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262화 (262/430)

 262화

[14회차] 어떤 용사님의 동료

과거의 원한을 잊은 건 아니다.

능력치가 오르면 오를수록 기억력도 덩달아 좋아져서, 야만인 알렉스에게 이리저리 당했던 1회차 일들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재생되니까.

하지만 그렇게 세세하게 따지면 원수가 너무 많다.

이래야 모험이란 이유로 고의로 일행을 던전 함정으로 유인하던 라누벨, 자기 부주의로 알몸을 보여놓고 사람을 변태 취급하면서 칼부림하던 검희, 남의 목숨은 귀하고 용사 목숨은 벌레 취급하던 성녀A, 꼭 중요한 순간에만 코피가 터져서 계획을 싹 망치는 현자, 용사를 이용해서 부친을 살해하려는 암흑공주, 구해준 은혜도 모르고 주인 행세하는 실비아, 가는 길에 괜찮은 수컷만 보이면 이탈해서 모험을 지체시키는 아쿠아….

이 중에서도 알렉스와 라누벨이 파티 초창기 멤버답게 민폐와 원한의 쌍벽을 이루는 건 사실이지만, 나는 감성에 휘둘리지 않고 항상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남자…. 왜?

“네 생각을 읽다가 속이 매스꺼워져서.”

쏘시아가 무례한 소리를 했다.

하지만 알렉스랑 지금부터 중요한 비즈니스를 이야기할 계획이기 때문에 비겁한 아내의 원한은 침대 위로 미뤄두기로 했다.

아무튼, 내가 원한이 있는 건 4차 교육과정의 알렉스다. 그리고 지금은 융통성을 발휘해야 할 위기상황이다.

장인어른이 가업을 떠넘기면서 판타지아 세계에 도로 갇혔다. 그리고 이번에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서 탈출하지도 못한다.

표현 그대로 갇혔으니까.

이대로면 천 년, 만 년 판타지아 차원에서 살아야 한다.

나는 매연으로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고향별 지구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원수랑도 동침할 수 있다.

“정말로 부활했군….”

설거지를 잽싸게 마친 알렉스가 나를 돌아보며 신음을 흘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의 말을 정정해줬다.

“죽은 적 없어.”

시스템 운영자인 최초의 천사 농간으로 순식간에 2000년이 흐른 것뿐이다.

“진짜 용사. 마왕이 된 너에게 가담하라는 건가?”

“따져보면 그런 셈이지.”

“.....”

“표정 펴, 알렉스. 내 목적은 세계정복이 아니야. 아무런 잘못도 없는 나를 죽이려는 용사의 마음을 돌려서 아군으로 만들 수 있으면 그걸로 만족해. 이 세상을 봐.”

“이미 2000년 동안 봤다.”

...알렉스 주제에 말발이 세졌네.

“지저분했던 판타지아 세계는 내가 수세식 변기를 널리 퍼트려서 아름답게 바뀌었어.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힘들게 가꾼 세계를 내 손으로 파괴할 이유가 없잖아?”

“라누벨은….”

“그년은 신의 하수인이고.”

언제나 라누벨이 문제였다.

지구에서 잘 살던 용사를 소환한 납치범이 그년이고, 마왕을 쓰러트려야 한다고 선동하는 사기꾼도 그년이며, 용사의 모험을 힘들게 하는 발암물질도 그년이다.

그보다 더 용서가 안 되는 건?

온갖 만행을 저지르면서 귀여운 척한다는 것이다!

“흐음….”

“고민이 필요한 문제인가? 알렉스. 나랑 모험해봤다면 알 텐데?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알렉스의 이마에 주름이 그어졌다.

그는 2000년 전을 회상하듯 말했다.

“상대가 갓난아기라도 적이면 자비 없이 처리하는 용사지. 이기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비함과 달리, 강한 힘마저 보유하고 있어서 더욱 위험하다. 또한, 대국적인 시야로 세상을 보는 탓에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신랄하네.”

