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13회차] 용사의 동료
후딱 마왕을 쓰러트리고 세상을 평화롭게 하면 좋겠지만, 처음부터 강한 자는 별로 없다.
물론, 아름다운 공주님의 뱃속에서 “응애!”를 외치며 세상 밖으로 나올 때부터 비범한 MAX급 용사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나도 환생했기에 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1회차 초창기는 흑역사로 가득하다.
즉, 용사에게는 시련과 성장의 시기가 꼭 필요하다.
“작전 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선발대 두 분 수고하셨어요. 여러분이 위험을 무릅쓰고 수집한 정보 덕분에 던전 공략이 수월해질 거예요. 오늘 공략할 던전은….”
학생회장은 동료들을 모아놓고 던전을 공략할 방법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이곳에도 일단 돌격하고 보자는 머저리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그들을 살살 달랬다.
“용사님!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호호! 당신의 용맹함과 강함을 모르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는 이게 마지막 싸움이 아니잖아요? 약간의 피해도 누적되면 큰 병이 된답니다. 그리고 던전 보스를 쓰러트리려면 체력을 최대한 보존해둘 필요가 있어요. 당신이 활약할 기회는 금방 올 거예요. 그때는 꼭 부탁합니다. 기대할게요.”
“어흠! 알겠습니다.”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쏘시아는 ‘별꼴 다 보겠네.’ 같은 시선이지만, 절대다수의 남성 동료들은 학생회장이 부탁하면 다 들어주는 편이었다.
그 수법은 나도 알고 있다.
강요가 아닌 부탁.
칭찬으로 상대의 기분과 자존심을 살려준 후, 조금만 양보해달라는 식으로 청원한다. 여기에 그녀의 탁월한 미모가 더해지면 99% 성공률을 자랑하는 미인계가 완성된다.
이게 끝이 아니다.
동료들 사이에서 과도한 경쟁이 없도록 그녀는 분업을 중시했다.
특기로 역할을 나눴다.
돌격대, 경비대, 선발대, 수색대, 지원반, 응급반….
이렇게 나눠버리면 서로 간섭하거나 중복으로 인한 작업효율감소를 대폭 줄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감탄한 부분은 그다음이다.
“대단한걸. 수평관계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어.”
능력이 뛰어난 동료에게 좀 더 많은 칭찬을 ‘분배’하긴 하지만, 지위나 서열 등은 전부 평등했다.
여왕벌을 돌보는 꿀벌들처럼.
벌의 사회구조랑 조금 다른 점이라면, 그 꿀벌의 대다수가 혈기왕성한 수컷이란 점이랄까?
학생회장은 이 무리의 홍일점이었다.
그녀의, 그녀에 의한, 그녀를 위해 잘 꾸려진 하렘이었다.
“남편. 저 뻔뻔한 여자에게 꽤 감탄한 눈치네?”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이유야 어찌 됐든 나는 실패했으니까. 내 1회차는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으며, 동료들은 내 앞길을 가로막는 적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흉내 내고 싶진 않지?”
“그것도 맞아.”
세상을 돌봐야 할 용사가 동료들을 돌보기 바빴다.
수련할 자신만의 시간은 갖지 못하고 온종일 동료들과의 관계 개선과 유지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중등교육과정 학생회장이란 신분을 갖고 있으면서도 전투력은 한참 밀렸으니까.
하지만 늘 이런 식이었다면 충분히 수긍이 간다.
모험 내내 동료들을 잘 활용해서 ‘높은 성적’은 나왔겠지만, 자신이 발전할 시간은 거의 없다.
학생회장의 특기가 마법인 것도 그 때문이다.
약한 탓에 가장 위험한 최전방에 서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안전한 후방에서 지원사격 하는 것밖에 못 했다.
“오빠는 돌격대에서 활약해주세요.”
학생회장의 부탁을 받은 나는 군말 없이 그러겠다고 답했다.
토박이 정령들을 활용해서 이미 던전의 구조를 완벽하게 파악해두고 있었지만, 나는 ‘정보반’이 아니다.
원활한 모험을 위해선, 괜한 참견으로 분란을 조장해선 안 된다.
내 역할에만 충실하면서 적당히 묻어갈 생각이다.
“Owuuuuu!”
“OwuOwuuu!”
던전을 만든 보스, 사악한 마법사A가 키워낸 돌연변이 오우거란 설정인 몬스터가 우르르 달려 나왔다.
알몸뚱이인 일반적인 오우거랑 달리 튼튼한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돌격밖에 모르는 일반 오우거보다 지능도 뛰어나서 약간의 전술을 구사할 줄 알았다.
이래저래 성가신 놈들임은 틀림없었다.
그렇긴 한데….
단신으로 마왕의 성까지 모든 악마를 몰살시키며 돌격한 전적이 있는 내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이번에 대폭 업그레이드까지 했다.
