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251화 (251/430)

 251화

[13회차] We are the one

“...계획이 살짝 어긋났군.”

“선배. 저에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습니까?”

저번에 만났을 때는 스카우트를 제안하더니, 이번에는 다짜고짜 기습했다.

“후배여. 그대의 뻔뻔함에는 감탄밖에 안 나오는구나. 원한이라면 정말 많다고 생각하는데. 내 부하들을 죽이고 성검을 빼앗았으며, 과거의 나를 모욕했다. 설명이 더 필요한가?”

“아하!”

그래도 스카우트하려고 하길래 괜찮은 줄 알았는데, 마음속으로는 계속 복리로 계산 중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부하들을 죽였다는 표현은 잘못됐다.

흑화 선배의 부하들은 나의 정령이 되어 살아가고 있으니까.

“영혼을 합쳐서 정체성을 잃은 그들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

“선배. 우리도 수많은 세포가 합쳐져 있습니다. 보리스는 육체 대신 영혼이 합쳐졌을 뿐이죠.”

“궤변이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세요. 제게 부하를 빼앗겨서 불편하다고.”

“......”

눈썹을 꿈틀한 흑화 선배의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그는 순식간에 다시 옥좌로 돌아간 후에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이 말했다.

“후배의 영혼을 제압해서 묶어두면 쏘시아가 나를 따르게 되리라고 계산했었는데, 수를 읽히고 말았군.”

쏘시아가 보유한 시스템 통제권 19%가 탐났던 모양이다.

그리고 나를 곁다리, 기둥서방 취급했다.

“비겁한 남편. 틀린 말은 아니잖아?”

“너는 이따가 밤에 보자.”

온라인게임이랑 같다.

이 판타지 썩은물들이랑 비교하면 나는 싱싱한 뉴비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들의 강함을 뛰어넘을 수 없다. 68년 동안 정체기 없이 강해져 왔지만, 선배와 쏘시아는 나의 수백, 수천 배의 시간을 수련에 투자했다.

이들이 지금부터 펑펑 놀더라도 내가 따라잡으려면, 그들만큼의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얼마나 걸릴까?

수백 년, 수천 년, 수만 년…?

그나마 선배는 대충 계산이 되지만, 쏘시아의 나이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 큭!

“숙녀의 나이는 따지는 게 아니야.”

비겁한 마누라가 내 옆구리를 찌르며 힐난했다.

“...우주 회장님. 제가 이러고 삽니다.”

남들에게 소문낸 것도 아니고 혼자 머릿속으로 생각했을 뿐인데, 힘만 센 무식한 마누라에게 맞고 삽니다.

우주의 총애를 받고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복에 겨웠네. 내 남편이 된 것 자체가 행운이고 축복이잖아. 내가 어려운 처지가 아니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어.”

“보셨죠? 심지어 뻔뻔합니다.”

나는 쏘시아에게 결혼해달라고 애원한 적이 없다.

마왕 페도나르가 멋대로 나를 사윗감으로 정하고, 이 비겁한 악마가 독자적으로 혼인계약서에 사인하고 마약 정령에게 공증까지 받아서 빼도 박도 못하게 해놨다.

내 청춘을 돌려줘!

“이봐, 남편. 그만해. 미친놈처럼 보여. 우주가 네 친구도 아니고, 그런 한심한 하소연에 일일이 응답할 만큼 한가한 줄 알아? 지금은 여기서 빠져나갈 궁리만….”

코웃음 치던 쏘시아가 말을 잇지 못했다.

흑화 선배는 옥좌에 앉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다시 벌떡 일어섰다.

“이것이 소문만 무성하던 총애인가….”

“말도 안 돼. 완전 반칙이잖아….”

시기와 질투에 찌든 엑스트라들이 뭐라고 떠들든 정의로운 현역 용사의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변화는 내게만 온 게 아니었다.

“아아아!”

“아아-!”

고향별을 지키기 위해, 부와 명성을 위해 흑화 선배에게 덤볐다가 기념품으로 전락한 영웅호걸들.

그들이 신을 찬양하듯 큰 함성을 내질렀다.

자신들에게 죽음보다 더한 굴욕을 안겨준 흑화 선배를 향한 두려움과 복수심이 그들의 영혼을 울렸다.

그리고 나는?

“거래를 받아들인다.”

이들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스르르….

스륵….

흑화 선배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던 영웅호걸들이 경험치로 치환되면서 내게 흡수됐다.

나는 마스터 몰랑이 아니다.

무엇이든 만들어내는 사기적인 능력은 없다.

대신, 나는 유일무이한 ‘인간의 정령’이다.

“나의 경험치가 되어라.”

어떤 인간이든 경험치로 만들 수 있다.

우주 회장님이 내 부족한 능력과 한계를 무마해주고, 마스터 몰랑이 깨달음과 원리를 제공해주셨다. 여기에 최초의 정령이랑 공유하는 커커플링 효과까지 곁들여졌다.

