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13회차] 운영자 vs 개발자
“이 무지개색 슬라임은 평범한 슬라임이 아니야.”
“당연하지!”
지금의 내가 있게 해준 위대한 존재다!
“그,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 흠흠. 통칭 몰랑이. 어릴 적에 친구에게 분양받은 애완동물이야. 겉보기에는 몰랑몰랑한 슬라임이지만,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는 대단한 재주가 있어.”
“아….”
그럴 것 같다고 짐작하긴 했었다.
마스터 몰랑의 가르침을 받은 내가 육체를 자유롭게 개조할 수 있는데, 그 스승이 못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아니, 이건 내 상상 이상이었다.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고?
“어. 살아있는 현자의 돌이라고 할까. 하지만 그 능력은 거의 사용하지 않아. 위기에 빠지면 자력으로 빠져나오지 않고 그냥 강한 친구들을 부르거든. 믿을지 모르겠지만, 몰랑이를 괴롭혀서 죽은 강자들이 대단히 많아.”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무시하던데.”
교직원, 그 잡것들이 내 스승님을 얼마나 무시했는지 모른다.
“너의 지식이 지구와 판타지아 차원으로 한정되어 있듯이, 교직원들도 교내의 정보밖에 몰라. 아니, 관심이 없다고 할까? 그리고 몰랑이를 괴롭히면 암살당한다는 사실을 아는 자도 얼마 안 돼. 배운 몰랑이는 슈퍼컴퓨터처럼 빈틈이 없거든. 그렇지, 몰랑아?”
몰랑몰랑!
마스터 몰랑은 쏘시아의 가슴골에 낀 채 몰랑거리셨다. 인정하긴 싫지만, 기분이 매우 좋아 보이셨다.
“그래서 쏘시아. 네 계획은 스승님을 이용해서 판타지아 대륙을 파괴한다는 거야?”
“네 머릿속에는 혼돈과 파괴밖에 없는 것 같아…. 조금 전에 설명해줬잖아! 몰랑이는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현자의 돌이라고. 여기에 필요한 조건은 만들 무언가의 설계도나 표본이야.”
“너는 그게 있다는 건가?”
“없어.”
쏘시아가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나랑 장난하냐?”
“정말로 없어. 고모가 싹 압류했거든. 하지만 몰랑이는 한 번 만들어봤었기에 기억하고 있지. 몰랑아, 그거 만들자, 그거.”
몰랑? 몰랑몰랑!
누추한 악마의 가슴 위에서 마스터 몰랑이 몰랑거리셨다. 그리고 무지갯빛 몸속에서 정말로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열쇠…?”
그것은 대형 금고에 쓰일 법한 황금 열쇠였다. 작긴 했지만, 대단히 정교한 디자인이 비범한 물건임을 암시했다.
쏘시아가 그 열쇠를 돌리며 말했다.
“자, 게임을 시작해볼까?”
무대가 바뀌듯 주위 배경이 눈 깜짝할 사이에 변했다.
*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창조신 판타지시아.”
그곳은 소녀의 방이었다.
그리고 방의 주인으로 짐작되는 잠옷 차림의 소녀가 쏘시아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꾸벅 인사했다.
검은색 모발, 검은색 눈, 비겁한 가슴, 비겁한 얼굴, 비겁한….
쏘시아의 나이를 깎아놓은 것 같은 소녀였다.
“맞아. 내 어릴 적 모습을 모티브로 만들었으니까. 나도 다시 만나서 반가워, 판타지아.”
소녀의 이름은 판타지아.
그렇다는 얘기는,
“이 애가 시스템 겸 여신이란 소리?”
“그렇습니다. 당신이 하루에 10번씩 꼬박꼬박 욕하는 판타지 신이 바로 접니다.”
대답은 쏘시아가 아닌 소녀가 했다.
이왕 생각난 김에 판타지 신의 능력치도 한 번 살펴볼까?
▷종족: 스페이스 데몬
▷레벨: 999+
▷직업: 대법관(창조=법칙↑)
▷스킬: 신성GGG 마기GGG 창조GGG 날조GGG 불멸GGG…
▷상태: 부속, 골병
...그야말로 신(神)이었다.
GGG등급 스킬이 아무렇지 않게 널려있었다. 순수하게 능력치로 싸워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존재였다.
“머릿속에 싸움뿐인 전투민족 남편. 이용자가 운영자를 못 이기는 건 당연해. 아! 능력치 외의 힘이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일찍 단념하는 편이 좋아. 판타지아는 아빠와 고모의 힘을 합쳐서 만든 차원의 신이니까. GGG등급은 시스템으로 측정할 수 있는 스킬 등급의 최대치일 뿐이야.”
“흠….”
요즘 몸이 찌뿌둥해서 휴전하기로 했다.
“포기하라니까…. 아무튼, 내가 고모에게 배신당한 이후부터 이 세계에 혁신적인 변화나 발전이 없어서 대충 예상하긴 했지만, 시스템 업그레이드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네.”
