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15회차] 불편한 진실
몰랑몰랑♪
말랑말랑♬
우리는 던전 중간에서 위대한 마스터 몰랑과 변변찮은 슬라임식 변기의 슬라임이 우정을 쌓는 훈훈한 광경을 구경했다.
빨리 가자고 지크가 보챌 줄 알았는데, 위대한 존재의 말씀이 끝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조금은 존경심이 생긴 건가?
그 뒤에는 무난했다.
주기적으로 태어나는 중간보스 ‘소심한 슬라임’을 가뿐히 쓰러트린 용사 지크는, 최종보스 ‘대범한 슬라임’ 앞에서 살짝 고전하면서 승리를 쟁취했다.
혼자서 던전을 깬 성과가 있었다.
단 이틀 만에 37레벨 달성!
내 1회차랑 비교하면 굉장히 빠른 성장세였다.
“성왕국으로 출발!”
지크 파티는 만두 왕국이랑 이웃하는 성왕국으로 향했다. 성녀A를 파티로 영입하기 위해.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성녀A는, 나 대신 북대륙 연합을 통치하는 섭정이 되었다. 내 당부대로 수세식 변기로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한 것 같다.
당시엔 야망이 대단히 큰 여자였는데….
환생한 지금도 그럴까?
“용사님이시죠? 도와주세요! 제 아버지가 아프세요!”
...성왕국은 무슨.
으스스한 슬라임 던전을 클리어하고 재정비를 위해 만두 왕국의 수도로 향하던 우리는, 마치 우리가 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길목에 대기하고 있던 소녀에게 발목을 잡혔다.
이래서 나는 보도를 이용하지 않는다.
차라리 숲을 관통해서 지나가며, 눈에 띄는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편이 인류에 더 보탬이 된다.
이 몬스터들이 언젠가 사람을 해칠 테니까. 명성과 보상은 전혀 없지만, 마을주민A의 잔심부름보다 훨씬 가치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
파티의 리더를 맡은 용사 지크는 소녀를 위아래로 쓱 보더니, 느끼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귀여운 아가씨. 자세히 말해보십시오.”
“네. 훌쩍!”
소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사연을 읊기 시작했다.
사냥꾼인 아버지가 오크랑 싸우다가 크게 다쳤다고 한다.
치유사를 고용하고 싶지만, 너무 비싸서 포기. 그래서 숲의 골짜기에서만 자라는 보라색 약초로 민간요법을 쓸 계획이다.
“하지만 숲에 무시무시한 몬스터가 있어서 갈 수 없다는 거군요?”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이 파티의 리더는 지크다.
그의 결정이 대단히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나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동료들 탓에 10년 동안 고생한 경험이 있다.
1회차의 고통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간섭하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용사가 아니라 ‘용사 지크의 동료’니까. 그의 판단을 존중해줄 것이다.
다만,
“아프신 아버지를 치료해주면 되는 거지?”
나는 소녀에게 질문했다.
약초를 구하러 숲으로 굳이 되돌아갈 필요 없다. 보라색 약초는 수단에 지나지 않으니까.
어떤 방식으로든 소녀의 아버지를 치료한다는 목적만 달성하면 문제 될 거 없다.
“네? 네. 하지만 용사님의 파티에는 성녀님이 없으시잖아요. 많이 편찮으신 아버지를 치유하실 수 있을 리가….”
“나는 정령사란다.”
“와! 희귀한 정령사님이셨군요! 그 힘으로 저를 좀 도와주세요! 아버지가 많이 아프-”
“치유의 정령도 보유하고 있지.”
“......”
“예쁜 아가씨. 네 아버지께 안내해주렴. 원래는 유료서비스인데, 지크 용사님의 체면을 봐서 공짜로 해줄게.”
얼마나 아픈지 모르겠지만, 옛날옛적에 죽어서 시체조차 남지 않은 인간도 부활시킬 수 있는 전직 성녀, 찰떡이 못 고칠 인간은 없다.
소녀가 어설픈 미소를 짓더니 뒷걸음치며 말했다.
“아차! 급한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아버지는 제가 어떻게든 치료해드릴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용사님! 안녕!”
도망쳤다.
고작 2레벨밖에 안 되는 소녀가 우리를 따돌릴 순 없지만, 조금 전부터 넋을 놔버린 용사 지크가 움직이지 않기에 추적하지 않았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나는 이 순진한 친구가 이해하기 쉽게 차근차근 설명해줬다.
“소녀가 말한 보라색 약초의 정식 명칭은 세레브리브. 야생에서만 자라는 희귀한 양귀비입니다. 진통제로도 쓰이지만, 고급 미약의 주성분이기도 하지요. 희귀하고 효과가 좋은 만큼 가격도 비쌉니다. 더 설명이 필요합니까?”
“고급 진통제라는 거잖아.”
