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18회차] 우에에엑!
용사 피오나는 프랑스 출신이다.
당연히 ‘피오나’는 그녀의 본명이 아니며, 아름다운 판타지 세계에서 새 인생을 산다는 의미로 새롭게 지은 이름이다.
슬라브와 라틴 혼혈인 그녀는 어릴 적부터 ‘인형 같다.’라는 칭찬을 들으며 자라왔다. 그러다가 중고등학교 때는 ‘영국 공주님에 버금간다.’라는 찬사를 들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녀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흥! 내가 영국 공주보다 예쁘다고 말한 게 어때서.”
“피오나 님. 영국 공주가 누구입니까?”
미남자의 물음에 피오나의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빅토리아라고…. 자기가 가장 잘났다고 착각하는 여자가 있어요.”
“대단히 오만한 여자로군요. 피오나 님이 계시는데 그런 말을 하다니.”
“에이~ 제가 뭘요~”
피오나는 마음에도 없는 겸손을 떨었다.
그러자 미남자는 여심(女心)을 살살 녹이는 중저음으로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줬다.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이들은 세계 평화가 아닌, 피오나 님을 위해 모인 영웅들입니다. 당신을 돕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그가 가리킨 피오나 주위에는 동료들이 바글바글했다.
하지만 여성은 오직 둘뿐. 용사 피오나와 성녀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전부 남성.
미소년부터 미중년까지 나이대와 외모, 표정, 복장, 직업 등이 전부 제각각이었다.
“고마워요, 비헬.”
피오나는 자신을 기분 좋게 해준 미남자에게 감사의 미소를 지었다.
“사실을 말한 것뿐입니다. 자! 가시지요, 용사님. 최종결전만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후후. 제가 앞장설게요.”
피오나는 마왕의 성을 바라봤다.
귀신에 홀린 기분이다.
마왕의 성에 도달하기가 이토록 힘들 줄은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4차 교육과정은 몸이 고달팠다.
식사량을 조절하지 않으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생리현상.
야외나 요강에 해결하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그 뒤처리는 세월이 흘러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피오나 용사님?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아! 미안해요. 지난 모험을 회상하느라….”
5차 교육과정은 몸이 편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수세식 변기가 판타지아 대륙 전역에 보급되면서 삶의 질이 급속도로 향상됐다.
‘수세식 변기를 보고 처음에는 정말 기뻐서 눈물마저 흘렸는데.’
그러나 죽고 깨달았다.
스킬 업보.
회귀할 때마다 등급이 올라가는 이 스킬 때문에 모험의 난이도가 갈수록 어려워진 탓이다.
회귀해도 남은 기억의 이점?
전혀 살릴 수 없었다.
평판이 내려가면 원주민들이 용사를 대하는 태도도 바뀌니까.
같은 상황에서 다른 결과가 나와버리니, 과거의 기억은 거의 도움이 안 됐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종족: 스페셜 휴먼
▷레벨: 999+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매력Z 검술Z 마법Z
회피SS 민첩S…
▷상태: 기대, 만족
피오나는 하나도 없었던 초월영역 스킬을 무려 3개나 만들었다.
상위등급 스킬을 몽땅 제물로 갈아 넣는 바람에 스킬 구성이 다소 불균형해지긴 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을 자신 있었다.
▷조언: 피오나 학생. 마왕을 절대 얕보면 안 됩니다. 오만은 자아가 없는 자들의 거만함이라고 했습니다. 마왕의 목을 벨 때까지 절대 방심하지 마세요.
“후후.”
피오나는 잔소리하는 도덕 선생님에게 미소로 회답했다.
마왕 파르마몬이 얼마나 강하든 그녀는 상관없었다.
회귀할 때마다 사라졌던 스킬들을 전부 돌려받았으니까.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매우 컸다.
피오나는 판타지 세계에서 80년을 보냈다.
여태 졸업하지 못한 이유는 회귀할 때마다 스킬이 초기화되면서 경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탓이다.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나는 80년 동안 모험했는걸♪”
도덕 선생님은 사랑과 우정을 실천하며 5년만 모험하면 어렵지 않게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무려 80년!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패배할 수가 없었다.
물론, 대비는 해놨다.
용사 피오나의 동료 중에 ‘용자’가 3명이나 있었다.
마왕이 예상보다 강하면 용자의 직업특성을 발동해서 1레벨로 하락시킨 후, 협공하면 된다.
“여기는 못 지나- 커억?!”
피오나는 겁도 없이 앞길을 가로막은 악마의 공격을 간단히 피하고 일격을 가했다.
상대의 직업은 대공.
마왕 다음으로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 ‘악마 대공’이었으나, 싸움이 되질 않았다.
“대충 견적이 나오네~”
피오나는 긴장이 탁 풀렸다.
지난 80년 동안 고생을 너무 많이 한 탓일까?
살짝 불안했었는데, 괜한 기우였던 모양이다.
