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16회차] 비데 제조기
□어머니: 많이 아프니? (오전 7:32)
“......”
건강히 잘 지낸다고 말하면서 증명사진도 한 장 찍어서 보내드렸는데 어째서 저런 질문을 하시는 걸까?
하지만 원하는 설계도를 전부 얻을 수 있었다.
심지어 굉장히 상세했다.
예를 들어보자.
컴퓨터 본체에는 케이스, 하드디스크, 메모리카드, CPU, 사운드카드, 그래픽카드 등이 들어간다.
일반인들을 위한 설명서라면 ‘이거를 어디에 조립하세요.’라는 간단한 설명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내게 지금 필요한 설계도는 하드디스크, 메모리카드, CPU 등의 기본부품 제조법까지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이건 마치….
“비겁한 남편이 딱 원하는 설계도네. 내가 네 고향별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렇게 상세한 설계도가 구하기 쉬워?”
“아니.”
내가 부탁한 제품들이 국가기밀인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상세한 설계도는 일반인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자료가 아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구해내셨다.
충전기, 발전기, 비데.
답장이 온 시간을 계산해보면 자료수집에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으셨다. 심지어 여러 종류의 발전기를 보내는 여유까지!
잘 풀려서 나쁠 건 없지만, 굉장히 찜찜했다. 풀려도 너무 잘 풀렸다고 할까.
“어머님이 칭찬하시는 며느리의 능력이 좋은 모양이네. 구하기 쉽지 않은 설계도를 이렇게 빨리 모아서 보낸 걸 보면.”
내 옆에 착 달라붙어서 누운 쏘시아가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스마트폰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여자의 감.”
우주에서 가장 불확실한 요소로군.
뿅!
나는 천사들이 사용하는 고급 종이를 스킬 ‘창고’에서 소환했다. 그리고 그 위에 설계도를 빠르게 복사했다.
필기도구는 따로 필요 없다.
치이이익-
말로 설명하려면 피곤해지는 판타지 기술과 판타지 자원을 활용하여 레이저프린트처럼 바로 출력했다.
“이러면 회귀해도 남지.”
내가 사용한 종이는 ‘Made in 용사 페스티벌’이다.
판타지아 차원에 종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용사가 죽어서 회귀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설계도를 전부 복사했다.
도중에 배터리가 떨어져서 스마트폰을 43번이나 바꾸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결과물은 만족스러웠다.
“비겁한 남편. 난쟁이에게 주문할 거야?”
난쟁이들은 무언가를 만드는 손재주가 탁월하다.
전혀 모르는 문명의 첨단기술도 상세한 설계도만 있으면 뚝딱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천만에! 난쟁이를 노예처럼 부려먹는 양아치 용들이랑 MAX급 마왕님을 똑같이 취급하지 마.”
허영심 많은 용족은 멍청하지 않다.
보석과 희귀금속 등을 가공해서 더욱 가치 있는 무언가로 만들어내서 뽐낼 줄 알았다.
단, 직접 가공하진 않는다. 아무리 재료가 좋아도 기술이 받쳐주지 않으면 걸작이 탄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들은 손재주 좋은 난쟁이들을 수탈했다.
힘으로 난쟁이를 제압하고 원하는 예술품을 만들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흐응~ 내가 쓸 물건은 직접 만들어서 쓴다는 주의구나?”
“잘 지켜봐. 내 실력을 보여줄 테니.”
나는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펼쳤다.
*
“허걱! 마왕이다!”
“마왕이 쳐들어왔다!”
“오! 신이시여….”
이곳은 중앙대륙 북부의 엘몰랑도 상공.
위대한 마스터 몰랑이 살지 않는데, 마스터 몰랑의 거처를 자처하는 사악한 천사들이 모여 사는 공중도시다.
악마는 무조건 나쁘다고 가르치는 초등교육과정에서는 그 반대 개념인 천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천사가 사는 엘몰랑도가 없다.
하지만 중등교육과정부터는 다르다.
나쁜 줄로만 알았던 악마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고, 중등교육과정부터 새롭게 등장한 천사들이랑 비교하면서 선악의 개념을 배운다.
“아주 무의미한 수업이지.”
이 닭대가리들은 비열하고 위선적인 존재다.
생각해볼 것도 없다.
“마왕 파르마몬이여. 무모한 행동은 자제하고 물러나세요. 이곳은 당신이 올 곳이 아닙니다.”
헐벗은 몸 위에 얄팍한 흰색 천을 두르고 얼굴에는 검은색 안대를 착용한 천사였다.
그녀는 칼끝을 내게 겨눈 채 건방진 어조로 경고했다.
▷종족: 배틀 엔젤
▷레벨: 999+
▷직업: 집행자(신앙→응징↑)
▷스킬: 신앙ZZ 신성ZZ 심판Z 비행Z 재생Z…
▷상태: 기도, 축복, 강화, 가호, 수호…
그 자신감을 받쳐주는 화려한 능력치.
