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13회차] 사랑 때문에~
펄럭!
나는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펼치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여기가 전장으로 바뀌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몰살될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또 재방송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올 터!
안 따라오면 어쩌나 살짝 걱정했는데, 나의 친애하는 전우는 인간에서 용인의 형태로 바꾸고는 바로 뒤쫓아왔다.
▷종족: 다크 드래고니안
▷레벨: 999+
▷직업: 모험가(모험→근성↑)
▷스킬: 태권ZZ 용린ZZ 내성ZZ 체력ZZ 근성Z…
▷상태: 변신
내 기습을 막아내고 역공할 정도로 강한 뇌비우스의 능력치는 생각처럼 높지 않았다. 자주 보던 황혼기가 아닌 젊은 시절의 ‘모험가 뇌비우스’인 탓이다.
하지만 내게 상처를 줄 만큼 높은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만큼 ‘용족’은 사기다. 그리고 그 용족 중에서도 뇌비우스는 매우 특별했다.
“여기면 충분하지 않나?”
“...신사로구먼.”
내가 알던 뇌비우스는 인간이 얼마나 있든 신경 쓰지 않고 맹독 숨결을 무차별적으로 토해내는 패왕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젊은 뇌비우스는 아니었다.
호전적이고 호기심이 많긴 하지만, 불필요한 살생은 피하려는 경향이 보였다.
그게 당연하다?
우리는 건물을 지을 때, 땅 주인과 인근 주민의 눈치는 봐도 건설지에 사는 곤충과 벌레는 신경 쓰지 않는다.
용족의 관점에서 인간은 그 미생물들이다.
인간으로 변신해서 인간을 사랑하고 쫓아다니는 용들을 정상이라고 착각하면 곤란하다.
그런데 지금, 뇌비우스는 인간을 배려하고 있었다.
“참 많이 다르네.”
“아까부터 계속 이상한 말을 하는군.”
“그런 게 있어.”
우리는 공중전에 돌입했다.
하지만 원거리에서 미사일 같은 것을 우아하게 쏘는 게 아니라, 딱 붙어서 손발을 이용한 원시적인 격투를 벌였다.
여기서부터 ‘영웅의 힘’이 진가를 발휘했다.
그들의 지식과 경험이 내게 숙련자, 전문가를 뛰어넘는 달인의 길로 인도했다.
이걸 스킬 등급으로 정의하긴 무리였다.
스킬은 MAX등급이 올릴 수 있는 한계이며, 그 위 단계부터는 숙련도와 노력 아닌, 다른 스킬을 제물로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웅의 힘’은 능력치로 표시되지 않는다.
퍽, 퍽, 퍼버벅…!
문제는, 친애하는 전우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나는 수많은 영웅의 경험을 병렬 구조로 흡수했다면, 뇌비우스는 용족답게 기나긴 수명을 활용한 직렬 구조로 온전한 본연의 지식을 갖고 있었다.
비겁한 협공이나 다름없는 ‘영웅의 힘’에 축적된 내 지식이 훨씬 방대하긴 했지만, 전투에 특화된 강인한 육체로 싸우는 뇌비우스는 이러한 단점을 간단히 상쇄해버렸다.
만만치 않은 전투.
이게 ‘약했던’ 젊은 시절이란 게 더욱 기가 막혔다.
그렇다면-
“이봐, 뇌비우스. 그냥 이쯤에서 멈추는 게 어때? 우리는 원한 관계도 아니잖아.”
내 제안에 뇌비우스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리고는 살짝 거리를 벌린 후에 말했다.
“그 말이 틀림없다. 하지만 나는 아직 듣지 못했다. 어째서 인간인 네게서 나의 냄새가 나는지를.”
아하! 그런 이유였군?
나는 상큼하게 대답해줬다.
“우리가 친구이기 때문이지. 지금의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미래의 너는 나와 친분이 있다.”
“......”
“믿기 싫으면 어쩔 수 없고.”
“...미래에서 왔다는 건가? 그 또한 흥미로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친구든 원수든 너에게서 나의 냄새가 나는 이유가 되진 못 한다. 당장 증명할 방법이 없더라도 상관없다. 이 싸움을 통해서 내가 어떻게든 알아낼 생각이니.”
“하! 못 믿겠다면 어쩔 수-”
▶당부: 강한수 생도님….
...이대로 계속 싸우면 전장이 확장될 것이다.
나와 원주민들은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교직원 대신 나를 담당하는 예쁜 교생 아가씨가 곤란하게 된다.
비밀 친구에게 민폐를 끼칠 순 없지!
흠. 증명할 방법이라?
*
*
*
“...남편. 탈모가 있었어?”
젊은 뇌비우스랑 휴전하고 지상으로 내려온 나를 본 쏘시아가 심각한 어조로 질문했다.
민머리가 안 보이도록 투구를 썼는데, 평소에 안 쓰던 투구를 수상하게 여긴 쏘시아에게 단번에 들키고 말았다.
“여기에는 다 사정이….”
