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14회차] 2000년의 사랑
“바로 시작해볼까!”
내 USF의 종족특성은 영웅을 종속하는 것이다.
용사도 따져보면 영웅.
교과서에 실린 ‘전직 MAX급 용사 선배님’께 덤비는 싹수없는 후배들을 흡수해서 판타지아 차원을 탈출하면 된다.
“이봐, 남편.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쉽다고 한 적 없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흑화 선배의 집에서 대량의 영웅을 이미 흡수한 상태다. 그런데도 시스템에 조그마한 구멍 하나 못 내고 있었다.
지금부터 얼마나 많은 영웅을 흡수해야 시스템을 이겨낼 수 있을지 감이 안 온다.
깊게 생각해보면 상황은 절망적!
하지만 어렵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비겁한 따님과 3D 가업을 순진무구한 용사님에게 떠넘기고 도망친 장인어른에게 한 방 먹여주지 않으면 잠이 안 올 것 같으니까.
분노조절 장애, 식욕감소, 불면증, 변비, 안구건조증….
장인어른 때문에 온갖 병에 시달리고 있다!
“아응! 아프다면서 아내를 괴롭힐 힘은 넘치는구나?”
“이건 다른 힘.”
힘들고 어려운 상황일수록 성욕이 왕성해진다고 하잖는가?
“용사를 키워서 잡아먹으라는 내 말을 곡해하지 말아줘. 나는 누군가 다치는 걸 좋아하지 않아. 판타지아 시스템은 현재 최초의 천사, 고모가 지배하고 있어. 그 지배권을 빼앗으려면 용사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여야 해.”
변변찮은 후배들을 아군으로 포섭해야 한다고?
“자세히 설명해봐.”
“고모와 너의 조건은 거의 같아. 첫 번째 천사, 두 번째 마왕. 각각 신성과 마기를 이 세상에 공급해주고 있어. 죄인 신분이었던 아빠랑 달리, 너는 이 학교의 최대 후원자인 셈이야.”
“호오?”
최대 후원자! 구미가 당기는 호칭이다.
그래서 학교를 먹자는 건가?
“맞아. 지금까지는 고모가 유일한 후원자이자 대주주였지만, 내가 시스템 통제권 일부를 보유하고, 남편인 네가 학교를 후원해줌으로써 주주(株主)의 자격조건을 갖췄어.”
“...흥미롭네.”
나는 사악한 교직원들에게 납치되기 직전까지 학생 신분이었다. 아직 사회에 찌들지 않은 순수한 영혼!
그래서 주식이나 경영권 같은 회사문제는 거의 모른다.
“히히히! 마약용사. 이과지?”
“닥쳐. 마약정령.”
비겁한 마누라. 계속 말해.
“응. 지금처럼 자격여건이 비등한 상황에서 최고경영자를 결정하는 주체는 그 회사를 구성하는 관계자들이야. 그리고 여기는 학교지. 교직원뿐만 아니라 학생도 그 관계자라고 할 수 있어. 하지만 교직원은 고모의 추종자들이라 힘드니, 우리가 노릴 수 있는 대상은 학생뿐이야.”
“즉, 용사들을 포섭하란 거군?”
쉽네! 자고로 학생의 마음은 선생보다 같은 처지인 학생이 더 잘 아는 법이다.
그리고 나는 전직 용사.
누구보다도 용사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쉽게 생각하지 마. 너도 알다시피, 용사의 일상생활은 언제나 신성으로 찌들어 있으니까. 성검, 성녀, 성물, 성룡, 성혼. 그들은 잠잘 때나 싸울 때나 온종일 고모의 협찬을 받고 있어. 반면, 마왕은 나쁘다는 인식이 짙게 깔려있고.”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었어.”
갈 길이 멀었다.
하지만 그 막막함은 1회차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판타지 원주민들은, 벌레도 못 잡는 여린 고등학생에게 무시무시한 마왕을 쓰러트리라고 강요했다.
불합리한 요구.
하지만 나는 10년 만에 해냈다!
물론, 유쾌한 모험은 절대 아니었다.
