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263화 (263/430)

 263화

“나를 내버려 둬!”

Let it go~ let it go~!

Can’t hold it back anymore~♪

Let it go~ let it go~!

...

지크가 빽 소리를 지르더니, 내 고향별에서 유명했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시커먼 사내가 처량한 얼굴로 고블린들의 시체 위를 촐싹촐싹 뛰어다니면서 힘껏 노래를 부르는데….

썩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중독성 있는 노래네. 남편. 저 노래의 제목이 뭐야?”

“나도 몰라.”

제목: 내버려 둬(Let it go).

회사 동료들이랑 회식 2차를 가려는데, 아내의 불호령이 떨어져서 털레털레 귀가하는 유부남들의 마음을 은유적으로 잘 표현한 노래다.

흑화 선배도 분명히 저 노래를 부르면서 가출했을걸?

“그렇구나. 지크 용사님의 상태가 매우 안 좋다는 걸 충분히 이해했어.”

“내버려 두면 나아질 거야.”

확실한 치료법이 있다.

저 노래의 뮤직비디오에서는, 노래를 부르며 가출한 언니에게 친동생이 남자친구랑 커플로 찾아가서 염장을 지른다.

이에 발끈한 노처녀 언니는 곧장 집으로 돌아온다.

감동적인 결말!

“흐응~ 지크 용사님에게 가족이 필요하다는 거네.”

“걱정할 거 없어. 실비아 공주님이 있잖아?”

나의 친구 지크도 유부남이었던 시절이 잠깐 있었다.

아내와 장인어른에게 잘 보이려고 동족을 배신하고 요정의 앞잡이가 된 후레자식이긴 했지만, 그때가 지크의 전성기였던 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 뒤로 꽤 세월이 흘렀음에도 지크가 거의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비아랑 묶어주면 모험에 가속도가 붙지 않을까?

나를 향한 지크의 적대감도 줄어들 것이다.

“소시리스 후작님. 저는 결혼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고 아껴둔 것뿐이거든요? 인간 여성보다 매력은 떨어지지만, 고귀한 왕족 신분과 영원한 젊음 덕분에 꿀리지 않는다고요. 그러니 지크 용사님이랑 연애하라는 끔찍한 발언을 철회해주세요.”

“어…. 그래. 미안.”

실비아도 너무 변해서 적응이 안 됐다.

인간혐오로 찌들었던 그 요정이 인간에게 존댓말을 쓰면서 논리정연하게 따지는 날이 올 줄이야!

뭐가 됐든, 5회차 교육과정 실비아의 주장은 지극히 옳았다.

아내가 젊어 보이는 걸 싫어할 남자는 없으니까. 평평한 LED 모니터가 흠이긴 하지만, 그녀의 왕족 신분을 고려하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실비아는 지크가 넘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4차 교육과정에서는 그녀에게 주어진 상황이 너무 안 좋아서 선택권이 없었지만, 5차 교육과정에서는 다르다.

신랑감을 고를 여유와 능력이 있다.

“그럴 수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건 성녀님뿐이구나….”

실비아의 발언을 엿듣고 충격받은 지크는 호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스마트폰 케이스에 그려진 성녀 게임캐릭터를 연인처럼 애틋하게 바라봤다.

...저대로 놔둬도 괜찮은 걸까?

“괜찮은 것 같네.”

가슴만이 아니라 온몸이 평평한 2D 캐릭터에게 위로받은 지크의 상태는 빠르게 호전됐다.

“라누벨! 성왕국으로 가자! 성녀님을 동료로 영입하는 거야!”

그리고 대범하게 3D를 노리기로 다짐했다.

여러모로 부족한 B급 용사지만, 지크의 빠른 회복력과 도전정신은 칭찬해줘도 될 것 같다.

“지크. 네 레벨을 보고 하는 소리야?”

입만 열만 심한 말을 하는 라누벨이었다.

“그, 금방 올릴 수 있어!”

“이 근방에 너에게 어울리는 초보자용 던전이 있어. 거기를 클리어한 후에 성왕국으로 가자.”

조금 미뤄지긴 했지만, 지크는 실망하지 않고 흔쾌히 수락했다.

“으스스한 슬라임 던전을 말하는 거지? 잘 지켜보고 있어. 너희가 깔본 용사님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줄게!”

라누벨을 밀어내고 지크가 자신만만하게 앞장섰다.

여러 번 회귀하면서 던전의 구조를 완벽하게 암기한 게 틀림없다.

B급 용사 지크 일행은 추천 레벨 ‘30레벨 미만’인 초보자용 던전, 으스스한 슬라임 동굴로 향했다.

*

*

*

푹-! 뿌직! 푹푹!

말랑~?!

말랑말랑?!

약자에게만 강한 용사 지크는, 경험치도 얼마 안 주는 무고한 슬라임들을 단검으로 찌르거나 밟으며 보이는 족족 사냥했다.

말랑말랑한 슬라임들은 부지런히 도망 다녔다.

