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269화 (269/430)

 269화

[16회차] 목숨만은 살려주마.

“엣-?!”

MAX급 마왕님의 예리한 지적에 변명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한 용사가 뒷걸음치며 주춤했다.

그녀는 시선을 자신의 노출된 배꼽 아래쪽으로 향하더니, 단숨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리고는 어린애처럼 외쳤다.

“내 골반이 어때서요?!”

“용사여! 참으로 오만방자하구나! 어떻게 그런 누추한 골반을 자랑스럽게 노출하고 다닐 수 있지?”

“읔-!”

반박하지 못한 용사는 옆에 선 미남의 널찍한 등 뒤로 몸을 숨겼다.

쯧쯧. 용사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만용이거늘!

단 열흘 만에 여기까지 온 첫 손님이라서 기대했는데,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했던 모양이다.

▷종족: 플라워 휴먼

▷레벨: 185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매력Z 검술Z 매혹Z 체력E 민첩E…

▷상태: 굴욕, 마검

단시간에 이만한 전력을 모을 수 있었던 이유가 그녀의 능력치에 잘 표현되어 있었다.

스킬 매력과 매혹이 각각 Z등급.

도시에서 능력치가 괜찮은 용병 수컷을 불러세우고 ‘저를 좀 도와주세요.’라고 하면 99% 넘어올 것이다.

그렇다고 이 용사를 얕보는 건 아니다.

5차 교육과정이 시작되고 이제 겨우 열흘밖에 안 됐다.

초등학생이든 중학생이든 고등학생이든, 그들 대다수가 지크처럼 크게 바뀐 교육과정에 적응하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첫 번째로 내 앞에 당도했다. 수단과 방법이 어쨌든 ‘1등’이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리고 검술이 Z등급이었다.

나는 1회차 때, Z등급 스킬이 하나도 없었다. 그걸 고려하면 그녀의 전투 감각도 낮지 않다는 의미.

용사의 얄팍한 골반만 보고 무시하면 안 된다.

이런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종류: 성적기록부

▷이름: 레이나

▷전투력: S

▷업적: B

▷평판: E-

▷인성: B

명예교사의 특권으로 살펴본 용사의 초등교육과정 성적기록부는 나쁘지 않았다.

이건 그녀의 최고 성적.

당장 졸업하거나 중등교육장으로 넘어가도 될 학점이었지만, 평판에서 딱 걸리고 말았다.

평판이 E등급이다.

“용사여. 얄팍한 골반만큼 평판도 하찮구나.”

“어, 어떻게 그 사실을…!”

성적기록부를 봤다고 곧이곧대로 말할 순 없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평판이 낮은 이유도 잘 알고 있다.

▷종류: 생활기록부

▷이름: 레이나

▷성향: 중(中)

▷속성: 여왕

▷경력: 275년

▷기록: 6

▷총평: 타고난 외모와 재능을 활용할 줄 아는 기대주. 고향에서부터 익혀온 가문의 검술로 새내기 때부터 무섭게 치고 올라왔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사내가 보이면 어떻게든 빼앗는 성향 탓에 평판이 늘 좋지 못하다. 어떤 이상한 학생이 등장하기 전까지 관심용사로 지정되어 있었다.

관심용사! 그리운 단어네. 나도 예전에는 관심용사였는데.

이 용사님에 대한 호감이 약간 상승했다.

“페도나르는 저렇지 않았는데…!”

...마왕으로 취임하고 열흘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장인어른이랑 나를 비교하는 건 실례잖아.

살짝 올랐던 호감이 다시 떨어졌다.

“조심하십시오, 용사님. 마왕의 정신공격이 상당합니다.”

허리에 찬 검을 뽑은 미남 중 하나가 나를 주시하며 말했다.

용사를 따르는 동료 중에서 가장 튼실한 복장과 잘생긴 얼굴을 한 남자였다.

겉보기 나이는 20대 초반의 뉴페이스.

다부진 어깨와 흑표범처럼 오밀조밀한 근육이 인상적이었다.

야. 네가 더 용사 같다.

나는 습관처럼 그자의 능력치부터 살펴봤다.

겉으로는 여유 부리고 있지만, 이 몸은 본체가 아닌 더미라서 매우 연약하니까.

적에 관해 조금이라도 더 파악을…. 음?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653

▷직업: 용자(전원=1레벨)

▷스킬: 속검S 혼돈S 결투A 파괴A 정력A…

▷상태: 오만, 자만

종족에서부터 심상치 않았다.

카오스(chaos).

흑화 선배의 동료 중 일부가 가지고 있던 종족특성이다.

능력치와 시스템에 간섭할 수 있는 저 혼돈의 힘은 흑화 선배에게서 비롯됐으며, 나도 그 혜택을 누렸던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누구일까?

긴가민가했던 나는 그의 직업을 보고 확신했다.

다른 건 생각할 수 없다.

“너는 가짜 용사의 후예로군.”

젊은 시절의 선배는 내 손에 확실하게 죽었다.

