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254화 (254/430)

 254화

[13회차] 시나리오

“오해가 없도록 먼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는데, 무슨 짓을 한 건 시스템이 아니라 너야. 페스티벌 진행자 히프리아는 판타지아가 공을 들여 만든 존재. 음…. 아바타라고 할까?”

“전에는 그런 얘기를 안 했잖아.”

방금 짠 어설픈 변명 아니야?

“너도 안 물어봤잖아. 뭐, 시스템을 욕하면서 시스템의 아바타는 아끼는 게 이상하긴 했지. 성녀는 신(神)의 대변인. 이 둘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게 잘못된 거야. 어디의 비겁한 용사님이 타락시켜서 엇나가버리고 말았지만.”

내가 페스티벌 진행자였던 성녀H를 빼내긴 했었다.

전직 영웅이었던 악마추종자들을 개과천선(改過遷善)하는 이벤트 임무를 이용해서 그녀를 역으로 타락시켰다.

그걸로 다 끝날 줄 알았는데?

“얼른 복구해.”

“아빠나 고모에게 빼앗겨도 괜찮다면 복구해줄게.”

“...설명해봐.”

“너는 2가지 실수를 저질렀어. 성녀를 타락시키는 과정에서 아빠의 마기를 활용했고, 페스티벌 우승 상품으로 받은 천사들을 그녀에게 흡수시켰지. 고모는 최초의 천사. 모든 신성과 천사의 기원은 고모에게서 비롯돼.”

신성과 마기가 문제라는 것 같다.

그래서 이 둘을 제어하기 위해 쏘시아가 관여했고, 성녀H는 본체인 시스템의 영향을 받게 됐다.

여기까지 아주 잘 이해했다.

“찰떡. 지금의 너는 누구지?”

“아직은 저입니다.”

“그래….”

나는 성녀H의 잘록한 허리를 왼팔로 조심스럽게 안으며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코 닿는 거리에 도달하자마자 그녀의 입술에 나의 것을 포개어 틀어막았다.

쏘시아의 눈치는 보지 않았다.

이것이 마지막이니까.

두두둑, 두둑….

성녀H의 등에서 새하얀 천사의 날개가 떨어지고 반투명한 정령의 날개가 돋아났다.

변화는 그것만이 아니다.

▷종족: 호모 스피릿

▷레벨: 1

▷직업: 사도(총애=능력)

▷스킬: 번역A

▷상태: 종속, 환생, 신룡

종족이 천사에서 ‘인간의 정령’으로 바뀌고, 레벨과 스킬은 초기화됐으며, 직업도 성녀에서 사도로 전환됐다.

성녀H의 ‘본질’만 남겨놓고 전부 뽑아낸 셈.

그 본질도 ‘시스템 아바타’란 구속에서 해방하기 위해 내가 전부 재구성했다.

물론, 전부 잘 풀린 건 아니다.

“찰떡. 너의 힘을 빼앗고 총배설강으로 만든 나를 용서하지 마라.”

자연에서 태어나는 정령에게 생식기는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보리스 때는 그래도 ‘외형’만은 전생의 모습을 유지했지만, 성녀H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전생은 ‘시스템 아바타’니까.

불온한 씨를 남겨둘 수 없었다.

이제, 성녀H는 인간과 천사를 거쳐 순도 100% 정령으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인님의 곁에 머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이젠 직업도 바뀌었으니 성녀H라고 부르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냥 평소처럼 찰떡이라고 부르자!

“아름다운 숙녀에게 그딴 이름을 붙이지 마.”

당사자는 불만 없는데, 제삼자인 쏘시아가 딴죽을 걸었다.

“흥! 내가 남의 눈치를 볼 것 같아?”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미래에도 찰떡은 나의 소유다.

용사 페스티벌 얼굴마담이자 진행자였던 그녀를 빼돌릴 때부터 결정된 사안이며, 이건 나에게 묵묵히 충성해온 그녀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신뢰의 표시이기도 하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그녀를 지배하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책임과 양심의 문제다.

