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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급 관심용사-257화 (257/430)

 257화

[13회차] 마왕의 안배

역사는 밤에 쓰인다고 했다.

자기가 잘린 줄도 모른 채 꿀잠 자고 있어야 할 학생회장은 여관 침대에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수세식 화장실에 질려서 야외로 나간 줄 알았는데, 아침까지 기다려도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일용직 용사의 쓸쓸한 퇴장이로군!”

“비겁한 남편.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하지만 검왕 알렉스는 유일한 스폰서였던 학생회장 용사가 사라졌음에도 마지막 여정까지 함께하겠다고 해서 나를 슬프게 했다.

매우 위험하다고 설득해도 소용없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내게는 누가 용사고 얼마나 위험하든 중요하지 않다. 이 여정의 끝을 나의 두 눈과 귀에 담고 싶을 뿐.”

야만인 알렉스답지 않은 철학적인 말이로군.

나는 그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한 후, 모험의 중간 단계를 생략하고 곧장 마왕의 성으로 가기 위해 설녀의 깃털을 활성화했다.

남에게 떠넘기기 좋아하는 판타지아 원주민들에게 무료봉사하는 건, 학생회장 탓에 질리도록 했으니까!

“비겁한 남편. 말은 똑바로 해야지. 학생회장이 일을 벌이고 학생회장이 수습했잖아. 너는 구경하기만 했고.”

“어허! 이 악마가 뭘 모르네. 학생회장이 지치고 힘들 때마다 불평하지 않고 위로해줬다구?”

“밤에만?”

“왜? 너는 낮이 편해? 대범한걸~”

“남이 비꼬면 왜곡하지 말고 반성해!”

번쩍-!

정의로운 MAX급 용사님과 잡것들은 중앙대륙 남부를 지배하는 마왕 페도나르가 기거하는 성으로 진격했다!

*

“귀찮구먼.”

마왕의 성에는 공간이동 마법을 방해하는 마법진이 사방에 깔려 있어서 내부로는 이동할 수 없다는 설정이 있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입구부터 시작!

순찰하던 악마들에게 바로 들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침입자다!”

“적들을 죽이자!”

“산 채로 잡아!”

악마들 사이에서 ‘마왕의 딸’ 쏘시아가 얼마나 푸대접 받아왔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런 딸을 나에게 떠넘긴 장인어른에게 다시 한번 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위에게 미안하지도 않나?

“...유감스러운 말만 골라서 하는 남편. 저들은 나를 푸대접하는 게 아니라 내 얼굴을 아예 모르는 거야. 대기업의 말단사원이 회장님 가족을 못 알아보는 것처럼.”

“그렇다면 명함을 보여줘야지.”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네 손에 저들이 아무것도 못 해보고 몰살당하는 광경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쏴아아아-

쏘시아가 GG등급 마기를 한껏 뽐냈다.

악마는 마기의 양으로 주종관계가 정해지는 철저한 계급사회. 그렇기에 그녀의 마기에 노출된 악마들은 예외 없이 땅에 머리를 박고 조아렸다.

악마 졸개, 악마 기사, 악마 남작, 악마 백작, 악마 후작, 악마 공작, 악마 대공….

압도적인 그녀의 마기 앞에선 모두가 평등했다.

정의로운 용사님의 발걸음을 막는 무모한 악마는 없었다. 또한, 미로처럼 복잡한 마왕의 성 내부를 안내해줄 길잡이도 불필요했다.

여긴 과거나 현재나 구조가 똑같았기 때문이다.

“발전이 없네.”

“발전이 없는 게 아니라 안 한 거야. 지금이 딱 적당한 수위라고 보는 거지. 함정이 너무 많으면 용사가 도중에 고꾸라질 수 있고, 너무 쉬우면 마왕의 체면이 구겨지니까.”

“네가 설계했지?”

“...내가 무슨 말실수 했어?”

“옹호하는 걸 보면서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마왕의 성은 객관적으로 형편없다.

최종결전 전에 용사의 동료 서너 명은 확실하게 낙오시켜서 전력을 줄일 수 있어야 하는데, 내 1회차 때부터 13회차까지 그랬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강해서 그런 게 아니다.

침입자를 저지한다는 본분을 지키지 않는 잘못된 기획설계 탓이다.

예를 들자면?

마왕의 성에는 발판을 잘못 밟으면 밑으로 떨어지는 함정이 지뢰처럼 곳곳에 깔려있다.

하지만 함정에 걸리더라도, 아래층에서 다시 위층으로 왔던 길을 되짚어가는 번거로움이 끝이다.

함정 아래에 송곳을 잔뜩 배치해두면 죽을 텐데!

단순히 시간만 빼앗는 게 전부다.

그리고 내가 아는 쏘시아는 그렇게 관대한 악마가 아니다. 비겁한 가슴으로 내 시선을 빼앗고 공격할 만큼 비겁하다.

이런 쏘시아가 본가(本家)의 허술한 방범 장치를 보고도 비난하긴커녕 옹호했다는 것은 ‘무언가’ 있다는 뜻이다.

생각해보라.

