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16회차] 업보
□어머니: 메신저만 보내고 집에 안 들어오는 건 무슨 심보니? (오전 9:36)
...에?
□어머니: 아들. 이 엄마는 굉장히 섭섭해. 10년 동안 전화 한 번밖에 안 하고 동창과 며늘아기에게 소식만 전하면 끝이니? (오전 9:37)
□어머니: 그리고 며늘아기를 욕하지 마렴. 너는 며늘아기가 말리지 않았으면 이렇게 대화도 못 했어. (오전 9:37)
아, 네. 대단히 열 받으셨군요.
그래서 그 며늘아기가 대체 누굽니까?
□어머니: 집에 빨리 돌아와. (오전 9:38)
□어머니: 며늘아기가 능력도 좋아. 지구의 어느 공항에서든 네 이름을 대면 2시간 안에 전용기가 간다는구나. 이래도 곧장 안 돌아오고 싸돌아다니면 이 엄마는 진짜 화낼 거다? ^^ (오전 10:15)
그 마누라 사칭범이 누군지는 안 가르쳐주시고 계속 칭찬하신다. 대체 얼마나 영악한 년이길래 천하의 어머니를 구워삶은 걸까.
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어머니: 빨리 오면 사랑한다, 아들. 찡긋! (오전 10:17)
“...실수다.”
상식적으로 조금만 생각해보면, 판타지아 차원에서 지구의 WiFi가 잡힌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내가 스마트폰으로 메신저를 보낸 시점에 ‘저는 지구 어딘가에 있습니다.’라고 주장한 셈.
하지만 나는 여전히 판타지아 차원에 갇혀있다.
사랑받는 아들이 되긴 글렀다.
“비겁한 남편. 짐작 가는 여자도 없어?”
“있겠냐?”
나는 문화를 사랑하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전용기를 몰고 다니는 여자애랑 친분은커녕 보지도 못했다.
메신저에 답변을 작성했다.
□아들: 여전히 판타지 세계에 갇혀있습니다. (오후 4:01)
□아들: 안 믿어지시죠? (오후 4:01)
□아들: 증명사진을 찍어서 보내드릴게요. (오후 4:01)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이곳이 판타지 세계임을 증명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아!
“야. 너희들. 모여봐. 단체 사진 좀 찍게.”
나는 디지털카메라가 뭔지도 모르는 무식한 판타지 야만인들을 일렬로 세웠다.
용사, 후예A, 미남A, 미남B, 미남C, 미남D...
현실감 있게 잘 꾸민 코스프레를 의심할 수도 있지만, 팔다리가 절단된 모습까지 배우가 흉내 낼 순 없다.
이러면 어머니도 믿으시겠지!
“마왕이 어떻게 스마트폰을...?”
미남들의 부축을 받으며 나란히 선 용사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했잖아. 나도 용사였다고.”
“아...”
이제야 마왕의 본질을 깨달은 용사를 무시하고. 나는 멍청하게 서 있는 미남들에게 경고했다.
“지옥으로 끌려가는 천사 같은 표정 풀고 자연스럽게 웃어라. 싫거나 못 하겠으면 말해. 철면피를 씌워줄 테니.”
“하, 하하...!”
“하하하!”
“아으아아~!”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스마트폰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아서 연습할 시간이 없었다.
“야. 비켜.”
“헉! 네!”
나는 용사를 부축하고 있던 미남을 살짝 옆으로 밀어낸 후, 판타지 세계의 주인공이랑 정답게 어깨동무했다.
그리고 누구나 안심시킬 수 있는 정의로운 용사의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는 어머니! 아들은 야만적인 원주민들 사이에서 건강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찍는다?”
원래는 비겁한 마누라도 함께 찍을 예정이었지만, 그녀가 ‘오늘은 준비가 안 됐어.’라면서 극구 사양하는 바람에 제외됐다.
고작 사진 한 장 찍는데 무슨 준비?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찰칵-!
*
*
*
마음 같아서는 속 시원하게 통화하고 싶지만, WiFi 신호가 약해서 사진 한 장 전송하는데도 10분 가까이 걸리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메신저가 한계였다.
“답답해도 어쩔 수 없지.”
어머니의 답신을 기다리는 사이에 스마트폰 전원이 꺼졌다.
나는 스마트폰 배터리가 다 떨어져서 쓸모가 없어진 용사님과 동료들이랑 무사히 마왕의 성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배웅해줬다.
