긴 여정을 1초 미만으로 단축했다.
이게 다 설녀의 깃털 덕분이다.
“마약 용사. 손이 없는 설녀를 누가 돌볼 거냐?”
“당연히 네가 해야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최초의 정령은 투덜대면서도 안 한다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가 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밑의 아이들에게 또 시키겠지!
순진한 척하는 정령만큼 지독한 계급사회도 없을 것이다.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 왕, 마약 정령!
상급자들이 시키는 온갖 궂은일은 다 맡아서 처리하는 하급 정령들이 자살하지 않고 어떻게 사는지 진심 궁금하다.
“마약 용사. 정령은 나쁜 상사조직이 아니다!”
“심지어 뻔뻔하기까지.”
“정말 아니다. 내가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심하군. 나쁘다는 자각도 없어.”
손이 없는 설녀의 관리를 해결한 우리는 현재 위치부터 파악하기로 했다.
이번에도 토박이 정령들을 활용했다.
나태한 상급자 밑에서 부지런히 일해온 하급 정령들은 대기업 프레젠테이션에 가까운 완벽한 설명으로 나를 감동시켰다.
설녀의 깃털로 이동한 우리의 도착지점은 동대륙에서 가장 큰 4개의 섬 중에서도 가장 동쪽에 치우쳐져 있는 섬E였다.
“마약 용사. 가장 서쪽에 있는 섬은?”
“섬W.”
“가장 북쪽에 있는 섬은?”
“섬N.”
“가장 남쪽-”
“섬S. 멍청한 정령. 68년 경력 용사님을 시험하지 말라. 내 사전에 중복은 없다.”
지리상 타대륙이랑 무역과 교류가 힘들고, 주위에 초대형 해양몬스터가 많이 서식해서 해적들도 노략질을 꺼리는 섬E는 소위 ‘고인물’이 사는 동네다.
레벨 깡패가 수두룩하다.
긴 수명과 부지런함, 우수한 육체!
요정A처럼 인간과 요정의 장점만 흡수한 혼혈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사기 캐릭터인지 쉽게 알 수 있는 곳이다.
“마약 용사. 여기는 용(龍)도 많이 살아.”
“아이들이 가르쳐준 정보를 자기가 알던 것인 마냥 떠들지 마라. 뻔뻔한 정령.”
“흥! 나와 아이들은 가족이다. 가족끼리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는 게 어때서?”
“그걸 뻔뻔하다고 하는 거다.”
물을 다루는 파란색 용이 많이 산다.
이 동네에 사는 파란색 모발의 혼혈은 전부 용이 폴리모프, 코스프레 한 거라고 보면 된다.
자기들은 완벽하게 변신해서 정체를 감췄다고 믿는 모양이지만, 순수한 파란색은 어떤 유전자 배합으로도 나올 수 없는 머리카락이다.
물론, 전혀 없는 건 아니다.
푸른색 용이 임신시킨 인간 여성이 낳은 혼혈 아이가 훗날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의 왕족들은 대대로 파란색 머리카락이 태어났다.
하지만 그건 정말 예외 중의 예외에 속한다.
그걸 일반화할 순 없다.
“흠. 내가 너무 성급하게 진도를 뺐나?”
현대에서는 망룡왕 뇌비우스에게 참교육 당한 용들이 단체로 잠적하면서 인간 사회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훨씬 과거.
용들의 참견이 많던 시절이다.
“빠른 건 사실이다. 최초 녀석은 여기까지 오는 데 11년이 걸렸으니까. 그동안 인연이 닿아서 만난 용도 엄청나게 많다.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황금색, 똥색, 하늘색, 녹색, 검은색, 보라색, 은색, 백색···. 색깔만 따져도 얼마나 많았는지 알만하지?”
많이 만났을 것 같다.
당장 내가 눈대중으로 주변을 쓱 훑은 것만으로도 용을 2마리나 찾았을 정도니까.
