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16회차] “Ulluuu?”
“흠. 내 명령이 대를 이어가며 2000년 동안 유지됐던 모양이네.”
인어여왕의 전매특허인 절대명령.
그 힘은 옹달샘에 떨어진 물감처럼 희석됐지만, 인어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인간 수컷을 사냥하게 바꿔놨다.
그 결과가 눈앞의 광경.
성왕국은 호수에서 왕국으로 향하는 길목에 높은 망루를 세우고 여성 감시병들을 세워뒀다.
평지에는 돌로 된 성벽을 건설하여 인어들이 샛길로 왕국에 침입하는 것을 원천봉쇄 했다.
인어들도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성루와 성벽을 파괴하고 여성 병사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항복과 포로는 일절 받지 않았다.
하지만 손바닥은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인어들에게 포섭된 인간들이 아름다운 인어와 결혼하길 희망하는 총각들을 호수까지 밀항(密航)시켰다.
“비겁한 남편. 이건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야.”
“왜?”
나는 자연의 법칙이라고 보는데.
인어에게 남자친구와 남편을 안 빼앗기려면, 여자들은 외면과 내면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추구할 필요가 있다.
이건 생존경쟁이다.
심각한 문제 같은 게 아니다.
“모든 항구도시를 인어들이 점령했을 거야.”
바다인어의 숫자는 민물인어랑 비교 자체가 안 된다. 그리고 평균 레벨도 바다인어가 훨씬 높다.
그런데 수적으로든 질적으로든 모든 면에서 바다인어보다 부족한 민물인어가 중앙대륙에서 2번째로 국력이 강한 성왕국이랑 대치한 채 2000년을 버텼다.
이제 좀 상황이 이해됐다.
“내 영토가 무지막지하게 넓었구나!”
장인어른이 ‘악마의 정치’를 할 때보다 영토가 좁아서 내심 자존심 상했었는데, 판타지아 행성의 모든 바다와 호수가 나의 영토였다.
그리고 거기에 사는 모든 인어가 나의 군대!
모든 인류를 합친 숫자보다 많으리라.
나는 마음속 깊숙이 반성했다.
마왕이라고 해서 악마와 악마추종자만 지배하란 법은 없다. 이미 유부남 알렉스도 내 하수인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비겁한 남편. 초점이 잘못됐어! 지금, 네 영토가 넓다는 게 중요해? 인류는 초유의 위기를 맞이했어. 플랑크톤이 과다증식해서 물고기가 떼죽음 당하듯이 인어가 너무 많아졌어.”
“잡으면 되잖아?”
인어 회와 젓갈이 부족할 걱정은 없을 거다.
“...인어를 식용으로 쓴다는 발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놀랍네. 비겁한 남편. 장난하지 말고 조금만 진지하게 생각해봐. 판타지아 차원의 물자 운송은 대부분 배로 해. 그리고 이 배들은 바다와 강에서 이동하지. 그런데 인어가 이렇게 많으면 어떻게 될까?”
“여자들이 일하겠네.”
“맞아. 유통이 막혀…. 응?”
쏘시아가 두 눈을 깜빡거리며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왜? 맞잖아?
“인어는 주위에 남자가 없으면 여자를 공격하지 않아. 경쟁상대라고 인식했을 때만 공격하지.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해. 저 성왕국 병력처럼 상단도 여성으로만 구성하면 돼. 그 상단을 지키는 용병들도.”
“아….”
“안 그러면 저렇게 될 테니까.”
나는 손끝으로 호수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미역처럼 생긴 초록색 물풀을 엮어서 남성의 중심만 가린 근육질 야만인이 철벽처럼 서 있었다.
쏘시아의 표정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성왕국 최강의 영웅으로 불리는 토마스 기사단장이 인어들의 편에…?”
“자연의 순리로군.”
성녀A와 인류를 배신한 토마토 기사단장 주위를 다수의 인어가 연인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수산물시장을 연상시키는 광경!
거대한 하렘을 꾸린 토마토의 능력치는 더욱 굉장했다.
▷종족: 워터 휴먼
▷레벨: 794
▷직업: 성기사(신성=축복↑)
▷스킬: 정력MAX 체력S 신성A 수영A 호흡B…
▷상태: 강건, 축복, 현자
2000년 넘게 유부남으로 살아온 알렉스에게 비빌 수준은 아니었지만, 약하다고 할 순 없었다.
여기가 초등교육장이 맞는 걸까?
동료들의 평균 능력치가 4차 교육과정 때보다 훨씬 높았다.
“지크랑 붙이면 좋은 싸움이 되겠는걸?”
정력이 Z등급인 지크가 좀 더 유리하겠지만, 주위에 응원하는 여성이 없으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스킬이라서 별 차이 없으리라.
이곳엔 토마토만 있는 게 아니었다.
“여자들은 당장 물러나라!”
“나는 인어가 좋다!”