“...하지만 그의 판단은 언제나 최선의 결과를 가져왔다. 눈물을 흘리는 한 소녀를 위해 거리낌 없이 전쟁을 일으키고 학살을 벌인 누구보다 훨씬.”

흑화 선배는 빠지는 법이 없군!

생활기록부는 사라졌지만, 2000년을 살아온 알렉스는 선배의 만행과 흑역사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비교가 내게 힘을 실어줬다.

“결정했어?”

“그대를 따르겠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도울 순 없다.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MAX급 마왕이 사랑하는 치킨- 아내의 목숨을 쥐고 있다는 설정을 넣어. 이러면 어쩔 수 없이 따른다는 명분이 생기지.”

슬그머니 발을 빼려던 알렉스가 입을 쫙 벌렸다.

“또 말해봐.”

“...없다. 진짜 용사, 그대의 진짜 무서운 점은 전투력이 아님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됐다. 그래서 내가 할 일은?”

“간단해.”

나는 지루하다고 항의하듯 늘어지게 하품하는 비겁한 마누라의 잘록한 허리를 끌어당기며 히쭉 웃었다.

*

판타지아 시스템 제어권 일부를 가져온 비겁한 개발자, 쏘시아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내 더미들이 용사와 라누벨의 머리 위에서 느긋하게 염탐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것도 가능하다.

“지크 용사. 내 친구의 친구 아들을 소개해주려고 다시 불렀다. 시련과 고통이 넘쳐날 네 모험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제자 실비아를 통해서 지크와 라누벨을 집으로 초대한 알렉스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친근하게 정의로운 용사의 미소를 지은 채 자기소개할 예정이었는데, 들킬 수 있다는 쏘시아의 지적 탓에 어쩔 수 없이 무표정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정령사입니다. 머리 위에 앉아있는 정령의 이름은 작은 정령, 그리고 뒤편에 선 아름다운 정령은 큰 정령. 끝으로, 비겁한 가슴을 가진 이 여자는 제 아내입니다. 편하게 정령사2라고…. 큭! 왜?”

옆에 서 있던 쏘시아가 내 옆구리를 팔 뒤꿈치로 찔렀다.

나는 마약정령, 예쁜 찰떡, 비겁한 쏘시아 순으로 자연스럽게 소개했다. 그런데 왜 찌르고 난리…. 아!

맨 마지막에 소개해서 삐진 모양이다.

유치한 마누라 같으니…!

“호호호! 소문이 무성한 용사 파티를 만나서 정말 영광입니다! 저는 이 무성의하고 유치한 정령사의 아내인 소피아 소시리스입니다. 저희는 북대륙 마법왕국의 소시리스 영지에서 왔어요. 이 남편은 중2병- 실례. 본인의 정체를 감추고 싶은 모양이지만, 앞으로 동료가 될 텐데 비밀이 있으면 안 되겠죠? 남편은 소시리스 영지의 주인인 소시리스 후작이고, 저는 그이가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는 소시리스 후작부인입니다. 친근하게 소피아라고 불러주세요.”

쏘시아가 주절주절 설정을 붙여서 다시 소개했다.

듣는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르는 악마다. 그렇게 길고 진부한 자기소개를 주의 깊게 듣는 사람은 없-

“만나서 반가워요! 소시리스 후작님, 소피아 님! 먼 북대륙에서 오셨군요! 저는 신탁을 받고 용사의 동료가 된 고고학자 라누벨이예요. 그리고 큰 정령을 보면서 발정하는 이 수상한 남자의 이름은 지크. 믿어지지 않으시겠지만, 지크는 신에게 선택받은 용사예요.”

라누벨이 지크까지 세세하게 소개했다.

그리고 지크는?

“으음….”

사립탐정처럼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용사의 특전을 활용해서 내 능력치를 살펴보고 있겠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종족: 휴먼

▷레벨: 427

▷직업: 주술사(축복=정령↑)

▷스킬: 정령SS 축복S 정치A 내성A 품위B…

▷상태: 양호

감쪽같이 감췄기 때문이다.