“네가 양심을 운운할 줄 몰랐는데….”

“쏘시아 님은 제 주인님을 너무 과소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고향별로 돌아갈 수 있음에도 이처럼 남아서 남을 위해 무료봉사하시는 이유도 양심과 책임 때문입니다.”

대답은 내가 아닌 찰떡이 대신했다.

쏘시아를 부르는 호칭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런 것 같네. 응, 맞아. 인정해. 과소평가했던 것 같아. 그것도 아주 여러모로.”

비겁한 악마가 천연덕스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잘 안다.

이 악마가 무척 아쉬워한다는 것을.

“포기해. 네가 나를 감정적으로 지배할 날은 오지 않아.”

“안 해. 시간은 많으니까. 지긋지긋할 정도로.”

쏘시아는 ‘두 번째 저주’를 받은 악마다.

뭐든지 두 번째다.

그렇기에 내가 ‘세 번째로 사랑하는 여자’를 아끼면 아낄수록 ‘두 번째로 사랑하는 여자’인 쏘시아가 나를 정신적으로 속박하는 힘도 강해진다.

이건 내 전투력이랑 무관했다.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라고 할까?

“아직도 세 번째를 찾는 거야?”

“흥! 기다려. 금방 찾아내서 너를 사랑의 노예로 만들어줄 테니까. 너는 기고만장하겠지만, 히프리아- 찰떡을 네가 소환하도록 유도한 것도 내 계획이었어. 그녀가 너의 첫 번째잖아?”

“글쎄?”

나도 모르는 걸 네가 어떻게 아냐?

“확실해. 시치미 떼도 소용없어. 그리고 원래 감정은 본인보다 주변인이 더 잘 알 수 있는 법이거든.”

“그 말이 맞아. 나의 귀여운 조카가 마약 용사를 생각하는 마음이 훤히 보인다. 히히히!”

“이모님! 제발 좀-!”

명확한 증거를 발견한 탐정처럼 기세등등했던 쏘시아는 최초의 정령이 참견하면서 단숨에 허물어졌다.

그나저나….

“찰떡. 이 마법사를 살려낼 수 있겠어?”

조금 성급했다는 후회가 살짝 들었다.

손이 살짝 미끄러져서 죽여버린 마법사A부터 부활시킨 후에 정령으로 환생시켜도 늦지 않았는데.

직업마저 상실할 줄은 몰랐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죽은 존재를 부활시키는 원리와 과정이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되살린다는 결과는 같으니까요. 주인님의 경험치로 대상의 영혼과 육체를 재구축하면 됩니다.”

“간단하군?”

경험치는 내가 제공하고, 성녀였던 경험을 살린 ‘사도 찰떡’이 능숙하게 마법사A를 부활시켰다.

줄어든 경험치는 티도 나지 않았다.

호숫물을 퍼서 1.5L 생수병에 담은 수준쯤 될까?

동정을 지키지 못해서 대마법사에 오르지 못한 패배자는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비겁한 남편. 상대를 너무 깔보는 거 아니야?”

“쫑알대지 말고 세팅이나 도와.”

“세팅?”

“용사님이 오셔서 사악한 마법사A의 가슴에 마무리 일격을 가해야 모험의 흐름이 맞지. 설녀야. 손이 없다고 멀뚱멀뚱 서서 구경하지만 말고, 구해낸 아가씨들의 팔을 밧줄로 다시 묶어. 아가씨들? 미안하지만, 멍청한 용사의 동료들이 마법사A의 악행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옷도 잠시만 다시 벗어주세요. 그리고 이따가 사람들이 몰려오면 눈물도 좀 흘려주시고.”

시간이 별로 없었다.

마법사A가 죽기 전에 한 말에 따르면, 1시간 뒤에 학생회장과 잡것들이 우르르 몰려온다고 했으니까.

그 전에 세팅을 완료해야 한다.

“이봐, 남편. 너의 번거로운 계획은 잘 이해했어. 하지만 주연인 마법사A가 겁에 질려 있는데, 그게 가능할까?”