▷종족: 블루 드래곤
▷레벨: 999+
▷직업: 요리사(경력→요리↑)
▷스킬: 숨결Z 요리Z 마법MAX 해양MAX 변신MAX···
▷상태: 흥미, 관찰, 탐색, 변신
아쉽다.
우주의 총애 때문에 레벨을 조절해야 하는 신세만 아니었다면, 벌써 등 뒤로 다가가서 요추를 예쁘게 꺾어줬을 텐데.
가져가라고 유혹하는 듯한 저 나약한 자태를 가만히 놔둬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게 했다.
“어서 오시게, 이방인들이여.”
인간 행세를 하는 파란색 머리카락 용이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환영하는 척했다.
“아! 나도 반가워.”
“케엑?!”
“...어라?”
악수하려다가 손이 미끄러진 모양이다.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가 부러진 용이 맥없이 쓰러졌다.
▶당혹: 강한수 생도님. 가만히 놔둔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이건 사고야! 교생 아가씨!
나는 모른 척하며 가만히 놔둘 생각이었는데, 오른손이 멋대로 손 대신 목을 잡은 것뿐이다.
아무튼, 경험치는 짭짤하군.
“헉! 나의 친우가?!”
“저놈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야!”
“죄도 없는 그를 어째서···!”
고작 용 1마리를 실수로 죽였다고 주위에서 야단법석을 떨었다.
나는 논리정연하게 설명했다.
“주민 여러분, 당황하지 마십시오. 저는 선량한 인간 행세를 하던 사악한 용을 처치한 것뿐입니다. 자! 보십시오. 몬스터처럼 시체를 남기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광경을.”
“그는 내 친구다!”
“우리의 주례를 서줬어요!”
“그래! 헛소리하지 마!”
“이방인은 잘못을 인정해라!”
...흠. 시대가 다른 탓인가?
정의로운 용사의 미소를 지으며 설득해도 영 신통치 않았다.
☞해설: 용의 평판은 망룡왕 뇌비우스의 활동기 전후로 나뉩니다. 인간들의 사회 깊숙이 파고든 고대의 용들은 나라와 도시의 수호신으로서 평판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악룡과 마룡 외에는 대부분 잠적한 현대하고는 상황이 다릅니다.
응. 늦은 해설 고마워, 망할 시스템.
“우매한- 어흠. 존경하는 주민 여러분. 여러분은 위선적인 용들에게 속고 있는 겁니다! 용들은 수호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섬S에 사는 저주왕 말파르트를 처치하지 않고 고의로 방치했습니다. 용들이 진심으로 여러분을 아낀다면 위협적인 저주왕 말파르트를 진즉 처치-”
“사기꾼!”
“말파르트가 누구야?”
“몰라. 너는 알아?”
“아니. 저 이방인의 거짓말이겠지.”
혈압이 살짝 오르기 시작했다.
또?
☞해설: 동대륙의 5대 재앙, 저주왕 말파르트는 동대륙 최남단의 열대기후 섬에서 난쟁이들이랑 조용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못생긴 난쟁이였던 남자친구가 과로사하기 전까지는 그녀가 용이란 사실조차 아무도 몰랐습니다.
과로사? 언제 하는데?
☞설명: 그가 난쟁이들의 섬에 방문했을 때입니다.
그라면, 또 선배인가?
주연배우답게 사건마다 빠지는 곳이 없었다.
아무튼,
“의심 많은 주민 여러분. 제가 여러분들을 기만하고 있다면 분노한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질 겁니다! 자! 보십시오. 안 떨어지지 않습니까?”
“우우!”
“사기꾼!”
“현실성 있는 조건을 걸어야지!”
“추하다! 죄를 인정해라!”
한계를 초월한 인내심을 갖고 설득해보지만, 주위의 여론은 갈수록 나빠지기만 했다.
원인은 간단했다.
내 말이 현실성 없다고?
“좋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요구대로 조건을 뒤집도록 하지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진실만을 고백하고 있다면 감동한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질 겁니다.”
“우우!”
“사기꾼!”
