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17회차] 몰랑의 이름으로
“Ulluuuu~?!”
압도적인 체급으로 인어들을 쥐포처럼 밟으려 했던 초대형 거인 울룰루가 몸의 균형을 잃고 호수 위로 자빠졌다.
촤아아아!
큰 파도가 발생하면서 호숫가의 인어와 인간들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무려 2000년 동안 두 종족이 대치해온 전쟁터가 물살에 싹 쓸려나간 셈이다.
이것이 호수의 왕, 울룰루의 위용.
하지만 이 메기 거인이 다시 일어서는 일은 없었다.
“모두 공격!”
한 남자가 우렁차게 외치며 울룰루의 머리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손에 쥔 검으로 거인의 커다란 눈 정중앙을 찔렀다.
푹!
“Ulluuuu-?!”
천둥 같은 비명을 지르며 거인이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거기엔 이전 같은 박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1레벨로 하락한 영향.
모두가 그 변화를 눈치챘다.
“울룰루가 약해졌어!”
“어? 정말이잖아?!”
“그렇다면 나도-!”
남자의 선동에 넘어간 인어들이 물고기의 뼈로 만든 창과 칼을 쥐고 울룰루의 온몸을 구석구석 찌르기 시작했다.
그 하나하나는 매우 약했지만, 모이고 모이니 거인의 두꺼운 피부를 금방 너덜너덜하게 바꿔놨다.
압도적인 숫자의 폭력!
혼자서 감당하기엔 너무나 많은 물고기였다.
“U, Ulluuuu….”
똑같이 1레벨이면 능력치를 벗고 본연의 힘으로 싸워야 한다.
울룰루는 모든 면에서 인어를 압도한다.
체급, 근력, 체력, 오감….
하지만 인어는 숫자의 폭력으로 울룰루를 찍어 눌렀다.
수십만 마리의 미꾸라지가 몰려온다고 상상해보라. 마법이나 과학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다.
그리고 울룰루는 능력치란 마법의 힘을 잃었다.
“용사님! 라누벨은 울룰루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 잠깐! 라누벨! 적이 너무 많아!”
죽어가는 거인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용사E와 잡것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울룰루가 쓰러지면 다음은 우리 차례일 거예요!”
라누벨이 귀여운 척하면서 약을 팔기 시작했다.
울룰루를 깨워서 인어들을 먼저 공격해놓고 저런 말을 태연하게 내뱉는다.
과정이야 어쨌든 타당한 접근법이지만, 인어는 복수할 시간에 짝짓기할 만큼 단순한 종족이다.
지금도 짝짓기에 방해돼서 싸울 뿐.
용사 일행은 안중에도 없다.
“저도 라누벨 양의 말에 동감합니다.”
하지만 성녀A가 라누벨의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
아쿠아는?
“용사님. 꼭 살아남으세요♪”
대세가 기울었다는 걸 깨닫자마자 동족들의 편으로 돌아섰다. 그녀의 시선은 울룰루의 눈을 찌른 남자에게 꽂혀 있었다.
다음 표적은 너란 듯이.
푹! 푹! 푹! 푹!
인어공주 아쿠아의 현란한 창 솜씨가 작렬했다. 배신에 배신을 거듭한 그녀는 태연하게 울룰루를 공격했다.
다른 공주들이 이런 아쿠아 곁으로 몰려들었다.
“아쿠아! 남자 냄새를 맡았구나?”
“언니! 반갑지 않네요!”
“내 남자는 못 줘, 아쿠아.”
“침 흘리지 마. 저분은 내가 먼저 찜했어.”
“모두 반가워♬”
아쿠아를 견제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받아주는 인어들도 답이 없긴 마찬가지였지만, 그게 원래 인어라는 종족이다.
멍청한 물고기 대가리들.
하지만 전투력마저 변변찮은 건 아니다.
그녀들의 미끌미끌한 피부는 정면에서 날아오는 화살도 빗겨나갈 정도로 미끄럽고, 꼬리지느러미는 자기보다 100레벨 높은 강적도 단숨에 죽일 만큼 강한 힘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 물의 가호까지!
물속에서 인어는 체력과 상처를 빠르게 회복한다.
촤아아아-
얼마 안 지나서 울룰루는 열흘짜리 폭우로 산화했다.
“......”
“......”
그 치열한 싸움과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멀찍이 후퇴해서 관전하고 있던 용사E와 잡것들은 울룰루의 빠른 퇴장에 절망했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녀석, 여기서 인생을 즐기고 있었군?”