수많은 영웅이 나를 협찬하고 있다. 비겁한 사랑과 우정으로 무장한 나는 흑화 선배조차 치를 떨었다.
그런데 이까짓 오우거쯤이야.
“영웅 여러분. 협력이 뭔지 보여주자고.”
영웅들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필살기를 보유하고 있고, 나는 ‘여성만 쓸 수 있음.’이나 ‘동정만 쓸 수 있음.’ 같은 까다로운 조건이 없는 기술 대부분을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안다.
그리고 뭐가 좋은지 몰라서 흑화 선배의 집에서 전부 써본 결과, 몇 가지 필살기를 선별할 수 있었다.
취향 저격이라고 할까?
스르르륵….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가 그 형태를 바꿨다.
땅거미의 가늘고 긴 다리처럼 생겼던 날개의 골격 첨단에 ‘총구’ 같은 구멍이 생겼다.
이건 장식이 아니다.
나는 그 첨단에서 바늘처럼 얇고 뾰족한 ‘가시’를 발사했다.
가시의 주성분은 나의 뼈이며, 체내에 독소를 품는 암살계열 영웅들의 비법과 필살기를 혼합한 맹독이 묻어있다.
드드드드-
푹! 푹! 푹! 푹!
3쌍의 날개 골격에서 기관총처럼 쏘아진 그 가시들은 오우거들의 몸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단숨에 육체를 녹여버렸다.
흑화 선배마저 따가워했던 치명적인 독이니까. 던전 보스조차 안 되는 일개 몬스터가 견딜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가시가 불발하더라도 걱정할 것 없다.
이 독소는 분자구조가 원형을 유지하는 지속시간이 매우 짧아서 환경과 생태계 파괴는 일으키지 않는다.
정의로운 전직 용사다운 환경보호!
상을 줘야 마땅하다.
“마약 용사. 상으로 내 의자가 될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
“내 머리에서 쫓겨나고 싶은 모양이구나?”
노리는 정령들이 무척 많다구?
“뭣?! 거짓말하지 마라!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이 내 고정석을 노릴 리 없어!”
정령들이 소문처럼 순진하진 않아도 착한 건 틀림없다. 이런 상관을 여태 쫓아내지 않고 따르는 걸 보면 말이다.
주위에서 본 나의 평가는?
“그 많은 오우거가 한순간에….”
“등에 돋아난 저 흉측한 촉수는 대체….”
“용사님. 저 남자는 누굽니까?”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쁠 수가 없지!
아군의 피해는 없고, 시간도 단축했다.
내 체내에서 생산한 독소가 빠진 만큼 수분과 영양분이 부족해지긴 했지만, 극소량이기 때문에 티가 나진 않았다.
흑화 선배의 집처럼 터무니없이 넓다면 또 모르겠지만, 이번에 공략하는 던전 규모는 평균 수준이었다.
“우리 남편. 성장했네. 나는 네가 다짜고짜 큰 기술을 써서 동대륙을 깔끔히 지워버릴 줄 알았거든.”
“네 남편을 바보 취급하니 재미있니?”
“놀리는 게 아니라 전적이 있잖아.”
“상대가 흑화 선배였으니까.”
타락한 최초의 용사를 약해빠진 오우거랑 비교하는 건 실례다. 어쩌면 이미 엿듣고 있을지도 모른다구?
“듣고 있으면 좋겠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내 아내는 성격이 매우 나쁘군.”
남의 아픈 곳을 헤집는 건 좋지 않아.
“새로운 힘에 흥분해서 이것저것 시험해보다가 남의 집에서 쫓겨난 남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흠흠!”
흑화 선배도 전직 용사니 대범하게 용서해줄 것이다.
학생기록부를 지워주지 않으면 은하계 규모의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협박하는 걸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우리는 평범한 부부다운 대화를 나누면서 던전 내부를 전진했다.
미로와 함정은 걱정하지 않았다.
내게 협찬하는 영웅들의 지식과 정보는 방대하고, 그들이 공략한 던전의 숫자와 종류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분명히 처음 와보는 던전이지만, 몇 번 와봤던 곳처럼 머릿속에 선명한 지도가 그려졌다.
스킬이 아닌 경험의 산물.
우리랑 마주친 던전 보스도 무척 당황한 눈치였다.
“나조차 가끔 길을 잃는데, 어떻게 모든 미로의 갈림길과 함정에서 단 한 번의 어긋남도 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는 것이냐?”
“흠….”
예전 같으면 “정의로운 MAX급 용사니까!”라고 답해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일개 ‘용사의 동료’다.
뭐라고 답해줘야 좋을까?
▶조언: 호칭과 직업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강한수 생도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닐까요?
교생 아가씨는 조언도 예쁘네!
그 마음만 고맙게 받겠다.
