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17회차] 용의 후예
“용자가 상당히 흔하네.”
강력한 직업일수록 희소성이 올라가야 하는데, 직업 ‘용자’는 그런 상업적인 상식을 무시하고 절찬리에 판매되는 느낌이다.
하긴, 그래야 현실답지.
그랜드-SSS급-울트라-제너럴-엠페러-레전드-슈퍼-히든클래스가 선착순 1명! 단 1명뿐!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후회!
...같은 식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젊은 시절의 흑화 선배는 내 상상 이상으로 본능에 충실했다.
우주에서 가장 충실하지 않을까?
대다수 동식물이 동족하고만 짝짓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흑화 선배는 포유류만이 아니라 파충류, 조류, 어류 등을 가리지 않고 고루 섭렵했다.
그 번식력은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유전됐다.
직업 ‘용자’와 함께.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동정A가 당황했다.
레벨과 근력 스킬만 믿고 무거운 철갑옷으로 무장한 이 친구는 꼼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평소에 근력운동 좀 해두지. 쯧쯧.
물론, 동정A의 상황을 전혀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용사의 특전은 경험치 500%.
남들보다 노력을 덜 해도 똑같은 등급에 오를 수 있다. 그런데 근육이 발달하려면 한계를 계속 두드리며 혹사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문제.
근력 스킬 등급이 높아질수록 순수한 근육보다 스킬 의존도가 높아진다. 그리고 이 시기는 남들보다 용사가 5배 일찍 찾아온다. 아니, 레벨 성장 속도도 5배란 걸 고려하면 이론상으로는 25배!
게임이 안 된다.
“친구. 여기서 죽지 말고 기다려.”
물론, 내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노력하는 자는 몰랑한 자를 절대 이길 수 없다.
가만히 숨만 쉬어도 운동하는 효과가 있는 내 근육은 100년 전에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으며, 망룡왕 뇌비우스를 포함한 여러 종족의 우수한 근육조직을 참고하여 재구성했다.
이것이 진화.
이것이 혁신.
이것이 몰랑!
지구의 ‘다윈의 진화론’은 증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가 주창한 진화는 아무리 짧아도 수천 년에 걸쳐 천천히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몰랑의 진화론’은 다르다.
위대한 존재의 가르침만 이해하면 순식간이다.
이 얼마나 효율적인 진화란 말인가!
“...비겁한 남편. 나는 다윈이 누군지 모르지만, 슬라임보다는 훌륭한 분이라고 장담할 수 있어.”
“그래. 네가 정말 몰라서 그래.”
스르륵.
나는 진화의 결정체인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생성했다. 그리고 무너져내린 대장간 벽을 통해서 밖으로 나왔다.
친애하는 전우 뇌비우스의 아내와 자식들을 찾는다고 두리번거릴 필요는 없었다.
바로 코앞에서 싸우고 있었으니까.
퍼벅!
퍽!
전투는 용(龍)의 싸움이란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소박했다.
1레벨로 하락하며 스킬 대부분이 봉인된 상태에서, 용이 아닌 나약한 인간의 형태를 고집한 탓이다.
그러나 완전한 인간의 모습은 아니었다.
▷종족: 그린 드래고니안
▷레벨: 1
▷직업: 녹왕(정글→가호↑)
▷스킬: 부활SSS 영생SS 회복SS 재생SS 용린SS…
▷상태: 행복, 변신, 결속, 용갑
성룡왕의 피부는 녹색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부분부분 두툼한 칠흑색 비늘을 갑옷처럼 걸쳤다.
마무리는 칠흑색 뿔투구.
유일하게 녹색 비늘로 덮이지 않은 인간적인 얼굴과 녹색의 긴 머리카락을 철저하게 보호했다.
“꽤 실용적으로 변했네.”
방어력 0짜리 패션밖에 모르는 노출증 환자인 줄 알았는데, 결혼하고 지켜야 할 아이들이 생기면서 타협점을 찾은 것 같았다.
가장 신경 쓰이는 점은 칠흑색 갑옷.
저건 몇 번을 다시 봐도 뇌비우스의 비늘이 틀림없었다.
녹색 용에게 검은색 비늘이라?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녀와 뇌비우스의 상태에 표시된 ‘결속’이 어떤 식으로 작용한 것 같았다.
그리고 투구.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구미가 당겼다.
왜냐하면, 나는 뇌비우스에게 받은 칠흑색 용린으로 몸을 감싸면 무조건 탈모가 오기 때문이다!
“포기하세요, 용자의 후예여.”
성룡왕이 상대를 바라보며 묵직하게 말했다. 그녀는 용인 형태로 완전무장하긴 했지만, 제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싸우는 건, 그녀의 두 아이였다.
“엄마를 괴롭히지 마!”
“당신은 나쁜 누나입니다.”
녹색 소녀와 검은색 소년의 공격은 매우 서툴렀다. 전투경험이 매우 부족하다는 방증이었다.
반면에 상대는 전문싸움꾼이었다.
