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14회차] MAX급 모범마왕
그것은 신비로운 감각이었다.
싫다고 해도 끈질기게 따라오는 라누벨처럼, 내 육체와 영혼에 착착 감기듯 감싸서 떨어지지 않는 시커먼 물질.
연기? 액체? 반고체?
그 부드러움은 마누라의 비겁한 가슴에 버금갔다.
슈우우우-
내가 그 감각을 만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것은 마른 땅에 떨어지는 폭우처럼 내게 흡수됐다.
워낙 양이 많았기에 전부 소화하지 못하고 넘쳐날 법도 한데, 그것은 한계가 없다는 듯이 내 영혼과 육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끝없이, 끝없이, 끝없이….
나는 이것의 정체를 잘 알고 있다.
마기(魔氣)
육체 강화, 노화 억제, 수명 연장, 외모 보정, 치매 예방, 고속 재생, 공짜 날개, 공짜 뿔, 공짜 의상, 공짜 무기….
만능형이란 표현이 절대 과하지 않는 판타지 자원.
마기를 더 많이 보유한 상급자에게 복종하고, 다혈질처럼 욱하게 되는 단점을 제외하면 최고라고 할 수 있다.
내 능력치에도 변화가 생겼다.
▶종족: 유나이티드 스피릿 판타지아
▶레벨: 999+
▶직업: 탈마(용사=마왕)
▶스킬: 마기GGG 영재ZZZ 날조ZZ
▶상태: 성검, 용린
막대한 양의 마기를 견디지 못한 Z등급 ‘신성’과 잡다한 스킬들이 먼지처럼 쓸려나가고, 그 빈자리를 ‘날조’가 채웠다.
제물과 한계돌파 없이 Z등급에서 ZZ등급으로 상승!
하지만 내가 진짜로 주목한 것은 스킬이 아닌 종족이었다.
▷종류: 종족
▶명칭: 유나이티드 스피릿 오브 판타지아
▶등급: 태초
▶태초1: 영웅을 종속시킨다.
▶태초2: 두 번째 마왕이다.
▷특성1: ㈜우주의 후원을 받는다.
▷종족1: 전설적인 인간이다.
▷종족2: 세계적인 정령이다.
두 단계로 나누어져 있었던 종족 효과가 하나로 통합되고, 장인어른이 말했던 ‘두 번째 마왕’이 새롭게 추가됐다.
그리고 종족특성.
시들시들해졌던 우주의 총애가 후원으로 바뀌었다. 내 몸에 끊임없이 흡수되는 마기의 출처를 단적으로 알 수 있게 해주는 문구였다.
하지만 마냥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세계적인 정령….”
유나이티드 스피릿 오브 판타지아(United Spirit Of Fantasia).
줄여서 USF.
판타지아 세계의 절반을 구성하고 있던 장인어른의 빈자리가 내게로 넘어왔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슈우우우-
판타지아 세계의 유지비용으로 내 마기가 빨리기 시작했다.
설마, 몸뚱이도 여럿으로 나뉘는 건 아니겠지?
치지지직-!
그럴 조짐이 살짝 보였지만, 다른 종족특성의 반발로 무산됐다.
종족1의 ‘전설적인 인간’이 많아지면 희소성이 떨어져서 더는 전설이 아니게 되니까. 사전에 차단된 것이다.
그러나 마기는 지키지 못했다.
내 육체에 흡수되거나 감싸고 있던 시커먼 기운이 판타지아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지듯 빠져나갔다.
마기GGG→마기G
다행히 장인어른처럼 밑바닥까지 떨어지진 않았다. 이 정도면 지나가는 용사A에게 맞고 다니진 않으리라.
그렇다고 유쾌한 상황은 절대 아니었지만.
“흐음….”
훌륭한 사위에게 비겁한 여식과 가업을 떠넘긴 장인어른의 빈자리에 앉은 나는, 마왕의 옥좌 팔걸이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 빌어먹을 직장을 어쩌면 좋지?
