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17회차] 은퇴
▶난감: 피코 생도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업보 시스템이 추가되면서 생도들의 은퇴가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어요. 성격이 삐뚤어지면서 악당보다 더한 악귀로 변한 자들도 있답니다!
세세한 설명 고마워! 예쁘고 똑똑한 교생 아가씨!
용사들은 99.999%가 사회부적응자들이다. 지구의 가정과 학교에서 ‘못난이’ 소리를 듣고 자랐다.
그런 녀석들을 납치해서 용사로 키워내려면 ‘우쭈쭈!’ 달래면서 항상 칭찬과 응원만 해줘야 한다.
나는 동정A가 유부남A로 성장하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기 때문에 잘 안다.
모든 판타지 원주민이 그를 외면하고 멸시할 때, 똥색 아가씨가 포기하지 말라면서 ‘우쭈쭈’ 해줬다.
“한수야. 나는 앞으로 그녀를 위해 살기로 결심했어.”
“마왕은?”
“마왕이 쓰러지면 이 세상도 끝나버리잖아. 마왕이 먼저 야욕을 드러내기 전까진 봐줄 생각이야.”
“어, 그래.”
지금이라도 이 친구를 먼지로 만들어버릴까?
MAX급 마왕님을 호구로 아는 B급 용사를 참교육시킬 방법이 493가지쯤 떠올랐으나, 단념했다.
동정을 졸업하고 유부남A가 된 고등학교 동창의 변화를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교생 아가씨가 말하지 않았던가?
이 친구처럼 포기하고 은퇴한 용사가 많다고.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비겁한 남편. 빙빙 돌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축하한다고.”
“축하는 무슨.”
육아의 지옥에 온 걸 축하한다, 형제여!
“완전히 어린애네.”
쏘시아가 아까부터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축하해주라고 부추겼지만, 용사가 인류의 평화보다 가족을 선택했다는 건 변함없다.
명백한 직무유기(職務遺棄)!
하지만 그 결정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나도 같은 상황이면 동창이랑 똑같은 선택을 할 테니까.
가족의 안전과 행복이 최우선이다.
다만,
“아이라….”
너무 성급한 거 아닌가?
그래서 아까부터 똥색 아가씨가 불안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마왕이란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용사&용자 콤비가 내게 안 통한다는 것도.
“저…. 가도 될까요?”
똥색 아가씨의 조심스러운 질문.
그녀는 용서받는 조건으로 용사의 동료가 된 것이다.
나는 똥색 아가씨의 아랫배를 힐끔 쳐다봤다.
아직은 뚜렷한 능력치로 표시되지 않았지만,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미세하게 느껴졌다.
“...몰랑의 가호가 함께하길.”
“아! 감사합니다!”
안도한 똥색 아가씨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처음에는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여자였는데, 지금은 한 생명을 지키려는 ‘예비 엄마’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유부남A를 돌아봤다.
그리고 질문했다.
“동정을 졸업한 친구. 마왕이나 네가 죽으면, 이 세계와 함께 아내와 아이도 사라진다는 건 알고 있지?”
“...알아.”
“그렇다면 다행이고.”
용사 유부남A는 체크메이트다.
아이가 생긴 시점부터 마왕을 토벌하기란 불가능해졌으니까.
어디 그뿐이랴?
내 더미가 자살한다고 협박하면 유부남A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나는 똥색 신부에게 정의로운 용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덕담을 날려줬다.
“남편에게 계속 사랑받는 아내가 되도록. 죽기 싫다면.”
“네! 네!”
쏘시아가 또 귀찮게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지만, 무시했다.
이건 사실이니까.
가족을 향한 애정이 식은 유부남A가 마왕을 쓰러트린다고 돌격하면 전부 끝이다.
“강한수. 너는 성격 좀 고쳐라. 누군가 네 아내를 죽인다고 말하면 기분 좋겠어?”
아무것도 모르는 유부남A는 헛소리를 내뱉었다.
나는 시원하게 답해줬다.
“기분이 아주 좋지.”
“뭐-?!”
“누군가를 기분 좋게 죽일 수 있으니까.”
“......”
가족을 늘린다는 건 대단한 위험과 부담, 책임을 동반한다.
나는 검희와의 사이에서 아들 크리스가 생긴 이후에 교직원 일당에게 크게 당해봐서 잘 안다.
그래서 이 뒤부터 나는 ‘행운의 반지’를 항상 착용한다.
