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13회차] 야생 용이랑 마주쳤다!
나의 전폭적인 도움으로 학생회장의 모험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하지만 성공에는 늘 희생이 따르는 법.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용병왕이 “얼마를 주더라도 함께하기 어렵겠소.”라고 말하며 도중에 하차했고,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을 자랑하는 검왕 알렉스만 끝까지 남았다.
그래도 별문제 없다.
학생회장의 동료는 여전히 많았으니까.
정의로운 MAX급 선지자, 사랑을 위해 아빠를 배신한 악마, 고급 깃털을 제공하는 설녀, 커플링을 낀 최초의 정령, 선지자의 왼쪽 겨드랑이를 지키는 바람의 정령왕, 선지자의 오른쪽 겨드랑이를 지키는 물의 정령왕, 선지자의 왼쪽 사타구니를 지키는 땅의 정령왕, 선지자의 오른쪽 사타구니를 지키는 불의 정령왕, 선지자의 성창(聖槍)을 지키는 마음의 정령왕. 그 외의 정령 다수.
소환 대기 중인 찰떡과 쑥떡, 보리스도 있다. 남대륙에 놔두고 온 그림자A도 여차하면 불러올 수 있고.
학생회장의 파티는 여전히 건재했다!
“내가 사랑을 위해 아빠를 배신했다는 설정이 마음에 안 들지만, 따지면 밤에 피곤해지니 따지지 않을게. 하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너의 모험인데? 네가 줄줄이 소개한 동료 중 검왕 알렉스 빼고는 전부 네 라인이잖아. 게다가….”
잔소리를 퍼붓던 쏘시아는, 내 팔뚝을 끌어안은 채 곤히 잠든 미녀를 보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질투가 추하구나, 두 번째.”
“안 해!”
“내가 용사 시절에 그랬듯이, 이 용사님도 남자의 넓고 탄탄한 가슴으로 힐링하는 거지. 그리고 이 파티에 남자라고는 알렉스랑 나밖에 없잖아?”
객관적으로 내가 알렉스보다는 100배 낫지!
고급여관에서 쉴 때마다 학생회장이 내 침실로 조용히 찾아오는 행동은, 음양의 이치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뭐…. 그건 넘어가자고. 진짜 용사가 누구냐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밤에 온 건 아니니까.”
“그러면?”
“멍청이가 오고 있어.”
쏘시아가 ‘멍청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하나다.
흑화 선배.
하지만 이 시대의 그는 아직 삐뚤어지지 않은 평범한 용사다. 국경과 종족을 초월한 취향으로 모든 미녀를 도와주는….
빠르게 퇴장해줬다면 서로 편했을 텐데.
“애송이 선배가 저주왕 말파르트를 드디어 처치한 건가?”
“어. 보고 놀라지 마.”
“언제 도착해?”
“곧. 으음…. 이 속도면 10초쯤 뒤에?”
“그런 건 일찍 말해라!”
농담이 아니다. 이젠 나도 느낄 수 있었다.
흑화 선배보다는 턱없이 약했지만, 애송이 선배 주위에 함께하는 동료들이 풍기는 힘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곳은 판타지아 중앙대륙.
동대륙에서 활약하는 ‘최초의 용사’랑 충돌하고 싶지 않았던 학생회장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중앙대륙을 주요활동무대로 선택했다.
덕분에 지금까지는 모험이 수월했다.
그러나 영원히 충돌하지 않을 순 없었다.
용사가 도굴할 수 있는 던전과 유적 등은 무한하지 않으니까. 얼마 안 남은 밥그릇 싸움은 필연이다.
“이걸 어쩌지? 우리의 용사님은 준비가 안 됐는데.”
학생회장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잠들어있다.
그녀가 무척 피로하다는 것은, 눈 밑과 엉덩이에 생긴 진한 다크서클만 봐도 알 수 있다.
큰일인걸.
“엉덩이는 네가 만든 거잖아! 이 짐승아!”
“흠…. 어쩔 수 없지. 이 MAX급 선지자가 피곤하신 용사님 대리로 나가보는 수밖에.”
“...비겁한 남편. 설마, 노린 거야?”
“뭔 소리야? 나는 네가 알려줘서 이제 막 알았다고.”