심지어 장인어른은 인수인계조차 똑바로 안 하고 ‘사위! 오늘부터 네가 마왕이야! 참 쉽지?’라고 상큼하게 한마디 해주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가출하셨다.
판타지아 차원 밖으로.
“동생에게 당했어.”
“아빠에게 당했어.”
최초의 정령과 두 번째 악마가 한마디씩 했다.
“나도 아는 내용을 강조하듯 말하지 마. 쏘시아.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지 시도해봐.”
“...응. 예상대로 안 되네.”
쏘시아가 허탈하게 웃고는 내 허벅지 위에 엉덩이 깔고 앉았다.
“너, 뭐하냐?”
“미안해서. 내 저주에 휘말려서 고향에 못 돌아가게 됐잖아.”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나는 의자가 아니다.
“의자 취급한 게 아니라 내 나름의 사과표현이거든?! 앞으로 너만의 장난감이 되어줄게. 기나긴 시간을 지루하게 보내지 않도록.”
쏘시아가 그렇게 말하면서 내 가슴에 등을 기댔다.
야릇한 목소리로 남편만의 장난감이 돼주겠다고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전혀 흥분되지 않았다.
그녀의 장난감 의자가 된 기분이다.
“흠…. 벌써 지루해졌어.”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하지만 비겁한 악마의 같잖은 애교 덕분에 복잡했던 머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1회차 마지막이 떠오른다.
무려 10년 동안 나를 괴롭혀온 동료들을 처리하고 마왕 페도나르도 쓰러트린 후, 매연으로 가득한 고향별 지구로 마침내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다.
그때, 뜬금없이 성적표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시작된 2회차!
지금도 그렇다.
“13회차에서 14회차로 넘어온 거네. 별거 아니군.”
“비겁한 남편. 해탈했구나?”
“그러는 너는 반성의 기미가 어째 10초를 못 넘기냐?”
장인어른이랑 단합해서 내 고향길을 막은 일로 무척 미안해하던 마누라는 평상시의 뻔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단합한 적 없거든? 그리고 뻔뻔한 것도 아니야. 어린 남편에게 조언 하나만 할게. 후회와 반성을 오래 끌어안으면 남은 무한한 삶이 피곤해져.”
“그걸 뻔뻔하다고 한다만?”
“삶의 지혜야.”
“그래? 그렇게 지혜롭다면 열 받은 남편에게 혼날 것도 이미 예상했겠군?”
“응? 꺅?!”
공명정대한 마왕님은 뻔뻔한 악마를 응징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알몸의 쏘시아가 과분한 남편의 넓은 가슴에 가녀린 몸을 기댄 채 미역처럼 축 늘어졌을 때였다.
☞조언: 교직원 회의가 끝났습니다.
내 마기를 빨아먹고 사는 기생충 시스템이 튀어나왔다.
☞충격: 창조신 판타지시아 님을 괴롭히는 당신이 공급해주는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끔찍한 사실을 막 자각했습니다. 저에게 자해가 허락된다면 당장 소멸하고 싶습니다.
잡소리는 됐고, 교직원 회의에서 뭐래?
☞설명: 분노로 이성을 상실한 당신에게 절대로 접근하지 말라는 엄명이 떨어졌습니다. 말뿐만이 아니라 아예 교칙으로 정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지정된 관계자 외에는 당신에게 접촉은커녕 메시지조차 보낼 수 없습니다.
접근금지라?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
교직원들은 예전부터 나를 멀리했었으니까. 그 증거가 예쁘고 착한 교생 아가씨고.
☞부정: 그렇지 않습니다. 최초의 용사를 주축으로 짜인 4차 교육과정을 신봉하는 보수파가 몰락 직전에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주인공인 5차 교육과정을 지지하던 개혁파는 이번에 생긴 교칙으로 구심점을 잃고 흩어졌습니다.
