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18회차] 마왕의 힘
“참고로, 판타지아 세계에 한 번 귀속된 정령은 다시 되돌릴 수 없어. 그러니 신중하게 선택해.”
“교장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는 소리인가?”
“우리가 시스템 제어권을 잃는다면 그렇게 되겠지. 뭐, 그때는 우리도 고모의 입맛대로 놀아날 테니, 신경 쓸 필요 없어.”
“과연….”
위험부담은 있지만, 권속을 빼앗길 정도면 주인인 나도 이미 무사하지 않을 거란 의미.
쏘시아의 말대로 신경 쓸 필요가 없을 듯했다.
“그래서 골랐어?”
“어.”
보리스! 너로 정했다!
“주인님이 결혼하시고부터 저를 향한 애정과 관심이 점점 식어간다고 느끼긴 했지만, 막상 닥치고 나니 섭섭하네요.”
아름다운 퇴마사가 새침한 어조로 퉁퉁거렸다.
“정말 미안해.”
나는 사과부터 했다.
장인어른에게 낚여서 비겁한 따님을 떠맡게 될 줄 몰랐으니까.
나도 엄연한 피해자지만, 묵묵히 충성해온 보리스에게 할 변명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다.
그리고 보리스 혼자서는 용사와 동료들을 막을 수 없다.
직업 용자의 존재 탓이다.
아무리 능력치가 출중해도 ‘몰랑의 사도’가 아닌 한, 1레벨로 떨어지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해답은 정해져 있다
이걸 구현하는 문제는 비겁한 마누라가 해결할 것이다.
쏘시아. 추한 질투심으로 내 사랑을 독점한 만큼 일해라.
“말은 똑바로 해. 다른 여자를 질투한 적 없거든…!”
“조카야. 추하다.”
“이모님이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저 비겁한 바람둥이가 기고만장해져서 계속 착각하잖아요!”
“바람둥이?”
“......”
“우리 어여쁜 조카.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엄청 신경 쓰고 있었구나? 귀여워! 히히히!”
“으으…. 평소에는 맹하시면서 이런 때만 날카로운 이유가 뭔가요?”
“재미있잖아! 히히히!”
훌륭한 MAX급 남편이 딴 여자랑 대화만 나눠도 질투심이 활활 타오른다고 고백한 쏘시아!
그녀는 새빨개진 비겁한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내가 질투할 리 없잖아. 어차피 두 번째니까….”
“그건 아니지.”
첫 번째를 제외한 나머지 여자들을 두 번째만큼 사랑할 순 있다.
사랑을 숫자로 표현할 수 있다면?
1위: 50
2위: 10
3위: 9.9
4위: 9.9
5위: 9.9
6위: 9.9
...
이런 식으로 될 수도 있다.
나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쏘시아가 바라는 이상적인 그림은 대충 이럴 것이다.
1위: 50
2위: 49.9
3위: 0.0001
...
즉, 무조건 두 번째이기 때문에 질투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얄팍한 논리는 잘못됐다.
자! 변론해보시지?
“...네 말이 맞아. 하지만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걸 잊지 마.”
매섭게 째려보는 쏘시아가 하려는 말은 충분히 예상이 간다.
1위: 99.9
2위: 0.01
3위: ?
...
두 번째 악마인 그녀가 내게 사랑받길 완전히 포기하고 밉상 짓만 골라서 한다면?
나는 영원히 한 여자만을 사랑하게 된다.
다만,
“순정이 어때서?”
내 어머니도 집안일을 잘 도와주는 아버지를 사랑하신다.
아버지는 무조건 어머니만 사랑하신다.
좋잖아?
“네가 좋아하는 여자가 너를 싫어할 수도 있어. 그러면 영원히 고자로 살아- 그만 좀 해!”
“참나. 소원대로 사랑해줘도 신경질이네.”
정말 싫으면 밀어내든가.
“...지금부터 보리스를 넷으로 분리할 거야. 그러면 한 명일 때보다 용자에게 대항하기 수월해지-”
“손가락은?”
“닥쳐!”
“성깔하고는.”
나는 쏘시아가 시스템을 조작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빛인 고모는 시간을, 어둠인 마왕은 공간을 지배해. 이렇게 설명하면 너무 추상적이지? 간단히 설명해줄게. 판타지아 차원의 시간이 지구보다 10배 느리게 흐르고, 용사들이 죽으면 회귀하는 건 고모의 능력이야. 그리고 마왕은 판타지아 차원의 핵심인 능력치를 관장해. 영혼에 그릇(공간)을 부여해서 힘을 채우는 방식이지.”
“그 힘이 능력치고?”
“맞아.”
쏘시아의 설명을 들은 나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네 말대로라면 능력치는 내 힘으로 생성된 셈인데, 어째서 나는 마음대로 레벨과 스킬을 조작하지 못하는 거야?”
“인위적인 힘이니까.”
“그게 마왕의 힘이라며?”
이 악마가 약을 파네!