비겁한 마누라에게 무시당하고 사는 나를 불쌍하게 여기신 두 위대한 존재와 마약 정령의 협찬에 무한한 감사를!

덤으로,

“내 각성이 무사히 완료될 때까지 멀뚱멀뚱 구경해주신 선배와 마누라에게도 감사를.”

판타지 출신 악당들은 참 신사적이다.

나였다면 강해지려는 낌새가 보이자마자 요추부터 꺾어버렸을 텐데.

쏘시아는 그렇다 치더라도, 흑화 선배가 기다려준 덕분에 변화한 능력치를 살펴볼 여유마저 생겼다.

▶종족: 유나이티드 스피릿

▶레벨: 999+

▶직업: 탈마(용사=마왕)

▶스킬: 영재ZZZ 신성Z 날조Z 편애MAX 불사MAX···

▶상태: 성검, 성녀, 용린

스킬 변동은 없었다.

그 대신, 종족이 상식의 범주를 이탈했다.

▷종류: 종족

▶명칭: 유나이티드 스피릿

▶등급: 태초

▶태초1: 영웅의 삶을 계승한다.

▶태초2: 계승한 삶을 융합한다.

▷특성1: 우주의 총애가 시들시들해졌다.

▷종족1: 전설적인 인간이다.

우주를 티끌만큼 제어할 수 있었던 효과가 사라졌다.

사용하면 우주의 심연으로 끌려가는 탓에 제대로 활용해본 적 없은 없지만, 지금까지 나를 강자들로부터 지켜주는 일회용 맹독 같은 힘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지나치게 남용한 탓일까?

우주의 총애가 만료됐다!

그동안 우주 회장님이 특급배송으로 보내준 운석으로 재미 좀 봤었는데, 살짝 아쉽게 됐다.

하지만 상관없다.

“슬슬 자립할 때도 됐지.”

우주의 총애가 시들시들해진 이유를 알 것 같다.

너무 강해졌다.

주인공이 매번 이기기만 한다면, 소설이든 만화든 영화든 흥미가 떨어지는 법.

지금의 내가 딱 그 짝이었다.

“꽤 위협적인 종족특성이군. 타인의 전부를 흡수해서 후배의 것으로 만드는 힘인가?”

“제대로 봤어.”

나는 이곳에 갇혀있던 영웅호걸들을 전부 흡수했다.

그들의 육체, 경험, 지식, 영혼, 재능….

그 대가로 전직 용사였던 은하계 지배자를 대신 쓰러트려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반드시 지킬 필요는 없다.

“마약 용사. 그건 사기다.”

“허어! 사기라니! 나는 언제까지 약속을 지키겠다고 기한을 명시한 적 없어.”

흑화 선배를 500년 뒤에 무찔러도 문제없다.

“나를 무찌른다고? 까마득한 후배가 농담도 잘하는군. 잘 들어라, 후배. 내가 굳이 기다려준 것은 승리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네가 무슨 기연으로 얼마나 성장하더라도 내 상대는 안 된다.”

이 선배가 큰 착각을 하는군.

“모든 악당이 선배 같은 마음으로 기다려주다가 패배한다는 걸 모르시는군요? 인생 헛사셨네요.”

“......”

선배가 말없이 옥좌에서 일어섰다.

여러 속성의 힘이 그의 몸 주위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단순한 위협시위였지만, 거기에 내포된 힘은 함부로 건드리면 행성이 먼지로 변할 만큼 아찔했다.

“이봐, 남편. 수컷들의 무가치한 자존심 싸움을 하고 싶은 마음은 잘 알겠는데. 오늘은 사과하고 돌아가는 게 어때?”

“그냥은 못 돌아가.”

마스터 몰랑께서 중재해주지 않으셨다면 크게 당할 뻔했다.

여기서 무릎 꿇는다면 우리를 깔본 선배가 앞으로도 사사건건 귀찮게 할 게 분명하다.

지금, 확실하게 선을 그어둘 필요가 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후배로군.”

“나중에 비겁하다고 비난하지나 마쇼, 선배.”

“그럴 일….”

카아앙-!

콰르르르륵….

잽싸게 소환한 성검 뉴클리온을 수직으로 내리그어서 선배의 대갈통을 좌우로 분리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게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흑화 선배가 소환한 성검에 막혔다.

두 성검이 충돌한 여파로 건물이 팽창하듯 폭발하고, 나와 선배를 중심으로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겼다.

단 한 번의 충돌만으로 도시 규모의 공간이 초토화됐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선배. 계속하시죠?”

“너….”

나는 찔끔찔끔 30%, 50% 강해진 게 아니다.

얼마나 심했으면 우주의 총애가 단숨에 사라졌겠는가?