여긴 마왕의 성이긴 하지만, 가끔 찾아와서 며칠씩 머물다가 가는 마왕의 딸을 위한 ‘숙녀의 방’도 어딘가에 있다.

그곳에는 쏘시아의 비겁한 검은색 삼각팬티가 잔뜩 보관되어 있을 터. 절대 도난당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함정을 허술하게 해도 괜찮다고?

충분히 수상한 논리다.

“칫! 마음에 안 드네. 네가 점점 나에 대해서 잘 알게 되는 것 같아. 진짜 반려자처럼….”

“점점이 아니라 이미 완벽하게 안다고 자부한다만? 너의 궁둥뼈와 꼬리뼈 모양은 내가 훨씬 잘 알아.”

“그건 변태 아니야?!”

내 머릿속에는 마왕의 성 구조가 완벽하게 들어있다. 유일한 변수인 악마들이 귀찮게 안 하면 함정을 밟을 일이 전혀 없다.

덜컹!

“꺅?! 용사니임~?!”

...나는 안 밟지만, 잡것들은 아니다.

어디에 함정이 있으니 주의하라고 일러줬음에도, 아래층으로 떨어지는 함정을 밟은 설녀가 맥없이 추락했다.

하피답게 날개를 펄럭이면 안 떨어질 텐데, 이 멍청한 새대가리는 그새 나는 방법을 까먹었는지 인간처럼 비명만 질렀다.

“설녀에게 너무 뭐라고 하지 마. 그녀는 못 나는 게 아니라 안 난 것뿐이니까.”

“왜?”

어째서 그런 멍청한 선택을?

“너는 무시하고 지나친 모양인데, 실내에선 비행 금지라는 표지판이 곳곳에 붙어있어.”

“그건 나도 봤어! 그걸 침입자인 우리가 왜 지키는데!?”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금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울 것 같은 몰상식한 발언이네. 비겁한 남편. 그렇게 사는 거 아니야.”

“비겁한 악마에게 지적당하다니….”

살고 싶은 마음이 뚝뚝 떨어지는걸!

그때,

“용사는 계속 앞으로 가라. 나는 함정에 빠진 설녀를 데리고 뒤쫓아가겠다. 손이 없는 그녀가 걱정되는군.”

알렉스가 신사 같은 발언을 하더니 고의로 같은 함정을 밟았다.

덜컹!

그리고는 조용히 밑으로 추락했다.

나는 함정 아래로 사라진 알렉스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 새끼. 누가 원조 용사의 동료 아니랄까 봐. 제멋대로 파티에서 이탈하고 자빠졌네. 할 거면 용사인 내게 허락을 구하고 설명이라도 듣고 빠지든가.”

이 함정은 살상력이 없긴 해도 단순한 구조는 아니다.

똑같은 위치의 함정을 밟더라도 각자가 다른 장소로 떨어지도록 고안되어 있다.

즉, 검왕 알렉스는 설녀를 만날 수 없다.

헛짓거리한 셈!

이 함정의 취지는 똘똘 뭉쳐있는 용사의 파티를 분산시킨 후, 악마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각개격파한다는 전략이다.

...그냥 함정에 빠지자마자 송곳에 찔려 죽도록 해놓으면 간단할 텐데, 구차한 패자부활전처럼 참으로 번거롭게 해놨다.

“비겁한 남편. 정말로 그러고 싶어?”

“갑자기 웬 헛소리야?”

“오랫동안 함께 울고 웃은 동료들이 마지막에 어이없는 함정에 빠져서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광경을 보고 싶냐고.”

“싫겠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아니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나 또한 멍청이의 동료로 오랫동안 함께했어. 그가 신출내기일 때부터 아빠를 쓰러트릴 때까지 쭉. 그리고 아빠의 손에 정든 동료들이 허무하게 몰살되는 광경을 눈앞에서 보고 말았지. 그때 내가 느낀 상실감을 남들도 느끼게 하고 싶지는…. 뭐야? 그 어이없다는 표정은.”

너무 어이없어서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것뿐이다만?

“쏘시아. 착각하지 마. 너에게는 동료지만, 남들에게는 단순한 침입자야. 무시무시한 용사의 동료들을 함정에 빠트려서 피해 없이 처리할 수 있다면, 그만큼 수많은 악마 가정이 구원받는다고.”

“......”

“내가 이 자리에서 함정을 밟고 허무하게 죽더라도 악마를 원망하진 않아. 약하거나 방심한 내 잘못이니까. 남의 행복을 파괴하러 온 자에게 낭만적이고 명예로운 죽음은 사치야.”

그 뒤로 묵묵히 따라오던 쏘시아가 한참 뒤에 말했다.

“나는 네가 무서워졌어.”

“그래? 내가 흑화 선배의 협찬으로 너보다 강해지긴 했지.”

수많은 영웅호걸을 무상으로 제공해준 흑화 선배에게 많이 감사하고 있다.

“전투력을 말하는 게 아니야. 너의 사고방식, 너의 사상은 지극히 이성적이고 옳아. 침입자에게 명예로운 죽음은 사치지. 하지만 그건 다시 말해, 적에게는 자비를 일절 베풀지 않겠다는 뜻이잖아.”