“내 행복을 짓밟지 마라!”
“나를 좀 내버려 둬!”
인어에게 현혹된 수많은 남정네가 인어와 호수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고 동족 여성들이랑 대치했다.
팽팽한 긴장감.
하지만 피가 튀는 전쟁으로 발전하진 않았다.
“이 누나에게 돌아와!”
“진짜 잘해줄게!”
“오빠! 이러지 마!”
“정신 차려요!”
인어에게 빼앗긴 남자친구를 차마 공격할 수 없었던 여자들은 설득하려고 애썼다.
나로선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래고래 소리만 질러서 대화가 되나?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부터 잡고 시작해야지.”
정말 어이가 없었다.
“비겁한 남편. 네가 더 어이없거든?”
“말꼬리 그만 잡고 아쿠아나 찾아봐. 어째선지 안 보이네.”
성녀A는 찾았다.
성왕국 진영의 선두에 선 그녀는 토마토 성기사단장의 도덕성을 맹비난하고 있었다.
듣는 내가 어이없었다.
용사에게 사랑과 우정을 강요할 때는 언제고?
“아마…. 아쿠아는 남자들이 호수에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육지에서 직접 사냥하고 다닐 거야. 그녀는 인어치고 드물게 육지에서도 장시간 활발하게 돌아다닐 수 있으니까.”
“흠. 계획이 살짝 꼬였네.”
용사가 아쿠아를 영입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성왕국 어딘가에서 남자를 겁탈하고 다니는 강간범 아쿠아를 동료로 받아들이더라도 성녀A와 토마토가 따르지 않을 테니까.
그렇기에 나로선 이해가 되질 않았다.
용사들은 왜 성왕국으로 향한 걸까?
몰랐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5차 교육과정의 한 회차라도 성왕국에 도착해본 용사라면 이 꼬여버린 상황을 단번에 눈치챘을 것이다.
그런데도 성왕국을 선택한 이유는?
나는 이 의구심을 해결하기 위해 용사E가 성왕국에 도착하길 기다렸다.
*
“용사가 도착했습니다!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라누벨도 왔어요!”
용사E와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이 호수에 도착했다.
하지만 실연의 아픔으로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성왕국 병사들은 그들의 방문을 썩 반기지 않았다.
용사를 따르는 운명을 짊어진 성녀A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너희들이 어쩔 건데?
딱 그런 시선으로 바라봤다.
호응이 낮은 분위기를 본 용사E는 ‘또 업보가….’라고 구시렁대다가 썩은 미소를 지으며 장황하게 설명했다.
“이 호수 밑바닥에 울룰루란 고대의 거인이 잠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 적이 아닙니다. 마왕에게 대적하다가 봉인된 호수의 지배자입니다. 현재는 인어들의 자장가로 깊은 잠에 빠져있습니다. 그 자장가만 멈출 수 있다면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낼 수 있습니다.”
“그게 사실임을 증명할 방법이 있나요?”
이 군대를 이끼는 성녀A가 대표로 질문했다. 하지만 용사E가 설명하기 이전처럼 시큰둥하진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꿈과 희망이 가득했다.
“아쿠아가 알고 있습니다.”
“아쿠아…. 성왕국의 수많은 영웅을 정신적 고자로 만들어버린 그 흉악한 강간범이 증명해줄 거라고요?”
“그녀의 피를 호수에 흘리면 울룰루가 오랜 잠에서 깨어납니다.”
“...좋습니다. 한번 해보죠.”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쿠아로 귀결되는 걸까?
용사E와 성녀A는 성왕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남자를 사냥하는 아쿠아를 잡기 위해 함정을 팠다.
미끼는 용사E 본인.
아쿠아가 숨어있을 법한 도시와 마을에 ‘멋진 용사님이 성왕국 도시A에 오셨다!’라고 소문을 냈다.
딱 봐도 함정!
이런 거에 걸리는 멍청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어는 그 멍청이에 해당했다.
지능은 사람처럼 천차만별이지만, 남자와 짝짓기만 연관되면 막무가내로 돌격하는 금붕어가 된다.
고귀한 인어공주란 감투도 이때는 소용없었다.
“찾았다!”
아쿠아는 망설임 없이 함정으로 뛰어들었다.
여관 침대에 알몸으로 걸터앉은 용사를 창문을 통해 발견하자마자 옆의 건물 지붕에서 도약, 도둑고양이처럼 침입했다.
그리고 용사E를 덮쳤다.
“큭-!”
“우후후후! 얌전히 있어. 이 누나가 처음은 살살 해줄게.”
속옷 없이 푸른색 원피스 한 장만 걸친 아쿠아는 벗을 것도 없이 바로 용사E랑 몸을 겹쳤다.
힘에서는 그녀가 압도적이었다.