나 혼자서 무모한 싸움을 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내 종족특성을 빼고 생각했을 때의 가정이다.

“선배가 외면한 사랑과 우정의 쓴맛을 맛보십시오.”

은하계를 정복한 흑화 선배의 기념품, 전리품으로 전락한 영웅호걸들이 나의 피와 살이 되어 협공하는 중이다.

그들 개개인은 선배보다 약하다.

하지만 이처럼 뭉치면?

“비겁한 놈! 정정당당하게 1대1로 싸워라!”

남의 시간과 노력을 무시할 수 있게 된다.

이 악물고 수련해서 강해지더라도, 놀면서 대충 수련한 양아치들이 둘러싸고 협공하면 쓰러질 수밖에 없다.

불합리의 극치.

그것이 사랑과 우정의 힘이다.

나는 판타지아 대륙에서 배운 가르침대로 싸우는 중이다.

다만,

“We are the one.”

우리는 협력을 넘어서서 하나가 됐다.

“We are the champion.”

그리고 승자가 될 것이다.

*

“진짜 너무하네!”

초대해놓고 멋대로 추방하다니!

흑화 선배의 인성을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의 집에서 행패 부리면 누구라도 쫓아낼걸. 하지만 정말 좋은 구경거리였어. 비겁한 남편이 작정하고 비겁하게 싸우면 얼마나 비겁해질 수 있는지 잘 봤어. 진짜 비겁하더라.”

“너, 비겁하게 혼나볼래?”

내 육체에는 수많은 영웅이 함께하고 있다. 싸움만 잘하는 게 아니다. 공성전과 지구전에도 자신 있다.

악마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까!

“...그건 좀 무서운데. 정말로.”

우리는 이번에야말로 불시착하지 않고 난쟁이 나라로 귀환했다.

하지만 무언가 달라졌다.

나는 그 변화를 금방 눈치챘다.

“이건…. 수세식 변기잖아?”

내가 판타지아 북대륙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 보급이 아직 원활하지 않아서 고급여관이나 부자들의 집에서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건 대체 뭐란 말인가?

공중화장실에 수세식 변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심지어 북대륙도 아닌 동대륙에.

혹시…?

“내가 한 건 아니야. 그만큼 시간이 흘렀을 뿐이지. 칫! 몰랑이로 그 멍청이에게 한 방 먹인 줄 알았는데, 우리도 당했어.”

“시간이 흘렀다고?”

...교생 아가씨. 내 말 들려?

▶깜짝: 강한수 생도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말도 없이 갑자기 실종되셔서 교직원 회의가 매일 같이 열리고, 저도 업무 태만으로 선배님들께 혼나고…. 하루하루가 혼돈의 도가니였어요.

잠깐! 며칠이나 지났길래 그리 호들갑이야.

▶대답: 며칠이 아니에요! 무려 12년 동안 실종되셨었어요!

...12년?

우리는 흑화 선배랑 잠깐 대화했을 뿐이다.

그런데 12년이 흘렀다고?

믿어지지 않았던 나는 재확인을 위해 쏘시아를 돌아봤다. 나랑 쭉 함께 있었던 그녀라면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을 터.

쏘시아가 내 스승님을 애완동물 다루듯 쓰다듬으며 답했다.

“최초의 용사가 시공의 흐름을 비틀었어. 그나마 다행이네. 네가 거기서 난장판을 안 벌였다면, 녀석이 시간을 더 질질 끌어서 12년이 아니라 120년이 흘렀을 수도 있어. 당했다는 건 변함없지만.”

터무니없는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12년이면…. 설녀는 이미 양념치킨이 되었겠군.”

“너무 쉽게 포기하는 거 아니야?”

우리는 곧바로 지모왕 말파리의 집으로 달려갔다.

외출하자마자 돌아온 기분이지만, 흑화 선배의 수작으로 그 짧은 사이에 12년이 흘렀다는데 어쩌겠는가?

집은 겉보기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난쟁이 대신 다양한 인간군상이 정원과 거실 등 곳곳에 바글바글했다.

나를 아는 척하는 여자도 있었다.

“안녕! 오랜만이야, 남친!”

지적인 미모의 아가씨였다.

직업은 용사였는데, 능력치나 복장은 마법사에 어울렸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우수한 편이란 건 분명했다.

“...우리가 언제 만난 적 있던가?”

“남친! 어떻게 나를 까먹을 수 있어?! 중등교육장 학생회장! 아직도 기억 안 나?”

“음…. 그런 여자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네.”

“너무해! 나는 정말 보고 싶었는데!”

쏘시아가 말없이 해명을 요구하고. 마스터 몰랑께서 엄하게 몰랑거리시는 가운데, 나는 교생 아가씨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교생 아가씨.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설명: 강한수 생도님이 장시간 실종되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대타를 뽑았어요.

내가 해고됐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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