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14회차] 내 꿈을 위한 여행! 몰랑!
펄럭!
나는 테라스 난간에 오른발을 올린 후,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활짝 펼치며 날아올랐다.
그러다가 문뜩,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날개가 이전보다 훨씬 커진 것 같은데?”
기분 탓이 아니다.
골다공증을 피하고자 늘 크기에 제약을 뒀던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였는데, 구성성분을 철분 대신 마기로 꽉꽉 채울 수 있게 되면서 재료의 부담이 사라졌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날개로 태양을 덮는 것도 가능하다.
“어디서 저런 끔찍한 날개가…!”
“헉! 마왕이 깨어났다!”
“맙소사! 타락한 용사가 부활했어요!”
“빛의 용사들이여! 집결하라!”
보란 듯이 날개를 펼친 채 공중에 떠 있는 나를 발견한 요새의 인간들이 부산스럽게 떠들었다.
나는 그들의 능력치를 쓱 훑어봤다.
▷종족: 휴먼
▷레벨: 794+
▷직업: 기사(충절→불굴↑)
▷스킬: 불굴S 검술A 맷집A 내성B 체력B…
▷상태: 긴장
요런 근육질 기사도 있고~
▷종족: 휴먼
▷레벨: 813
▷직업: 마법사(나이→마력↑)
▷스킬: 마법S 마술S 마력A 집중A 증폭B…
▷상태: 긴장, 강화
요런 황혼기 마법사도 있고~
▷종족: 휴먼
▷레벨: 999+
▷직업: 치유사(나이→치유↑)
▷스킬: 치유SS 매력S 유혹A 언변B 축복B…
▷상태: 긴장, 축복
요런 예쁜이 치유사도 있었다.
대체로 레벨과 스킬 등급의 균형이 잘 맞은 능력자들이었지만, 최종보스 마왕의 아지트를 포위한 정예군치고는 너무 약했다.
“마약용사. 저들이 약한 게 아니라 네가 강한 거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마약정령!
상대가 나보다 약하든 강하든 적은 적이다. 나를 해하려고 한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비행F→비행D
체력F→체력E
인내F→인내E
이 와중에도 스킬 등급은 야금야금 오르고 있었다.
마왕이 되면서 초월영역 스킬을 제외하고는 전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탓이다.
그나마 나는 상황이 나은 편이다.
빼앗긴 마기와 함께 생성된 내 더미(dummy)들은 스킬이 Z등급 마기 하나만 달랑 주어진 상태였으니까.
종족: 유나이티드 스피릿 판타지아
▷레벨: 999+
▷직업: 마왕(용사→레벨↓)
▷스킬: 마기Z
▷상태: 마검
능력치에 보이는 레벨은 똑같이 ‘999+’였지만, 나처럼 은하계를 꿰뚫을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우려했던 상황이 현실이 된 셈.
사악한 교직원들의 의도대로, 신출내기 용사가 요리하기 좋게 하향된 내 더미들의 능력치는 너무나 절망적이었으니까.
믿을 거라곤 단 하나.
“비겁한 우정의 힘을 보여주지.”
나와 더미들은 의식이 연결되어 있다. 그 점을 이용해서 종족 USF의 종족특성 일부를 공유했다.
내게 종속된 영웅들의 지식과 경험을 더미들에 적용. 포위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던 더미들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탁!
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이곳만이 아니다.
수많은 교과서(차원)에 등장한 내 더미 ‘마왕 강한수’가 비슷한 타이밍에 비슷한 판단과 행동을 했다.
탁! 탁! 탁! 탁…!
그 소리에 맞춰서 마왕의 성 주변 땅이 흔들리고 갈라졌다.
틈만 나면 성희롱하는 땅의 정령들이 한 게 아니다. 장인어른의 비밀무기인 암흑물질로 지진을 발생시킨 것이다.
능력치 외의 기술.
그렇기에 더미들도 쓸 수 있다.
“으아아아~?!”
“사, 살려줘~?!”
“엄마얏~?!”
쫙쫙 갈라진 대지의 틈새로 요새와 인간들이 떨어졌다.
물론, 전부 추락한 건 아니었다.
비행 마법을 쓸 줄 아는 마법사와 민첩한 도적 등은 지진피해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는 안 되지.”
나는 치사하게 살아남은 인간들을 응징하기로 했다.
슈슈슈-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에서 발사된 가시 뼈들이 소나기처럼 생존자들을 무차별적으로 덮쳤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능력치 외의 기술.
마스터 몰랑의 가르침을 승화한 나의 독자적인 힘이다.
