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14회차] 스트레스
☞제재: 노후 준비는 나중으로 미루셔야 할 것 같습니다. 상식과 명분을 벗어난 이번 대량학살은 편집으로도 무마가 안 된다고 판단. 기록을 폐기하고 재녹화에 들어갑니다.
뭐?! 잠깐! 손이 미끄러진 거로 너무한 거 아니야!
☞분석: 당신의 모험은 동대륙 이전까지 우수한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지금까지 쌓은 모든 업적과 평판을 상쇄해버릴 만큼 치명적이었습니다. 회귀를….
잠시만 기다려봐. 이대로 회귀시키면 다 그만두고 지구로 가버릴 테니까.
불가능한 협박이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남의 생각을 읽는 교사와 시스템 때문에 쭉 머릿속으로도 생각하지 않고 감춰왔는데, 비장의 수가 있다.
팩토리아
페스티벌 당시, 내가 제작한 ‘용자의 팔찌’를 넘겨받고 지구로 귀환한 그녀와 나는 ‘실’로 이어져 있다.
그 실을 따라가면 나는 지구로 갈 수 있다. 그리고 한 번 지구로 돌아간 나를 다시 납치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젠 강제적인 차원이동을 거부할 만큼의 힘이 생겼으니까.
망할 시스템. 어쩔래?
☞계산: 페스티벌 기록과 현실성을 분석 중….
내 몸을 감싸던 차원이동의 빛이 사라졌다.
☞결론: 좋습니다. 변호를 시작하십시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감춰둔 비장의 패를 이렇게 써먹게 될 줄 몰랐지만, 어쩔 수 없다.
북대륙, 서대륙, 남대륙.
세 대륙에서 고생한 시간이 너무나 아까우니까.
수세식 변기의 제조법을 널리 알린다고 무진장 애썼다. 직접 땅을 파고 정화조를 매설하면서 멍청한 기술자와 마법사들을 가르쳤다.
그 짓을 또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면 지금부터 변호를 시작한다.
시스템. 잘 들어.
문제의 발단이 된 파란색 용이 악수하는 척하면서 나를 마법으로 탐색하려 했고, 내 본능이 거부반응을 일으키면서 조건반사처럼 놈을 처리한 거야.
이건 내가 짠 시나리오가 아니다.
그 용은 실제로 나를 탐색하려고 했다.
☞판단: 정당방위의 허용범위 안으로 인정합니다. 하지만 대량학살의 명분은 될 수 없습니다.
그거야말로 억울하다!
나는 처음에 ‘내 말에 거짓이 없으면 운석이 떨어지지 않는다.’라는 조건을 걸었다. 하지만 이 우매한 원주민들이 억지라고 맹비난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조건을 뒤집었고, 하늘에서 운석이 무더기로 떨어진 것이다.
이건 원주민들의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그리고 말은 똑바로 해야지.
동대륙에서 내가 죽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우연히 발생한 자연재해로 생긴 인명피해를 내 탓으로 돌리는 건 억지다.
역으로 나는 구조 활동에 힘썼다.
운석을 막지 못한 무능한 위선자(용)들 대신 정령들과 함께 동대륙을 지켜냈다!
표창장을 줘야 마땅하다구?
☞분석: 논리의 오류를 검색 중….
흥! 내 논리는 완벽하다.
☞결론: 회귀가 불가피합니다.
대체 왜…!
☞원인: 당신의 논리는 주관적입니다. 피해 규모가 당신을 비난한 원주민 한정이었다면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연관 없는 무고한 생명을 다수 끌어들였습니다. 이건 용사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범죄행위입니다.
자연재해를 내가 일으켰다는 증거 있어?
☞반박: 없습니다. 하지만 운석이 떨어지길 기도한 행위는 인성 논란의 소지가 다분합니다. 또한, 용들이 운석을 막지 못하고 후퇴할 때까지 가만히 지켜본 것도 방조죄에 해당합니다.
정말 웃기지도 않는 방조죄로군!
내가 아닌 다른 용사였다면 운석을 아예 막지도 못했다.
막을 능력이 있음에도 지체한 게 죄가 된다면, 다수의 생명을 죽이고 파티를 벌이면서 시간을 낭비한 동료들은?
그 시간에 모험을 계속했다면 더욱 많은 원주민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도 방조죄에 해당하지 않나?
“마약 용사. 포기해. 시스템을 설득하는 건 무리다. 그게 가능했다면 내가 진즉에….”
“상관없어.”
시스템이 설득되지 않으면 내가 지구로 탈주할 거니까. 나를 순순히 회귀시키고 싶다면 이 자리에서 설득해야 한다.
자! 시스템. 어쩔 거지?
☞계산: 논리의 모순을 정리 중….
실컷 찾아봐라. 모순 따위는 없다구?
☞결론: 용사 일행의 파티는 중요한 휴식행위이므로 방조죄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반박함으로써 오류 발생. 용사의 모험 도우미 ‘판타지아 여신’의 잘못이 인정됩니다. 모험 첫날부터 약 4년 동안 당신은 단 하루도 쉬지 않았습니다. 휴식을 권하지 않고 스트레스가 폭발할 때까지 방관한 도우미의 업무 태만은 방조죄에 해당합니다.