쏘시아의 지적대로, 부활한 마법사A는 벌벌 떨고 있었다.

...이러면 확실히 곤란하겠군.

“마법사A야. 나는 네가 곧 찾아올 용사에게 죽길 원하지만, 그 운명에서 벗어날 기회를 줄게. 용사를 제외한 동료들을 몰살시켜. 그러면 너를 풀어줄게.”

“저, 정말이십니까?! 혹시….”

“선배의 수작으로 은퇴하고 말았지만, 10년 전까지만 해도 정의로운 MAX급 용사였어. 풀어준 후에 뒤쫓아가서 죽이는 양아치 짓은 하지 않아. 그러니 안심해.”

“아아…!”

겁에 질렸던 마법사A의 얼굴에 꿈과 희망이 깃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곳으로 향하는 용사의 전력이 막강하다는 걸 깨닫고는 다시 절망에 빠졌다.

이대로면 들킬 것 같다.

“흠. 어쩔 수 없지. 나의 힘을 빌려줄 수밖에.”

남아도는 경험치를 마법사A의 몸에 욱여넣었다.

“내 레벨이?! 힘이, 마력이, 정력이 넘쳐난다…!”

썩은 동태 같았던 마법사A의 눈동자가 다시 희망의 불씨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레벨을 올려놓고 싶었는데,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패배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경험치 그릇이 너무 작아서 어쩔 수 없었다.

“오우거를 지배하는 사악한 마법사라는 설정인데, 최종결전에 오우거가 한 마리도 없으면 허전하겠지? 찰떡. 실험실에 쓸만한 녀석이 아직 있나 살펴봐.”

“네, 주인님.”

몬스터는 죽으면 몇 분 이내에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마법사들은 몬스터를 실험할 때, 강력한 마법으로 전신을 마비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실험실에는 살아있는 오우거도 있었다.

힘줄을 전부 절단하고 재생하지 못하도록 이물질을 심어놨다. 살아있는 박제나 다름없는 상태.

하지만 그건 문제가 안 됐다.

“멍청한 오우거. 위대한 마스터 몰랑을 찬양해라.”

“Owuuu…?”

그분이 한 번 몰랑거리시면 열등한 생명조차 강인해질지니-!

▷종족: 슈퍼 마운틴 오우거

▷레벨: 999+

▷직업: 포식자(포식→흡수↑)

▷스킬: 근력Z 불사Z 내성Z 대형MAX 체력MAX…

▷상태: 강화, 개조, 용맹

정말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스킬을 선물하거나 이식하는 등의 인위적인 방식으로 올릴 수 있는 등급은 초월영역의 바로 아래인 MAX가 한계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편법은 얼마든지 있다.

마음의 정령으로 오우거의 정신을 지배한 후, 스킬들을 싹 초월영역 재료로 쓰도록 지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소모된 스킬들은 다시 MAX급으로 빠르게 채웠다.

마스터 몰랑의 가르침을 받은 내가 단시간에 인위적으로 올릴 수 있는 스킬은 전투계열로 한정됐기 때문에 Z등급 3개가 최대였지만, 5분 작업해서 나온 것치고는 썩 괜찮은 것 같았다.

종족 업그레이드는 서비스다.

“고작 5분 만에 영웅급 오우거를…. 이건 그냥 괜찮은 정도가 아니야, 비겁한 남편. 진짜 비겁한 사기잖아….”

앞으로 8분 뒤에 학생회장과 잡것들이 도착한다.

시간이 애매하게 남는 바람에 영웅급 오우거 한 마리를 더 만들기로 했다.

사악한 마법사 좌우에 1마리씩 배치 완료!

“호오~ 이제 좀 모양새가 나는걸?”

“가, 감사합니다….”

꾀죄죄한 몰골을 다듬고 던전 보스다운 복장과 헤어스타일로 꾸민 마법사A는 썩 괜찮은 비주얼이었다.

그의 침대에는 오랜만에 깨끗하게 몸을 씻은 전라의 미녀들이 관능미를 뽐내며 모여있었다.