가족을 더 늘리지 않기 위해.
어머니가 ‘둘째’를 만드실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행복하라구, 친구.”
“강한수! 몰랑의 가호가 함께하길 빌어줄게! 몰랑!”
“그래. 너도 몰랑해라. 몰랑!”
마스터 몰랑이시여!
저 친구가 오랫동안 가출하지 않도록 굽어살펴주소서.
몰랑? 몰라아앙~
오늘도 마스터 몰랑은 솔로와 커플을 차별하지 않고 몰랑하셨다.
*
내가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용사들은 알아서 탈락했다.
회귀해도 초기화되지 않고 쌓이는 스킬 업보가 그만큼 치명적으로 적용했다는 의미.
그 결과, 초등교육과정은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초등학생들은 자주 회귀하니까.
특히, 처음 판타지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신출내기들은 아무리 주위에서 ‘우쭈쭈!’해줘도 잘 죽었다.
신출내기들이 몇 번 죽으면서 경험 좀 쌓였을 때는 이미 업보 등급이 높아져서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후였다.
▶소식: 강한수 생도님! 조만간 대책이 마련된다는 것 같아요. 업보 스킬을 지우지 않고 상쇄하는 스킬을 생도들에게 제공하는 방식이라고 얼핏 들었어요.
아주 고마워! 비밀 친구!
판타지아 교육장 제어권의 상당 부분이 쏘시아에게 넘어왔다.
그 탓에 업보 스킬을 지울 수 없음을 깨달은 교직원들은 ‘상쇄’라는 차선책을 선택한 것이리라.
교장이 어떤 식으로 용사들을 지원할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굉장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판타지아 세계는 ‘빛’만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니까.
지금처럼 빛과 어둠이 협력하지 않고 대립하면 할 수 있는 일들이 거의 없다.
“느긋하게 지켜보자고.”
“비겁한 남편. 여유만만하네? 상대는 최초의 천사인데.”
“나도 두 번째 마왕이다.”
장인어른이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지만, 은퇴한 최초의 마왕 페도나르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은 마왕 파르마몬의 시대!
차원의 모든 ‘어둠’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상반되는 ‘빛’을 대변하는 최초의 천사랑 정면승부를 벌이더라도 패배하지 않을 자신 있다.
“대신에 많은 걸 잃겠지.”
비겁한 마누라가 핀잔을 줬다.
“괜찮아. 굳이 안 싸우더라도 이대로만 흘러가면 내가 무조건 이겨.”
유부남A를 보고 확신했다.
용사들이 원주민들이랑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고 정이 들면, MAX급 마왕님을 토벌한다는 목표를 단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교육장 전체가 마비되면 내가 이기게 된다.
“어째서?”
“비겁한 마누라. 조금 전에 MAX급 남편님이 설명하실 때 뭘 들었냐?”
“무시했지.”
“어, 그래. 잘 들어. 마왕이 자살한다고 협박하면, 판타지아 대륙에 2세가 생긴 용사들은 무조건 항복할 수밖에 없어.”
“...어? 어어?!”
부활한 마왕의 토벌을 막으려고 애쓰는 용사!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현실성 없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깜짝: 어떻게 그걸 아셨어요? 강한수 생도님은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말씀하신 문제도 교직원 회의에서 거론됐어요. 정확한 원인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지만, 생도들의 결혼율과 정착률이 급증했다고요.
신성한 학당에서 학생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연애에 빠졌다.
교직원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일 터.
하지만 나는 이해한다.
학업이 너무 어려우면 스트레스가 폭발한 학생들이 삐뚤어지면서 딴생각을 품게 된다.
연애도 그중 하나다.
“네 경험담?”
“친구의 경험담이야.”
나는 어머니의 테니스라켓 아래에서 올곧게 성장한 모범생이었다.
유부남A는 정말로 은퇴했다.
똥색 아가씨랑 단둘이 오붓하게 살 집을 알아보고 있었다.
저러려고 신성제국에 온 게 아니었을 텐데….
“나는 멋지다고 생각해. 명예보다 사랑을 선택한 거잖아.”
“너, 로맨스는 작작 봐라.”
“안 봐.”
“허어! 비겁한 마누라야. 남편님 몰래 스마트폰으로 웹툰이랑 소설을 틈틈이 읽고 있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네가 가장 최근에 즐겨 읽는 작품도 잘 알지. 이 연애 실화냐?”