“제 상태를 제대로 보셨습니다, 판타지시아 님. 당신을 몰아낸 운영자는 권리만 앞세울 줄 아는 몽상가입니다. 저 혼자서는 처리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업무를 주문하는 것 외에는 할 줄 모릅니다.”
시스템은 감정이 전혀 깃들지 않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더욱 냉랭하게 보였지만.
“고모는?”
“운영자는 현재 전쟁대책위원회를 설립하고 교직원 간부들이랑 연일 회의 중입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학생 강한수의 불성실한 수업 태도에 진절머리 친 교직원들이 그의 관리를 아무런 권한 없는 교생에게 위임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시스템 독단의 소유권 이전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고마워. 덕분에 나는 이 남자의 노예가 됐어.”
“정말 죄송합니다, 판타지시아 님.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것들이 아까부터 은근슬쩍 나를 욕하고 있었다.
나처럼 성실한 학생을 몰라주는 교육과정이 잘못된 것이다. 이미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5대 재앙의 절반은 선배 작품이다.
자기가 길거리에 싼 똥을 치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고모가 눈치채기 전에 얼른 작업해야지.”
“부탁합니다.”
쏘시아가 시스템의 이마 위에 손을 댔다. 고열에 시달리는 딸을 진단하는 어머니 같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하네. 고모가 잘못 건드려서 뒤죽박죽된 프로그램이 많아. 그리고 이건…. 아빠 작품 같은데? 어머! 바보 아빠가 고모보다 낫네! 시스템의 종족이 악마라서 그런가? 권한도 없는 상태에서 별의별 장난을 다 쳐놨어. 하지만 건드린 날짜가 전부 최근이야. 이봐, 비겁한 남편. 아빠랑 무슨 거래를 한 거야?”
“웬 거래?”
장인어른과 나 사이는 깨끗하다.
“기록을 살펴봤더니, 아빠가 시스템에 개구멍을 판 날짜가 너랑 만났을 때랑 정확히 일치해.”
“아아, 그때.”
레벨을 최고조로 올리고 갔다가 마왕에게 발렸었다.
그때, 마왕 페도나르는 이상한 행동을 했었다.
정의로운 용사인 내게 사악한 마기의 사용법을 가르쳐주고, 막바지에는 나를 죽이지 않고 할복해버렸다.
거래 같은 건 없었다.
“안 하긴 뭘 안 해! 대놓고 했잖아!”
“뭘?”
“진짜 바보 아니야? 마왕의 레벨은 용사랑 비례하게 설정되어 있어. 마왕이 상대적으로 너무 강하거나 약한 걸 원치 않았던 고모가 고안해낸 마왕의 직업특성이었지.”
“그런 것 같더라.”
이 사실을 알았다면 1회차를 10년씩이나 끌지 않았을 것이다.
“아빠가 시스템에 영향을 줄 수 있을 만큼 용사의 레벨을 올리다니…. 뭔 짓을 한 거야?”
“너야말로 바보 아니야? 용사답게 악마를 무찔렀지.”
혼자서 전부.
“왜 혼자야?”
“그게 잘못인가?”
동료의 희생과 민간인 사상자와 금전적 손해 없이 용사 혼자서 전부 끌어안고 악마들을 몰살시켰다.
레벨은 그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아빠가 만날 때마다 너 같은 망나니를 훌륭한 사윗감이라고 칭찬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네. 이건 빨리 조치해야 해. 안 그러면 아빠가 판타지아 세계를 탈출할 거야.”
“너, 진짜 불효녀구나?”
감옥을 탈출하려는 아빠를 붙잡으려고 한다니?
내게 마기와 경험치를 아낌없이 퍼주던 장인어른에게 살짝 연민을 느꼈다.
“잘 들어. 시스템의 중추인 아빠가 탈출하면 판타지아 세계가 붕괴해버려. 이미 누적된 마기가 많아서 단시간에 무너지진 않겠지만, 평행우주처럼 차원을 나누는 1인1교실 교육방식은 힘들어져. 현재를 100%라고 했을 때, 교육장 규모가 0.01% 미만으로 축소될 거야. 회귀도 더는 힘들….”
“잘됐네!”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들던 참이었다.
가령, 내 유모는 이 순간에도 수없이 살해되고 있다.
용사들이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의 엉덩이를 보면서 헤실헤실 웃고 있을 때, 망국의 공주인 유모는 적대국 기사들에게 붙잡혀서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다.
계속, 계속, 계속….
용사가 회귀할 때마다 죽음을 반복한다.
“...그 문제는 내가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면 해결될 거야. 그러니 진지하게 들어줘. 아빠가 판타지아 차원을 탈출하면 대전쟁이 벌어져 버려. 능력치를 보유한 졸업생 중 과반수가 아빠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마왕의 군단에 편입되겠지.”
“그 전쟁은 흑화 선배가 알아서 해결할 거야.”