중등교육과정의 내 더미 능력치를 고려하면, 용사가 올 것도 없이 이런 천사 한두 마리만 보내도 세계가 평화로워질 것 같았다.
심지어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신의 위엄을.”
“신의 영광을.”
“신의 명예를.”
유니폼처럼 똑같은 차림의 남녀가 뒤편에서 사랑과 우정을 과시하며 나에게 위협시위를 시도했다.
그 닭대가리 숫자가 100마리도 더 됐다.
전투병력이라고는 대공B밖에 없는 마왕군이랑 너무 대조됐다.
“아빠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보라색 에테르 날개를 소환하는 것만으로도 중력을 무시하고 허공에 뜬 쏘시아가 감상을 피력했다.
“파르마몬이 농간을 부린 거겠지?”
전력 차이가 심해도 너무 심하다.
마왕의 성에서 대기 중인 내 더미들은 이것들이 원거리 저격하면 속수무책으로 증발할 것이다.
이래서 무슨 교육이 된다는 걸까?
파르마몬 교장은 생각이 없는 것 같다.
“파르마엘이야. 파르마몬은 너고.”
“아씨! 이름이 비슷해서 헷갈리잖아!”
“그건 자업자득이고.”
“비겁한 마누라. 네 고모라고 편드는 거 아니다. 추하다.”
“추한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네 잘못이거든…!”
협상이 결렬됐다고 판단한 천사들이 새하얀 날개를 펼치더니, 활공하는 독수리처럼 돌격해왔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음속을 가볍게 찢고, 방어력 0의 헐벗은 복장 대신 신성으로 몸을 보호했다.
가지각색의 무기들은 순백의 빛에 휘감겨있다.
강하다.
집단으로 이만한 전력은 내 판타지 100년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예전에 망령왕 섹스피어가 흑화 선배의 파티를 부활시켜서 나를 깜짝 놀라게 했었지만, 주둥이로 싸우는 요정왕과 응원단을 뺀 실질적인 전투원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 천사들은 전부 전투원.
이래도 되는 건가?
▶설명: 집행자예요. 악을 처단하기 위해 악이 된다는 의미가 담긴 검은색 안대가 특징이에요. 저들은 죽을 때까지 안대를 안 벗죠. 신성이 워낙 사기적이고 만능이라서 천사들은 나태하고 오만한 경향이 강한데, 집행자들은 달라요. 매일 8시간씩 꼬박꼬박 수련해요.
매일 8시간씩! 온종일 한다고 했으면 절대 안 믿었을 텐데 참 현실적인 설정이다.
예쁘고 똑똑한 교생 아가씨의 설명을 다 들으니, 천사가 지척에 도달해 있었다.
중등교육과정의 더미라서 마기는 한 단계 올라간 ZZ등급. 하지만 눈앞에는 ZZ등급 천사가 바글바글했다.
능력치로 싸우면 필패!
장인어른이 괜히 성에 틀어박혀 있던 게 아니다.
탁-!
하지만 그건 장인어른의 얘기고, 나에게 마기는 비겁한 따님을 맡아준 대가로 받은 덤 같은 거다.
내 스승은 위대하고 위대한 마스터 몰랑.
게임처럼 숫자와 등급으로 강함을 구분해둔 판타지 능력치 따위랑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이다!
“아아악?!”
“꺄앗?!”
내가 오른손 손가락을 튕기자마자 몰랑몰랑한 공진이 발생하고, 가시광선으로 인식되지 않는 암흑물질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것만으로도 천사들은 뭉개지며 한 줌의 핏덩이로 전락했다.
신성의 반사보호막?
이건 ‘공격’이 아니다.
공간이 일그러진 것처럼 보이지만, 암흑물질이 대륙이동처럼 움직이면서 발생한 부수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것이 공간 위에 있다.
도화지 위에 그려진 그림이나 다름없다.
신성은 도화지에 해당하는 공간을 통한 공격을 방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화지를 올려놓는 책상은 어떨까?
그림은 도화지에 그리지만, 그 도화지는 평평한 책상 위에 있다.
책상이 울퉁불퉁하면 그 어떤 고급 도화지를 사용해도 그림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 문제의 책상이 암흑물질.
도화지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세계다.
“히야~ 비겁한 딸을 떠넘긴 장인어른에게 유감이 많지만, 이거 하나는 마음에 든단 말이지.”
최초의 마왕이 기나긴 시간 동안 갇힌 상태에서 이를 악물고 연구한 비장의 수답다.
“아빠의 필살기가 이렇게 사기였나…?”
“마스터 몰랑 덕분이지!”
업그레이드했다.
위력, 범위, 사거리, 준비시간, 재사용시간….
모든 면에서 장인어른의 기술보다 성능이 뛰어나다.