“오빠! 제가 구해줄- 꺄앗~?!”
“휴! 살았다…. 컥?!”
한 번 몰랑거리는 것만으로 흑화 선배를 긴장시켰던 마스터 몰랑의 기술답게 살상력 또한 무시무시했다.
마왕의 성을 포위하고 있던 방어선과 요새를 순식간에 파괴하고, 그곳에 상주하던 적들까지 깔끔히 몰살시켰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달그락달그락….
다닥다닥….
나의 G급 마기로 뒤덮인 대지에 널브러져 있던 주검들이 좀비처럼 다시 일어섰다.
그러나 더는 인간이 아니었다.
“마왕님께 충성을 바칩니다!”
“오오! 위대한 마왕님이시여!”
“나의 목숨을 마왕님께!”
악마로 환생한 인간들이 망설임 없이 내 앞에 무릎 꿇고 충성을 맹세하며 찬양하기 시작했다.
마기가 Z등급밖에 안 되는 더미들은 이것까지 흉내 내지 못했지만, 레벨과 스킬 숙련도를 대폭 올릴 수 있었기에 성과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다.
뿅! 뿅! 뿅! 뿅! 뿅!
땅, 불, 바람, 물, 마음.
설정상으론 2000년 동안 떠나 있었던 정령왕 5마리가 내 기운을 느끼고 잽싸게 모여들었다.
녀석들은 제삼자가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신속하게 내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 자리를 잡았다.
내 오른팔에 바람의 기운이 깃들고, 왼팔은 물이 감쌌다. 그리고 나의 공성추는 땅처럼 단단하면서도 불처럼 뜨거워졌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아무리 험준한 난공불락 요새의 성문도 부드럽게 파고들 수 있도록 공성추 전체를 마음으로 코팅했다.
“짐승.”
성문을 활짝 개방하고 혼절할 때까지 나를 쫓아내지 않았던 어떤 비겁한 악마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내 조카가 원래 좀 그러니 이해해라, 마약용사.”
“이모님!”
“왜? 귀여운 조카야. 히히히!”
쏘시아는 시스템을 벗어나서 내 개인소유가 됐기에 더미들 옆에 분신이 생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최초의 정령은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시스템에 묶여있는 존재.
더미들은 나처럼 정령들을 매혹할 능력은 없었지만, 정령들의 불합리한 계급사회 정점에 있는 ‘최초의 정령’들이 더미들을 따라다니기에 결과적으로는 같았다.
“우선, 잃어버린 영토부터 탈환해보실까.”
물론, 내가 직접 하진 않는다.
나와 더미들의 지시를 받은 정령왕들 또한 꿈쩍하지 않고 턱짓으로 아래에 명령했다.
정령왕 바로 아래인 최상급 정령들도 움직이지 않긴 마찬가지. 녀석들은 상급 정령에게 ‘들었지?’라고 묻듯이 쳐다봤다.
그러자 긍정하듯 고개를 끄떡인 상급 정령은 중급 정령들을 손짓으로 부르고, 중급 정령은 다시 하급 정령을….
정령왕, 최상급, 상급, 중급, 하급까지!
더는 떠넘길 후배가 없는 하급 정령들이 부지런히 일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악마들의 마을과 도시가 있었던 폐허를 산과 호수로 덮고 울창한 숲을 조성했다.
그리고 인간들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도록 사방에 늪지대와 구덩이를 파두고, 식인식물과 독버섯 종자를 다른 지방에서 옮겨다가 꼼꼼히 심었다.
이 뒤부터는 크게 건드릴 게 없었다.
인간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밀림처럼 ‘자연의 힘’이 강한 지역에 몬스터가 자연적으로 생성되니까.
그리고 자연의 힘이 짙을수록 레벨과 스킬 등급이 높은 몬스터가 태어나는 건 당연지사.
나는 이걸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
당연히 이것도 내가 하진 않는다.
“마약용사! 내 아이들을 너무 부려먹지 마라!”
“너는 되고 나는 안 되냐?”
“나는 아이들을 부려먹은 적 없어. 언제나 부탁했지.”
야근 안 하는 직원들을 한직으로 좌천시키면서 ‘야근수당 없으니 일찍들 퇴근해.’라고 말하는 사장님 같네.
“Owuuuu-!”
“Troool~!”
“Gob! Gob!”
온갖 몬스터가 마왕의 성 주변에 생성됐다.
이것들을 몰아서 인간이 사는 도시와 마을 쪽으로 유도하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땅을 점령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일궈낸 수세식 변기인데.”