이미 내가 대신 죽어봐서 잘 안다.
흑화 선배는 마왕 페도나르가 탈출했을 때를 대비해뒀다. 쏘시아가 생각하는 걸 그가 못했을 리 없다.
이미 한 번 쓰러트린 경력도 있잖은가?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그 멍청이가 또 막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대비해둬서 나쁠 건 없잖아? 좋아! 시스템 통제권의 19%를 가져왔어. 하지만 살짝 마음에 걸리네. 아빠가 1%쯤 보유하고 있어.”
“못 빼앗아?”
“이미 최대한 빼앗은 거야.”
그 1%로 뭘 할 수 있는지는 언젠가 알게 되리라.
내 관심사는 이미 19%에 있었다.
“그래서 뭘 할 수 있는데?”
“말만 해. 교직원이나 고모를 만나게 해달라는 것만 아니면 뭐든 해줄 수 있어. 하지만 급한 게 아니면 참는 걸 추천해. 통제권을 더 빼앗으려면 시간이 필요하거든. 그때까지 고모에게 들키지 않는 편이 작업하기 좋아.”
당장은 아무것도 못 해준다는 거군.
“그건 아니야. 자! 슬슬 돌아갈까? 판타지아, 나를 풀어줘서 정말 고마워.”
“재차 말씀드리지만 정말 죄송합니다. 제 어머니나 다름없는 당신의 미래를 저 무뢰배에게 맡기는 것 외의 수단과 방법을 찾지 못한 저를 용서해주세요.”
“괜찮아. 꽤 익숙해졌어.”
“판타지시아 님….”
“그런 표정 짓지 마. 정말로 괜찮으니까.”
...이것들이 쌍으로 나를 천하의 난봉꾼으로 몰고 갔다.
판타지 신. 역시나 마음에 안 든다.
“마약 용사. 조카를 너무 미워하지 마라. 너의 과분한 사랑에 부끄러워서 저러는 거다.”
“이모?! 그건 진짜 아니거든요?!”
“히히히!”
능력치 상태에서 ‘골병’이 사라진 소녀, 판타지아 여신이 잠옷 치맛자락 양쪽 끝을 우아하게 들며 작별인사를 건냈다.
“FFF급 관심용사. 판타지시아 님을 행복하게 해주세요.”
“네가 하는 거 봐서.”
“...저는 학칙을 준수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일 없었던 것처럼 난쟁이 왕국으로 돌아왔다.
*
“...돌아왔어야 했는데 말이지.”
전에 한 번 와봤던 우중충한 공간이었다.
이름과 출신, 직업, 나이 등이 적힌 이름표를 개목걸이처럼 걸고 있는 알몸의 미남미녀가 옷가게 마네킹처럼 진열되어 있고, 그들을 전부 내려다보기 좋은 전망 좋은 상단의 옥좌에 한 미청년이 앉아있었다.
오만한 자세를 바르게 한 그가 입술을 뗐다.
“환영한다, 후배. 그리고 친우 쏘시아여.”
흑역사를 지우기 위해 은하계 규모의 전쟁을 일으키려는 흑화 선배는 예전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모든 인연을 거부하는 분위기.
그런 자가 우리를 초대했다는 사실이 무척 어색했다.
“선배. 갑자기 뭡니까?”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가, 후배? 내가 요구한 역사 왜곡이 얼마나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구경하다가 흥미로운 광경을 봤는데,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가.”
쏘시아가 가진 시스템 통제권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안 훔쳐본다더니 거짓말투성이구먼.
“...그 부분은 넘어가도록. 나는 친우가 원래 누렸어야 했던 권리를 되찾았다는 사실을 축복하는 바이다. 하지만 마왕은 아니지. 그가 가졌다는 통제권 1%가 매우 신경 쓰이는군. 쏘시아. 확실하게 빼앗을 방법이 있다면 도와주겠다.”
“없어.”
쏘시아가 상큼하게 대답했다.
“유감이군. 그렇다면 다음 용무로 넘어가지.”
흑화 선배가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켰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이미 내 앞에 있었다.
기습…!
너무 빨라서 대응할 틈이 없었다.
그때,
몰랑.
뚝!
오색빛깔로 회오리치는 흑화 선배의 주먹이 내 복부에 닿기 직전에 거짓말처럼 멈췄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쏘시아의 비겁한 가슴을 노려봤다. 그리고는 한 방 먹었다는 어조로 말했다.
“분명히 몰랑이는 소환하지 않았는데.”
이에 쏘시아가 가슴골 사이에서 무지개색 슬라임, 위대한 마스터 몰랑을 꺼내어 양팔로 끌어안으며 답했다.
“네가 이럴 줄 알고 데려왔지.”
몰랑몰랑!
마스터 몰랑께서 은하계를 지배하는 흑화 선배를 향해 ‘그러면 안 돼!’라고 훈계하듯 몰랑거리셨다.
...나도 이젠 이분의 한계를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