▷종족: 하프 드래곤
▷레벨: 1
▷직업: 용자(전원=1레벨)
▷스킬: 섬광SS 변신SS 반사S 검술S 마법S 마력S 민첩S 강타S 암살S 질주S 둔기S 반격S 매력S 습격S 격투A 사냥A 오만A 궁술A 내공A 기력A 마술A 방어A 우정A 내성A 면역A 회복A 광속A 거래A 압박A 학살A 매복A 축복A 은신A 사랑A 창술A 독살A 제조A 투창A 통감A 집중A 명령A 환술A 기만A 방술A 연금A 매혹A 오감A 채집A 낚시A 호감A 회피B…
▷상태: 변신, 축복, 강화, 물약
전투계열 스킬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균형 잡힌 능력치라고 보긴 어려웠다. 스킬 상위권에 공격계열만 있고, 방어계열은 아래쪽에 깔렸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몇 개 되지 않았다.
일격필살만 노리는 암살자 같기도 하고, 약자만 노리는 사냥꾼 같기도 했다. 어쩌면 둘 다이거나.
“이 괴물들이…!”
별처럼 반짝반짝한 눈부신 금발을 제외하면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여성 용병이었다.
복장은 평범한 갈색 가죽옷.
하지만 그녀는 양손에 황금색 건틀릿을 착용하고, 황금색 해머를 장난감처럼 휘두르면서 평범한 인간이 아님을, 황금색 용의 피가 몸속에 흐른다고 광고했다.
그리고 딱 거기까지였다.
퍽, 퍼억-!
뇌비우스의 두 새끼용은 둔기로 몇 번을 처맞아도 오뚜기처럼 벌떡벌떡 일어나서 다시 돌진했다.
아무리 심각한 부상도 순식간에 회복됐다. 그리고 치명상을 넘어서서 죽음에 이르면….
“힘내렴.”
톡-
뒤편에서 관전하던 성룡왕이 지팡이 끝으로 대지를 가볍게 찍고, 언제 죽었냐는 듯이 태연하게 부활했다.
“좀 죽어! 죽으란 말이야! 이 괴물 새끼들아!”
다 큰 처자가 어린이들을 상대로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하지만 그 기분을 잘 안다.
“나도 진짜 돌아버리는 줄 알았지.”
흑화 선배의 뒤편에서 끊임없이 회복시키는 ‘최초의 성녀’ 때문에 싸움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물론, 끝은 있었다.
전장이 됐던 흑화 선배의 집이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투 도중에 선배의 집에서 쫓겨난 것이고.
“저는 괴물이 아니에요. 그리고 언니나 죽으세요.”
“히스테릭 그만 부리고 누나나 죽으십시오.”
두 아이는 부친에게 물려받은 사기적인 유전자로 부상과 체력을 빠르게 회복하고, 회복이 힘든 치명상과 죽음에 이르더라도 모친의 사기적인 능력으로 되살아났다.
반면, 황금색 용은 점점 지쳐갔다.
“흠. 내가 나설 필요도 없겠네.”
이 가족은 너무 강했다.
심지어 최종보스라고 할 수 있는 가장(家長) 뇌비우스는 아직 깨어나지도 않았다.
“이익-! 이 괴물들! 두고 보자! 다음에는 반드- 꺄읔?!”
“벌써 다음이야, 똥색 아가씨.”
황금색 용의 종족특성인 ‘빛’으로 빠르게 도망치려는 용병의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가 우연히 내 손아귀에 붙잡혔다.
어머나! 세상에 이런 우연이?
“마, 마, 마왕-?!”
새파랗게 질린 똥색 아가씨가 외쳤다.
정확히 나를 바라보면서.
그래서 나는 고개만 살짝 뒤로 돌려서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어디에도 장인어른은 없었다.
나는 곧장 ‘창조신 판타지시아’에게 따졌다.
“비겁한 마누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내가 공명정대한 MAX급 마왕이란 사실을, 이 똥색 날도마뱀이 어떻게 눈치챈 거야?
“그, 글쎄? 프로그램은 정상인데….”
나도 내 직업이 ‘선지자’로 보이긴 했다.
“확실해?”
“...조금 전까지는 확신했었어.”
“지금은 못 한다는 소리네. 예산과 시간은 충분했던 것 같은데. 비겁한 마누라. 변명해보시지?”
“좀 닥쳐봐. 나도 원인을 몰라서 머리 아프니까.”
자존심 상한 쏘시아는 놔두고, 당사자에게 물어보기로 할까?
그런데 내가 부탁할 필요도 없었다. 똥색 아가씨가 벌벌 떨며 고백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들려주신 옛날이야기 그대로야. 악몽도 도망칠 흉악한 날개. 그렇게 추상적으로 설명해주시면 어떻게 아느냐고 웃었었는데…. 이젠 알겠어. 어머니가 완벽하게 설명해주셨다는 걸.”
“내 날개가 왜?”
이건 흉악한 게 아니다.
악의 무리를 응징하기 위해 효율적으로 진화한 이상적인 형태다.
