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17회차] 등록
“비겁한 남편. 10년 동안 어떻게 살면 시스템으로 구현된 전투계열 스킬 중 대부분이 SSS등급일 수 있어?”
게임 운영자처럼 옥좌 뒤편에 ‘투명화’한 채 숨어있던 쏘시아가 모습을 드러내며 질문했다.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진짜 바보 같은 질문이군!”
부지런히 스킬 숙련도를 올렸다.
동료들이 과부를 양산한 기념 축하하는 파티를 열며 밤새 사랑과 우정을 쌓을 때, 나는 능력치를 보면서 체계적으로 수련했다.을
등급이 낮은 스킬들을 분류하고, 숙련도를 최단시간에 올릴 방법과 일정을 고민했다.
목표는 모든 스킬 SSS등급.
그 위에 MAX등급은 SSS등급이랑 스킬 효과가 똑같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부터 신경 쓰지 않았다.
MAX등급 위의 Z등급은 말할 것도 없고.
목적은 동료들보다 강해지는 것.
개개인의 전투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를 괴롭혀온 그들의 협공을 당해도 이길 수 있을 만큼 능력치 스킬을 올렸다.
“그게 가능해?”
“불가능할 이유라도?”
용사의 직업특성은 경험치 5배.
어릴 적부터 레벨과 스킬을 쌓은 동료들을 따라잡거나 대항력을 키우는데 평균 4년이 걸렸다.
위협적인 딜러였던 검희를 예로 들자면,
어릴 때부터 검술을 배운 그녀의 수련 시간은 용사력 10년을 기준으로 약 25년쯤 된다.
수련 기간: 25년
비슷한 재능과 환경이라고 가정했을 때, 내가 검희의 전투력을 따라잡기까지 5년이 걸린다는 뜻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너의 살인적인 재능 때문에?”
“아니.”
벌레도 못 죽이던 가녀린 고등학생에게 무슨 재능이 있겠는가?
“아! 알겠다! 마약마왕은 경험치가 안 되는 벌레 대신 몬스터를 학살하던 고등학생이었구나!”
얌전히 듣고 있던 최초의 정령이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했다.
“지혜를 총배설강으로 먹은 마약정령. 지구에는 몬스터가 없다.”
“거짓말은 나쁘다, 마약마왕.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지혜로운 최초의 정령을 속일 수 없어.”
“정 못 믿겠으면 지구에 계신 어머니께 스마트폰으로 물어 보…. 아니, 하지 말자. 절대로 좋은 소리 못 들을 거야.”
“하자! 꼭 하자! 히히히!”
“닥쳐!”
하여간 검희가 용사력 10년까지 약 25년 동안 수련만 한 건 아니다.
먹고, 싸고, 자고, 놀고….
경력은 25년이지만, 나태하고 방만했던 그녀의 실질적인 누적 훈련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다.
용사가 직업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2년 안에 검희의 전투력을 따라잡을 수 있다.
그리고 추월해서 압도하기까지 넉넉히 잡아서 총 3년.
“겨우 3년…?”
“이건 어디까지나 이론이고 실제로는 더 걸렸어. 동료들이 내 성장을 방해하고 견제했거든.”
용사살해미수범을 경험치로 안 바꾸고 풀어주거나?
힘들게 수집한 전리품을 원주인이라고 주장하는 날강도들에게 공짜로 넘겨줬다.
어디 그뿐이랴!
제멋대로 날뛴 동료들의 똥을 치우는 건 언제나 내 몫이었다.
안 치울 수가 없었다.
정의로운 용사님마저 외면하면, 이 정신병자들은 “오늘도 보람찬 하루였어! 그렇지, 얘들아?” 같은 망언을 지껄이며 뒤도 안 돌아보고 그냥 떠나니까.
“...그 애들이 앞만 보는 것은 지난 과거를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야.”
“말이야 좋지.”
판타지 원주민들은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 덕분에 행복해요!”라고 말한다.
왜냐?
해맑게 웃으며 장난스럽게 사람을 학살하는 살인마들이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비겁한 남편. 그건 네 오해 아니야?”
“너도 내가 무섭다며?”
“......”
“힘없는 원주민들은 더 심하지.”
내 목표는 전투계열 스킬들의 숙련도만 올리는 거였다.
하지만 동료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불필요한 스킬들까지 올리게 됐다.
정치, 경제, 토목, 위생, 복지, 종교, 예술, 교육….
생산계열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의 스킬이 SS등급.
모험 뒷수습에 시간을 많이 빼앗기는 바람에 전투계열 스킬을 집중적으로 성장시키지 못했다.
“미쳤네.”