대서사시 같은 치열한 접전은 없었고, 인간과 요정 암컷 코스프레 하던 용들이랑 함께 사이좋게 몰살당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를 보라.

그는 흑화 선배의 고유직업인 ‘용자’를 보유했다.

환생한 게 아니라면 선배의 후예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분은 가짜가 아니다!”

“전혀 안 닮았네.”

판타지아 원주민 투표에서 가장 귀여운 인물 1위로 뽑힌 나보다는 당연히 못났지만, 흑화 선배가 눈앞의 후손보다 좀 더 잘생겼다.

이름은 후예A라고 해둘까?

선배가 죽기 전에 부지런히 유전자를 퍼트렸다면 후예B, 후예C 등도 판타지아 대륙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제법 많겠지.

종족과 국적을 불문하고 상대가 미녀면 망설임 없이 공성전에 돌입했던 선배의 잡식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면 말이다.

“그분의 원한을 이 자리에서 갚겠다!”

솨아아아-

남자의 선언과 함께 ‘용자’의 직업특성이 활성화됐다.

1레벨로 고정하는 효과.

자신도 그 효과를 피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수적 우위와 본연의 실력에 자신 있다면 상관없다.

나는 조종 중인 더미의 능력치를 힐끔 확인했다.

종족: 유나이티드 스피릿 판타지아

▷레벨: 1

▷직업: 마왕(용사→레벨↓)

▷스킬: 마기Z

▷상태: 마검

내 더미들은 부활하자마자 최종보스 마왕답게 999레벨을 돌파한 상태로 시작한다. 그리고 본체와 유일하게 공유하는 종족 USF의 종족특성인 ‘우주의 협찬’으로 숨만 쉬어도 경험치가 쌓인다.

그런데 1레벨로 고정돼버렸네?

확실히, 몸에 기운이 ‘조금’ 빠진 게 체감됐다.

“용사님! 지금 공격하면 마왕을 손쉽게 쓰러트릴 수 있습니다!”

“네! 여러분! 저에게 힘을 보태주세요!”

용기를 잃고 미남의 등 뒤에 숨어있던 용사가 비열한 사랑의 힘을 과시했다.

“아자!”

“와아아아!”

“하아압!”

나머지 동료들의 능력치는 용사와 후예A만큼 우수하진 못했다. 우수하긴커녕 양아치 용병 수준.

능력치와 실력이 아닌 얼굴로 뽑은 탓이리라.

만두 왕국에서 시작하여 아무런 정보도 없이 열흘 만에 모은 오합지졸의 한계였다.

그러나,

“대공B가 돌파당한 이유가 있었군.”

눈앞의 용사가 ‘첫 손님’이긴 하지만, 마왕의 성에 침입한 순서로 따지면 100번째도 넘었다.

그녀보다 먼저 찾아온 자들은 저 문을 열지 못하고 모두 대공B에게 패하여 죽거나 도망친 까닭.

그만큼 대공B는 훌륭한 필터였다.

하지만 상대가 ‘용자’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장인어른도 그랬지만, 마기를 기반으로 싸우는 악마에게 레벨 하락은 매우 치명적인 페널티다.

하물며 대공B는 혼자.

용사의 비열한 협공에 당할 수밖에 없다. 동료 대다수가 얼굴만 반지르르한 양아치들이라도 말이다.

그것이 ‘용자’의 무서움이다.

다만,

퍽-!

손등으로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가장 먼저 돌격해온 미남의 잘생긴 머리가 수박처럼 터졌다.

“...어?”

“헛?”

“무슨…?”

힘차게 달려오던 용사와 미남들의 걸음이 뚝 멈췄다. 그들 모두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표정들이 왜 그래? 마왕이 사람 죽이는 거 처음 봐?”

섭섭하다! 마왕을 초식동물 취급하다니!

평상시에는 수세식 변기를 사랑하고 마스터 몰랑을 존경하는 온순한 생물이지만, 마왕 파르마몬도 엄연한 포식동물이다.

“용사님! 마왕의 능력치는…!”

“분명히 1레벨인데요!”

“그렇다면 조금 전에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후예A와 용사가 내 코앞에서 작전 회의에 들어갔다. 내가 듣든 말든 안중에 없는 것 같았다.

“매너가 없네.”

그렇다면 나도 이에 합당한 대답을 해주리라.

장인어른의 뒤를 이어 MAX급 마왕이 됐어도 나의 정의로운 마음은 변치 않았다.

외적인 귀여움과 육체는 중요하지 않다. 내 영혼과 의지가 이곳에 있다는 게 중요하다.

그것을 증명하듯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가 더미의 등에 위풍당당하게 솟아났다.

펄럭-!

“히익?!”

“헉?!”

“어머니….”

내 날개의 위용에 놀란 용사와 잡것들이 위기상황임을 깨닫지 못하고 감탄사를 터트리는 여유를 부렸다.

그 대가는?

푹! 푹! 푹! 푹!

정의로운 마왕의 심판!