마을 꼬마에게 지고 질질 짜며 도망치거나, 고블린이 무서워서 무기를 버리고 수풀에 숨은 적도 있었다. 얕봤던 여자 용병에게 처맞고 온종일 이불 속에 틀어박히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뭐야, 그 표정은.”
“...그냥. 가만히 듣기만 해도 현기증 나는 그 한심한 남자를, 마왕의 후계자로 키우고 내 남편으로까지 만들어낸 판타지아 교육과정과 교직원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 잘못이 아니야.”
“알아. 잘못된 교육법의 폐단이야.”
살짝 마음에 안 들지만, 나와 쏘시아는 서로를 돌아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의 생각이 일치했다.
*
*
*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마왕이 없는 판타지아 차원은 없다.
그 덕분에 나는 더미들의 눈과 귀를 통해서 모든 용사의 위치와 동향, 상태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졸업하지 못한 용사라면 누구든지.
가령, 나의 친구 ‘지크’라든가?
“말도 안 돼! 실비아는 내 여자인데! 나만 바라봐야 하는데! 인간을 혐오하는 요정의 선두주자였던 그녀가 어째서 다른 인간 수컷이랑 시시덕거리는 거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는 불쌍하게도 5차 교육과정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용사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세요?”
“있어! 라누벨, 내 말 좀 들어봐. 요정공주 실비아가 노예시장에 없어. 심지어 정령사도 아니야. 나는 그녀가 정령들이랑 장난치며 노는 모습이 좋았는데!”
“우우…. 라누벨은 용사님이 얼른 제정신을 차렸으면 좋겠어요. 자꾸 이상한 행동을 하셔서 모험이 지체되고 있어요.”
“아니야! 나는 멀쩡해!”
마왕을 쓰러트린 최초의 용사가 흑화 선배에서 나로 바뀌면서 판타지아 세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안 바뀐 것도 있었다.
중앙대륙의 중부에는 ‘만두 왕국’이 존재했고, 귀여운 척하는 고고학자 라누벨이 용사들을 소환하는 것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만두 왕궁에는 층마다 12개의 수세식 화장실이 있으며, 공용이 아닌 남녀 구분까지 되어있다.
언제나 꽃향기에 뒤섞인 암모니아 냄새로 가득했던 왕궁 정원의 공기는 맑았고, 하녀들은 일찍 청소를 끝내고 정원 벤치에 앉아서 한가롭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슬쩍 엿들어보니….
지크 용사님이 고자 같다는 험담이었다.
“지크 용사님.”
“편하게 지크라고 불-”
“야! 지크!”
“라누벨?! 적응이 너무 빠른 거 아니야?! 내가 알던 라누벨은 이렇지 않았는데…!”
“실비아 공주님을 노예시장에서 구매하겠다는 무례한 망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마왕이 부활했어!”
라누벨의 말대로다. 심지어 용사의 머리 위에 있다.
“마왕이라면 걱정하지 마, 라누벨. 내가 마음만 먹으면 6년 안에 토벌할 수 있으니까. 지금 중요한 건, 인간을 혐오하는 실비아가 인간들의 나라 한복판을 버젓이 돌아다닌다는 거야. 그걸로 모자라서 인간 왕자랑 시시덕거리기까지! 말도 안 돼!”
“이상할 거 없어. 실비아 공주님은 인간이랑 결혼하기 위해 가출하셨을 정도니까.”
“뭐어~?!”
...이건 나도 충격적인걸.
“요정왕은 혈통보존을 위해 동족하고만 결혼할 수 있어. 그 때문에 나서스 왕자와 실비아 공주가 서로 왕위를 안 물려받으려고 오누이끼리 신경전을 벌이는 중이야. 현재까지만 보면, 세력이 약한 실비아 공주님이 다음 요정왕이 될 확률이 높아.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가출하셔서 보다시피….”
인간들의 나라를 돌아다니며, 연하(年下)의 순진한 왕자들을 유혹한다는 것 같다.
유감스러운 3대 요정왕 엘브하임이 요정들을 통치하면서 요정왕국의 전반적인 문화와 생태도 싹 바뀐 모양이다.
인간이랑 우호적인 나라로!