학생회장의 엉덩이에 다크서클이 생긴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우연히 날짜가 겹쳤을 뿐이다.
“수상한데….”
“잔말 말고 얼른 따라와. 여관 밖으로 나오라는 듯이 힘을 팍팍 풍기고 있잖아.”
내가 아는 애송이 선배는, 사람이 많이 사는 도시 한복판에서 싸움을 벌일 만큼 정신 나간 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절대 안 할 인간도 아니지만.
한 미녀를 구하기 위해 수백만 명을 가차 없이 죽일 위인이다.
▶공지: 강한수 생도님께 전달할 사항이 있어요! 후임자들의 자진 사퇴와 지지부진한 성적으로 인하여, 교직원 일동은 심사숙고 끝에 강한수 학생을 복직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추가 합의사항과 질의응답은 교생에게 위임하였으니 그쪽에 문의하시면 됩니다. 강한수 학생의 무궁한 발전과 건투를 빕니다. 이상.
타이밍이 참 예술적이네.
이런 중요한 사항을 직접 전달 안 하고 교생에게 떠넘기다니, 그 새끼들에게 양심이 있기나 한 건지 정말 모르겠다.
▶으쓱: 그만큼 선배님들이 저를 신용한다는 의미 아닐까요? 정식교사로 채용되려면 평균 200년 동안 인턴으로 일해야 하는데, 저는 그 시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게 전부 강한수 생도님 덕분이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어…. 이게 감사받을 일인지 모르겠다.
내가 잘한 게 아니라, 교생 아가씨를 싸게 부려먹으려는 교직원 일동이 지나치게 쓰레기인 것 같은데.
▶변호: 그렇지 않아요. 정식교사로 채용되면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는 평생직장인걸요? 전쟁으로 뒤숭숭한 요즘 같은 시대에 이처럼 안정적인 직장은 그리 흔하지 않아요. 그걸 고려하면 200년은 별거 아니랍니다. 선생님이 되는 게 저의 꿈이기도 하고요.
교생 아가씨만 좋다면 나도 응원할게!
그나저나….
내가 다시 용사라고?
▶긍정: 네. 서류상으로는 아직이지만요. 일이 빠르게 처리되면 좋겠지만, 반대하시는 선배님들이 조금 계셔서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하지만 분위기로 보아선 열흘 안에 정식으로 복직되실 거예요. 이렇게 공문이 내려온 것도 확정된 사항이기 때문이랍니다.
그렇군! 내가 다시 주인공이란 거네!
“...비겁한 남편. 뭐해?”
은은한 촛불로 밝혀진 여관 복도를 걸어가다 말고 옷을 벗는 나를 쏘시아가 정신병자처럼 쳐다봤다.
“교생 아가씨가 말하길, 내가 다시 용사로 복직됐다네? 그러면 복장도 용사답게 바꿔야지.”
성검 뉴클리온을 허리띠에 매고, 외부평가가 좋은 천사의 갑옷과 망토를 입었다.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전투화의 낡은 깔창도 새 걸로 교체했다.
마무리는 설녀의 깃털로 만든 수제 머플러!
이것으로 용사의 풍모가 완성됐다.
“표정이 꼭, 새 장난감을 선물 받은 어린애 같아.”
“내가? 나는 평소 그대로야.”
“그건 네 생각이고.”
쏘시아의 핀잔을 무시한 나는 여관 밖까지 위풍당당하게 전진했다.
그리고 마주친 애송이 선배 파티.
좌에서 우로 쓱 훑어본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냐, 저 사기적인 구성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미녀와 미소녀가 주를 이루는 건 그대로였지만, 그녀들의 머리카락 색이 아주 개성적이었다.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황금색, 은색, 초록색, 분홍색….
선배의 동료는 용족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물론, 모두가 암컷인 건 아니었다.
“망룡왕 뇌비우스. 아빠도 치를 떨었던 그 폭군이 멍청이의 동료였던 시절이 잠깐 있었지.”
나는 친애하는 전우가 인간 모습으로 변신한 것을 처음 보았다.
그는 차가운 피가 흐르는 암살자 같은 미청년이었다.
검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복장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이었지만, 목을 감싼 목도리만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녹색이었다.
이 용이 선배의 동료였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유는?”