외모 또한 변장하기 위해 모발을 파랗게 염색하고, 눈동자도 북대륙 왕족과 귀족들의 특징인 황금색으로 바꿨다.

나머지는 크게 손댈 게 없었다.

나를 낳아준 유모는 판타지아 북대륙 출신의 순도 100% 공주님이니까. 그래서 그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내 얼굴도 북대륙 원주민들만의 고유한 특징들을 고루 갖고 있다.

피부가 하얗고, 콧대가 높으며, 가슴에는 털- 음….

아무튼, 지구인에게 없는 청발(靑髮)만으로도 감쪽같았다.

쏘시아는?

▷종족: 엘프

▷레벨: 389

▷직업: 퇴마사(악마→피해↑)

▷스킬: 매력MAX 퇴마S 항마S 사교A 면역A…

▷상태: 양호

악마의 특징인 뿔과 날개를 감추고 피부색도 사람처럼 바꿨다.

원래는 둘 다 정령사를 할 예정이었는데, 악마들이 나와 쏘시아만 보면 본능적으로 복종하는 탓에 그녀는 악마의 천적인 ‘퇴마사’로 계획을 변경했다.

진짜 퇴마사인 보리스는?

안 보이는 곳에서 상황을 조율하는 역할로 대기 중이다. 눈치 없는 멍청한 악마들이 내 정체를 발설하면 곤란하니까.

짝!

손뼉을 친 알렉스가 소개시간을 마치듯 말했다.

“주목. 이건 내 아내가 용사 일행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다. 기억에 있는 장소라면 어디든 순식간에 갈 수 있다.”

“앗! 설녀의 깃털! 정말 감사합니다!”

라누벨이 덥썩 선물을 챙기며 귀여운 척했다.

돌연변이 하피의 날개에 잔뜩 매달려있는 수많은 깃털 중 2개 뽑아서 준 거로 호들갑 떨긴.

나는 따로 200개를 챙겼다.

시스템을 조작할 수 있는 쏘시아 덕분에 깃털 없이도 판타지아 대륙 어디든 단숨에 갈 수 있긴 하지만, 개연성과 상식 파괴라서 남들 앞에선 쓰지 못한다.

그때를 대비한 깃털이다.

“지크 용사님. 조심히 모험하세요. 용사님도!”

...망할 새대가리 때문에 빨리 모험을 떠나야 할 것 같다.

뜨거운 물에 목욕하고 개운한 마음으로 곤히 자다가 내게 깃털을 뭉텅이로 뽑힌 설녀.

우리의 감동적인 재회는 그걸로 끝!

그녀는 언제 울상을 지었냐는 듯이 신나게 날개를 파닥거리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파티 규모가 커졌다는 사실에 설녀만큼 신난 라누벨이 팔을 흔들며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서 지크의 등을 밀었다.

“지크! 얼른 모험을 떠나자! 아! 새벽에 잡은 산토끼의 가죽을 잡화점에 파는 거 잊지 말고.”

오우거가 아니라 산토끼인가….

회귀하면서 정력Z 빼고 싹 초기화된 지크의 레벨이 너무 낮아서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금방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다.

용사의 직업특성인 경험치 5배는 장식이 아니니까. 약간만 노력해도 남들의 5배 효율이 난다.

그나저나….

“지크 용사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알렉스의 호화저택을 나와서 만두 왕국 수도의 시장 한복판을 걸어가는 내내 지크가 나를 계속 쳐다봤다.

항상 실비아의 엉덩이를 바라보던 지크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설마, 내 정체를 의심하고 있는 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내가 이러는 동안, 나머지 더미들도 놀고 있지 않았다.

일일이 조종할 수 없어서 용사의 파티에 들어가진 않았지만, 만두 왕국에서 은밀히 활동하는 악마를 통해서 내 메시지를 알렉스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모든 차원의 알렉스가 내 제의를 수락했다.

다짜고짜 복종하라고 했다면 반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직접 용사 지크를 따라다니면서 알렉스를 관찰했고, 그의 현재 처지와 생각 등을 나름대로 분석했다.