제멋대로인 교직원들의 파벌 싸움은 내가 알 바 아니다.
그래서 내가 받을 실질적인 피해나 영향은?
☞요약: 이번 사태는 교직원의 업무 태만으로 서류가 미흡해서 발생했습니다. 원리원칙대로라면, 마왕이 된 당신에게 정신적, 물리적 손해배상을 해줘야 합니다. 하지만 접근 자체를 금지한 교칙으로 인해 흐지부지 넘어갈 공산이 큽니다.
...드디어 이해했다.
회귀를 자주 반복하는 바람에 깜빡했다.
지금까지는 편파판정이든 뭐든 간에 졸업할 성적을 못 낸 ‘내 잘못’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교직원 잘못’이 명백한 상황이다.
보상해줘야 마땅하다!
그런데 보상을 안 해준다고?
“미쳤군….”
“맞아. 너는 미친 짐승이야. 으으….”
“나 말고.”
쏘시아의 헛소리를 무시한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지금의 나는 용사가 아닌 마왕.
마기를 완전히 포기하거나 정신계열 스킬 등급이 높지 않은 한, 판타지아 대륙에 사는 모든 악마와 악마추종자가 내 말에 복종하게 되어있다.
그들이 어디서 뭘 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집중력의 분산 탓에 그들 전체를 동시에 관찰할 순 없지만, 내가 마음먹으면 거리랑 상관없이 세세한 명령도 내릴 수 있다.
순진한 척하는 정령에 버금가는 계급사회!
이 모든 것들이 장인어른이 떠넘기고 간 유산이다.
“보상은 알아서 챙겨가마.”
내가 주인공인 새로운 교과서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정의로운 MAX급 용사가 마왕 페도나르에게 패배한 건 아니지만, 승리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모호한 상황.
굳이 표현하면 비겼다고 할까!
하지만 교직원이 보상해주지 않는다고 한 시점에 다 끝났다.
‘나의 군단이여! 집결하라!’
정령과 악마들이 내 부름에 응답했다.
판타지아 대륙 전역에 흩어져서 살던 ‘마왕의 추종자’들이 중앙대륙 남부로 대이동을 시작했다.
마왕 페도나르의 별장으로.
“마약용사. 뭘 하려고?”
“땅따먹기.”
교직원들이 좋아하는 호구 용사가 소환되어 발붙일 땅을 일절 남기지 않을 생각이다.
장인어른이 아닌 내 마기로 구성된 판타지 세상.
내가 소유하는 게 마땅하다.
“음…. 짐승 남편. 그건 좀 힘들 것 같아.”
눈꺼풀을 올릴 힘도 없었던 쏘시아가 기력을 조금 회복하자마자 내게 딴죽 걸었다.
“왜?”
“교과서가 완성됐거든. 용사의 모험 과정을 새롭게 작성하긴 했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으니까. 용사에게 패배한 마왕은 봉인되어 기나긴 잠에 빠져든다는 거지.”
“하! 봉인? 이 남편을 얕보지 마.”
이젠 누구도 나를 어쩌지 못한다.
흑화 선배랑 싸워도 안 밀렸던 나다. 장인어른에게 가업(家業)을 물려받은 현재는 더 강하면 강했지 약해지진 않았다.
봉인? 차원이동? 회귀? 환생?
누구도 내 운명을 멋대로 바꿀 수 없다.
나는 그만큼 강해졌다.
“얕보지 않아. 교육장의 숫자만큼 잘게 쪼개졌던 아빠랑 달리, 분할되지 않아서 강함을 유지 중인 너를 이리저리 옮기는 건 불가능해. 그걸 눈치챈 고모가 방법을 바꿨어.”
“방법을 바꿔? 어떻게?”
최초의 천사가 직접 강림해서 나랑 싸우기라도 할 건가?