...지나치게 우호적이라서 탈인 것 같지만.
“그럴 수가….”
나의 친구 지크가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을 지었다.
“지크. 정말 미안한 얘기인데, 실비아 공주님이랑 결혼하고 싶으면 왕자들 이상으로 출세하는 수밖에 없어. 지금의 너는 요정만 보면 발정하는 수컷에 지나지 않아.”
“말아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라누벨이 오랜만에 올바른 소리를 했다.
용사 지크가 마왕인 나를 쓰러트리기란 불가능하다. 회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자의 한계 탓이다.
▷종족: 아크 휴먼
▷레벨: 19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정력Z 통역A 검술E 체력F 마력F…
▷상태: 우울
지크의 유일한 초월영역 스킬인 ‘정력Z’는 회귀한 후에도 꿋꿋하게 남았지만, 나머지 스킬들은 싹 사라져서 새롭게 올리고 있었다.
정력Z는 침대 위에서나 유용한 스킬이다. 그리고 침대에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어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도 붙어있다.
스킬이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아예 없는 게 낫지 않을까? 정력을 활용할 여자도 없잖아. 그리고 초월영역 스킬은 많아질수록 다음 한계돌파가 힘들어져. 능력치를 싹 갈아엎고 새로 시작하는 편이 나을걸?”
MAX급 마왕님 옆에서 함께 용사 지크를 구경하던 쏘시아의 평가는 지극히 현실적이라서 매우 잔인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유부녀 같으니.
“비겁한 유부남. 너는 절대로 저딴 쓰레기 스킬 올리지 마. 지금의 너도 감당하기 힘드니까.”
“네가 올려달라고 애원해도 안 올려.”
그나저나….
용사의 초기훈련을 전담했던 검왕 알렉스가 안 보였다.
이 녀석이 사라지는 바람에 라누벨의 ‘용사님! 모험! 빨리 모험!’이라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어디 간 거지?
그런 내 의문을 해소해주듯, 귀여운 척하면서 지크에게 언어폭력을 행사하던 라누벨이 말했다.
“지크. 따라와. 소개해줄 동료가 있어.”
“동료라면…. 알렉스겠지?”
“어?! 어떻게 알았어?”
“그야 매번 알렉스였으니까.”
몇 회차인지 모르겠지만, 지크가 노련한 B급 용사처럼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크 주제에 건방진걸!
“우우…. 그러면 나머지 한 명도 맞춰봐.”
지크가 정답을 말해서 기분 상한 라누벨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귀여운 척했다. 그러면서 추가 문제를 냈다.
“또 한 명? 이것도 새롭게 추가된 설정인가….”
“참고로, 굉장한 미녀야!”
“미녀? 아! 실비아구나!”
“땡! 네 머릿속에서 실비아 공주님을 이만 놔줘, 지크. 너 같은 방탕아가 넘볼 신분이 아니야. 하지만 인간이 아닌 건 맞아.”
그렇게 말하면서 둘은 왕궁 밖으로 향했다.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씩씩하게 전진하는 라누벨의 뒤를 지크가 헤벌쭉 웃으며 따라갔다.
나도 더미를 조종해서 그들의 뒤를 미행했다.
어디로 가는 거지?
라누벨과 지크가 도착한 장소는 부유한 가정집이었다.
넓은 정원과 연못이 딸린 호화저택.
이런 곳에 알렉스가 산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 야만인에게는 칙칙한 동굴이 잘 어울리니까.
“알렉스 씨! 라누벨이 왔어요! 문 좀 열어주세요!”
깔끔하게 정돈된 정원의 중앙을 가로질러서 현관문에 도착한 라누벨이 귀여운 척하며 외쳤다.
“음? 라누벨 양이 무슨 일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손 좀 닦고….”
집 안쪽에서 금방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금쇠를 푸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 오! 맙소사!
“내 눈이 썩는 것 같아….”
“왜? 앞치마 두른 남자 처음 봐? 전투민족인 너는 깔보지만, 요즘은 가정적인 남자가 아가씨들에게 인기 많아.”
쏘시아가 없는 말을 지어냈다.