마왕이 대공보다 살짝 더 강할 뿐이라면 자신의 상대가 안 될 테니까.
끼이익-
피오나는 성의 최상층 복도 끝에 있는 대문을 열고 당당히 진입했다.
드디어! 드디어!
그녀는 마왕을 토벌할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담아서 힘차게 정면을 향해 외쳤다.
“마왕 파르마몬! 용사 피오나의 손에 쓰러질 준비가 됐나요!”
“아아, 준비라면 물론.”
옥좌에 삐딱하게 앉아있던 마왕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
단지 일어섰을 뿐인데, 피오나는 척추가 얼어붙는 듯한 오한을 느꼈다.
어째서?
그녀는 습관적으로 적의 능력치를 확인했다.
▶종족: 유나이티드 스피릿 오브 판타지아
▷레벨: 999+
▷직업: 마왕(용사→레벨↓)
▷스킬: 마기Z 검술SSS 맷집SSS
내성SSS 회피SSS…
▷상태: 마검, 축복, 가호, 호부,
강화…
종족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타락한 용사라는 설정 때문일까?
그녀가 알던 ‘퍼스트 데몬’이랑 전혀 달랐다. 애초에 저 존재가 악마이긴 한 걸까?
레벨과 직업은 평범.
스킬 중에 Z등급이 있는 것을 본 피오나가 혀를 찼다.
‘초월영역 스킬이 하나도 없으면 도전하지 말라는 소리네.’
하지만 이젠 아니다.
피오나는 보유한 초월영역 스킬의 숫자에서 마왕을 압도했다.
스킬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녀 주위에는 동료들도 잔뜩 있었다.
반면에 마왕은 혼자. 아니, 그의 머리 위에 벌거벗은 꽃의 요정이 앉아있었다.
하지만 전투력은 변변찮았다.
“관찰은 끝났나?”
이것도 마왕이 타락한 용사란 설정 탓일까?
용사가 상대의 능력치를 살펴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피오나는 살짝 서둘렀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꼼꼼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본능이 속삭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태창의 효과들이 비정상적으로 좀 많았다.
그냥 넘어가긴 찜찜했던 용사 피오나는 ‘상세히 살펴보기’로 설정을 변경했다.
그리고는,
“우에에에엑~!”
낮에 먹은 것들을 전부 게워내기 시작했다.
“용사님?!”
“피오나 님?!”
놀란 동료들이 용사를 불렀지만, 양손으로 두 눈을 가린 그녀는 대답할 상황이 아니었다.
대신,
“이제야 끝난 모양이군.”
마왕 파르마몬이 빙그레 웃었다.
*
나는 오랜만에 1회차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본체는 이미 충분히 강하기에 체감이 덜했지만, Z등급 마기 하나로 버텨온 더미는 달랐다.
단순히 몇 배라고 계산하기 힘들 정도로 강해졌다.
비슷한 스킬끼리 중첩되고 상호보완하며 상승작용을 일으킨다는 점까지 고려해야 하니까.
▶종족: 유나이티드 스피릿 오브 판타지아
▷레벨: 999+
▷직업: 마왕(용사→레벨↓)
▷스킬: 마기Z 검술SSS 맷집SSS 내성SSS 회피SSS 몰살SSS 패기SSS 육감SSS 파동SSS 광기SSS 내공SSS 근력SSS 포박SSS 어둠SSS 사령SSS 민첩SSS 투기SSS 출혈SSS 오감SSS 색적SSS 위엄SSS 대피SSS 저항SSS 척살SSS 통치SSS 예지SSS 귀살SSS 권투SSS 역전SSS 포위SSS 검기SSS 학살SSS 낙법SSS 방패SSS 금강SSS 예측SSS 심판SSS 활기SSS 긍지SSS 강화SSS 격투SSS 청력SSS 체술SSS 유도SSS 영체SSS 처형SSS 불굴SSS 투쟁SSS 돌파SSS 체력SSS 격파SSS 폭식SSS 강타SSS 탐색SSS 회복SSS 저주SSS 면역SSS 번개SSS 위압SSS 바람SSS 분쇄SSS 용맹SSS 대지SSS 활로SSS 회전SSS 화염SSS 광휘SSS 감지SSS 가호SSS 견고SSS 질주SSS 협력SSS 호부SSS 은폐SSS 전쟁SSS 용살SSS 간호SSS 근성SSS 인내SSS 속박SSS 소수SSS 불변SSS 통감SSS 호흡SSS 집중SSS 각성SSS 봉인SSS 예시SSS 가속SSS 대응SSS 포효SSS 무효SSS 천명SSS 강골SSS 붕대SSS 도살SSS 천운SSS 문신SSS 기력SSS 대검SSS 반복SSS 함정SSS 관통SSS 독살SSS 전차SSS 휴식SSS 촉각SSS 관찰SSS 절단SSS 귀기SSS 활력SSS 해제SSS 선술SSS 천력SSS 약점SSS 궁술SSS 축복SSS 재생SSS 소형SSS 섬멸SSS 시력SSS 냉정SSS 철벽SSS 명중SSS 정신SSS 잠복SSS 투창SSS 도발SSS 노출SSS 각인SSS 수영SSS 봉합SSS 기백SSS 협박SSS 유인SSS 방어SSS 항마SSS 정복SSS 추적SSS 지력SSS 공포SSS 살인SSS 반격SSS 잠수SSS 탐지SSS 갈망SSS 지휘SSS 정력SSS 날조SSS 투시SSS 조합SSS 대비SSS 분노SSS 신속SSS 무공SSS 철퇴SSS 갑주SSS 둔기SSS 약자SSS 생존SSS 불운SSS 반전SSS 쌍수SSS 변칙SSS 최면SSS 용기SSS 폭풍SSS 쌍부SSS (중략) 철인SS…
▷상태: 마검, 축복, 가호, 소원, 호부, 강화, 기백, 문신, 각인, 천운, 보호, 초월, 증폭, 수호, 보험, 가속, 충전, 간호, 항마
이만큼 스킬을 다시 올리라고 하면 절대로 못 할 것이다.