“인위적인 힘을 유지하는 건 별개의 문제야. 식량창고라고 생각하면 편해. 식량을 아무리 많이 넣어둬도 썩어버리면 못 먹잖아? 고모가 공간의 시간을 멈춘 덕분에 스킬을 유지할 수 있는 거야. 창고를 냉장고로 업그레이드한다고 할까?”
비겁한 마누라가 마스터 몰랑의 고향별 엘몰랑도 유학파라더니, 설명 하나는 참 잘하는 것 같다.
질투만 안 하면 더 좋을 텐데.
“그만 좀 우려먹어! 비겁한 놈아!”
“누가 뭐래?”
남편님의 머릿속을 멋대로 들여다본 네 잘못은 생각 안 하냐?
마왕의 힘 = 창고(공간)
스킬 = 식량
교장의 힘 = 냉동(시간)
창고+냉동 = 냉장고(능력치)
즉, 판타지 능력치는 마왕과 교장의 합작품이란 얘기다.
둘 중 하나라도 빠지면 성립될 수 없다.
그래서?
“너는 4명의 영웅을 합쳐서 1명의 강력한 영웅을 탄생시켰어. 그렇지?”
“맞아.”
보리스는 정령1, 정령2, 정령3, 정령4가 합쳐진 존재다.
“이름 좀 똑바로…. 아무튼, 원래는 분리할 수 없어. 완전히 융합돼서 하나의 새로운 존재가 됐으니까.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어. 너는 공간을 지배하는 마왕이잖아? 권속의 공간쯤은 마음대로 나눌 수 있어.”
“아하!”
마왕은 마기만 많은 쓰레기 직업인 줄 알았는데, 진짜 사기잖아?
“한 번 해봐.”
“그래.”
정신을 집중했다.
달랐다.
모든 게 달라졌다.
쏘시아에게 ‘공간을 지배할 수 있다.’라는 설명을 듣고부터 의식이 확장된 기분.
이 비겁한 마누라야! 이런 유익한 정보는 일찍 말해줬어야지!
남편님의 손가락에 혼나봐야 정신 차릴래?
“닥치고 집중이나- 아읏?!”
“너나 조용히 해.”
천사의 날개와 요정답지 않은 가슴을 소유한 ‘인간의 정령’ 보리스는 하나의 영혼이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접합부가 보였다.
요정 여성을 중심으로, 인간 남성과 요정 남성, 천사 여성이 단단히 결속되어 있었다.
이 결속들을 끊으면 예전처럼 넷으로 분리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재미없잖아?
“보리스.”
“주인님의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호호! 저는 괜찮아요. 이건, 쏘시아 님의 독점욕과 질투심을 얕본 제 업보니까요.”
“...너는 정말 좋은 여자야.”
쏘시아. 반성해라.
“날조는 적당히 해! 내가 어째서 악역인데?! 이상하잖아! 아내가 남편에게 사랑받으려고 비겁한- 헙!”
“히히! 자폭한 조카도 귀여워~”
“아으….”
자폭해서 상태가 안 좋은 쏘시아는 내버려 두고, 나는 마왕의 권능을 활성화했다.
원리는 간단하다.
영혼, 경험치, 스킬.
이 셋을 적당히 나눠서 적합한 육체에 넣으면 끝난다.
“4대 군주라고 해둘까.”
세세한 설정도 생각해뒀다.
“군주A, 군주B, 군주C, 군주D라고 할 거지?”
“어허! 잠자코 보기만 해.”
나는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지구에서 유행하는 최신 RPG 게임의 공략집 사이트로 들어갔다.
그리고 복사, 붙여넣기!
전설의 군주: 야스호
배신의 군주: 한죠
죽음의 군주: 실바라스
강철의 군주: 2D
“...이름을 지어준 건 대견한데, 너무 성의 없는 것 같아.”
“좀 더 들어봐. 설정도 있다구?”
야스호는 ‘요정 남성’이다.
검의 달인이며, 전투가 시작되면 바람처럼 사라진다.
전직 용사라서 성검을 제약 없이 다룰 수 있지만, 성검은 보유하지 않았다.
“마왕님. 부활시켜주신 건 정말 감사한데, 몸이 좀 이상합니다. 아내만 보면 발을 핥고 싶어집니다.”
“그건, 아내의 충실한 노예란 설정 때문이야.”
“...네? 잘못 들었습니다?”
“제대로 들은 거 맞아.”
한죠는 ‘천사 여성’이다.
용의 피가 흐르는 이 명사수는 항상 대기 중이다.
공략집에는 온몸에 문신이 가득한 노총각인데, 성전환은 번거로워서 문신만으로 타협했다.
“문신도 번거롭지 않으세요? 게다가 이 문신은 아무리 봐도 용이 아니라 뱀인데요? 그리고 제 무기는 활이 아니라 창….”
“남자가 되고 싶다고?”
“멋진 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왕님! 충성을 다할게요!”
“알면 닥쳐.”
실바라스는 ‘요정 여성’이다.