“이모님!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모님! 이걸 보세요! 아직 100살도 안 된 팔팔한 남편에게 벌써 탈모가 왔어요! 이건 이혼 사유로 충분하지 않나요!”
내 말을 무시한 쏘시아가 결혼공증인 중 한 명인 최초의 정령에게 하소연했다.
하지만 이혼 허가는 떨어지지 않았다.
차갑고 딱딱한 투구 때문에 잠시 어깨로 장소를 옮긴 최초의 정령은 웃기 바빴던 탓이다.
“탈모 아니다. 그리고 탈모는 죄가 아니야.”
사용하는 샴푸와 스트레스 같은 후천적인 원인과 건강관리도 중요하긴 하지만, 탈모는 유전적인 영향이 매우 크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탈모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연세가 있으셔서 머리카락이 모자란 것뿐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위로: 괜찮아요. 남자에게 머리카락이 전부는 아니니까요.
교생 아가씨. 정말 아니야! 아닐 거야!
“미래에서 온 나의 친우여. 그대의 비늘에 숨겨져 있던 메시지는 잘 보았다. 그래서 곤란해. 지금의 나는 일개 떠돌이. 그 보답으로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나와 함께 돌아온 뇌비우스가 말했다.
비늘에 박혀 있었다는 그 메시지 내용이 궁금하긴 했지만, 자세한 내용은 묻지 않았다.
그것은 평범한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늘에는 용의 일생이 담겨있는데, 젊은 뇌비우스는 황혼기의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느낀 것이다.
이걸 말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단,
“뇌, 뇌비우스 님?!”
뇌비우스는 인간의 모습을 한 성룡왕의 잘록한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의 가녀린 몸을 품에 안았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란 녹색의 절세미녀는 당황했으나, 슬그머니 그의 탄탄한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이 상황을 만끽했다.
“성룡왕 에르단티. 나를 따라와라.”
“네! 당신 곁이라면 어디든지…!”
갑작스럽게 진전된 관계!
신사답지 못한 고압적인 면이 다소 있었지만, 두 눈이 하트로 변한 성룡왕은 아무래도 좋은 모양이다.
뇌비우스가 내게 건넨 비늘은, 젊은 뇌비우스의 판단과 심경에 영향을 준 게 틀림없었다.
펄럭-!
칠흑색 용인의 날개를 펼치며 떠날 준비를 마친 뇌비우스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래의 내가 어째서 인간과 동족- 특히, 천사들을 그토록 증오하는지는 알 수 없다. 미래에서 온 그대라면 그 이유를 알겠지만, 묻지 않겠다. 이미 나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기에.”
“그래.”
보상이 없어서 매우 아쉽다.
“저…. 싸우시던 두 분이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인간 용사님 덕분에 저는 꿈을 이루게 됐어요. 제 둥지에 있는 모든 보물을 드리고 싶지만, 결혼자금- 어머! 아무튼, 그건 안 되고요! 대신에 저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힘을 조금 나눠드릴게요.”
잘생긴 얼굴과 능력뿐인 빈털터리 남자친구 대신, 행복에 찌든 성룡왕 에르단티가 크게 나왔다!
저 용은 틀림없이 훌륭한 아내가 될 것이다.
성룡왕 에르단티의 권능은 생명.
죽음이란 굴레로부터 자유롭게 풀어주는 힘이었다.
진짜 그녀가 아닌 ‘시스템이 만들어낸 성룡왕’인 탓에 얼마나 유효할지는 모르겠지만, 있어서 나쁠 건 없으리라.
“무운을 빌겠다.”
번창한 도시 위의 하늘로 단숨에 날아오른 뇌비우스의 몸이 빛에 휩싸이더니 순식간에 그 형태가 바뀌었다.
원래의 모습으로.
황혼기의 뇌비우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쑥떡의 10배는 될 덩치는 지상에 착지만 해도 도시가 뭉개질 것 같았다.
그를 뒤쫓아간 성룡왕 에르단티도 본연의 용족으로 돌아갔다.
용족은 태생적으로 중성이지만, 이 녹색 용은 여인의 보드라운 피부처럼 전반적인 분위기가 여성스러웠다.
날카로운 뿔이 다수 돋아난 뇌비우스처럼 위압감이 없고, 쑥떡 같은 귀여운 쪽이랄까.
별명에 ‘왕’이 붙었을 만큼 그녀도 덩치가 큰 편에 속했지만, 뇌비우스랑 나란히 있으니 작게 느껴졌다.
“Daaaaaar-!”
“Greee~♪”
한 차례 포효를 터트린 칠흑, 녹색 용은 구름 저편으로 떠났다.
그리고 남은 건, 푸른색 용 1마리였다.
저주왕 말파르트.
애송이 선배가 죽으면서 자유의 몸이 됐지만, 그녀는 여전히 꼼짝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완전히 정신을 놓은 건 아니었다. 아니, 놔버렸던 정신을 다시 붙잡게 됐다고 하는 게 옳을까?