시스템이 내린 결론은 내 예상을 한참 뛰어넘었다.
스트레스라고…?
☞긍정: 이번 사태의 발단은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판단. 원인을 조기에 발견하지 못한 도우미, 시스템의 실수입니다. 지금부터 재녹화 외의 차선책을 실시합니다.
시스템은 그 뒤로 침묵했다.
대신,
(정말 죄송해요, 용사님!)
시스템의 대변인이라고 할 수 있는 판타지아 여신님이 튀어나왔다.
(살짝 변명하자면, 지금까지 당신 같은 용사는 없었어요. 굳이 휴식을 권하지 않아도 알아서들 잘 쉬었거든요. 전례가 없는 바람에 방심했답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려요.)
존경하는 여신님. 말로만 사과하고 끝낼 건 아니지?
(물론이죠! 하지만 그전에 이번 사태부터 해결해야 해요. 제 실수였더라도 비난은 용사님이 감당하게 되니까요. 이대로 아무런 일 없었던 것처럼 뻔뻔하게 모험을 진행하는 건 무리예요.)
그 차선책이 회귀만 아니면 돼.
“정말로 그 고집불통 시스템을 설득하다니…. 마약 용사. 앞으로 쭉 존경하게 될 것 같다.”
“그래. 많이 존경해라.”
나도 일이 이렇게 풀릴 줄은 몰랐다.
뜬금없이 스트레스라니?
(얕보면 안 돼요.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랍니다. 저는 이번 사태의 해결과 배상, 당신의 휴식을 동시에 해결할 생각이에요. 가장 큰 문제는 자연재해로 목숨을 잃은 무고한 원주민들입니다. 그들을 전부 되살리면 이 상황을 충분히 만회할 수 있어요.)
나도 그 생각을 했었다.
현대에서 내 대리자로 활동하는 성녀H를 소환하면 섬E에서 죽은 원주민들을 전부 되살릴 수 있으니까.
시스템이 좀 더 그럴싸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회귀를 부르짖으면 바로 그녀를 소환할 예정이었다.
굳이 회귀까지 갈 필요 없다구?
☞부정: 이 시대에는 성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쓸 수 없습니다. 대신, 편법이 있습니다. 고위급 악마는 다른 종족을 악마로 환생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고위급 악마라면…. 마왕인가?
☞오류: 당신의 고위급 기준은 지나치게 높습니다. 비상대책 4조 8항에 의거하여, 제1급 수감자 ‘쏘시아’의 소유권을 현 시간부로 비상대책위원장 ‘강한수’에게 영구이전합니다. 이 결정에 동의하시면 ‘확인’이라고 직접 말씀해주십시오.
제1급 수감자.
시스템 개발자인 쏘시아는 후원자였던 최초의 천사에게 배신당하고 이곳에 갇혔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멋대로 빼내도 괜찮은 건가?
최초의 천사가 매우 불편해할 것 같다.
“확인.”
하지만 내가 불편한 건 아니니 상관없다.
☞확인: 제1급 수감자 ‘쏘시아’의 소유권 이전이 완료됐습니다. 그녀를 바로 소환할 수 있지만, 자연스러운 시나리오 흐름을 위해 특정 구역에 전송 및 감금해뒀습니다. 아버지인 마왕에게 대항했다가 보석에 봉인됐다는 설정입니다. 찾아가서 구하시면 됩니다.
제멋대로인 판타지 시스템이 마음에 안 들지만, 이번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소유권이 넘어온 걸까?
쏘시아의 위치가 내게 보이기 시작했다.
“빠르게 가볼까.”
나도 모르게 서두르는 걸 보면, 시스템의 말처럼 스트레스가 쌓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난 4년 동안, 정령 보리스가 부드러운 핫팩이 되어줬지만, 내 뒤통수를 후려친 비겁한 악마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는 나날이 복리로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이제, 청산할 때가 됐다.
“마약 용사. 이 공동묘지가 수상하다.”
“그래. 굉장히 수상하지.”
쏘시아가 봉인된 위치는 정의로운 용사를 비난했던 우매한 원주민들이 사는 도시 외곽의 공동묘지였다.
형편이 좋지 못한 사람은 근처 신전에 약간의 기부금을 내고 시신을 자연으로 돌려보내지만, 부유한 상인과 가문에서는 이처럼 공동묘지에 기념비적인 비석을 세운다.
단, 시신을 고스란히 묻진 않는다.
마법이 있는 판타지 세계에선 시체가 벌떡 일어나서 생사람 잡는 사례가 지구의 교통사고만큼 흔하기 때문이다.
“멈추시오! 여기는 외부인이….”
“너도 악수할래?”
사교성 넘치는 용사의 제안에 묘지관리자로 둔갑한 용이 주둥이를 다물었다.
“대체 우리에게 왜 이러는 것이오!”