판타지 세계의 모든 것들이 낯설고 두려웠던 1회차 때만큼 절박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특정 상황이나 환경, 약자일 때만 획득할 수 있는 스킬도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위로: 회귀하셨을 때 박탈감이 엄청나셨을 것 같아요.
위로해줘서 고마워, 몸도 마음도 예쁜 교생 아가씨!
하지만 나는 버틸 수 있었다.
회귀로 모든 걸 잃은 줄 알았던 내 머릿속에 마스터 몰랑의 가르침이 생생하게 남아있었으니까.
몰랑은 나의 등불이오.
몰랑은 나의 구원이오.
몰랑은 나의 샛별이오.
“자! 용사와 잡것들. 그대들은 무엇을 믿지? 사랑, 우정, 용기, 기적, 희망, 근성. 무엇이든 좋다. 그 믿음의 힘을 내게 증명해 보여라.”
“하아압”
“으라차차!”
“타핫!”
여전히 눈을 못 뜨고 헛구역질하는 용사는 내버려 두고, 잡것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돌격해왔다.
능력치를 볼 수 없더라도 자신보다 강한지 약한지 구분하는 안목을 키워둬야 하는데, 이들은 그동안 용사에게 너무 의존해온 것 같았다.
그 증거로, 용자가 있음에도 내 레벨은 가만히 놔뒀다.
“죽어라.”
털썩, 털썩, 털썩.
약 34개 스킬의 효과가 중첩된 내 위압과 살기를 견디지 못한 자들이 왼쪽 가슴을 부여잡으면서 픽픽 쓰러졌다.
사인은 심장마비.
정신이 나약하다는 증거다.
“그리고 나머지는….”
촤아아아-
마검(?) 뉴클리온에 깃든 약 196개 스킬의 효과가 중첩된 광역공격에 깔끔히 쓸려나갔다.
약해도 너무 약했다.
“너, 너무 강해…!”
“그러는 너희는 너무 약하군. 내 동료들도 너희만큼만 약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내 1회차 동료들은 강했다.
모험 도중에 많이 죽은 건 사실이지만, 그만큼 남은 자들이 강해졌기에 숫자는 무의미했다.
특히,
검희(劍姬)
요정왕(妖精王)
현자(賢者)
용병왕(傭兵王)
최후의 4인은 정말 강했다.
판타지아 북대륙, 중앙대륙, 남대륙에서 모집할 수 있는 3명의 성녀를 전부 잃고 ‘부활’이 막힌 악조건 속에서도 악착같이 살아남았으니 오죽할까?
그리고 이 4인의 방심을 틈타서 기습으로 아슬아슬하게 몰살시킨 용사님이 바로 나.
현재 이 모습.
종족 USF와 스킬 마기Z까지 고려하면 더 강하리라.
“선생님! 선생님! 말씀 좀 해보세요! 이건 얘기가 다르잖아요! 이 괴물을 어떻게 쓰러트리란 거예요?!”
다 죽고 혼자 남은 용사 아가씨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이라…?”
내가 아는 그 선생이려나?
“마왕님! 파르마몬 님! 선배님!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제가 잠시 미쳤던 모양이에요! 그러니 제발 한 번만 살려주세요! 업보가 더 쌓였다가는-”
서걱- 떼구르르.
눈물, 콧물, 침으로 범벅된 예쁜 머리통이 차가운 바닥을 굴렀다.
“미안. 후배 아가씨. 손님이 밀렸거든.”
“......”
약한 용사를 걸러주던 대공A가 동네북으로 전락한 탓이다.
그래서 별시답잖은 용사들까지 출입문을 빵빵 차대고 있었다.
“마약마왕. 얼른 일해라. 히히!”
“쩝.”
척추에 교훈을 새겨줄 틈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