“어허! 너에게 과분한 MAX급 남편님에게 미쳤다니!”
“너는…. 아니, 미친 게 맞아.”
근거 없는 억지를 부린 쏘시아가 비겁한 가슴을 내 등에 바짝 맞대고는 양팔을 내 허리에 둘렀다.
급기야 머리마저 내 어깨에 기댄다.
“...너, 뭐하냐?”
“방황하던 영혼이 치유되는 기분이지 않아?”
“대전제부터 틀렸어. 내 영혼은 매우 건강해.”
“강한 척하긴.”
“너도 대화가 안 되네!”
최초의 정령에게만 뭐라고 할 게 아니었다.
▶빼꼼: 강한수 생도님이 미쳤다는 의견에 동의해요.
컥! 교생 아가씨가 여린 내 가슴에 말뚝을 박다니!
너무나 슬프다.
오늘 밤에는 핫팩을 눈물로 적실 것 같다.
▶깜짝: 일에 너무 몰두하신다는 의미였어요! 생도들이 먼지 같아서 마음에 안 드시겠지만, 이젠 용사가 아닌 마왕이시잖아요~ 지난 과업을 내려놓고 자신을 아껴주세요. 모두가 안 된다고 말해도 제가 허락할게요.
...교생 아가씨가 내 인생을 책임진다고 약속했다.
감동적인 날이군!
약혼기념일로 삼아야겠다.
▶당황: 의미전달이 잘못된 것 같아요! 그리고 약혼이라니…. 당치도 않아요. 강한수 생도님처럼 훌륭한 분께는 아름답고 현숙한 쏘시아 원로님이 어울리세요. 저 같은 일개 교생은 그분의 발끝에도 못 미쳐요.
요즘 발끝은 막강한 모양이네!
“...비겁한 남편. 순진한 교생을 꼬드겨서 나처럼 불행하게 만들 계획이라면 당장 포기해. 내가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우리 조카는 질투도 귀여워.”
“이모님. 제 표정을 보세요. 진지하게 하는 경고에요.”
“아닌 척해서 더 귀여워~”
“아, 진짜-!”
“우히히히히!”
동료들의 방해와 견제로 성장이 늦어진 나는 무려 10년이나 걸렸다.
그래도 운이 좋았다.
성녀와 검왕이 ‘사고’로 죽지 않았다면 엄두도 못 냈을 테니까.
“거기에 비하면….”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초월영역 스킬이 생겼다고 희희낙락하며 돌격해온 용사와 동료들의 주검이 널브러져 있다.
한심했다.
내 1회차 동료들보다 능력치 총합은 높아도, 실질적인 전투력은 형편없으니까.
파스스스….
용사의 모험이 막을 내리면서 판타지아 세계도 붕괴했다.
몇 번째인지 모른다.
얼마나 많은 세계가 사라지고 재구축됐는지 셀 수 없었다.
“귀찮네.”
나는 평화와 스마트폰을 사랑하는 문명인이다.
그런데 홍수처럼 밀려드는 용사들 때문에 여유를 잃고 말았다.
원인은 잘 알고 있다.
악마 대공A
중간보스 격인 ‘필터기’가 상대적으로 너무 약해진 탓이다.
이 문제는 빨리 해결해야 한다.
“마왕 파르마몬! 나는 빛의 용사- 꾸엑?!”
“이름대로 빛이 되어라.”
이젠 용사의 인사말도 들어주지 않고 밟아버리는 추세다. 자기소개서가 거기서 거기였으니까.
대문을 여는 즉시 몰살SSS.
기적적으로 살아남으면 0.1초쯤 더 상대해준다.
“비겁한 남편. 여기까지 애써 찾아온 성의가 있는데, 문전박대는 너무한 거 아니야?”
자기 이모에게 완패하고 얌전히 있던 쏘시아가 내게 핀잔을 줬다.
진짜 어이가 없네!
“비겁한 마누라. 그래서 섭섭하다고 말한 용사가 있었어?”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즉, 용사 만족도 100%
아무런 문제 없다.
“네가 말하기도 전에 죽였잖아!”
“그런 결과론은 좋지 않아.”
쏘시아 말대로 용사들이 섭섭했다면, 죽기 전에 말했어야 했다.
죽은 후라도 상관없다.
“그러면 너는 어머님께 말도 못 하고 죽겠네.”
“뭐-?”
“스마트폰을 한 번 봐봐. 하긴, 스마트폰을 안 봐서 어머님이 화나셨으니 별 의미 없으려나?”
“...줘봐.”
조종이 늦어지는 바람에 더미 하나가 용사에게 쓰러졌지만, 그딴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화나셨다고?
