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17회차] 사랑의 힘!
용사 동정A와 위대한 MAX급 선지자, 잡것들은 예정대로 북대륙을 가기 위해 중앙대륙 북부의 신성제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여정은 시작부터 매우 험난했다.
대도시마다 있는 마탑에는 공간이동 마법진이란 훌륭한 교통수단이 존재하지만, 용사님의 평판이 좋지 못해서 ‘신성제국 마탑’으로부터 입국을 거부당한 탓이다.
이건 참으로 생소한 경험이었다.
세상을 구할 용사님에게 입국허가가 안 떨어지다니?
내 동료들의 활약으로 평판이 썩 좋지 못했던 1회차 때도 경험해보지 못한 푸대접이었다.
물론, 내가 아닌 동정A가 겪는 상황이었지만, 동행 중인 나도 함께 거부당했으니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친구. 평소에 잘 좀 하지 그랬어?”
성룡왕이 준 징표 덕분에 비싼 공간이동 마법진도 공짜로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목적지에서 입국을 거부하면 방법이 없다.
공간이동 마법진은 일방통행이 아니라 상호작용을 통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이동한다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입국이 제한되는 경우는 은근히 많다.
범죄자, 지명수배자, 얼굴을 가린 자, 신분이 불확실한 자, 경력 5년 미만의 용병, 허가받지 않은 노예, 출국이 금지된 자….
그리고 너무나 당연한 얘기겠지만, 적대국 출신이거나 이주민은 어떤 경우에도 안 된다.
“어째서 거부된 건가요?”
억울했던 용사님은, 젊은 제자의 예쁜 다리를 바라보며 심연을 탐구 중인 마탑의 마법사에게 질문했다.
연구를 방해받은 마법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
“신성제국에서 용사님을 신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 제가 뭘 잘못했다고….”
“아무것도 안 한 것도 잘못입니다.”
“......”
업보E의 효과였다.
만두 왕국은 그나마 ‘소환한 나라’여서 괜찮았지만, 다른 나라는 그렇지 않았다.
용사의 출신이 만두 왕국인 셈이니까.
아니, 원래는 그렇다고 해도 입국심사에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평판의 감소는 용사의 신용도를 떨어트렸다.
쉽게 말해,
공간이동 마법진에서 튀어나온 용사가 마탑에서 칼부림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이유로 입국이 거부됐다.
“걸어가는 수밖에 없겠네. 평판도 올리면서.”
모든 모험은 공간이동 마법과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로 해결해왔던 내 입에서 이 말이 나올 날이 올 줄이야!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란 말이 정말이었다.
“...저기, 비겁한 남편.”
“왜? 비겁한 마누라.”
“가업을 물려받은 이후부터 더 용사다워진 것 같아. 내 기분 탓인지도 모르지만.”
“어. 기분 탓.”
나는 언제나 한결같이 정의로웠다.
쏘시아의 말처럼, 마왕이 됐다고 더 용사다워지진 않았다.
용사다워지긴커녕 어려운 원주민이 보여도 ‘내 일이 아니니까.’라는 생각으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 용사답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누가 좀 도와주세요…!”
“용사야. 당장 뛰어가서 해결해.”
“나는 지금 남 도울 기분이 아니- 컥?!”
“도움을 요청하는 아주머니. 평판이 저질인 용사 1인분 갑니다!”
“으아아아~?!”
나는 동정A의 요추(腰椎) 4번과 5번 사이를 힘껏 걷어찼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B급 용사님은 도움을 요청하는 원주민 앞에 정확히 착지.
평판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마왕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경하드리옵니다.”
인간사회에 숨어든 악마를 호출했다.
“이 도시에 상주하는 모든 악마와 추종자들은 지금부터 마왕의 영토를 넓히는 작업을 시작하라. 시민의 청원을 들어주면서 우매한 인간들의 호감을 쌓고, 용사에 대한 안 좋은 편견을 심어줘라. 또한, 저기서 허리 붙잡고 끙끙대는 용사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뺑뺑이를 돌리도록.”
“뺑뺑이라 하시면….”
내가 너무 전문용어를 쓴 모양이다.
“쉽게 말해, 땅속에 떨어트린 황금송아지 좀 찾아달라고 용사에게 부탁해라. 그러면 용사가 황금송아지를 찾는다고 여기저기 삽질하며 시간을 허비하겠지.”
“오오! 참으로 명안이시옵니다!”