몰랑몰랑? 몰랑몰랑~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겸손하게 몰랑거리실 필요 없습니다, 마스터 몰랑이시여.
우매한 판타지 원주민들은 천연덕스럽게 몰랑거리시면서 속일 수 있으셨겠지만, 이 제자의 눈은 못 속입니다.
“...너. 어머님 말씀처럼 많이 아픈 것 같아.”
“매우 건강하거든?”
정의로운 MAX급 용사님을 응징한다고 지껄이던 건방진 닭대가리들은 아닌 것 같지만.
후두둑!
툭! 툭!
푸드드득!
새하얀 깃털을 사방으로 뿌리며 추락했다.
높은 재생력으로 버텨낸 천사도 있긴 했지만, 심장이 뭉개지고 뇌가 일그러지면서 즉사해버린 천사는 능력치에 ‘죽음’ 판정이 나면서 0레벨로 단숨에 하락.
그대로 생명이 끝나버렸다.
하지만 괜찮다.
“We are the one~ You are the Exp~♪”
경험치가 된 그들은 내 더미 속에서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쭉 함께하리라.
“어, 어떻게 그런 힘을…….”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는데….”
등을 보이며 도망치거나 이전처럼 돌격하지도 못한 채 갈팡질팡하는 생존자들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그래서 나는 이 우매한 닭대가리들에게 쓴소리해줬다.
“나는 마왕이야.”
주인공 용사의 고향길을 막는 최종보스다.
인물묘사와 자기소개의 시간도 없이 ‘잡것들’로 표현되는 엑스트라들이랑 격이 다르다.
압도적으로 강한 게 당연하다.
그런 마왕에게 ‘어째서 강하지?’라는 질문은 맞지 않는다.
“그대는 용사에게 쓰러질 운명.”
“조용히 심판의 날을 기다려야 하거늘!”
“마왕이 이기는 운명은 없다!”
“형제들이여! 운명이 우리와 함께합니다!”
“돌격! 약속된 승리를 위하여!”
빠르게 전열을 가다듬고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천사들.
근거 없는 운명을 맹신하는 그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운명은 딱 하나였다.
탁-!
우리는 하나가 될 것이다.
*
“안녕? 척추가 튼실한 미모의 천사 아가씨. 나는 우락부락한 털북숭이 중년 수컷을 상상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숙녀가 엘몰랑도 최고의 대장장이일 줄은 몰랐네.”
“흥! 뭐냐, 마왕. 그 추한 대갈통을 용광로에 녹여달라고 주문하러 왔나?”
“하하핫!”
내면의 아름다움만큼 입담도 시원시원한 닭대가리네.
일을 맡겨도 될 것 같았다.
“비겁한 남편. 양심이 있다면 뒤를 돌아봐. 네가 대장간까지 오는 동안 갈아버린 천사가 몇 명인 줄 알아?”
“세서 뭐해?”
그런 만행은 ‘사람을 적게 죽인 사람이 저녁 사기!’ 같은 엽기적인 내기를 즐기는 용사의 동료들이나 하는 짓이다.
나처럼 선량한 마왕님은 흐르는 강물처럼 곱게 죽이고 넘어간다.
“대장장이의 협력을 기대하지 말라는 의미였어.”
“오! 마왕의 계집은 눈치가 좀 있군. 그렇다! 내 동족들을 학살한 네놈에게 협력할 줄 아느냐? 내가 이 망치로 두드려줄 수 있는 건 네 머리통뿐이다!”
이해가 안 됐던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했다.
“정당방위였는데? 나는 그냥 물건 좀 주문하러 온 것뿐인데, 야만적인 천사들이 먼저 공격했다구?”
“하! 그딴 논리는 슬라임 앞에서나 해라.”
이 대장장이가 슬라임을 무시하네. 슬라임은 천사 따위랑 비교할 수 없는 섬세한 종족이다.
“마스터 몰랑. 이 천사에게 한마디 해주십시오.”
몰랑? 몰랑!
잘 들었지? 마스터 몰랑께서 귀엽게 말씀하실 때 순순히 듣는 게 좋을 거야.
“마왕. 포기해라. 나는 네 주문을 절대 받지 않- 우웁?!”
주문제작 한 것처럼 완벽한 몸과 얼굴이 매력적인 천사의 도도한 입술을 틀어막았다.
외적인 아름다움만 보고 평가한 게 아니다.
말이 많은 게 흠이지만, 관리를 잘해서 튼실한 요추(腰椎)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런 인재를 함부로 죽일 순 없지.
“쓰읍!”
“웁-?!”
나는 대장장이 천사의 신성을 쭉쭉 빨아 마셨다. 그리고 그녀의 목구멍으로 질퍽한 마기를 밀어 넣었다.
옳지. 잘 먹네.
오늘부터 너를 비데 제조기로 임명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