짐작 가는 이유가 너무 많아서 모르겠다.
⤷어머니: 공주님에게 사랑받는 아들. 정기보고 안 하니? (오전 8:42)
⤷어머니: 이번에는 답신이 너무 늦는 것 같네. (오전 7:52)
⤷어머니: 아파? (오후 3:06)
거참! 걱정도 많으셔.
기회가 되면 어머니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나보다 행성이 더 약하다고.
⤷어머니: 며늘아기가 네 접속기록을 확인해줬어. (오전 9:32)
...음?
⤷어머니: 엄마보다 로맨스 소설이 더 좋다는 거지? (오전 9:34)
로맨스 소설…?
⤷어머니: 네 마음대로 해. (오전 10:14)
⤷어머니: 엄마도 착한 둘째가 더 좋아. (오전 10:16)
마지막 메시지는 사진이었다.
2살짜리 못생긴 아기의 뺨에 뽀뽀하는 어머니의 모습.
“...쏘시아. 해명해봐.”
“그 며늘아기가 중간에서 계속 이간질하는 것 같아. 보통내기가 아니야.”
“그거 말고.”
로맨스 소설을 말하는 거다.
“성인인증을 안 하면 못 읽게 해놔서 네 아이디를…. 잠깐! 나도 할 말이 있어!”
“편하게 말해.”
네 몸은 신경 쓰지 말고.
“내게 화풀이한다고 어머님의 분노가 풀리는 건 아니잖아?”
“내가 풀려.”
나는 쏘시아의 잘록한 허리를 왼팔로 억세게 끌어안으며, 그녀가 꼼짝달싹 못 하도록 고정했다.
각오는 됐겠지?
안 되어있으면 더욱 좋고.
“어머님이 자주 칭찬하시는 그 며늘아기가 타인의 신상정보를 마음대로 열람할 수 있는 권력자임을 예상하지 못한 내 잘못을 인정할게. 하지만 지금은 수습이 우선 아닐까?”
“......”
틀린 주장은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
내가 스마트폰을 잠시 만지작거리는 사이에 더미가 셋이나 당했다.
아무리 강한 능력치를 보유했더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소용없으니까.
시간을 더 지체할 수 없다.
이러다가 졸업생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5차 교육과정에서 졸업생이 1명이라도 나오면?
지구로 귀환한 졸업생이 ‘마왕 파르마몬’을 쓰러트린 무용담을 떠벌리고 다닐 것이다.
거기까진 그나마 괜찮다.
하지만 그 마왕이 ‘강한수’란 사실이 밝혀지면 많이 난감해진다.
지구의 내 가족이 위기에 빠질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막아야 한다.
졸업생이 단 한 명도 없도록.
▶소곤: 언급하신 생도들은 졸업하지 못했어요. 평판과 명성이 너무 낮았거든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유가 그것만은 아닐 텐데?
▶으쓱: 강한수 생도님의 추측이 맞아요. 육체가 심각하게 손상되면 졸업할 수 없답니다. 이겨도 이긴 게 아니니까요.
스킬이 많으면 생기는 장점.
어떤 상황에서도 ‘유용한 효과’가 발동한다.
예를 들자면,
MAX급 마왕님이 죽으면서 상대에게 저주를 남기고 부활한다든가?
그래서 또 죽였더니, 자폭하면서 용사의 동료 절반을 전멸시키고, 폭주 상태로 돌입한다든가?
폭주가 끝날 때까지 시간을 끌어보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든가?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지긴커녕 점점 강해지든가?
.....
굳이 내가 조종하지 않아도 스킬만으로 용사들을 처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게 먹힐까?
“서둘러야 해.”
MAX급 마왕님을 운 좋게 쓰러트린 졸업생이 언제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그러니 비겁한 남편. 일단 이 손가락부터 빼고 내 계획을 들어봐. 지금은 이것 때문에 심란해서 집중이 안 돼.”
“듣고 괜찮으면 빼줄게.”
“먼저.”
“나중에.”
“먼저.”
“나중에.”
“먼- 아읏?! 알았어! 알았어! 먼저 말하면 되잖아! 그러니 손가락으로 긁지 마! 지금보다 강력한 중간보스를 세우는 거야!”
그런 말은 지나가던 슬라임이 말랑거리면서도 할 수 있다.
“쏘시아. 너의 계획은 그걸로 끝?”
그렇다면 대단히 실망인데….
“지금부터 그걸 설명하려던 참이야. 예전에는 안 됐지만, 판타지아 시스템을 유의미한 수준까지 점령한 현재라면 가능할 거야. 너의 권속들을 교과서에 등록하는 것이.”
“나의 권속이라면….”
인간의 정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