손을 묶은 밧줄만 풀면, 침대 밑에 숨겨둔 옷가지와 짐을 챙겨서 곧장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공짜로 부려먹느냐?

아니다. 협찬의 대가로 여비도 조금씩 챙겨줬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점검할게. 용사와 잡것들이 저 문을 열고 들어오면 망토를 펄럭이면서 이렇게 외쳐.”

*

“으하하하!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 용사와 잡것들! 이곳이 너희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물론, 자기가 아직도 10대인 줄 착각하는 용사는 죽이지 않고 내가 오래오래 예뻐해 주마!”

“뭐어~~?!”

마법사A의 유지한 도발에 학생회장이 제대로 걸려들었다.

이건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다.

제법 열심히 준비하긴 했지만, 잠깐 대화만 해봐도 어설픈 부분들이 들킬 테니까.

예를 들어, 앞장서서 먼저 던전에 진입한 내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마법사A에게 묻기만 해도 들통 날 어설픈 시나리오.

그만큼 마법사A의 연기는 서툴렀다.

하지만 기본적인 탐색전을 생략하고 이렇게 바로 전투에 돌입해버리면 상관없다.

그리고 시작된 전투.

내 바람대로 쉽게 결판나지 않았다.

“Owuuuu…!”

“크윽! 오우거가 너무 강해!”

“미, 미친! 머리가 잘렸는데도 재생되잖아!”

“조심해! 지금까지 상대한 오우거들이랑 차원이 달라!”

“오우거가 후방을 노린다! 얼른 막아!”

위대한 마스터 몰랑의 가르침으로 업그레이드한 오우거 2마리가 잡것들을 무찔렀다.

방패를 든 검왕과 용병왕을 무시하고, 뒤편에서 강력한 마법을 준비하는 현자에게 돌격, 그리고 소년의 몸을 힘껏 걷어찼다.

“으아아아~?!”

평소의 코피가 아닌 피가 현자의 몸에서 철철 흘러내렸다.

대마법사의 보호막도 영웅급 오우거의 Z등급 근력과 무지막지한 체급 앞에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그나마 현자이기에 저 정도로 그친 것이다.

다른 마법사와 치유사들은 뭉개져서 형체조차 남지 않았으며, 학생회장의 응원단도 3초를 넘기지 못했다.

...너무 업그레이드했나?

“몰랑이가 이런 비겁한 편법을 가르친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몰라아앙….

구석에 은신한 채 전황을 구경하던 쏘시아가 중얼거렸고, 마스터 몰랑께서는 겸손하게 몰랑거리셨다.

“흠…. 내 예상보다 잡것들이 약하네. 2단계를 쓸 수밖에.”

“2단계?”

“힘에 심취한 마법사가 폭주한다는 전개야.”

얼마 안 가서 생존자는 학생회장과 검왕, 용병왕뿐인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 펼쳐졌다.

승리를 눈앞에 둔 마법사A가 희희낙락했다. 그는 학생회장의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속살을 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그러나,

“크윽…!”

“Owuuu…!”

내가 걸어둔 타이머가 발동하면서 마법사A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오우거 1마리도 통제를 이탈하면서 옆의 마법사A를 공격했다.

그리고 둘이 싸우는 틈에 학생회장은 혼신의 일격을 가했다. 실패하면 죽는다는 각오로 힘껏!

“커억~?!”

“Owuuu~?!”

학생회장의 특기인 ‘절대로 꺼지지 않는 불꽃’에 휩싸인 마법사A와 오우거가 잿더미로 변했다.

그리고 승리!

내가 짠 시나리오대로 흘러갔다.

검왕 알렉스가 끝까지 살아남은 건 유감이지만!

“괜찮은 결과로군. 안 그래?”

“아빠보다 더 마왕 같아….”

“어허! 나처럼 훌륭한 선지자에게 마왕이라니! 나는 용사님께 경험치와 명성을 양보하는 훌륭한 동료라고.”

“마왕 같아.”

“시끄러워.”

이때까진 정말 몰랐다.

정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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