“당장 시행하라.”
“반드시 이 도시를 마왕님께 바치겠사옵니다.”
악마가 다시 인간사회에 숨어들었다.
그리고 우리의 용사님은?
“한수야! 내 말 좀 들어봐!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숲에 떨어트린 붉은색 리본을 찾아달라는 소녀가 제정신으로 보여? 심지어 오늘 안에 찾아달라는 시간제한까지 걸었어!”
“쯧쯧. 한심하긴.”
“내가? 소녀가 미친 게 아니라?”
이 친구는 경력을 똥구멍으로 먹은 듯했다.
“의류점에서 붉은색 리본 하나를 구매해.”
“...어?”
“소녀의 주변인들에게 물어보면 리본을 어디서 만들었고,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잖아.”
“하지만 추억이 깃든….”
“바보냐? 이게 쓰던 리본인지 아닌지 소녀가 어떻게 구분해? 구매한 후에 서너 번 밟아서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줘봐. 절대로 구분 못 할 테니까.”
“......”
“아직도 할 말 남았냐?”
“...중학생은 확실히 다르구나. 대단해.”
감탄한 동정A가 다시 평판 작업에 돌입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B급 용사님의 ‘퀘스트 아이템 바꿔치기’는 실패로 돌아갔다.
붉은색 리본에 칼자국이 없었던 탓이다.
리본의 특징을 좀 더 주도면밀하게 조사하지 않은 본인 잘못이니 누굴 탓하겠는가?
그동안 나도 놀고 있지 않았다.
대장장이 천사가 만든 비데를 도시의 공용화장실에 설치한 후, 무식한 판타지 야만인들을 대상으로 운행시험을 해봤다.
“너무나 굉장해요!”
“이건 진짜 혁명입니다!”
“써보고 깜짝 놀랐어요.”
“정말 편리하네요.”
평가는 내 예상대로 대단히 좋았다.
아름다운 고향별 지구의 히트상품이니 어련할까!
하지만 기술적인 문제로 대량생산이 어렵다는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엉덩이를 향해 물줄기를 분사한다.
이게 말은 쉬운데, 구현해내려면 수세식 변기보다 구조가 훨씬 복잡해진다.
차갑지 않도록 온수로 하려면 또….
대량생산은 꿈도 못 꾼다.
게다가,
“비겁한 마왕님. 회귀하면 어차피 초기화될 텐데, 너무 고민하는 거 아니야?”
쏘시아가 살갑게 눈웃음 지으며 물었다.
“그게 가장 큰 문제네. 용사가 죽어서 회귀해버리면 비데를 보급해도 의미가 없어져.”
“하지만 네 마음은 잘 알겠어.”
“내 마음?”
들킨 건가?
갑자기 친한 척하는 비겁한 아내의 기행을 의심하고 있었다. 뭘 노리는 거냐.
“완전히 틀렸거든?! 판타지아 원주민들에게 잘해주는 네가 보기 좋았을 뿐이야.”
“잘해주긴 개뿔.”
용사들의 꿈과 희망을 짓밟고 절망에 빠트리기 위해 원주민들을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위선이오, 기만이다.
“흐응~ 그렇구나. 아주 사악한 마왕님이네~”
“...웃지 마라. 기분 나쁘다.”
대량생산이 힘든 비데는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마왕의 성에만 설치하기로 했다.
설계도만 있으면 모든 차원에 하나씩은 자체생산이 가능하니까.
마왕의 성을 방문한 용사들을 위한 서비스다.
“용사는 꺼져라!”
“우리 도시에 얼씬도 하지 마!”
“실망이에요, 용사님.”
“우우! 용사는 물러나라! 우우!”
평판 작업을 시작한 동정A는 가는 도시와 마을마다 실패하고 쫓겨나기를 반복했다.
최근에는 멀리 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문전박대까지 당했다. 돈을 준다고 해도 여관에서 안 받아주는 황당한 상황.
내일부터는 노숙해야 할지도 모르겠는걸?
함께 모험 중인 B급 용사님만이 아니다.
자주 죽어서 스킬 업보가 벌써 D등급까지 올라간 용사들의 상태가 대체로 동정A랑 비슷비슷했다.
▷종류: 스킬
▷명칭: 업보
▷등급: D
▷C: 회귀할 때마다 신뢰가 감소한다.
▷D: 회귀할 때마다 호감이 감소한다.