“비겁한 마누- 유용한 동료를 구하러 왔다.”
“동료…? 여기는 도시민들의 마지막 안식처요. 그대의 동료가 이 도시 출신이라면 이름을 대시오. 그러면 내가 그곳까지 안내하리다.”
“그럴 필요 없어.”
나는 공동묘지 중앙에 자리한 납골당으로 향했다.
그 납골당은 지상에 간이화장실처럼 생긴 출입구 하나만 딸랑 있었고, 두꺼운 철문 너머로는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어두컴컴한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쭉 이어져 있었다.
내 본능이 속삭였다.
쏘시아가 이 아래에 있다고.
“멈추시오! 죽은 사람을 모독- 켁켁?!”
“너도 모독당할래?”
우박처럼 떨어지는 운석을 피해 도망쳤던 용들이 인간의 형태로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를 이 아래로 안 보내겠다는 의지.
하지만 그들의 의지는 허리디스크 앞에 좌절했다.
“어, 어디서 이런 괴물이….”
“인간이 맞긴 하나?”
“으으…. 허리가, 허리가….”
용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납골당을 무너트리려고 했지만, 그 얄팍한 전략은 땅의 정령왕이 보호하면서 무산됐다.
그래. 네 공적은 10분 동안 잊지 않으마.
다급해진 용들은 소형전투형태인 드래고니안으로 변해서 내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실로 하찮았다.
망룡왕 뇌비우스처럼 진짜 싸우려는 전투형태가 아니라, 겉멋만 잔뜩 들어간 얄팍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인간 형태에서 날개와 뿔이 추가되고 끝.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고대나 현대나 생각 없이 사는 건 똑같네.”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판단한 시스템의 판정을 부정해서 상황을 복잡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입 다물고 있었지만, 나는 애초부터 용이란 종족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나이에 걸맞지 않은 유치함에는 치가 떨린다.
내가 1회차 때….
“마약 용사. 1절만 해라.”
“......”
인정머리 없는 마약 정령 같으니!
막상 도착한 납골당 본관은 조금도 어둡지 않았다.
창문 없는 호텔 로비라고 해도 믿어질 만큼 화려하면서도 웅장한 실내장식과 넓은 면적.
그리고 본관이랑 이어진 다양한 시설이 있었다.
“이봐, 파랑이. 내가 모욕했다는 시체는 어디에 있지?”
“......”
내게 정답게 목을 붙들린 용은 대꾸가 없었다.
68년 경력 용사님의 예리한 관찰력으로 살펴본 결과, 이곳은 다수의 용이 공동으로 생활하는 둥지가 틀림없다.
엄밀히 따지면, 가장 나이가 많고 강한 용 1마리의 둥지에 나머지가 더부살이하는 방식이다.
현대에는 거의 사라진 ‘아파트 둥지’다.
친애하는 전우, 망룡왕 뇌비우스가 용들을 참교육하면서 굳이 공동생활할 필요 없을 만큼 빈 둥지가 많아졌으니까.
“용사님. 보물이 정말 많아요!”
내게 입양되기 전까지 마법사의 집과 작은 마을에서만 생활해와서 호기심이 왕성한 설녀가 겁 없이 용들이 사는 아파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말했다.
용케도 도난장치를 하나도 안 밟았군.
“그리고 사람도 많아요!”
당연히 그럴 것이다.
용들은 보석만 취급하지 않는다.
땅을 파면 보석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만, 소위 ‘영웅’이라고 불리는 보물은 한 세기에 한두 명밖에 없다.
그 희소성은 보석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래서 영웅은 용들이 환장하며 모으는 수집품목 중 하나다.
“너 같은 돌연변이 몬스터도 있을걸?”
북대륙의 악룡, 서리왕 에쉬노프가 설녀를 바로 잡아먹지 않고 납치한 것도 그 때문이다.
애초에 평범한 하피였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온난화의 주범, 빙룡왕 슬레이아스가 사막 한복판에 시원한 파라다이스를 만들고 용사를 초대한 것도 같은 맥락.
희소성 부동의 1위인 용사를 곁에 두기 위함이다.
“용사님. 장식장에 갇혀있는 그들을 제가 풀어줘도 될까요?”
“손 없는 네가 무슨 수로?”
“어…. 제가 발을 동동 구르며 방황하면 가엾게 여기신 용사님이 손을 빌려주시지…. 아얏?!”
“통닭으로 만들어버리는 수가 있다.”
오늘은 용들의 시시콜콜한 취미생활을 따지려고 이곳에 방문한 게 아니다.
나는 보석이 쌓여있는 창고로 걸어갔다.
그리고 보았다.
“정말로 있군.”
“아, 악마가 어째서 우리의 보물창고에…?”
정육각기둥 자수정 안에 비겁한 악마 1마리가 우아한 자태로 곤히 잠들어있었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도 모른 채 태평하게.
“아아, 이것이 휴가란 건가.”
벌써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이다.
그래서 이해가 안 됐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외출하고 없을 때가 휴가라고 했는데, 어째서 나는 반대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