“아니. 고모도 너처럼 세상을 구성하느라 힘이 싹 빠져서 약해진 상황이야. 그리고 우주의 모든 강자가 너처럼 전투민족인 줄 알아? 싸움은 필수가 아니라 최후의 수단임을 명심해. 비겁한 남편. 방법이 궁금하면 창밖을 봐.”
“창밖? 미친!”
쏘시아의 말대로 창밖을 내다본 내 입에서 욕부터 튀어나왔다.
판타지아 대륙이 붕괴하고 있었던 탓이다.
“교과서는 이미 완성됐어.”
그녀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안다. 저 현상을 예전에도 본 적 있었기 때문이다.
용사 지크를 죽인 8회차.
그때의 결말도 이처럼 모든 게 허무(虛無)로 돌아갔었다.
“마왕은 있지만, 용사가 없다는 건가….”
교육장의 존재의미 탓에, 판타지아 차원은 마왕과 용사가 최소 1명씩 세상에 존재해야 유지된다.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세상이 사라진다.
“비겁한 남편. 붕괴의 충격에 대비해.”
“거참….”
내가 봉인되지 않더라도 발을 디디고 살아갈 세상이 사라지면 봉인된 거나 다름없다.
바로 지금처럼.
콰르르…. 번쩍!
판타지아 세계가 붕괴했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재탄생했다.
그리고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
“환영합니다, 마왕님!”
“......”
“정신이 드셨나요?”
“아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그리고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 흉내 내지 마라. 살심(殺心)이 내 척추를 타고 끓어오르니까!
“그, 그래? 봉인되지도 않았는데, 이것저것 풍경이 많이 바뀌어서 혼란스럽지? 차근차근 설명해줄게. 이곳은 마왕의 성이야. 쓰러트린 마왕 페도나르의 끔찍한 저주를 받은 용사 강한수가 2000년 동안 봉인된 장소지.”
“잠깐! 2000년이라고…?”
정말로 2000년이 흐른 건 아니겠지?
“우리는 안 바뀌고 세상은 2000년이 흐른 상태야. 네가 모험한 과거 시대의 2000년 뒤의 모습이라고 보면 돼.”
“아하! 어떤 원리인지 알겠네.”
내가 꿈쩍 안 하니 세상을 바꿔버린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기억을 체크할게. 고모가 수작을 부렸을지도 모르니까. 우선 나부터. 나는 쏘시아. 판타지아 세계를 창조한 두 번째 악마이며, 두 번째 마왕 강한수가 끔찍이 사랑하는 아내야.”
“너, 정신이 완전히 나간 것 같아.”
누가 누굴 끔찍이 사랑한다고? 망상은 적당히 해줬으면 좋겠다.
“막말하는 걸 보니 멀쩡하네.”
“됐고, 상황이나 읊어봐.”
“너의 세력을 묻는 거라면, 대단히 절망적이야.”
“...왜?”
그럴 리 없다.
나는 마왕의 성에 도달할 때까지 악마를 한 마리도 쓰러트리지 않았고, 그 덕분에 장인어른의 전력을 온전히 계승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절망적이라고?
나는 서둘러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쏘시아의 헛소리가 정말임을 깨달았다.
마왕의 성을 둥글게 감싼 해자(垓字) 밖에는, 악마들의 마을과 도시 대신에 인간들의 요새가 떡하니 있었다.
판타지아 중앙대륙 남부 전체였던 마왕의 영토가 도시 하나 규모로 축소됐다는 의미.
이게 어떻게 된 걸까?
“훌륭한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를 받으며 쭉쭉 성장한 어떤 용사님 탓이야. 그가 남긴 수세식 변기가 인류를 강하게 만들었어. 위생과 복지가 개선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인간들이 악마와 몬스터를 야금야금 밀어낸 결과지.”
“수세식 변기가 이걸…?”
수세식 변기가 부활한 마왕의 신변을 위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