내 목숨을 노린 자들은 모세혈관의 숫자만큼 죽어야 마땅하지만, 첫 손님에게 그건 너무 야박하잖은가?

“목숨만은 살려주마.”

허어! 나란 마왕은 어찌 이리도 호구란 말인가!

MAX급 용사 시절의 올곧은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왕으로서 실격 아닐까?

푹-!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에 돋아난 수많은 뿔 중 하나로 미남의 눈구멍을 가볍게 찔렀다가 뽑았다.

자연스럽게 딸려오는 잘생긴 눈깔!

한쪽 눈은 남겨뒀으니 앞으로 생활하는 데 지장 없을 것이다.

“아아아앜?!”

“훌륭해. 방금까지는 양아치 같았는데, 이젠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처럼 보이잖아? 여자들이 좋아서 환장할 거야.”

나는 역전의 용병으로 성형수술을 마친 남자를 걷어차서 구석에 처박은 후, 다음 미남으로 넘어갔다.

“히익?! 자비를- 꾸엑?!”

“걱정하지 마.”

이 마왕님은 이미 자비로우니!

미남의 턱주가리를 후려쳐서 멋지게 교정해줬다.

여자랑 키스할 때 방해되는 이빨을 제거해준 건 서비스. 어금니들은 남겨뒀으니 죽만 먹지 않아도 된다.

자비로 모자라서 배려까지! 뭘 더 바라노?

“이 악마-!”

“나도 알아.”

내가 악마인 걸 모를 줄 아나?

장인어른이 떠넘겨서 안 그래도 기분이 꿀꿀한 마왕님을 바보 취급하다니!

푹!

보답으로 머리에 조그마한 환풍구를 만들어줬다. 그리고 머리카락에 구멍이 막히지 않도록 그 주변의 두피를 깔끔히 제거해줬다.

“부르르르….”

동공이 풀린 미남이 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다음 미남에게로 시선을 돌렸더니….

풀썩!

미역처럼 흐느적거리면서 멋대로 드러눕는 게 아닌가? 심지어 능력치의 상태가 ‘혼절’이다.

즉, 남의 집에 쳐들어와서 멋대로 잔다는 뜻이다.

“거참! 뭐 이런 뻔뻔한 놈이 다 있어?”

우드득-

드러누운 김에 영원히 일어서지 못하도록 복사뼈를 밟아줬다.

이 마왕님이 만만한 호구임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 집에서 무전취식은 용서할 수 없다!

그럼, 다음 손님?

“도망쳐!”

“이길 수 없어!”

“용사님! 후퇴를!”

“너무 강해!”

사랑과 우정을 배신하고 뒤돌아선 미남들. 그중에는 남의 집 바닥에 암모니아를 줄줄 흘리면서 영역표시 하는 강아지마저 있었다.

거참! 생긴 건 멀쩡한데 말이지.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아…. 그래도 목숨만은 살려주마.”

나는 우주를 통틀어서 가장 마음이 여린 한심한 마왕일 것이다.

*

후예A가 직업특성을 발동하고부터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무려 30초나 걸렸다.

내가 잡것들을 상대로 일일이 개인면담 해준 탓이다.

역시, 마왕은 내 적성에 맞지 않네.

“죄송합니다, 용사님!”

“어쩔 수 없습니다, 용사님!”

“아으아부아~!”

“용사님. 미안합니다.”

내 지시를 받은 잡것들이 용사를 밟고 있었다.

동료들의 일방적인 폭력에 옷이 찢어지고 흙먼지와 피를 뒤집어쓴 용사의 몰골은 참담했다.

하지만 최악은 아니었다.

그녀의 소중한 목숨은 무사했고, 뜨거운 공성전도 없었으며, 내일 풀어주겠다는 헛된 희망까지 약속해줬다.

어디 그뿐이랴!

“외면의 아름다움만 중시해온 어리석은 용사여. 사랑과 우정은 척추와 같다. 살짝만 어긋나도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지! 지금 느끼는 모든 고통을 골반에 잘 새겨두도록. 그러면 너는 강해질 것이다. 마왕이 아닌 선배 용사로서 해주는 충고다.”

사랑과 우정이 얼마나 하찮은지 뼈에 각인시켜줬다.

“......”

하지만 혼백이 완전히 나간 얼굴인 용사는 고통의 비명은커녕 대꾸조차 없었다.

지금은 분하겠지만, 언젠가 내게 고마워할 날이 올 거야.

자기가 용사라도 된 것처럼 까불던 후예A는?

“사람의 마음을 죽이는 절망의 마왕 파르마몬 님께 영원한 충성을 바칩니다….”

비열한 사랑의 힘에 살해된 대공B의 빈자리를 채워줄 ‘악마 용자’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나는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왔다.

“오오! 어머니의 답신이 드디어…!”

부드러운 찰떡 위에 편안한 자세로 누운 후, 아기자기하게 꾸민 용사의 스마트폰 화면을 빤히 쳐다봤다.

어디, 어머니가 뭐라고 보내셨는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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