...이 친구의 무능함은 경이로운 수준이군.
“지크 용사님은 어린 소녀에게 사기를 당할 뻔했습니다. 아버지를 핑계로 비싼 약초를 공짜로 얻으려고 한 거죠. 그 소녀에게 부모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프진 않을 겁니다.”
“후작님. 라누벨의 생각은 달라요. 저 소녀에게 정말로 급한 약속이 생겼을 수도 있잖아요!”
라누벨이 귀여운 척하면서 내 설명에 초를 쳤다.
참자, 참아. 내 파티가 아니다….
“모가지를 확- 흠흠! 라누벨 양. 편찮으신 아버지보다 더욱 중요한 약속이 뭐가 있을까요?”
“우웅…. 아! 데이트 약속이요! 아버지는 아프셔도 며칠 더 버티실 수 있지만, 남자친구랑 헤어지면 영영 끝이잖아요!”
...보통은 둘이 반대 아닌가?
하지만 라누벨이랑 더 대화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말을 아꼈다. 최종판단은 지크의 몫이니까.
“...라누벨의 말이 맞아.”
이 새끼, 제정신인가?
“역시, 용사야! 라누벨은 지크가 올바른 판단을 할 거라고 믿었어!”
폭언만 일삼던 라누벨이 이틀 만에 처음으로 지크를 칭찬했다.
아주 훌륭한 호구라고.
“그렇게 귀여운 소녀가 내게 거짓말했을 리 없어. 물론, 중요한 약속이란 그녀의 변명은 믿지 않아. 하지만 짐작은 갑니다. 소시리스 후작님께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당신이 다그쳐서 겁을 먹고 소녀가 도망친 게 틀림없습니다.”
이게 나 때문이라고?
나는 정의로운 용사의 미소로 친절하게 말했다. 그런데 겁을 집어먹다니? 말도 안 된다.
이봐, 비겁한 마누라. 멀뚱멀뚱 구경만 하지 말고 지원사격 좀 해봐.
“하지만…. 설득력 있는 추측인걸? 네가 무서워서 도망쳤을 가능성도 있어.”
진짜 도움이 안 되는구먼!
“지크! 라누벨이 소녀를 따라가서 집의 위치를 알아둘게. 너는 그동안 숲의 골짜기에서만 자란다는 보라색 약초를 채집해줘. 해가 질 때쯤에 도시 광장의 분수대 앞에서 만나자!”
비행 마법으로 몸을 띄운 라누벨이 소녀의 뒤를 따라갔다.
역시! 초창기 동료다운 싹수다.
이 파티의 리더인 용사 지크의 허락도 없이 멋대로 파티를 이탈한 거로 모자라서 명령하다니!
야! 지크! 뭐라고 한마디 해봐.
“조금 서둘러야겠네. 해가 떨어지기까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소녀는 라누벨에게 맡기고 우리는 약초를 캐러 갑시다! 후작님. 땅과 바람의 정령으로 약초의 위치를 추적해주세요. 그리고 실비아 님. 후작이 위치를 알려주면 바로 채집해주세요.”
지크는 순순히 라누벨의 계획에 따랐다.
“...들었지? 일해라.”
나는 오른쪽 사타구니에 달라붙어서 비비적거리는 땅의 정령왕에게 집세를 요구했다.
그 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고혈압으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이 답답한 친구야!
지금은 멋대로 파티를 이탈한 라누벨을 응징해서 파티의 기강을 바로잡을 때라고.
“네. 용사님. 이제 좀 용사답네요. 아주 조금.”
5차 교육과정에 들어서면서 조금은 나아진 줄 알았던 실비아 공주가 지크의 말에 찬동했다.
요정왕국의 정권이 바뀌면서 올바른 조기교육을 받았어도, 태생적으로 멍청한 건 바뀌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멀리서 대기 중인 보리스를 불렀다.
‘주인님. 무슨 문제가 생기셨나요? 고고학자 라누벨이 개별행동하는 게 포착되긴 했는데….’
‘잘 봤어. 파티에서 이탈한 그년을 감시해.’
‘알겠습니다.’
나는 지크의 요구대로 약초들을 찾아줬다. 어차피 수고하는 건 내가 아니라 땅의 정령왕- 아니, 정령들의 계급사회 밑바닥에 있는 하급 땅의 정령들이니까.
사실, 멍청한 실비아도 필요 없다.
정령들만 동원해도 이 숲에 있는 모든 약초를 싹 채집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굳이 모기랑 싸워가면서까지 숲속 깊숙이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약초를 채집한 정령들이 배달까지 해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참견하지 않고 지크의 지시대로 움직여줬다.
“내 남편의 인내심을 다시 봤어. 밤에도 좀 참아주지 않을래?”
“싫으면 꺼져.”
비겁한 악마가 없더라도 내 스트레스를 풀어줄 핫팩은 많다.