“또 현실성 없는- 어?”
“정말로 운석이다···!”
슈우우— 콰앙!
내 선언이 끝나기 무섭게, 석양이 지듯 붉게 변한 하늘에서 운석이 우박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 연설에 감동한 우주의 답변은 특급배송이었다.
그리고 쪼잔하지 않았다.
쾅! 콰앙! 펑-!
고작 도시 하나에 운석 한두 개 떨어트리고 끝낸다면, 마법사의 농간으로 의심받았을 것이다.
나를 총애하는 우주 회장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결과, 섬E의 전역이 순식간에 초토화됐다.
“Bluuuu···!”
“Bluuu-?!”
“Bluuuuu~!”
인간 행세하던 변신을 풀고 본색을 드러낸 사악한 용들이 운석을 막으려고 애써보지만, 우주의 총애 앞에선 부질없는 발버둥에 지나지 않았다.
무리라고 판단한 용들이 하나둘 도망쳤다.
그리고 내 차례가 왔다.
“나의 군단이여!”
공명정대한 68년 경력 용사인 나는 최초의 정령처럼 지독한 계급사회로 정령들을 부려먹지 않는다.
내 아래의 모든 정령은 평등하니까.
뿅! 뿅! 뿅! 뿅!
동대륙에 사는 모든 토박이 정령이 내 부름에 동조했다.
보건교사가 준 커플링으로 최초의 정령이 가진 고유권한을 공유하는 내 지시와 중독성은 절대적!
이미 떨어진 운석은 어쩔 수 없지만, 새롭게 떨어지는 것들은 바람의 정령들이 궤도를 틀면서 바다로 떨어졌다.
촤아아아-
후폭풍으로 발생한 해일은 물의 정령들이 잠재우고, 운석의 충돌로 초토화된 내륙을 땅의 정령이 신속하게 복구했다.
마음의 정령은 혼란에 빠진 원주민과 동식물들은 안정시키고, 줄어든 숫자만큼 다시 불리기 위해 성욕과 번식욕을 유도했다.
“Troooo~?!”
“KuKu~?!”
“Bluuuu~?!”
운석의 열기로 더욱 강성해진 불의 정령들은 사악한 용과 몬스터를 섬E에서 깔끔히 박멸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여기까지 모든 게 척척 진행됐다.
나태하긴 해도 능력은 있는 중급 이상의 정령들을 부려먹으니 확실히 성과가 좋았다.
“주민 여러분, 무사하십니까?”
나는 정의로운 용사의 미소를 지으며 재차 질문했다.
하지만 줄어든 인구를 복구하려 정신없는 주민들은 나를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평균 1남3녀씩 짝을 이루며 어두컴컴한 곳으로 떠났다.
이렇게 된 원인은,
“야! 적당히 해야지.”
내 보물을 자기 소유처럼 양팔, 양다리로 부둥켜안고 있던 마음의 정령왕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불만을 표시했다.
뭐? 열심히 일한 게 무슨 잘못이냐고?
“마약 용사. 봤지? 정령은 적당히 나태한 편이 좋다!”
“너에게 안 물었다.”
섬E의 지형이 싹 바뀌었다.
운석이 떨어진 해안가는 훌륭한 간척지로 변했고, 크레이터로 강물이 흘러들면서 호수와 저수지가 형성됐다.
어디 그뿐이랴?
운석에는 다양한 광물과 미네랄이 함유되어 있다.
지금은 허허벌판이지만, 기름진 이 땅은 금방 울창한 녹지로 변하고 광산 개발로 바빠질 것이다.
“흠···. 나도 슬슬 노후를 준비할 때가 됐지.”
언젠가 이 호구 같은 삶을 정리하고 은퇴할 날이 오리라.
지금 이곳에 땅을 사두면, 현대로 돌아갔을 때 큰 자산이 되어있을 것이다.
“마약 용사.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
“헛소리가 아니야. 내 정신연령이 벌써 85세라구.”
부동산에 뛰어들기 좋은 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