“...비겁한 남편. 이건 내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너의 날개가 너무 효율적이라서 들킨 것 같아.”
“거참! 한 방 먹었네.”
나보다 날개가 더 유명할 줄은 미처 몰랐다.
“마약마왕. 굳이 누군가에게 듣지 않더라도, 네 날개를 보면 누구든 마왕부터 떠올릴 거다. 너의 흉흉한 날개는 고귀한 나의 후광으로도 상쇄가 안 돼.”
“졸개A. 그건 편견이다.”
무기는 어디서 어떻게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
대전제) 나는 정의롭다.
소전제) 날개는 내 일부다.
결론) 날개는 정의롭다.
그렇기에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인 것이다.
물론, 사악한 존재에게는 악몽보다 무서운 날개로 보이겠지!
“와아! 진짜 멋져요!”
“날개가 정말 부럽습니다.”
친애하는 전우 뇌비우스의 두 아이가 커다란 두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면서 감탄했다.
총명한 아이들이라 보는 눈이 있군!
내 날개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것은 선량한 존재란 뜻이다.
반면,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보고 겁에 질린 사악한 아가씨. 그 사악함을 당장 정화해주고 싶지만, 이대로 고통스럽게 죽어버리면 내 상황이 난처해져. 이해했지?”
똥색 아가씨가 “마왕이다!”라고 외치는 바람에 들키게 생겼다. 이건 본인밖에 수습할 수 없다.
똥색 아가씨? 네 똥은 네가 치워.
“흥! 그런 뻔한 협박에 굴복…. 어?”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예쁘더라고. 용뼈라서 그런가? 그래서 나도 모르게 손이…. 하하!”
“......”
“저기, 똥색 아가씨. 무슨 말이라도 해봐. 혹시…. 척추 처음 봐? 아! 자기 척추를 보긴 처음일 수도 있겠네. 한 번 만져볼래?”
“꺄아아아~?!”
*
예기치 못한 위기와 시련이 있었지만, 공명정대한 MAX급 마왕님의 활약으로 사건은 무사히 마무리됐다.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소란을 일으켜서 정말 죄송합니다! 마왕을 봤다고 거짓말해서 죄송합니다! 이, 이유요? 그건…. 관심받고 싶어서 그랬어요. 용병들이 자기 몸값 올리려고 종종 하는…. 예? 생긴 건 멀쩡해서 죄송합니다….”
똥색 아가씨가 무릎 꿇고 사죄했다.
그리고 직업 용자의 효과가 종료되면서 레벨을 회복한 B급 용사님이 우리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오는 게 보였다.
쯧쯧. 너무 늦었다구, 친구.
“한수야! 어떻게 됐어?!”
“소개할게. 너의 동료가 되어줄 똥색 아가씨야.”
이건 내 계획이 아니다.
내가 MAX급 마왕님이란 사실을 또 소문내지 못하도록, 이 아가씨를 깔끔히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성룡왕이 ‘옛 친우의 딸입니다. 선처를 부탁드려요.’라고 애원하는 바람에 포기했다.
대신, 옆에 감시자를 붙여두기로 했다.
“...뭐?”
동정A라고….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에게 차인 한심한 인간 수컷이다.
“설명이 더 필요해? 환불할까?”
“아, 아니야! 설명서는 대충 읽는 게 예의지! 하하! 갑자기 애인이 생긴다는 말에 얼떨떨해서 그래! 몰랑교여! 영원하라~! 몰랑! 몰랑!”
애인이 아니라 동료다만….
동정A의 신앙 스킬이 또 급상승했다.
“안녕하세요, 용사님. 저는 황룡왕(黃龍王) 글라디시아 님께서 유희 중에 낳은 사생아입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인간이셨기 때문에 혼혈인 저는 용으로 변신하진 못합니다. 대신, 용자셨던 아버지의 힘을 계승했어요.”
“아…. 반갑습니다. 저는 용사 피코라고 합니다.”
똥색 아가씨의 지루한 자기소개를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경청한 동정A가 짧게 답했다.
옆에서 듣는 내가 민망할 정도다.
이봐, 친구. 이름 말고 내세울 거 없어?
심지어 그 이름도 무식한 판타지 원주민들이 기억하기 쉽도록 지은 가명(假名)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쏘시아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왜?
“비겁한 남편. 그럴싸한 자기소개서를 만들려고 멀쩡히 잘 살아계신 부모님을 죽일 순 없잖아.”
“누가 죽이래?”
나는 가족 이야기로만 1시간 동안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어머니: 아들. 동생 좀 본받아.
⤷아들: 2살짜리 꼬맹이가 어쨌는데요?
⤷어머니: 엄청 의젓해. 울지도 않고 대소변도 가리고 동네 사람들에게 인기 폭발이야.
⤷아들: 이 아들도 여기선 존경받는 용사입니다.
⤷어머니: 일상생활 가능하니? ^^
...어머니를 주제로 10시간 넘게 말할 자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