설녀, 결혼, 유부남, 명성, 팔불출….

내가 알렉스에게 보낸 메시지에는 이러한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미리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고 거래를 시작한달까!

그렇기에 성공할 수밖에 없다.

“지크! 아까부터 표정이 왜 그래? 오늘은 새로운 동료가 들어온 기쁜 날이잖아!”

걸음을 멈추고 허리에 양손을 걸친 라누벨이 쌍심지 켜며 지크를 혼냈다.

라누벨에게 동조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나는 지크랑 만난 지 1시간도 안 됐다.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를 잡은 적도 없고, 정체를 들킨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대체 뭐가 불만이야?

“내 파티에 남자라니…. 심지어 커플….”

지크가 반찬 투정하는 어린애처럼 불만 사항을 중얼거렸다.

내가 남자인 것은 귀여운 황제일 때부터 결정된 사항이라서 어쩔 수 없지만, 파티 환경을 개선해줄 순 있다.

“들었지? 비겁한 유부녀 때문에 지크 용사님이 불편하시다잖아. 좀 떨어져서 걸어.”

나는 나란히 걷는 쏘시아의 어깨를 툭 밀쳤다.

옆구리의 복수다!

“읏!? 아프잖아. 이건 내가 아니라 쪼잔한 유부남 때문일걸? 그런데 용사가 이래도 괜찮은 걸까?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여성은 파티에 끼워주지 않겠다는 뜻이잖아. 아랫도리가 역류해서 뇌수까지 침범한 저 청년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구하겠지. 선택한 신께서 책임지고 도와주실 테니까.”

지금은 무고한 산토끼나 사냥하는 변변찮은 지크지만, 대신 싸워주는 오토매틱 기능이 탑재된 성검1을 획득한 이후부터는 날아다닐 것이다.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여행이 다소 지루해도 어쩔 수 없다.

“저런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가 있을까?”

“있지 않을까? 소설에선 꽤 있던데.”

“소설은 소설일 뿐이야.”

“나는 소설 같은 현실을 자주 겪어봐서 잘 알아. 지크 용사님에게도 희망이 있어.”

“하긴. 너도 결혼했는데.”

“내가 할 소리!”

용사 일행은 산토끼 가죽을 팔아서 번 푼돈을 들고 도시의 대장간으로 향했다.

거기서 지크는 만두 왕국에서 지급해준 ‘낡은 수련용 목검’도 팔았다. 그리고 ‘녹슨 수렵용 단검’을 구매했다.

지크 주제에 제법인데?

회귀를 자주 한 연륜이 느껴지는 선택이다.

같은 가격이라면, 목검을 업그레이드해서 계속 쓰는 것보다는 사거리가 짧더라도 내구력과 절삭력이 높은 철재 단검이 더 낫다.

근접전에 자신 있다면 말이다.

“하압-!”

“Gobbbb?!”

지크는 산토끼 다음 단계인 슬라임과 멧돼지를 건너뛰고 대범하게 고블린 사냥을 시도했다.

그리고 별 어려움 없이 성공!

조금 분하지만, 내 1회차 때보다는 100배 나았다.

“지크 용사님이 제법이네.”

“그러게. 조금은 다시 봤어.”

우리는 지크의 스킬 숙련도 성장을 위해 참견하지 않고 뒤편에서 관전했다.

고블린 무리에 포위될 때만 실비아가 조금씩 도와줬다.

나와 쏘시아는 부지런히 응원했다.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은?

“저기…. 두 분? 사이가 무척 좋은 부부라서 보기 좋긴 한데요. 지크가 접싯물에 코 박고 자살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언어폭력은 적당히 해주세요! 하루에 2번 이상은 금지!”

자기가 가장 많이 하면서 뭐래?

나는 지크의 경추…. 말고 어깨에 손을 얹으며 조언해줬다.

“부러우면 너도- 용사님도 얼른 결혼하십시오. 정말 좋습니다. 하루하루가 행복해요.”

신뢰감 넘치는 용사의 미소로 추천하는 바이다.

[15회차] 신분탈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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