나는 앞치마 두른 남자들을 깔본 적 없다.
요리를 못하시는 어머니 대신 아버지가 앞치마를 두르시는 날이 많았…. 이런!
“방금, 어머님이 요리를 못 하신다고 했지?”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다.”
“흐응~♪”
비겁한 마누라가 비겁한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빤히 바라봤다.
나는 애써 무시하며 알렉스를 돌아봤다.
흑곰을 인간화한 것 같은 검왕 알렉스의 불끈불끈 근육질을 감싼 새하얀 꽃무늬 앞치마가 무척 애처로웠다.
저 흉악한 패션의 어느 부분이 가정적인 남자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알렉스의 능력치는 더욱 흉악했다.
▷종족: 스카이 휴먼
▷레벨: 999+
▷직업: 검신(검술=신성↑)
▷스킬: 검술G 불로ZZ 사랑Z 요리MAX 청소MAX…
▷상태: 축복, 행복
검술이 G등급, 신의 영역에 도달했다. 분명히 충격적이긴 했지만 내가 주목한 점은 그게 아니었다.
불로ZZ.
늙지 않고 오래 살게 해주는 스킬.
그리고 검술을 제외한 나머지 스킬들은 가사노동에 도움이 되는 보조계열로 꽉 채워져 있었다. 심지어 등급도 높았다. 대부분 스킬이 MAX급이다.
“늙어 죽지 않고 2000년 동안 산 모양이네.”
쏘시아가 알렉스를 힐끔 보고는 대수롭지 않게 정의했다.
“그게 가능해?”
“불로(不老) 스킬 등급만 높다면 불가능할 건 없지. 4차 교육과정에서는, 아빠에게 몰살당했던 동료들이 후대 용사를 돕기 위해 현시대에 기억을 잃은 채 환생한다는 개념이었거든.”
하지만 내가 주인공이었던 5차 교육과정은 다르다.
불의의 사고로 바다에 빠져 죽은 동료가 조금 있긴 했지만, 원래 역사처럼 깡그리 몰살당하진 않았다.
그러니 알렉스처럼 자연사를 거부하고 2000년 넘게 산 동료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
2000년은 매우 긴 시간이다.
삶이 질리고 지쳐서 영원히 쉬고 싶은 순간이 왔을 터. 그걸 어떻게 극복한 걸까?
그 해답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지크. 이쪽은 알다시피 알렉스. 그리고 그의 등 뒤에 숨어있는 새하얀 미녀가 또 한 명의 동료야. 이름은 치킨. 고대어에도 없는 단어인데, 그녀의 옛 주인이 그렇게 불렀다는 모양이야.”
“치킨이라니….”
그 뜻을 잘 아는 지크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어이없긴 마찬가지였다.
어떤 몰상식한 주인이 그딴 이름을 붙인 거야?
“알렉스 씨가 그녀의 본명을 싫어해서 평소에는 설녀라고 불러. 그러니 지크도 그녀를 설녀라고 불러주는 편이 신변에 좋을 거야. 설녀 양? 알렉스 씨의 등 뒤에서 이만 나오세요. 지크가 음흉하게 생기긴 했어도, 신에게 선택받은 용사랍니다.”
빼꼼.
내가 아는 설녀가 알렉스의 널찍한 등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손 대신 날개를 흔들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라누벨이 소개한 설녀예요! 풀네임은 화이트-치킨이예요. 저는 주인님이 붙여주신 본명이 좋은데, 알렉스가 무척 싫어해요. 그러니 평상시에는 설녀라고 불러주세요. 손이 없어서 알렉스에게 쭉 신세 지고 있어요.”
“아….”
손 대신 새하얀 날개를 파닥파닥 흔들며 깜찍한 눈웃음을 짓는 설녀. 그리고 이런 돌연변이 하피의 아름다운 얼굴을 본 지크가 넋을 놓아버렸다.
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켁켁?!”
지크의 멱살을 잡은 알렉스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내가 2000년 동안 애지중지 돌본 아내에게 눈독 들이지 마라, 용사. 그 음흉한 눈깔을 뽑아버리기 전에.”
5차 교육과정 검왕은 유부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