“당연한 소리.”

나를 해하려는 자들을 용서할 만큼 나는 호구가 아니다.

강자든 약자든 적은 적이다.

“내 아빠는?”

“장인어른에게는 유감없어. 내가 용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쓰러트릴 뿐.”

비겁한 딸을 떠넘긴 원한도 있다.

“아주 배가 불렀구나? 세상에서 두 번째로 아름다운 아내를 둔 너는 무릎 꿇고 아빠에게 감사하다고 절해야 해.”

“마약 용사! 내게도 절해라!”

“나쁜 유흥에 빠져서 조카를 팔아넘긴 이모님은 반성이나 해요!”

“히히히!”

설녀와 검왕이 함정에 빠져서 이탈했음에도 전력손실이 전혀 없는 MAX급 용사님과 잡것들은 쭉쭉 전진했다.

그리고 마왕이 기거하는 대전 입구에 별 탈 없이 도착했다.

나는 이 순간이 늘 좋더라.

콰앙-!

웅장한 대문을 힘차게 걷어차면서 정의로운 용사님 입장!

그런 나를 마왕님이 반갑게 맞이해줬다.

“마침내 여기까지 왔구나, 신에게 선택받은 용사여. 짐은 모든 마(魔)의 정점, 마왕 페도나르다! 평생 독신으로 살 줄 알았던 딸을 유혹한 그대에게 뭐라고 감사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아! 사업 이야기는 식후(食後)에 천천히 하는 게 어떤가?”

언제나 옥좌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던 마왕의 대전에는 직사각형의 긴 식탁과 의자가 다수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까다로운 미식가인 장인어른의 취향이 반영된 산해진미가 그 위에 가득 차려져 있었다.

루시퍼 훈제 같은 혐오식품은 단 하나도 없었다.

“뭐…. 사람이 일만 하면서 살 순 없으니까요, 장인어른.”

“그렇지! 역시, 사위는 말이 잘 통해. 하하!”

마왕님이 제공해준 식사는 무척 만족스러웠다. 내가 판타지아 대륙에서 맛본 그 어떤 요리보다도 훌륭했으니까.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귀여운 황제, 신성몰랑제국 황제였던 시절에도 이만한 요리는 먹어보지 못했다.

이것들은 야만적인 판타지 세계의 요리가 아닌 까닭이다.

판타지아 문화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피자와 콜라처럼 이색적인 풍토의 요리가 많았다.

냅킨으로 입술을 닦은 마왕님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사위. 음식이 입에는 맞았는가?”

“매우 좋았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이 당시의 나는 우주 곳곳에서 다양한 식자재를 공수해와서 이곳에 보관해뒀지. 마왕의 성이라고 불리게 됐지만, 원래 용도는 별장이었다고 말하면 믿겠나? 저 테라스에서 엘몰랑도산 치즈를 곁들인 와인을 홀짝이며 내려다보는 경치가 썩 마음에 들어서 자주 찾아오는 곳이었거든.”

그리고 마왕 페도나르는 그 좋아하는 별장에서 최초의 용사에게 패배하여 지금까지 갇히고 말았다.

용사 교육용 광대로 전락한 채로 긴 시간 동안.

“근사한 식사 초대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비겁한 따님 때문에 쌓였던 스트레스와 피로가 싹 풀린 기분입니다. 그러면 슬슬, 사업 이야기로 넘어가고 싶은데요.”

내 직업은 용사, 장인어른의 직업은 마왕.

우리가 할 일은 명확하다.

“사위의 말에는 어폐가 있군.”

“장인어른이라고 눈감아드릴 순 없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저에게 쓰러져주셔야겠습니다.”

“자네가 용사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자네는 아직 정식 용사가 아니지 않나?”

“용사가 맞습니다.”

“일 처리가 엉성한 교직원 녀석들은 그렇게 말했겠지. 하지만 서류상으로는 아직 용사가 아니야. 내 말이 틀렸나?”

탕!

쏘시아가 양손으로 식탁을 박차며 일어섰다. 그녀는 무척 놀란 얼굴로 친부를 쏘아보며 말했다.

“아빠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아는 거야?!”

“나의 사랑스러운 딸아. 설마, 이 아비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 남자를 사위로 삼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용사 강한수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가 점찍어둔 마왕의 그릇이었다. 하지만 정략혼은 꺼려져서 망설이던 차에, 네가 먼저 그를 사랑해줘서 운명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단다.”

“운명…? 헛! 도망쳐-!”

무언가를 뒤늦게 깨달은 쏘시아가 내게 소리쳤다.

나도 직감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늦었다.

마왕 페도나르의 선언이 더 빨랐던 탓이다.

“두 번째 악마에게 저주받은 자여! 용사의 굴레에서 벗어난 그대는 두 번째 마왕이 될지니! 이것은 우주가 정한 섭리. 최초의 악마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 운명을 받아들이겠다!”

모두가 예상했던 용사와 마왕의 최종결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마왕이 탄생했다.

<1부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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