나는 딱히 중요하지 않아서 여태까지 미뤄뒀던 의문점을 쏘시아에게 물었다.
“용의 고질병인 호기심. 멍청이가 만든 용자의 힘에 흥미를 느끼고 따라다녔어. 그리고 점차 친구로 발전했어. 멍청이는 여자에게 관심이 아주 많았지만, 뇌비우스는 전혀 없어서 감정적으로 충돌할 일이 없었거든.”
“과연….”
용자의 힘이란 건가?
나도 그 힘에 의존하고 매료됐던 적이 있었기에 잘 안다.
패도를 추구하는 망룡왕 뇌비우스라면, 지금보다 강해질 수 있는 길을 마다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용들은 왜 따라다니는 걸까?
...솔직히 관심 없다. 종족을 따지지 않고 아름다운 여성이면 전부 포용하는 선배의 취향이 크게 반영됐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전부는 아니야.”
“아닌 암컷 용도 한두 마리쯤은 있겠지.”
비겁한 악마야, 말꼬리 잡을 게 없어서 그걸 잡냐?
“망룡왕 뇌비우스 옆에 바짝 붙어서 서 있는 풍성한 녹색 머리카락의 용이 보이지?”
“어. 가슴이 굉장히 풍성하네.”
쏘시아가 가리킨 대상은, 대자연의 어머니처럼 풍요로운 미모의 인간 여성으로 변신한 녹색 용이었다.
“성룡왕 에르단티. 죽을 자를 살려내고 영생을 부여하는 권능을 가진 최초의 성녀야. 후대 성녀들은 전부 신에게 힘을 빌렸지만, 그녀만은 오롯이 본연의 힘으로 기적을 행사했어.”
“전에 본 기억이 나네.”
서대륙의 5대 재앙, 망령왕 섹스피어가 G등급 스킬로 소환한 선배의 동료 중에 있었다.
쑥떡이랑 말싸움만 하다가 끝나서 전투방식은 알 수 없었는데, 쏘시아의 말대로라면 치유계열이었던 모양이다.
“싸우게 되면 성룡왕부터 처리해. 안 그러면 절대 못 이겨.”
저 풍성한 날도마뱀의 치유능력이 사기적인 모양이다. 하지만 내 흥미를 끌어내진 못했다.
차라리 뒤편의 파란색 머리카락의 여성 쪽이 더 신경 쓰였다.
가장 최근에 만난 용이기 때문이다.
저주왕 말파르트.
그녀의 가녀린 목에는 노예를 연상시키는 투박한 목걸이가 매어져 있었다.
무슨 생각 중인지 알 수 없는 무미건조한 얼굴을 한 그녀의 푸른색 눈동자는 한없이 고요했다.
순환되지 않은 저수지의 썩어가는 담수처럼.
기나긴 싸움 끝에 토벌됐다더니, 애완동물처럼 ‘용자의 힘’에 속박된 모양이다.
나는 저 힘을 예전에 겪어봤다.
북대륙의 ‘시험의 동굴’이란 곳을 관리하는 대사제가 나를 속이고 지배하려고 할 때 사용한 수단이니까.
같은 힘으로 맞받아쳐서 역으로 지배해줬지만, 매우 위험한 순간이었던 건 틀림없다.
“선지자 강한수. 결투를 신청한다-!”
애송이 선배가 험악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외쳤다.
나는 웃음으로 답했다.
“그런 하찮은 말을 하고 싶었던 거면, 내 마누라의 지겨운 설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됐는데 말이야.”
“응. 기껏 설명해줬더니 지겨웠구나? 다음에는 일절 없어.”
쏘시아가 생긋 웃으며 삐졌다고 주장했다.
“눈치 없긴. 상대를 도발하는 중이잖아.”
“어? 그런 거야? 너무 자연스러워서 진심인 줄 알았지.”
진심이 아니라고는 말 안 했다.
아무튼, 도발 중이라고 밝혔음에도 순순히 도발 당한 애송이 선배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설녀 양을 풀어줘라!”
“맙소사! 아직도 그 소리야?”
내 팔뚝에 정말로 소름이 돋았다.
설녀의 보호자였던 마법사는 나를 선택했고, 손이 없는 당사자도 나를 보호자로 인정했다.