그런데 참 운도 없지!
휘이이잉~!
도개교를 건너던 용사 일행은 강풍을 맞닥트렸다.
“어...? 어엇?!”
골반이 변변찮은 용사님은 발이 꼬이면서 휘청거리더니 도개교 좌우의 깊은 해자 아래로 뚝 떨어졌다.
퍽-
그것도 하필 머리부터!
“너무하네. 내가 기껏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를 교정해줬는데 벌써 부러트리다니.”
세계가 서서히 붕괴하고...
용사님의 스마트폰 배터리가 충전- 흠흠! 세계가 재구축됐다.
번쩍-!
MAX급 마왕님에게 맨 처음으로 도전하는 명예를 거머쥔 용사님은 변변찮은 골반을 품고 무사히 회귀했다.
그리고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의 인사로 불쾌하게 시작했다.
“환영합니다, 용사님!”
내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애써 시간을 내어 이 용사님을 관찰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후예A.
흑화 선배의 고유능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후손은 4차 교육과정에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기에 후예A가 어디서 어떻게 용사랑 만나는지 알아두고자 염탐하는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변동사항이 있었다.
4차 교육과정 때는 물론이고, 5차 교육과정의 최근까지도 없었던 스킬이 떡하니 등장했다.
▷종족: 플라워 휴먼
▷레벨: 1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매력Z 검술Z 매혹Z 번역A 업보F
▷상태: 혼란
그것은 ‘업보’였다.
회귀하더라도 초월영역 스킬은 남는다. 그리고 판타지아 원주민들이랑 의사소통할 수 있도록 해주는 번역A가 기본으로 주어진다.
그 외의 스킬들은 처음부터 다시 올려야 했다.
“이, 이건 대체...!”
골반이 변변찮은 용사님은 업보F 때문에 혼란에 빠졌다.
그 스킬 효과가 심상치 않았던 탓이다.
▷종류: 스킬
▷명칭: 업보
▷등급: F
▷E: 회귀할 때마다 명성이 감소한다.
▷F: 회귀할 때마다 평판이 감소한다.
회귀하면 할수록 용사가 불리해지도록 하는 스킬이다.
예전에는 뜻대로 안 풀리면 죽고 다시 시작할 생각부터 했던 용사들이지만, 앞으로는 그럴 수 없게 됐다.
이렇게 된 원인은?
“이젠 용사들이 RPG 게임 하듯이 목숨을 하찮게 여기지 못할 거야. 죽을수록 모험이 힘들어지도록 했으니까.”
비겁한 악마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업보 스킬의 가치와 역할을 설명했다.
내 감상은?
“너, 진짜 잔인하다.”
“비겁한 남편에게만큼은 듣고 싶지 않거든? 이 스킬은 용사들의 성장을 위한 조치야. 이러면 죽음을 두려워하고 매사에 신중하게 대처할 테니까.”
“진짜 너무하네!”
“설명했잖아. 이런 결단을 내린 나도 마음이 아파. 하지만 용사들을 위해 어쩔 수-”
“용사들이 안 죽으면 배터리를 충전할 수 없잖아!”
“......”
“뭐? 맞는 말이잖아?”
용사들이 몸을 사리면 사망률도 감소한다. 그리고 용사들이 회귀하지 않으면 배터리 충전에 차질이 생긴다.
이건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나는 이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해내는 네가 더 심각해 보여...”
부모님께 효도하려는 마음은 음양의 조화와 이치만큼이나 당연한 도리다, 비겁한 악마!
이러는 동안에도 용사님의 스토리는 빠르게 진행됐다.
만두 국왕이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용사여. 나의 왕국에 잘 와주었다. 판타지아 대륙은 지난 2000년 동안 수세식 변기의 가호 아래에 평화를 구가해왔다. 하지만 최근에 마왕이 부활하면서 위협받는 상황이노라. 신에게 선택받은 용사여. 마왕을 무찌르고 다시 한번 이 세계에 평화를 돌려다오.”
“네! 폐하!”
용사가 변변찮은 골반을 강조하며 답했다.
“이만 나가보라.”
“...예?”
“짐은 공무로 바쁘다. 아니면 아직 할 말이 남았는가?”
“그... 지원을...”
“허허! 우리 용사님이 농담도 잘하는군. 안 그런가? 공작.”