“오랜만이야.”
“당신은 그때의 용사로군요. 원수를 갚아주시고 저 또한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미 모든 걸 잃은 처지이긴 하지만, 원하시는 게 있으시다면 최대한 빨리 마련해서 보답하겠습니다. 원하시면 이 목숨으로 당신의 명성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용을 사냥하면 ‘용 학살자(드래곤 슬레이어)’로 불리게 된다.
마왕 토벌 다음으로 명예로운 업적!
하물며 이미 마룡으로, 저주왕 말파르트로 알려진 그녀를 처치한다면 나의 명성이 껑충 뛰어오를 게 자명하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너처럼 의욕 없는 용을 사냥해서 뭐 하려고? 죽일 거였으면 아까 죽였을 거야.”
“그것도 그러네요.”
우리의 주변에는 다수의 용이 죽기 직전의 인간 미녀, 미소녀의 모습을 유지한 채 죽어 있었다.
용의 형태였다면 심장이라도 파내서 써먹었겠지만, 이처럼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해있을 때는 건질 게 아무것도 없었다.
영혼과 특성 빼고는 완벽한 인간인 탓이다.
스르르….
자연에서 태어난 용들이 하나둘 자연으로 되돌아갔다.
붉은색 미녀는 주검이 불에 휩싸이며 잿더미로 변했고, 푸른색 미소녀는 물이 되어 대지에 스며들었다. 또한, 갈색 미녀의 시신이 있던 자리에는 무덤 같은 흙더미가 생겼다.
모두가 이런 식으로 옷과 소지품만 남긴 채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건?
“이게 그 문제의 성검이군.”
자연이 아닌 여인의 자궁에서 태어난 인간인 애송이 선배의 피투성이 주검만 이곳에 남았다.
나는 그가 사용했던 ‘최초의 성검’을 주워들었다.
딱 봐도, 굉장히 잘 만들어진 검이었다. 난쟁이 왕자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만든 검이니 어련할까.
“용사님. 정말 무례한 부탁이긴 하지만, 제 목숨이 필요 없으시다면 그 검을 저에게 주실 수 없을까요?”
판타지아 동대륙을 저주로 공포에 빠트렸다고 전해지는 저주왕이란 칭호가 아까운, 매우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파르트가 부탁했다.
나는 그녀의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사랑하는 난쟁이의 마지막 유작이라서?”
“...예전 같으면 아니라고 했겠지만. 네, 맞아요. 저는 난쟁이 왕자님의 작품들이 좋습니다. 그의 그림, 그의 무기, 그의 옷, 그의 조각, 그의 요리, 그의 반지…. 그리고 저를 위해 이것들을 진지하게 만드는 그의 모습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작품을 갖고 싶다는 것 같다.
난쟁이 왕자는 이 ‘최초의 성검’을 만들고 기력이 다하여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성검을 주문한 선배의 탓일까?
그 자세한 내막은 당사자만 알 것이다.
“구구절절한 사연은 잘 알았어. 그러니 선택해. 이 검이 필요한 거야, 그 난쟁이가 필요한 거야?”
“예? 그게 무슨…?”
“질질 끌지 말고 대답이나 해.”
“당연히 저는 왕자님이 더…. 저를 놀리시는 건가요. 어째서 그런 무의미한 질문을 하시는 건가요….”
“의미가 있으니까. 찰떡.”
나의 부름에 아름다운 사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반적으로 순백색이었던 그녀는 성룡왕의 힘에 영향을 받았는지 연한 에메랄드빛이 후광처럼 묻어나 있었다.
다음은 간단했다.
파직-!
나는 최초의 성검을 파괴했다.
걸작에는 ‘장인의 혼’이 깃든다고 한다.
지구에서는 그만큼 뛰어난 작품이란 표현에 지나지 않지만, 이곳 판타지아 대륙에서는 다르다.
에고소드가 흔하게 있는 곳이다.
무기에 장인의 영혼 일부가 깃드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애초에, 무기에 난쟁이 왕자의 영혼이 박히지 않았다면 그가 죽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으윽…. 나, 나는 분명히 죽- 어엌?!”
최초의 성검이 파괴된 자리에 난쟁이가 몬스터처럼 생성됐다. 그 난쟁이의 정체는 볼 것도 없었다.
“왕자님!”
“숨, 숨이- 헉?! 말파리시아 님이 포옹을?! 이게 꿈은 아니겠지요?”
“다시는 당신을 잃지 않겠어요!”
이것으로 판타지아 중앙대륙과 동대륙의 5대 재앙까지 무사히 살려서 중간보스로 교과서에 안착시켰다.
다섯 중 셋이 사랑 문제로 타락했다는 게 아이러니하긴 했지만.
아! 나도 사랑 문제인가?
“헤에~ 비겁한 남편. 나를 사랑하는구나?”
“좀 닥쳐.”
비겁한 딸을 떠넘겨서 내 장밋빛 인생을 망쳐놓은 장인어른을 응징하러 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