그런데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다고?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이 당시의 저 새끼는 아주 집요해. 한 번 물은 여자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 놈이었거든. 무명(無名)의 야생 용이었던 뇌비우스를 짝사랑한 성룡왕 에르단티를 빼앗으려고 별의별 짓을 다 했었으니까. 급기야…. 이 이상 말하면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전쟁 날 것 같으니 참을게.”
그 뒤를 나는 알고 있다.
뇌비우스는 ‘망룡왕’이란 이름으로 토벌되고, 죽지 않고 용자의 힘에 속박된 그는 천사들의 애완동물로 전락한다.
아주 기나긴 시간 동안.
나는 정의로운 웃는 얼굴로 애송이 선배에게 말했다.
“선배. 아주 기나긴 시간 동안 수련을 좀 더 하신 후에 다시 찾아오십시오. 지금의 당신은 준비가 안 됐습니다.”
“뭐-?”
푹! 푹! 푹! 푹! 푹…!
길게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자존심 상했다는 얼굴로 되묻는 선배를 향해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활짝 펼친 나는, 기관총처럼 가시를 쏘았다.
“꺄악?!”
“기, 기습- 꺅?!”
“아아앜~?!”
사람은 연약한 육체를 보호하려고 갑옷을 입는다. 그런데 인간 흉내 내는 용들은 그런 개념이 없었다.
얼굴, 목, 어깨, 배꼽, 허벅지, 종아리….
차라리 싹 다 벗고 다니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이 용들은 조금이라도 속살을 더 노출하려고 애썼다.
그 결과는 보다시피 몰살!
단단한 비늘로 온몸을 감싼 용의 형태, 하다못해 소형전투에 특화된 용인(드래고니안)의 모습을 했더라면 이렇게 허망하게 죽진 않았을 것이다.
쯧쯧! 한심하긴.
“...기습을 밥 먹듯 하는 비겁한 남편. 이건 복장 문제 이전에 압도적인 전투력 차이라고 보는데.”
“그것도 있고.”
애송이 선배와 용들이 무대에서 빠르게 퇴장했다.
하지만 전부 죽은 건 아니었다.
“뇌비우스 님. 소녀를 지켜주시다니….”
“착각하지 마라, 성룡왕 에르단티. 나와 가까이 있었던 덕분에 운 좋게 살 수 있었던 것뿐이다.”
“네. 알아요. 당신이 그런 분이란 걸요.”
“...너는 여전히 말이 안 통하는 멍청한 용이군. 난쟁이 1마리 때문에 무모한 싸움을 한 지모왕 말파리아스만큼이나.”
다시 용사로 복직한 나의 기념비적인 첫 기습으로부터 살아남은 용은 총 셋이었다.
망룡왕 뇌비우스
성룡왕 에르단티
저주왕 말파르트
내 의도대로 흘러갔다면 저주왕 말파르트만 살아남았어야 했다.
그녀는 동대륙에서 ‘정의로운 MAX급 용사 주인공’인 나에게 쓰러져주지 않으면 안 되니까.
망룡왕과 성룡왕은 아니었다.
아니, 나의 친애하는 전우는 이 정도에 안 당할 거란 기대를 살짝 하긴 했었다. 완전히 예상 밖인 건 성룡왕 하나뿐.
“매우 특이한 인간- 정령이군. 네 몸에서 나의 기운이 느껴진다.”
뇌비우스도 나의 기습에 당했다.
하지만 그의 찢어진 옷 안쪽은 사람의 몸이 아니었다. 검은색 비늘이 빼곡하게 뒤덮인 피부로 되어있었다.
그걸 본 성룡왕이 사르르 얼굴을 붉히고….
퍽-!
내가 한눈판 사이에 돌진해온 뇌비우스의 주먹- 아니, 등 뒤에 감춰둔 꼬리가 나를 힘껏 후려쳤다.
기습에는 기습이란 건가!
“과, 과연….”
입가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으며 나는 씩 웃었다.
제대로 하지 않으면 장인어른께 인사드리러 가기 전에 고꾸라질 것 같았으니까.
영웅들의 힘을 끌어올렸다.
▶부탁: 행성을 부수진 말아 주세요….
그거야 당연하지! 이 주인공만 믿어달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