“참으로 그렇사옵니다, 폐하! 전설의 용사가 지원이라니요. 아주 참신한 농담입니다. 하하하!”
“......”
여기저기서 호응하는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시작부터 보유한 초월영역 스킬 매력Z와 현혹Z로 쉽게 진행하려고 했던 용사님의 표정이 거무죽죽해졌다.
이전 회차에서는 이 수법이 통했을 것이다.
하지만 ‘업보F’ 때문에 실패했다.
“저기, 비겁한 마누라. F등급 스킬이 Z등급 스킬의 효과를 씹어먹는 것 같은데, 내 기분 탓인가?”
“응. 기분 탓.”
“그렇군.”
기분 탓이었던 모양이다.
▶당혹: 저 스킬의 출현으로 선배님들이 두 패로 나뉘어서 싸우고 있어요. 실패하면서 성장하는 생도들에게 너무 가혹하다는 주장과 합리적인 페널티라는 주장. 결론이 어떻게 날지는 모르지만, 회귀를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생도들에게 조만간 공문이 내려질 거예요.
알려줘서 고마워. 예쁜 교생 아가씨!
교직원 일당들끼리 의견대립으로 싸워서 어떤 결론을 내든 간에 이 결정은 뒤집히지 않는다.
통제를 이탈한 시스템 개발자가 한 짓이기 때문이다.
이봐, 비겁한 마누라. 지금처럼 시스템을 조작해서 탈주할 순 없어?
“못해.”
“정말로?”
“응. 정말로. 판타지아 세계는 신성과 마기로 구성되어 있어. 그래서 내가 통제권을 가져올 수 있는 최대치는 전체 영역의 49%야. 하지만 그 49% 중 약 17%는 신성의 영향을 받고 있어서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해. 그건 마기의 방해를 받는 이모도 마찬가지고.”
비겁한 쏘시아가 32%.
사악한 파르마몬이 32%.
서로 견제해서 동결된 제어권이 34%.
하지만 전부 더해도 100%가 되질 않았다.
부족한 2%는 어디?
“학생과 교직원이야. 비겁한 남편이 탈주하려면 그들의 동의를 얻어서 이모보다 더 많은 제어권을 손에 넣어야 해. 뭐, 그때쯤이면 탈주할 필요도 없으려나? 판타지아 대륙의 운영권이 우리에게 넘어온 이후일 테니까.”
“아! 그랬지.”
스마트폰 때문에 깜빡했다. 이게 다 스마트폰이랑 지크 잘못이다.
용사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여야 하는데, 내 효심(孝心)이 너무 강해서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지금부터라도 다시 신경 써야지.
그래서 우리의 D급 골반 용사님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한 번 볼까나?
“업보라니...”
망연자실한 용사님은 만두 왕국에서 선심 쓰듯 제공해준 허름한 침실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침실의 수준도 이전 회차보다 떨어진 걸까?
그녀는 숨만 쉬어도 삐꺽거리는 소음공해가 발생하는 누추한 침대 위에 웅크린 채 밤새 불평을 토했다.
이게 다 평판이 감소한 탓이다.
골반이 변변찮은 이 용사님만이 아니다.
일이 안 풀린다고 판단하자마자 태연하게 자살하고 재시작한 용사들은 그녀보다 더욱 힘들게 시작했다.
그들은 소환되어 6시간 동안 복도에서 대기한 후에야 만두 국왕을 만날 수 있었다.
무시도 이런 무시가 없었다.
“상황이 나쁘지 않네.”
저렇게 푸대접을 받으면 어떤 용사라도 실망할 터. 내가 스카우트하기가 더욱 수월해질 것이다.
“비겁한 남편. 온종일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는 나태한 삶을 청산하는 거야?”
“아니.”
일이 바쁘다고 문화시민의 삶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할지 고민하던 나에게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천재가 아닐까?
곧장 어머니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아들: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머니. 스마트폰 충전기의 설계도 좀 보내주세요. 가능하면 소형발전기도요. (오후 8:55)
하지만 이걸로는 뭔가 부족하고 석연치 않았다. 그래서 말 나온 김에 다른 설계도도 부탁해보기로 했다.
□아들: 비데 설계도도 구할 수 있을까요? (오후 8:56)
...왜? 비데가 어때서?
비데가 없는 수세식 변기는 날개 없는 천사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