“까칠한 걸 보니, 상태가 확실히 안 좋긴 하네. 이런 때일수록 아내의 포근한 가슴에 의존하라고.”
몰랑몰랑~
...마스터 몰랑께서 그러라고 하시니 어쩔 수 없군.
나는 오른팔로 쏘시아의 잘록한 허리를 감아서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비겁한 부드러움을 만끽했다.
조금은 심신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저기 소피아 님. 외람된 질문이지만, 그거 진짜인가요?”
멍청한 실비아가 부러운 눈으로 쏘시아의 가슴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LED 모니터가 아닌 요정 여성은 대단히 희귀하니까.
이에 비겁한 악마가 비겁하게 대답했다.
“제 대답이 필요할까요?”
“...아니요. 남편이신 후작님의 표정만 봐도 알겠네요. 으으…. 나도 얼른 결혼해야 하는데.”
실비아는 쏘시아의 비겁한 체형을 의심하지 않았다.
동양인 중에서도 간혹 8등신 모델이 태어나듯이, 요정들도 전부 똑같은 건 아니다.
못생긴 요정, 비만 요정, 근육질 요정….
작정하고 찾아보면 있긴 하다.
물론, 쏘시아처럼 아예 요정이란 종을 초월한 것 같은 비겁한 천연골짜기는 ‘순혈’ 중에선 없다.
이건 내가 장담할 수 있다. 유전법칙에 어긋나니까.
그러므로 순혈만 될 수 있는 왕족 ‘아크 엘프’인 실비아에게는 꿈도 희망도 없다.
“이거, 너무 많이 채집한 것 같은데…?”
파티 안에서 가장 약한 지크가 자진해서 짐꾼이 되었는데, B급 용사님은 약초로 빵빵한 가방을 짊어진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힘들면 얼른 돈 모아서 4차원 가방을 사라구, 친구.
이 상황을 RPG 게임처럼 묘사하면?
『채집 의뢰: 4713/5』
이쯤 되지 않을까.
부지런하고 성실한 하급 정령들은 이 숲에 존재하는 보라색 약초를 몽땅 채집해서 씨를 말리다시피 했다.
희귀한 약초치고는 제법 많이 모았는걸?
평범한 약초꾼은 엄두도 못 내는 절벽이나 몬스터 서식지 같은 장소에서도 채집해서 그럴 것이다.
우리는 라누벨이랑 만나기로 약속한 도시의 광장으로 향했다.
먼저 도착해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라누벨이 양손을 머리 위에 들고 흔들며 귀여운 척했다.
“여기야, 여기!”
지크가 그녀에게 호응하듯 마주 손을 흔들어줬다.
“라누벨도 수고했어! 소녀의 집은 찾았어?”
“아니. 아쉽게도 놓쳤어.”
“이런! 어쩌지? 약초를 이렇게 많이 모았는데….”
용사가 그렇게 말할 줄 예상했다는 듯이 라누벨이 시원시원한 어조로 말했다.
“라누벨에게 좋은 생각이 있어! 수집한 약초를 시장에 저렴하게 파는 거야! 그러면 소녀도 약초를 사서 아버지의 부상을 치료할 수 있을 거야. 어때?”
“오! 좋은 생각이야!”
...어이없어서 웃음이 절로 나오는구먼.
2레벨짜리 소녀를 놓쳤다는 200레벨 마법사의 말을 순진하게 믿는 지크나, 기껏 구한 약초를 땅에 버리듯 뿌리자는 라누벨의 제안이나….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그렇다면,
“지크 용사님. 약초를 옮기느라 힘드셨을 텐데, 식사 전에 군것질 좀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가 사겠습니다.”
나는 지크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라누벨이 모험을 보채는 바람에 새벽부터 쫄쫄 굶어서 배가 고팠던 B급 용사님은 사양하지 않았다.
“후작님께서 사주신다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근처의 노점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주인에게 말했다.
“이 귀여운 척하는 아가씨가 조금 전에 먹었던 거랑 같은 맛으로 4개 주십시오.”
“귀여운 척? 아! 귀여운 숙녀분이 또 오셨구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손님. 금방 익습니다!”
노점상에서 다 먹은 후에 나는 또 다른 가게로 지크를 안내했다.
그리고 같은 주문을 했다.
“이 귀여운 척하는 아가씨가 낮에 먹었던 거랑 같은 거로 주십시오.”
“낮에? 아! 라누벨 양, 저희 가게에 친구분들을 데려오셨군요. 낮에 드신 게 매운맛이었지요?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주십시오! 양념만 바르면 됩니다!”
또, 또, 또….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지크도 점점 이상함을 눈치챘다.
그리고 마침내,
“라누벨. 도시에서 소녀를 찾아다녔던 거 맞아?”
최후통첩 같은 질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