“푸하하하! 멍청한 슬라임들! 너희의 조잡한 함정에 내가 걸릴 것 같아?”

마, 말랑….

말랑말랑….

슬라임들은 도망치면서 용사 지크를 함정으로 유인했지만, 이 던전의 구조를 완벽하게 암기한 지크는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전부 아는 건 아니었다.

“지크! 여기서 잠깐 쉴게!”

“이런 곳에 어째서 공중화장실이…?”

5차 교육과정부터는, 똥개처럼 던전 구석에 싸놓고 떠나는 몰상식한 도굴꾼들이 없도록 간이화장실을 중간중간 배치해뒀다.

“다 아는 척하더니 가장 기본적인 걸 모르네. 지크. 던전에 화장실이 있는 건 상식이야.”

“말도 안 돼….”

“참고로, 화장실은 깨끗하게 써야 해. 망가트리거나 더럽히면 화장실을 설치한 국가에 배상해줘야 하거든. 저기, 천장에 박힌 수정구 보이지? 저걸로 이용객들을 감시해. 사생활 보호를 위해 화장실 내부까지 찍진 않지만, 누가 출입하는지 전부 기록돼.”

라누벨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쏘시아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GG등급 마기를 보유한 우주급 악마가 배설 욕구를 참지 못했을 리는 없다.

그녀의 목적은 호기심 충족.

던전에 생긴 화장실은 그녀도 처음 보니까.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설마, 정말로 싸고 있는 건가?”

쏘시아와 나는 ‘두 번째 저주’로 영혼이 이어져 있다. 그렇기에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녀가 어디서 뭘 하는지 세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훔쳐보지 않고 기다렸다.

봐서 뭐해?

하지만 지크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으으….”

화장실 입구에서 서성거렸다.

남녀가 함께 쓰는 공용화장실이고, 안에 여성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저리 바짝 붙어있다니….

심지어 그녀의 남편이 근처에 있다.

“마약정령사. 저 용사는 정말 예의를 모르는 것 같다.”

“그러게. 상식을 뇌 밖에 놔둔 건가?”

내가 비겁한 마누라에게 유감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성욕에 굶주린 지크의 행동은 나를 불편하게 했다.

“아니야! 오해하지 마! 그냥 급해서 그래!”

지크가 서둘러 변명했다.

사람의 심리라는 게 재미있다.

화장실이 없는 외지에서는 참지 않고 구석에서 방뇨하지만, 일단 화장실이 보이면 줄이 얼마나 길든 웬만하면 기다린다.

하물며 지금은 대기 줄도 없는 상황.

다만, 좀 급한 모양이다.

모험 초창기에만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과식하거나 병든 게 아닌 이상, 100레벨만 돼도 생리현상을 웬만큼 조절할 수 있으니까.

열흘쯤 안 먹고 안 싸는 건 기본.

하지만 지크의 레벨은 이제 고작 31레벨이다.

모험 이틀째란 걸 고려하면 절대 낮은 성장세는 아니었지만, 생리현상을 조절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지크 용사님. 동굴 벽에 싸십시오.”

“화장실을 쓸 겁니다!”

밖에서 소란스럽게 한 탓일까? 쏘시아가 바로 간이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지크는 황소처럼 빈 화장실로 돌진했다.

탕-!

아무리 급해도 문을 닫는 건 잊지 않았다.

“빨리 말하지. 그러면 일찍 나왔을 텐데.”

쏘시아가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과 후에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녀의 양팔에 끌어안겨 있는 마스터 몰랑일 것이다.

그녀는 이 위대한 존재를 언제나 비겁한 가슴골 사이에 껴두고 다니는데, 화장실에서 빼낸 모양이다.

“그게 오래 걸릴 일인가?”

“금방이지. 야! 수상한 눈으로 보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 비겁한 남편. 이런 외진 던전에 수세식 화장실이 가능한지 궁금해서 들어갔는데, 역시나 아니었어. 상수도와 배수관이 필요 없는 슬라임식 변기로 되어있더라고.”

몰랑몰랑~

쏘시아의 품에 안긴 마스터 몰랑께서 기분 좋다는 듯이 몰랑거리셨다.

“몰랑이는 그 슬라임식 변기에서 일하는 똑똑한 슬라임이 마음에 들었나 봐. 그래서 둘이 대화하도록 놔뒀어.”

“과연….”

위대한 마스터 몰랑께서 친분을 다지신다는데, 일개 제자인 내가 감히 불평할 수 있겠는가?

나는 쏘시아의 판단을 존중해줬다.

“아주 잘했어!”

“...네 생각처럼 몰랑이는 대단한 존재가 아니야. 모든 몰랑이의 고향인 엘몰랑도 토박이들은 대단하긴 하지만.”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지크가 나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끔찍한 광경을 보고 말았다.

“하하! 단숨에 100레벨 돌파! 변기 속에 숨어있는 슬라임을 사냥했더니 경험치를 많이 주네. 아! 그리고 라누벨, 왕국에 보고해줘. 슬라임 때문에 변기가 고장 난 것 같아.”