▷종족: 머메이드
▷레벨: 847
▷직업: 영웅(경험치 200%)
▷스킬: 창술SS 음욕S 잠복S 습격A 만능A…
▷상태: 흥분, 음란, 광기
초월영역 스킬은 없지만, 용사E보다 레벨이 월등히 높았다.
게다가 인어의 아름다운 얼굴과 몸, 윤활유를 바른 것처럼 반들반들한 피부는 수컷을 미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용사E는 거부하지 못했다.
아쿠아는 이런 수컷을 범하고 또 범했다.
1번, 2번, 10번, 20번, 50번….
둘은 이틀 동안 쉬지 않고 침대 위에서 싸웠다. 그리고 마지막에 웃는 자는 용사E였다.
“수고하셨어요, 용사님.”
“드디어 강간범을 체포하는군요!”
“용사님 덕분에 피해 없이 잡을 수 있었어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용사님.”
“당신은 성왕국 총각들을 구한 영웅이에요!”
아쿠아를 포박한 병사들이 용사E를 칭찬했다.
아쿠아는 이 모든 게 함정임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할 만큼 지쳐서 싸움은커녕 도망치지도 못했다.
“으으…. 내가 지다니….”
거칠게 포박된 아쿠아는 분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함정 때문이 아니었다.
이틀 동안 쉬지 않고 싸웠음에도 여전히 힘을 잃지 않은 용사E의 성검 탓이다.
“아쿠아. 당신에게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제 동료가 되십시오. 그러면 그동안 저질러온 죄를 묻지 않겠습니다.”
“무조건 좋아요! 용사님!”
아쿠아는 생각해볼 것도 없다는 듯이 승낙했다.
하지만 성왕국 측은 아니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용사님. 이 인어 때문에 어떤 여자를 만나도 흥분하지 못하게 된 영웅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세요? 고자가 됐다는 사실에 절망한 그들은 술과 눈물로….”
“성녀님 말씀은 충분히 이해했지만, 저는 그녀가 필요합니다.”
용사E가 침대 위에서 일어서자 정력Z의 힘을 머금은 성검이 위풍당당하게 성녀A에게 칼끝을 겨누었다.
덜렁덜렁.
“...그렇다면 저도 용사님의 모험에 동참하겠어요. 용사님께서 아직 성검의 시험을 통과하진 못하셨지만, 아쿠아를 감시하기 위해서 따르겠습니다. 다, 다른 뜻은 없어요!”
“환영합니다, 성녀님.”
용사E는 아쿠아와 성녀A를 영입하는 데 성공한다.
나와 쏘시아는 서로를 돌아봤다.
“저 쓰레기 스킬로 이걸…?”
“그러게. 아니면 지크가 정력 스킬을 제대로 활용할 줄 모르는 머저리였던 게 아닐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정력 스킬이 여성 동료를 영입하는데 탁월한 성능을 발휘하는 보조계열 스킬일지도 모르겠다.
지크는 ‘내 여자친구는 요정!’이란 확고한 가치관 때문에 전혀 써보지 못했고.
용사E의 파티는 벌써 하렘의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
라누벨, 성녀A, 아쿠아.
외적인 아름다움은 그럭저럭 봐줄 만하지만, 내 1회차를 힘들게 만들었던 여자들이었다. 그래서 전혀 부럽지 않았으나, 후배의 뿌듯해하는 얼굴에 차마 침을 뱉진 못했다.
암울한 미래가 보이는구나!
“아쿠아. 호수에 너의 피를 흘려보내.”
“잠깐! 그러면 울룰루가…!”
“알아. 울룰루는 용사의 동료. 그 용사의 후예가 흘린 피의 혈향(血香)이 이 고대의 존재를 자극할 거야.”
“어떻게 그 전승을…?”
“죽음의 문턱을 3번 넘으며 간신히 알아냈지!”
넘었다는 건 순전히 거짓말이고, 이 호수의 비밀을 파헤치다가 3번 죽은 모양이다.
“울룰루가 깨어나면 우리를 가만 안 놔둘 텐데.”
“내 동료가 되겠다며?”
“그냥 해본 소리야. 우후후!”
나 때도 그랬지만, 짝짓기를 위해서라면 동족도 간단히 배신하는 인어공주 아쿠아다운 발언이었다.
슥- 뚝! 뚝!
스스로 살짝 베어낸 그녀의 손목에서 흘러내린 피가 호수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Ulluuuuu…!”
메기 머리를 한 거인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인어들이 비명을 지르며 호수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호수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창으로 그녀들의 도주로를 막았다.
절체절명의 위기상황!
하지만 사랑의 힘은 더욱 위대했다.
“Ulluuu…?”
▷종족: 카오스 타이탄
▷레벨: 1
▷직업: 수왕(호수→가호↑)
▷스킬: 파괴SSS 가호SS 맷집S 혼돈S 돌격A…
▷상태: 짜증, 몽롱, 격분
마음껏 날뛸 준비를 하던 울룰루의 능력치가 999레벨에서 1레벨로 하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