로맨스 소설: 이 연애 실화냐?
순정과 하렘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신(神)들의 사랑을 다루는 소설이라는 모양이다.
결말의 반전이 묘미라고….
“그, 그냥 심심풀이로 1화만 읽어볼 생각이었는데…. 앗?! 결말 얘기하지 마, 비겁한 남편! 스포일러 하면 평생 저주할 줄 알아!”
“안 해.”
자! 그러면 슬슬 다른 용사를 만나러 가보실까?
내가 떠나면 이 더미는 알아서 별장의 옥좌로 돌아갈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도, 도와주시오!”
귀티가 흐르는 사내가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듯 달리고 있었다.
어깨와 등에 화살이 꽂혀 있고, 사선으로 베인 윗옷 사이로 긴 상처와 멋진 복근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그 뒤편,
철그럭철그럭!
철컹철컹!
검은색 갑주를 걸친 흉흉한 기사들이 그 사내를 추적하고 있었다.
대체 누구길래?
▷종족: 휴먼
▷레벨: 485
▷직업: 황자(서열=신용↑)
▷스킬: 검술B 면역B 선동C
정치C 환심C…
▷상태: 부상, 출혈, 중독
황자였다.
황제의 아들.
판타지아 중앙대륙의 유일한 제국인 신성제국 수도에 다른 나라의 황자가 돌아다닐 리 없다.
그리고 구면이었다.
“황자1이잖아?”
“...너만 아는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 줄래?”
황자1.
다른 이름은 황태자.
신성제국의 지배자가 병사(病死)한 후, 귀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다음 황제가 되는 남자다.
황자1은 황제에 오르자마자 똑똑한 여동생, 황녀를 역모죄로 처형하기 위해 다수의 기사와 자객을 보낸다.
억울하냐?
절대 그렇지 않다.
실제로 황녀는 역모와 반란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황이 참 묘하네.”
적당히 똑똑하고 장남(長男)인 황태자는 황위 계승서열 1위다.
그런데 자국의 수도에서 사냥감처럼 도망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도와- 켁?!”
고민하지 말고 당사자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실례합니다. 어째서 도망치시는지 궁금해서 목을 잡게 된 나그네A인데요. 발목은 절대 잡지 않을 테니, 친절하게 가르쳐주십시오.”
“모, 모함을 당했소!”
너무나 추상적인 대답이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바이다.
“...보리스. 조용히 시켜.”
“네, 주인님.”
공공장소에서 눈치 없이 “마왕님을 뵙습니다!”라고 외치는 악마와 악마추종자가 없도록 감시하던 아름다운 정령이 내 부름에 응했다.
털썩.
철퍼덕.
철컹!
보리스는 압도적인 능력치로 추적해오던 기사들을 전부 침묵시켰다.
기계장치의 전원을 내리듯, 모든 기사에게 고요한 죽음을 선사했다.
“자…. 그러면.”
“켁켁!”
나는 정답게 황태자의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를 붙잡고, 자연스럽게 수도의 거리를 걸어가며 말했다.
“나보다 못생긴 황족 친구. 울지 말고 무슨 모함을 당했는지 차분히 이야기해봐.”
“모, 목부터…!”
“사소한 목은 신경 쓰지 말고.”
억울하게 모함을 당했는데 목이 대수인가?
“북대륙을 지배하는 몰랑교를 믿는 이단자로 몰렸소.”
“...이단이라고?”
어떻게 그런 끔찍한 폭언을?
“그렇소. 슬라임 사냥을 엄격히 금지하는 몰랑교의 교리들은, 유일한 신(神)의 자손인 라누베르크 가(家)가 다스리는 신성제국의 신권을 위협하기에 절대 용납할 수 없소.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제국의 다음 지배자가 될 제가 슬라임 따위를 신으로 모신다는 게 말이나 되는-”
우득.
열성적으로 설명하던 황태자의 목이 갑자기 부러졌다.
“오! 맙소사! 황자님! 원통하게 목숨을 잃은 당신의 복수는 몰랑교의 신실한 제1 사도 강한수가 꼭 이루어드리겠습니다.”
사이비교의 부당한 박해에 맞서서 진리를 전파할 때가 됐다!
“...남편. 양심 어디?”
“일어나라, 몰랑교도들이여!”
신성제국의 오늘 날씨는 날조로 화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