종족 불문의 연애관을 자랑했던 흑화 선배의 후손답다고 할까. 울룰루의 눈을 찌른 남자의 정체는 후예A였다.
후예A가 직업 ‘용자’로 울룰루를 약하게 만든 것이리라.
그는 생선비린내 나는 인어공주들에게 둘러싸인 채 승리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리품으로 막대한 경험치를 흡수했다.
우리의 용사님은?
“용사님! 이제 어쩌실 생각인가요?”
“후, 후퇴해야지.”
성녀A의 질문을 받은 용사E는 도주를 선택했다.
완벽한 정답인 줄 알았던 서술형 문제를 틀린 초등학생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했다.
‘용자라니! 뭐, 저딴 사기 직업이 다 있어!’
직업을 탓하던 용사E는 이대로 성왕국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성녀A가 ‘호수 방어선이 무너진 책임을 지세요.’라고 말하면서 발목을 잡는 바람에 떠날 수 없었다.
그 결말은?
“더, 더는 못 해….”
참치 떼처럼 몰려오는 인어들을 성검 하나로 전부 상대하던 용사E는 치열한 접전 끝에 심장마비로 요절했다.
*
내가 회귀하는 건 아니지만, 용사가 죽으면 조종하던 더미도 덩달아 옥좌에서 재시작하기 때문에 별 차이 없다.
재시작하는 김에 다른 더미로 옮겨보자.
“흠….”
이젠 진짜 초짜를 제외하면 용사E처럼 유부남 알렉스를 회피하는 바람에 스마트폰 수급이 원활하지 않았다.
스마트폰도 충전기처럼 자체 생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반도체와 프로그램은 대장장이의 영역이 아니었다.
제작법을 찾을 때까지는 현재 수단을 고수할 수밖에.
나는 스마트폰을 확보한 더미들을 쓱 훑어봤다. 그리고 명예교사 특전을 활용해서 용사들의 위치와 생김새를 전부 확인했다.
흑인 여성, 백인 남성, 황인 남성, 백인 여성, 황인 여성….
외모만큼 국적과 인종도 다양했다.
그 대부분은 알렉스에게 수련을 명목으로 붙잡혀 있었지만, 요령 좋게 설득한 극소수가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나는 그 탈주자들을 더욱 세심히 살펴봤다.
“...어?”
“비겁한 남편. 무슨 일이야? 원수라도 본 얼굴인데.”
“맞아. 제대로 봤어.”
지구의 고등학교 동창생이었던 동정A를 발견했다.
용사 페스티벌 때 만났던 저 새끼가 지구로 돌아가서 이상한 소리를 해놓는 바람에 어머니가 나를 판타지 야만인 취급하신다.
그 원한은 우주만큼 넓고 깊다.
“가려고?”
“당연하지. 하지만 변장하진 않아.”
용사들을 몇 번 만나보고 안 사실인데, 능력치의 직업만 감추면 내가 마왕이란 사실을 몰랐다.
마왕의 얼굴을 본 적 없으니까.
현재, 지구에서는 장인어른을 포함한 대다수 악당의 얼굴이 잘 알려졌다. 미술을 전공했던 졸업생이 초상화를 그려 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내 얼굴을 본 용사는 지금까지 단 한 명뿐.
비겁한 마누라가 시스템을 조작해서 직업만 감춰주면 들킬 염려가 전혀 없다.
“헛! 강한수!”
“뭐야? 너잖아? 오랜만이다!”
나는 우연히 마주친 고등학교 친구란 형태로 그럴싸한 상황을 연출했다.
“...강한수.”
“왜?”
“내 이름은?”
“정말 반갑다, 친구야!”
“친한 척할 거면 이름부터 기억해둬!”
발끈하는 동정A는 예전이랑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자기가 불의 화신이라도 된 것처럼 붉게 물들인 머리카락, 재수 없게 생긴 얼굴, 갈비뼈가 보이는 마른 체형….
귀를 뾰족하게 바꾸고 머리카락을 녹색으로 물들이면 요정으로 오해받기 딱 좋은 외모였다.
“너는 여전히 졸업 못 했구나.”
“그건 내가 할 소리. 그보다, 너는 페스티벌 1위를 먹고 중등교육과정에 들어간 거 아니었어?”
예리한 질문.
나는 준비해둔 대답을 들려줬다.