힘들게 키운 자식이나 다름없는 수세식 변기들로 가득한 판타지아 세상을 내 손으로 파괴할 엄두가 안 났다.
“...저기, 비겁한 남편? 변기에 너무 집착하는 거 아니야?”
“집착?”
“어. 집착.”
비겁한 아내가 정말 어이없는 질문을 했다. 그래서 나도 어이없다는 말투로 그녀에게 되물어줬다.
“쏘시아. 한 100년쯤 요강 써볼래? 그 뒤에도 같은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요강 위에 쭈그려 앉아서 구멍의 위치를 잘 조준하고 발사!
치마와 바지에 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자주 비우고 청소해주지 않으면 암모니아 냄새뿐만 아니라 온갖 벌레가 들끓게 된다.
그리고 웬만하면 직접 치우는 게 낫다. 어제 무엇을 먹었는지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다면.
참고로, 황금색에 가까울수록 장이 건강하다는….
“그만! 그만 말해!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자꾸 상상하게 되잖아! 미안! 내가 잘못했어!”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쏘시아가 바로 백기를 들었다.
“앞으로는 수세식 변기를 절대 무시하지 마.”
“...응.”
쏘시아의 대답이 영 시원찮았지만, 관대한 MAX급 남편답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나저나….”
언제나 꼼짝 않고 옥좌에만 앉아있던 장인어른의 심정이 서서히 이해되기 시작했다.
잠깐 움직인 것만으로도 정신적인 피로가 장난 아니었다.
그 원인은 더미들에 있었다.
나를 복사한 더미들이 자율적으로 판단하며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완벽하게 독립된 존재는 아니다.
일일이 내 지시와 허락을 받고 움직인다.
내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지금쯤 뇌세포가 과로사로 싹 죽어서 백치가 됐으리라.
한둘이었다면 이렇게 앓는 소리 하지 않았다.
동시에 수십만 더미를 반자동으로 조종하기 때문에 피곤한 것이다.
특히, 지금처럼 격렬한 전투를 벌이면 정보과부하가 온다.
“히히! 이제 내 고충을 알겠지? 내가 나태해서 마약용사의 머리 위에 온종일 누워있는 게 아니다.”
“...마약정령. 이거, 어떻게 하냐?”
우쭐대는 꼴이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지끈거리는 두통과 피로 해소가 급선무인 나는 최초의 정령에게 조언을 구했다.
“너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을 텐데? 최대한 움직이지 마. 더미들에 명령을 내릴 때는 간결하게. 조금 전 같은 동시 전투는 최대한 피하는 게 좋고.”
“쯧. 귀찮게 됐네.”
나는 장인어른이 넘겨준 마왕의 옥좌에 도로 앉았다. 다른 차원에서 활동하는 내 더미들도 마찬가지로 귀환시켰다.
최초의 정령이 알려준 방법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휴식을 취한 효과가 금방 나타났다.
정신적인 피로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
장인어른처럼 나도 넓은 대전의 옥좌에 가만히 앉아있다.
그나마 나는 비겁한 악마라도 곁에 있어서 허전하지 않았지만, 더미들은 정말로 혼자였다.
머리 위에 누워있는 최초의 정령?
내가 데리고 있는 ‘최초의 정령A’는 수다쟁이지만, 더미들이랑 함께하는 ‘최초의 정령B’부터는 굉장히 과묵했다. 그녀가 심력과 관심 대부분을 ‘최초의 정령A’에 집중한 까닭이다.
나머지는 표현 그대로 더미, 빈껍데기 인형이다.
“흠…. 굉장히 곤란하게 됐는걸.”
나는 더미들로 모든 판타지아 세계를 점령해서 용사들이 소환될 장소조차 남겨두지 않을 계획이었다.
교육에 차질이 생기면 언젠가 폐교될 테니까!
하지만 그게 불가능해졌다.
내가 더미 서넛을 동시에 조종해서 세상을 점령하는 속도보다, 새롭게 생성되는 교육장이 더 많은 탓이다.
이 난국을 어찌하면 좋을까?
장인어른처럼 세월을 낚으며 기다리긴 싫은데….
“비겁한 남편.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오! 뭔데?”
멋진 남편의 기대에 찬 시선을 본 쏘시아가 만족한 얼굴로 내 귓가에 연보라색 입술을 바짝 붙이고는 속삭였다.
“용사들을 키워서 잡아먹는 거야.”
“...아!”
내 꿈을 위한 여행이 지금부터 시작된다!
...나머지는 알 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