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16회차] 복무신조
“...명을 따르겠습니다, 마왕님.”
내 마기에 침식된 대장장이 천사가 공손히 대답했다.
신성을 뽑아내고 마기를 주입하긴 했지만, 그건 천사의 수명을 약간 늘려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천사의 본질은 ‘빛의 정령’인 까닭이다.
체내에 쌓인 마기는 끊임없이 생성되는 빛에 언젠가 중화된다. 그리고 빛도 어둠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되면 ‘타락을 이겨낸 천사’가 되는 게 아니라 사망한다.
수술하기 위해 환자의 호흡을 10분 동안 멈춘다는 건 있을 수 없잖은가?
물론, 기적적으로 회복할 수도 있다.
호흡이 멈춘 사람이 인공호흡으로 살아나듯이.
하지만 나는 이 대장장이 천사의 미래에 전혀 관심 없다. 내가 원하는 물건만 만들어주면 된다.
“이걸 녹여서 만들어.”
뿅!
천사의 무기를 소환해서 대장장이 앞에 내려놨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던 이 무기의 가치와 성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알 바 아니다.
내게 중요한 건, 이 무기가 판타지아 차원이 아닌 페스티벌 차원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 원재료도 페스티벌 차원의 것.
그렇기에 회귀해도 사라지지 않고 유지된다.
내가 굳이 천사를 이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천사의 무기는 천사가 잘 다룰 테니까.
“굉장히 잘 만들어진 무기인데….”
“괜찮아. 잔뜩 있어.”
페스티벌 차원에 사는 천사들이 많이 챙겨줬다.
무기, 갑옷, 화살, 보석, 장신구, 예술품….
맨손과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가 훨씬 강해서 여태 안 쓰고 처박아둔 것뿐이다. 없어서 아낀 건 절대 아니다.
“마왕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
설계도를 본 대장장이 천사는 판타지 재료를 판타지 기술로 판타지처럼 활용하여 판타지답게 재현해냈다.
소형발전기와 충전기를 차례차례 만들었다.
용이 밟아도 끄떡없는 금속으로 코팅하고, 보검의 칼날에 애용되는 형상기억합금으로 파손과 고장에 대비했다.
위이이잉-
발전기와 충전기는 문제없이 작동됐다.
소음이 살짝 있긴 했지만, 그건 내 귀가 민감한 탓이다. 일반인들은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할 것이다.
“오! 충전된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소형발전기를 작동하려면 연료를 넣어줘야 했으니까.
석탄, 석유, 목재, 풍력, 수력….
발전기 연료의 종류는 설계도만큼 다양했다.
하지만 나는 이 연료를 판타지 세계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연료로 대처하고 싶었다.
가령, 마기라든가?
“마왕님께서 원하신다면 터빈을 돌리는 방식의 발전기로 다시 제작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발전기에 충전기란 물건의 변압기를 부착해서 일체형으로 만들어보겠습니다.”
“과연….”
척추가 튼실한 천사답게 유능하잖아?
“마약마왕. 네가 그 바보상자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한 날부터 심심해졌다. 가끔은 따뜻한 조카 밖으로 나가서 용사라도 잡으며 기분전환 하는 게 어떠냐?”
“이모님! 저는 이불이 아니거든요…!”
“심심하면 네가 잡아.”
판타지아 원주민들이 대단히 착각하는 게 있다.
이 세계는 MAX급 마왕님의 위협을 받기 전부터 이미 멸망 직전의 위기상황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최초의 정령.
온종일 내 머리 위에서 킁킁대는 이 총배설강 정령이 한마디만 하면 판타지아 대륙에서 인류가 싹 박멸된다.
나는 할 수 없다.
모든 더미를 일일이 조종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최초의 정령은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아이들아! 모든 인간을 죽여!’라고 말하면 끝이다.
핵미사일단추를 쥐고 있는 셈.
“그건 쉬워서 재미없다.”
“요정에게 붙잡혀서 하수구에 봉인되어있던 마약정령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너에게 스마트폰의 재미를 알려줄게.”
스마트폰 배터리를 충전할 수 있게 되면서 그동안 사용하지 못했던 기능들을 쓸 수 있게 됐다.
애니, 영화, 드라마, 웹툰….
이미지가 많이 들어간 매체는 이용하지 못했다. 사진이나 영상을 전송하는 사이에 배터리가 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괜찮다.
WiFi 신호가 약해서 느리긴 하지만, 서두르지 않고 기다리면 뭐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못 하는 건 모바일게임뿐.
하지만 10년 동안 밀리거나 쌓인 애니와 만화, 소설만 찾아다녀도 시간이 모자랐기에 심심할 틈이 없었다.
“살아있지 않은 그림엔 관심 없다.”
“흠. 그러면 이건 어때?”
나는 따분해하는 마약정령에게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마약용사. 누구냐?”
“내 부모님이야. 그리고 동생.”