바지를 끌어 올리며 개운하다는 얼굴로 나온 지크.

우리는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그런 끔찍한 짓을….”

“정말 잔인한 용사님이네.”

“지크! 저건 수세식 변기가 아니야!”

“용사님. 슬라임식 변기도 모르세요?”

칭찬 대신 맹비난을 받은 지크가 당황하며 변명했다.

“나도 슬라임식 변기는 알아. 그거, 북대륙 현자의 탑에서 개발한 엄청나게 비싼 요강이잖아. 그런데 어째서 이런 하찮은 던전에 있는 건데?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른 실비아가 지크의 논리에 반박해줬다.

“1000년도 더 된 이야기를 하시네요. 지크 용사님. 잘 들으세요. 약 2000년 전, 위대한 선지자가 수세식 변기를 널리 보급하면서 인류는 구원받았어요.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도 생기기 마련. 수세식 변기에 자리를 빼앗긴 슬라임식 변기들은 이곳처럼 물을 끌어오기 어려운 던전에서만 쓰이게 됐어요.”

“그, 그런…!”

수세식 변기가 또…?

휴대전화가 저렴하게 보급되면서 공중전화 박스가 점차 사라진 거랑 비슷했다.

슬라임식 변기에서 일하는 모든 슬라임에게 사죄를!

그때, 이변이 발생했다.

몰랑몰랑!!

방금 사귄 친구를 잃은 마스터 몰랑이 거세게 몰랑거리셨다. 그리고 위대한 존재의 분노에 수많은 슬라임이 동조하기 시작했다.

말랑말랑!

말랑! 말랑!

말랑말랑!

말랑! 말랑!

잔인무도한 용사 지크를 피해 도망치던 던전의 슬라임들이 제자리에 멈춰서 일제히 말랑거렸다.

그러더니,

쿠르르…!

으스스한 슬라임 동굴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시간이 흘러도 복구되지 않는 일회성 던전의 최종보스를 쓰러트리면 일어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초보자용 던전은 논외다.

던전이 완전히 무너지기까지 1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에는 용사의 레벨도, 스킬도 너무 낮으니까.

지크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시리스 후작님! 땅의 정령을- 꾸엑?!”

4차 교육과정의 정령사 실비아랑 함께 모험한 경험이 많은 지크는 이 위급한 상황에 가장 적합한 지시를 내렸다.

땅의 정령을 활용하면 생매장은 피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슬라임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말랑말랑!!

말랑! 말랑!

말라아앙-!

무너지는 천장에서 떨어지는 바위를 피하기도 급급한 지크는 슬라임들의 맹공격에 무력하게 휩쓸렸다.

라누벨이 잽싸게 구조를 시도했다.

“지크! 설녀의 깃털을 받- 앗?!”

몰랑!

쏘시아의 품에서 튀어 오른 마스터 몰랑께서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의 손에 들린 설녀의 깃털을 삼키셨다.

그리고 단숨에 소화!

“구, 구해- 컥?!”

우르르…!

무너지는 동굴 속으로 지크가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이틀 전으로 회귀했다.

*

*

*

다시 시작된 판타지 모험! 이름하여 15회차!

나와 쏘시아가 사라지면 지크가 수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재시험을 시작한 지크의 교육장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매우 중대한 사항을 깨달았다.

“회귀는 최악이야.”

“그러게.”

MAX급 마왕님과 비겁한 악마는, 지난 이틀 동안 지크 앞에서 내뱉었던 말과 행동들을 반복해야만 했다.

초월적인 능력치 덕분에 전부 기억하고 있지만, 같은 짓을 또 한다는 건 대단히 번거롭고 귀찮은 작업이었다. 다행히 이틀밖에 안 돼서 다시 할 엄두를 내는 것이다.

앞으로는 이런 비극이 없도록 주의하기로 했다.

나의 친구 지크! 또 죽지 마라!

“라누벨. 성왕국으로 가자! 상처받은 내 마음을 치료해줄 성녀님을 동료로 영입하는 거야.”

“지크. 네 레벨을 보고 하는 소리야?”

지크는 기억을 잃지 않았음에도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무고한 슬라임을 살해한 걸 제외하면 ‘이전 루트’가 좋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금방 올릴 수 있어.”

“이 근방에 너에게 어울리는 초보자용 던전이 있어. 거기를 클리어한 후에 성왕국으로 가자.”

그래서 라누벨도 같은 모험 코스를 추천했다.

지크가 우쭐대며 말했다.

“슬라임식 변기가 있는 으스스한 슬라임 던전을 말하는 거지? 잘 지켜보고 있어. 너희가 깔본 용사님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줄 테니!”

바로 이틀 전에 거기서 생매장당한 주제에 말은 잘하네.

매번 느끼는 거지만, 회귀는 사회부적응자들의 신분세탁에 아주 좋은 수단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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