“이봐, 던전 보스 마법사A. 내가 여기까지 실수 한 번 안 하고 들어온 건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네가 용사의 경험치로 찍혔다는 거야. 그러니 도망치지 말고 얌전히 거기서 기다려. 곧 용사가 너를 처치하러 올 테니까.”
지금의 나는 ‘퇴직 용사’다.
이 시대와 교과서의 주인공이 될 뻔했지만, 흑화 선배의 비열한 수작에 12년이나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직장에서 잘리고 말았다.
하지만 미련이나 후회는 없다.
나는 애초부터 용사란 호구 같은 자리에 관심 없었고, 부와 명예보다는 어머니의 테니스라켓이 조금이라도 덜 아프길 원한다.
빨리 지구로 돌아가서 부모님 앞에 바짝 엎드려야 한다.
“...가끔 네 이야기를 들어보면, 시어머님은 운동기구 하나로 우주를 파괴할 수 있을 것 같아.”
“푸하하하! 과대망상이 너무 심한걸. 어머니는 테니스를 좋아하는 평범한 가정주부야.”
우리의 대화를 듣는 마법사A의 표정이 썩어갔다.
“감히 내 앞에서 염장질을…!”
“내가 언제? 동정을 지켜서 대마법사에 오르지 못한 실패자가 이상한 말을 하네.”
마법사A의 실험실에는 그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한쪽에는 오우거를 해부하고 개조한 흔적이 보이는 전형적인 마법사의 생체실험장이었지만, 다른 쪽은 아니었다.
손발이 쇠사슬로 포박되어 꼼짝달싹 못 하는 미녀들이 알몸으로 붙잡혀 있었다.
삶의 욕구가 안 보이는 얼굴들.
어떤 취급을 받아왔는지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감히 나를 모욕하다니! 나는 대마법사의 경지에 못 도달한 게 아니라 안 도달한 것이다!”
“모든 실패자가 그렇게 말하지.”
쉬웠다면 판타지아 대륙은 대마법사로 넘쳐났을 것이다.
“멍청한 놈. 너의 동료들은 이미 미로에 빠져서 헤매는 중이다. 그들이 이곳에 당도하기 전에 네놈을 쓰러트려 주지. 그리고 옆의 네 아내는 퇴물이 될 때까지 나의 장난감으로 오래오래 써- 쿠엑?!”
“...아! 미안.”
습관이란 이래서 무섭다.
학생회장이 올 때까지 살려둘 예정이었는데, 손이 그만 미끄러져서 요추(腰椎) 4번과 5번 사이를 부러트리고 말았다.
“죽었어.”
혀 빼물고 쓰러진 마법사를 구두 끝으로 톡톡 건드려본 쏘시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사망진단을 내렸다.
“말도 안 돼! 살짝 미끄러졌을 뿐인데!”
“이 마법사가 자기 몸에 걸어둔 28중첩 보호막이랑 함께 척추가 완전히 박살 나서 가루가 됐어. 그리고 너는 처치한 대상의 경험치를 싹 흡수하는 체질이잖아. 이러면 불사 스킬로도 못 살아나. 흐응~ 계속 아닌 척하지만, 아내를 욕하는 소리가 듣기 싫었구나? 귀엽네.”
“닥쳐.”
“어휴~ 귀여워라~”
“아, 진짜! 헛소리할 시간에 살려낼 방법이나 떠올려봐.”
망할 마법사 새끼. 입 다물고 있었으면 1시간쯤 더 살았을 텐데.
“동정이 아니라고 놀리면서 시비는 네가 먼저 걸었잖아. 그리고 바보니? 이젠 성녀를 불러도 되잖아.”
“...어? 생각해보니 그러네.”
내가 선배의 집에 묶여있는 사이에 12년이 흘렀고, 그 사이에 중등교육과정 12회차가 멋대로 끝났다.
훌륭히 성장해서 신성몰랑제국의 2대 황제가 된 아들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게 아쉽지만, 회귀를 너무 자주 한 탓인지 미련은 별로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봉인해둔 이름을 외쳤다.
“찰떡!”
이 순간만을 애타게 기다렸다는 듯이 아름다운 천사가 주인의 부름에 응했다.
정령들에게 부탁해서 마법사A에게 붙잡혀 있던 미녀들을 부지런히 구하던 설녀가 그녀를 멍하니 올려다보며 감탄사를 터트렸다.
“예쁜 날개다….”
체감시간으로 5년 만에 부르는 성녀H.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내 예상 밖이었다.
“그자에게 납치되셔서 걱정했었는데, 건강하신 듯하여 매우 기쁩니다, 강한수 주인님. 그리고 쏘시아- 아니, 판타지시아 님.”
판타지시아라고...?
쏘시아를 그렇게 부르는 존재는 전 우주를 통틀어 단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겁한 남편. 설명이 필요해?”
“어. 당장.”
내가 가장 아끼는 핫팩에 무슨 짓을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