“현장조사.”
“웬 현장조사?”
“초등학생의 생태계를 조사하는 숙제 때문에 초등학교로 잠시 내려왔지.”
“헐…. 중학생은 별 해괴한 걸 배우네.”
내가 그럴싸한 답안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중등교육과정에 대해 전혀 모르는 동정A는 순진하게 믿었다.
...왜? 그럴싸한 거 맞잖아?
“안녕하세요. 저는 강한수의 아내인 쏘시아라고 해요.”
나를 어이없다는 듯이 한 번 흘겨본 쏘시아가 자기소개했다. 내 아내란 자부심이 넘치는 명랑한 어조였다.
“수치심이겠지!”
“그래. 나의 마누라여.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긴 하는구나?”
“그 반대거든?”
“히히! 우리 조카는….”
“이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그런 우리를 동정A가 썩어가는 사과 같은 얼굴을 한 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나의 친구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
“어. 그것도 아주 많이.”
“뭔데?”
마왕의 성에 도달하기 전까지 개인 면담은 안 받지만, 학연을 이럴 때 안 쓰면 언제 쓰겠는가?
MAX급 마왕님께서 특별히 들어주겠다.
“어디서 이런 완벽한 아내를 얻은 거야? 강한수 주제에.”
이 새끼가 뭐래?
“어머! 친구분이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이놈- 제 남편은 복에 겨워서 모른다니까요?”
“사모님. 이 새끼는 옛날부터 그랬습니다.”
“옛날에는 어땠는데요?”
“말도 마세요. 아주 그냥…. 켁켁?!”
나는 친애와 우정을 담아서 친구의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에 팔을 두르며 어깨동무했다.
지난 과거는 우리의 우정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하고 싶은 질문도 있고.
“친구야! 라누벨은 어디에 팔아치웠어?”
“그, 그게….”
동정A가 두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대답을 머뭇거렸다.
나는 자애로운 어조로 달래듯 말했다.
“판타지 세계를 떠도는 어린 용사여.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을 버린 것은 절대 죄가 아님을 몰랑의 이름으로 인정하노라. 몰랑.”
“으으….”
“몰랑 앞에선 숨기는 게 없어야 해.”
“그건 무슨 사이비종교의 고해성사(告解聖事)야?”
어허! 사이비라니! 몰랑교는 유일한 진리이자 구원이오. 이 세계는 몰랑으로 시작하여 몰랑으로 끝날 것이다. 몰랑.
“얼른 말해봐.”
“...라누벨에게 고백했다가 차였어.”
“어허! 거짓말은 좋지 않다구, 친구. 아주 수치스러운 과거지만, 나도 1회차 때 라누벨에게 고백했다가 차인 적이 있어서 잘 알아. 하지만 그 정도로는 그년이 도망 안 쳐.”
“그, 그랬냐….”
굳이 더 들어볼 필요도 없었다.
동창A의 머릿속이 번뇌와 사념으로 가득했던 까닭이다.
‘라누벨에게 술을 잔뜩 먹인 후에 작업했다고 어떻게 말해!’
...안심해. 이미 네 영혼에게 들었다구, 친구.
귀여운 척하면서 술을 물처럼 퍼마시는 그 술고래를 취하게 할 의도였다면 100% 실패했을 것이다.
혈중알코올농도가 0.45를 넘어도 죽지 않았으니까.
그년은 사람이 아니다.
“라누벨은 무척 실망했다고 말한 후에 홀연히 떠났어.”
“힘내, 친구. 대단히 귀찮지만, 성실한 자네에게 몰랑의 가호가 함께하길 빌어줄게. 몰랑.”
“그러는 너는 사모님을 어떻게 만났냐?”
내 비겁한 마누라?
“내가 북대륙에서 마스터 몰랑의 위대함을 널리 전파하고 있을 때, 쏘시아가 내게 비겁한 가슴을 흔들면서 고백했어.”
“전혀 아니거든?! 날조는 적당히 하시지?!”
날조? 나는 날조한 적 없다. 날조가 ZZ등급이긴 하지만.
“...야. 강한수.”
“머뭇거리지 말고 말해봐, 친구.”
“나도 몰랑교에 입교하면 사모님처럼 근사한 여자친구가 생길까? 예전에 얼음공주에게 차이고부터 자신감을 잃었어….”
“물론이지. 그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몰랑하시거든.”
몰랑?
오늘도 마스터 몰랑은 몰랑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