용사에게 패하여 부하가 된다는 설정까지 똑같아서 채택했다.
헌신적인 그녀의 충성심을 높이 사서, 몰랑한 가슴과 노예 남편을 선물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주인님. 소녀의 소망을 전부 들어주셔서 뭐라고 감사를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생전에는 제 가슴을 비웃고, 사후에는 무기 취급했던 남편이랑 행복하게 살게요.”
“행복하길 빌어줄게. 몰랑.”
2D는 ‘안드로이드 여성’이다.
슈퍼로봇은 아니지만, 미소년을 좋아하고 인류의 영광을 위해 싸우는 미녀 로봇이다.
직업이 용자이기에 사실상 무적!
1레벨 인간이 맨몸으로 안드로이드를 어찌 이기겠는가?
로봇이 되기 전의 이름은….
“강한수! 당장 돌려놔라!”
“보리스. 원작에서는 검은색 안대를 착용하는 모양이지만, 그건 네 취향에 맡길게.”
“복장을 따지는 게 아니다! 어째서 내가 여자인 거지? 심지어 인간도 아닌 기계라니!”
“하지만 원작이….”
“이 미친놈아! 원작을 따지기 전에 인간 남성을 골랐어야지! 나는 왕자였단 말이다!”
보리스가 흑화 선배의 친아들인 건 맞지만, 내 권속이 되기 직전에는 ‘안드로이드 메이드’였다.
나는 그 설정에 충실했을 뿐이다.
게다가,
“두 번 작업하기 귀찮아.”
“그러면 나도 협력하지 않겠다!”
“그건 무리. 상관이 명령하면 사랑하는 미소년도 죽일 수 있는 안드로이드란 설정이거든.”
“너는 일말의 자비심도 없냐….”
그건 원작자에게 따지라구?
“어허! 좀 더 들어봐. 너를 위해 수납형 성검도 준비해뒀어. 두께와 길이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고, 어떤 성문이든 단숨에 꿰뚫을 초강력 드릴 기능도 탑재되어…. 왜?”
“지옥에나 떨어져라.”
보리스는 내가 고의로 ‘안드로이드 여성’의 몸을 줬다고 굳게 믿는 모양이지만, 그건 심각한 오해다.
그의 직업 ‘용자’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면 ‘기계 몸’이 제격이라서 선택했을 뿐이다.
그리고 성별이 하필이면 여성인 이유는 보리스가 생전에 ‘안드로이드 여성’이었던 까닭이다.
싱크로율의 문제랄까.
“보리스. 원한다면 인간 남성으로 만들어줄게.”
“당장 해라!”
“하지만 별것도 아닌 여성 용사에게 겁탈당하더라도 내 원망은 절대 하지 마.”
“...그게 무슨 개소리지?”
“능력치를 봐.”
“내 능력치…? 헛!”
▷종족: 러블리 안드로이드
▷레벨: 500
▷직업: 용자(전원=1레벨)
▷스킬: 청소S 빨래S 요리S
정돈A 재봉A…
▷상태: 개조, 경악
강철의 군주 2D는 사기적인 직업과 종족의 콜라보로 용사 파티를 씹어먹는다는 컨셉이다.
용자에게 불필요한 스킬은 나머지 세 군주에게 몰아주고, 보리스는 생활계열과 생산계열 스킬로 채웠다.
하지만 500레벨 하인이나 다름없는 이 상태에서 종족을 ‘인간 남성’으로 바꾼다면?
좋은 경험치일 뿐이다.
상대가 여성 용사라면 살려줄지도 모르지만.
“보리스. 어떻게 할래?”
“이걸 노렸구나.”
“섭섭한 소리. 내가 노렸다면 너의 고충을 반영한 성검을 번거롭게 장착해둘 리 없잖아.”
“...속아주마.”
“거참! 진심을 몰라주네.”
강철의 군주는 모든 용사의 사랑과 우정을 짓밟는 공포의 존재로 군림하게 될 것이다.
▷종류: 종족
▷명칭: 러블리 안드로이드
▷등급: 특수
▷특수1: 이성에게 막강하다.
▷특수2: 동성에게 취약하다.
▷특성1: 이성의 공격을 반사한다.
▷특성2: 동성을 공격하지 못한다.
▷특성3: 소켓이 장착되었다. (개조)
▷종족1: 기계 속성이다.
▷종족2: 개조되었다.
강철의 군주 2D는 약점이 없다.
“쏘시아. 이들을 모든 차원에 배치해줘.”
인류에게 절망을.
“잠깐만! 비겁한 남편. 이 잔혹한 용사말살계획을 정말로 실행할 생각이야? 진심으로?”
이 비겁한 아내는 자기가 먼저 제안해놓고 무슨 소리래?
그리고 말살계획이라니!
누가 들으면 정말인 줄 알겠다.
“몰랑에게 영광을.”
몰랑한 절망 속에서 꿈과 희망이 싹트는 법이다.
...아니면 말고.