“동생? 동생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심심하다고 보채며 시종일관 시큰둥한 표정이었던 마약정령이 처음으로 흥미를 보였다.
내게 무릎베개를 해주는 찰떡과 마스터 몰랑을 껴안고 잠든 척하던 쏘시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단한 비밀도 아니었기에 솔직하게 답해줬다.
“내가 실종된 뒤에 태어난 늦둥이. 남동생이고 이제 2살이라는군….”
아버지를 닮아서 전혀 귀엽지 않았다.
“귀엽네.”
“아기 악마 같아.”
“사랑스럽네요.”
이 여자들이 아기를 볼 줄 모르는군!
나는 말 나온 김에 쑥떡도 불러서 물어보기로 했다.
“아버지. 찾으셨나요?”
무럭무럭 성장해서 뇌비우스의 뒷다리만 해진 쑥떡을 그냥 소환하면 마왕의 성이 바스러진다.
그래서 처음부터 인간 소년의 모습으로 주문했다.
나는 녹색 머리카락과 녹색 눈동자, 녹색 복장으로 통일된 ‘나는 녹색 용이다!’라고 광고하듯 생긴 양아들을 손짓으로 불렀다.
“그래. 쑥떡아. 이리 좀 와서 이 사진 좀 봐라. 내 동생이라는데 어떻게 생각하냐?”
“제 삼촌이요?”
“뭐…. 그렇게 되겠지.”
나이와 덩치 차이가 극심하긴 하지만, 항렬로 따지면 가족사진의 아기가 쑥떡의 삼촌이 될 것이다.
쑥떡이 녹색 눈동자를 몇 번 깜빡거리더니 감상을 말했다.
“안 귀엽네요.”
“역시! 네가 나를 닮아서 보는 눈이 있구나!”
“......”
“왜?”
“별거 아니에요. 드디어 아버지를 닮은 부분을 찾게 돼서 무척 기뻐서요.”
기쁘다고 말하는 쑥떡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진 것 같았지만, 내 기분 탓일 것이다.
“아버님이 이렇게 생기셨구나. 오우거 뺨치는 무서운 인상일 줄 알았는데.”
쏘시아가 무척 의외란 시선을 보냈다.
“평범한 아버지라고 말해준 거로 아는데?”
“안 믿었지. 어머님은…. 미인이시네.”
“그래도 세월이 참 무서워. 내가 마지막으로 보셨을 때보다 이마에 주름…. 음! 어머니는 여전히 젊고 아름다우시네! 아버지는 전생에 우주를 구했을 거야! 대박!”
“주름이 뭐?”
“아무 말도 안 했다.”
“주름이 어쨌는지 말해봐.”
나는 그렇게 문화생활을 만끽했다.
인터넷이 느려서 답답했지만, 아예 지구랑 단절됐을 때보다는 훨씬 상황이 나았다.
그리고 부모님이 안전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이게 중요하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도 꿈틀거리기 마련.
어머니는 나에게 빛만 주지 않으셨다.
□어머니: 아들. 이런 거 본 적 없지? (오전 9:25)
□어머니: 며늘아기가 선물로 줬어. (오전 9:25)
어머니가 사진 한 장을 전송하셨다.
하얀색 플라스틱 판때기 위에 스마트폰이 올려져 있는 사진이었다.
새로 구매하신 스마트폰인가?
스마트폰은 통화와 인터넷만 잘 되면 굳이 신제품을 살 필요가 없다고 보지만, 효자인 나는 성실하게 답장을 보냈다.
□아들: 오! 스마트폰 디자인이 멋지네요. (오전 11:54)
□아들: 정말 부럽습니다. (오전 11:54)
전혀 안 부럽지만, 어머니가 이 메시지를 보시고 기분이 좋아지신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어머니: ㅎㅎㅎ (오후 8:15)
□어머니: 요즘 스마트폰은 무선으로 충전해. (오후 8:16)
□어머니: 이 위에 올려놓으면 알아서 충전돼. (오후 8:17)
□어머니: 우리 아들. 판타지 촌놈이구나? (오후 8:18)
“......”
나도 내가 촌놈인 건 안다.
외계인으로 불리는 흑화 선배의 군대가 지구를 침공하면서 시국이 어지럽긴 하지만, 과학기술은 퇴보하긴커녕 가속됐다.
인터넷 홈쇼핑만 구경해봐도 별의별 해괴한 제품이 보였다.
하지만 내게만 해괴할 뿐, 아름다운 고향별 지구에 사는 문화시민들에게는 흔한 가전제품일 것이다.
마음이 아프다.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의 뼈를 때리시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프다.
“하나? 둘이잖아.”
“그렇구나! 이젠 둘이구나!”
내 허락도 없이 남동생이 태어났다.
이 나이 먹고 어린 동생을 질투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지구에 놔두고 온 물건이 있어서 얼른 돌아가야 한다.
스마트폰은 잠시 내려놓자.
“동생을 질투하는구나?”