▷E: 회귀할 때마다 명성이 감소한다.
▷F: 회귀할 때마다 평판이 감소한다.
그나마 아직은 공간이동 마법진을 이용한 입국만 금지된 것이다.
육로를 이용해서 국경을 넘는 것까진 제한하지 않았다. 하지만 업보 스킬이 C등급이 되면 그마저도 힘들지 않을까?
신뢰를 못 받으니 말이다.
“다 때려치우고 귀농하고 싶어….”
“힘내라구, 친구!”
업보E에 머무는 동정A가 벌써 민심을 잃고 헤매는 원인은 내가 개입한 탓이다.
겉보기에는 하는 일마다 실패하는 무능력자로 보이지만, 동정A는 사회부적응자치고는 꽤 잘하고 있는 편이다.
“힘내세요, 용사님.”
똥색 아가씨가 위로해줄 정도로 그의 신세는 처량했다.
그녀도 용사의 동료로서 함께 고생한 탓일까? 동정A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빠른 속도로 정이 든 모양이다.
그렇게 보름쯤 여행했을 때였다.
언제나 3개였던 침낭이 2개로 줄어들었다. 일행의 숫자는 그대로인데, 사용하는 침낭의 숫자만 변한 것이다.
이때부터 동정A의 상태가 이상해졌다.
“제발 좀 꺼져라, 용사야!”
“하하! 내일 또 오겠습니다, 어르신!”
“절대로 오지 마!”
“아드님을 치료할 약초가 있을지도 모르는데요?”
“...흥! 마음대로 해라.”
평판을 조금씩 회복했다.
문전박대를 당해도 웃으며 물 흐르듯 넘어갔다. 그러다가 정말 힘들 때는 똥색 아가씨가 옆에서 응원해줬다.
“흠. 이건 내 예상 밖이네.”
귀농하기 직전이었던 동정A가 ‘사랑의 힘’으로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갈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심심풀이로 붙여준 똥색 아가씨랑 궁합이 잘 맞은 것이 변수였다.
그 궁합은 사냥에서도 빛을 발했다.
“Hiiiiii~?!”
쿠웅-!
동정A가 무더기로 덤벼도 절대 쓰러트릴 수 없는 초대형 몬스터, 히드라가 둘의 협공으로 허무하게 토벌됐다.
히드라(Hydra)
다 자라면 머리가 9개까지 생기는 도마뱀이다.
모든 머리를 동시에 베지 않으면 금방 재생되는 탓에 쓰러트리기가 매우 까다로운 몬스터.
하지만 직업 ‘용자’는 더욱 사기였다.
레벨 하락으로 수수깡처럼 9개의 긴 목이 잘린 히드라는 뭔가 해보기도 전에 죽어버렸다.
똥색 아가씨가 히드라의 머리 8개를 베고, 마지막 1개를 동정A가 간신히 벴다.
의도된 팀플레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직업 ‘용사’가 극대화됐다.
496레벨→999레벨
히드라의 경험치를 흡수하고 단숨에 999레벨을 돌파한 동정A.
이때부터 학살이 시작됐다.
강한 몬스터를 마주치면 ‘용자’가 약화해서 처치하고, 약한 몬스터는 ‘용사’가 압도적인 레벨로 압살해버렸다.
“저건…. 확실히 위협적이군.”
용사와 용자의 콤비는 이론상으론 막을 방법이 없었다. 서로의 엉덩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이라서 더욱.
대책이 필요해 보였다.
“한수야. 정말 미안하다.”
신성제국의 수도에 도착한 동정A가 사과하기 전까진 말이다.
“갑자기 뭐가 미안한데?”
“피코의 모험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
피코가 누구인지 한참 동안 고민한 끝에 ‘용사의 이름’이라는 걸 깨달은 나는 재차 질문했다.
“친구. 모험을 그만두는 이유가 뭐야?”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업보E와 MAX급 마왕님의 방해를 뚫고 서서히 물타기 시작했던 B급 용사가 뜬금없이 은퇴를 선언하다니?
그 원인을 파악해두면 다른 용사에게도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동정A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녀가 임신했어.”
“그녀라고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아냐?”
“네가 똥색 아가씨라고 부르는 동료- 아니, 내 목숨보다 소중한 여자. 그녀가 내 아이를 가졌어.”
“아하!”
비열한 사랑의 힘은 유통기한이 매우 짧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