“...교실에 놔두고 온 물건이 떠오른 것뿐이야.”
“흐응~”
“불만 있어?”
“아니. 온종일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는 유감스러운 남편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하지만 판타지아 차원을 빠져나가려고 애쓰는 너도 나쁘지 않다고 보거든. 탈주한 아빠가 걱정돼.”
“어련히 잘 지내시겠지.”
장인어른을 걱정하는 건 심력 낭비다.
내가 두 번째 마왕으로 취임하며 마기를 무상으로 협찬받아봐서 잘 안다.
마왕은 방심하지 않으면 절대 패배하지 않는다.
그만큼 터무니없는 자연적인 존재다.
“아빠는 걱정 안 해. 그 주변이 걱정되지.”
“지구만 안 가시면 상관없어.”
우주는 상상 이상으로 광활하다. 장인어른이 지구를 방문할 확률은 한없이 0%에 수렴한다.
“아빠가 복수한다고 날뛰지 않아야 할 텐데….”
“나는 다르게 생각해.”
복수의 대상인 흑화 선배를 쳐부순 장인어른이 훌륭한 사위와 비겁한 딸을 구하러 와줄 테니까!
느긋하게 기다리면 된다.
“이게 말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아빠는 이제 마왕이 아니니까. 마기가 예전 같지 않을 거야.”
“...음?”
“생각해봐. 선언하는 것만으로 무쌍의 마왕을 쉽게 늘릴 수 있었다면 진즉 수만 명은 됐을걸?”
“......”
쏘시아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내게 가업과 따님을 떠넘기고 판타지아 차원을 탈출하기 직전의 장인어른 직업은 ‘마왕’이 아니었으니까.
그나저나….
“심심하네.”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자마자 할 일이 없어졌다.
용사들이 꿈과 희망을 품고 마왕의 성으로 무모하게 돌격해오는 경우가 눈에 띄게 줄어든 탓이다.
스킬 ‘업보’에 대한 부담감이 그들을 위축시킨 게 틀림없다.
▶긍정: 강한수 생도님의 추측이 정확해요. 생도들이 업보 때문에 예전처럼 무모한 행동을 못 하고 있어요. 모험을 안 하고 안전한 길만 찾아다니고 있답니다. 최근 통계자료에 따르면, 생도들이 가장 선호하는 임무가 ‘슬라임 사냥’에서 ‘소녀의 잃어버린 고양이 찾아주기’로 바뀌었어요.
설명 고마워, 교생 아가씨!
경험치도 주지 않는 고양이 찾기로 소중한 시간과 체력을 낭비하는 용사들이 많다는 것 같다.
그건 곤란하지.
나도 1회차 때는 안전하게 가려고 10년이나 걸렸다. 하지만 그때와 현재는 상황이 좀 다르다.
마왕의 영토는 이 별장이 전부고, 제대로 싸울 줄 아는 전투병력은 대공B가 유일하며, 완전히 포위된 상태다.
모든 면에서 인류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잠깐. 유리하다고?”
유리하기 때문에 일찍 쳐들어올 거란 발상이 잘못된 게 아닐까?
예쁘고 똑똑한 교생 아가씨. 질문이 있어!
▶궁금: 뭐든지 물어보세요!
교직원 일동이 정한 교육방침이 궁금하다.
용사의 복무신조(服務信條)는?
▶결의: 우리는 사랑과 우정을 다하는 판타지아 용사다. 하나. 우리는 판타지아 주민을 수호하며, 세계평화의 역군이 된다. 둘. 우리는 실전과 같은 훈련으로 토벌전의 승리자가 된다. 셋. 우리는 법규를 준수하며 약자의 부탁에 복종한다. 넷. 우리는 꿈과 희망을 지키며 전우애로 굳게 단결한다. 이상이에요.
...그렇군. 듣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네.
“용사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려면 꿈과 희망을 절망으로, 사랑과 우정을 배신과 통수로 바꿀 필요가 있겠군.”
“비겁한 남편. 그게 무슨 논리야?”
“아주 간단해.”
정의롭고 선량한 MAX급 마왕님을 쓰러트릴 수 있을 거란 헛된 꿈과 희망을 짓밟아주리라.
매연으로 가득한 고향별로 돌아가는 것도, 모험하면서 미남미녀를 수집하는 것도, 라누벨이 귀여운 척하는 것도…!
전부 가망이 없게 되면?
“비겁한 마왕에게 매달리게 될 거란 소리네.”
“그럴 수밖에 없잖아?”
“힘들 것 같은데….”
“힘들어도 나는 해낼 거다. 반드시!”
내게는 그래야 할 이유가 있다.
□어머니: 아들. 이게 뭔지 알아? (오후 7:35)
□아들: 수상택시로 보이네요. (오전 3:41)
□어머니: 자동차야! 날개 없이 날아다녀. (오후 4:20)
□어머니: 우리 아들. 마차 타니? ㅋㅋ (오후 4:22)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